10월 가을 하늘이 맑고 푸르다 가을의 내음이 천지간에 번지는 산야는 엄숙한 기운에 날씨도 싸늘하다. 길가의 코스모스는 바람에 산들거리며 가을의 분위기를 알린다. 가을의 진수를 만나기 위해 나는 오늘 20일 아침 6시30분에 출발하여 한계령을 향해 차를 몰았다. 오랜만에 부인과 같이하는 부담 없는 하루 가을 여행길이다. 출발하는 20일 아침에 일산지역에는 맑고 시야가 양호했으나 외곽순환도로 구리방향 사패산 터널을 지나 평내 호평로 향하는 도로는 안개 아닌 구름이 땅거미처럼 깔려있어 주위 분간이 어려웠다. 서울양양 고속도로 도화IC로 진입하여 가평 휴게소에 이를 때까지 안개구름은 마을과 산허리를 감돌며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고속도로변 가을 단풍을 감상 하려는 기대가 무너졌다. 이 안개구름은 동홍천IC까지 이어져 천기상 오늘 하루가 맑다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홍천으로 진입하는 도로의 해발높이가 낮아지자 구름안개는 걷혀가고 있었다. 홍천- 인제 간 4차선국도를 달리며 주변 가을경관을 보니 가을이 무르익어감을 느낀다. 군데군데 노란 들판이 시골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들깨대가 널려있는 밭에는 군데군데 가을무우가 싱그럽게 무성하다. 오전 8시임에도 시골에는 인적이 드물다. 느리고 여유로움이 시골마을을 평화롭고 풍성하게 보여준다. 원통을 지나 속초-양양간 지방도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한계령방향으로 달리자 그 옛날 민박하던 한계리 마을 살구나무집에 시선이 모아진다. 그때 그 자취는 오간데 없고 뒷산의 가을풍경만 그 시절을 말해준다 어린 삼남매를 데리고 승용차로 이고장의 가을을 여유롭게 감상하려고 시골집 방 한 칸을 1만5천원에 빌려 1박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 당시 한계령 단풍은 불타고 있었다. 장수대와 옥녀탕을 지나는 도로변에는 그냥 지나치기 아까운 오색단풍물결에 눈과 마음은 온통 환희에 빠졌었다. 이런 풍광 속에 아이들과 물가 바위에 앉아 흐르는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가을날의 여유를 즐기던 그 시절 물에 발 담갔던 그 바위는 자취를 감추었고 그때의 그 아이들도 모두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 당시 젊은 부부였던 우리는 초로가 되어 30년 전 그 가을의 불타는 계곡을 찾아 나섰지만 아쉽게도 그 모습이 아니었다. 그 당시 추억을 머리에 이고 지나치는 지금의 한계령은 너무나 서운하리만치 단풍이 형편없이 삭아 가고 있었다. 한계령은 높낮이 순으로 단풍의 절정을 이어간다. 지금은 전체적으로 여름 가뭄 탓인지 가을 분위기만 느낄 뿐 악! 소리 나는 황홀경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가을철 한계령의 산세이며 계곡이다. 환상과 기대에 어긋나면서 감정은 표면과 심층으로 의구심이 만발하고 이해하는 방식도 명시와 암시가 갈마들면서 복잡 미묘해진다. 몇 시간을 달려왔건만 현재의 여행이 과거의 회상과 겹치면서 고단하고 지친 심신의 고통을 자연으로부터 위로 받으려는 심경을 야속하게도 추억의 한계령 계곡은 뿌리쳤다. 상황과 풍속의 변화를 재현하려는 욕망이 기억과 과거 자기망상에 깊은 삶에 연민을 느끼게 한다. 드디어 한계령 정상에 도착했다. 그 옛날 같은 가을은 사라지고 가을명소에 사람이 붐비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가지다. 아이들이 들락거렸던 화장실은 여전하다. 부인과 탁자에 앉아 한방차 한잔을 조용히 마셔본다. 우리가 미망(未忘: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것)마저 없다면 노년의 문턱은 너무나 쓸쓸할 것이 아니겠는가. 탁자에 앉아서 바라본 주전골 점봉산이 추억에 잠기게 한다. 양양 방향으로 가려던 계획을 접고 차를 몰아 정상에서 오색방향으로 조금 내려와서 우회전하여 필례 약수터 방향으로 달렸다. 이곳은 인제군 지역이나 국립공원에서 벗어난 지역이고 내린천 물줄기의 발원지이기도하다. 이곳의 가을 단풍은 그런대로 눈길을 끈다. 차량은 한가하고 도로변에 맑은 물소리가 들리는 듯 노란 단풍숲 속에 빨간 단풍들이 불타는 모습을 보니 오랜만에 가을의 진수를 맛 볼 수 있어 가슴이 뿌듯했다. 왕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노송이 물가에 기울어져 있는 계곡의 평화로운 운치가 나의 눈을 사로잡는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삶은 황혼이 깃들 무렵이 진수라고 위로한다. 언제까지나 뒤만 돌아다보며 내 인생이 바랐던 대로 되지 않았다고 자책해본들 변하는 것이 무엇이 있겠나만 황혼기에 그런 우여곡절의 묘미를 맛보지 않은 인생은 무미건조한 삶이 아니겠는가라는 위안도 한다. 잔잔한 바다보다도 파도타기가 더욱 스릴을 느끼듯이 말이다. 내려가는 길 필레약수터 삼거리에 도착하니 단풍이 만개했다. 맑은 바람 스쳐 가고 가을 태양이 홍단풍 청단풍 적단풍 속에서 이글거린다. 차를 세우고 풍경을 담아본다. 구도에 변화를 주어 몇 장을 찍어대고 흐르는 물가에 가을국화 싱싱한 자태를 바라본다. 단풍나무아래 온천 간판이 눈에 띈다. 이런 곳에 생뚱맞게 온천이 존재한다. 필례 약수터를 지나 위로 한참을 올라가니 구멍가게 같은 온천이 게르마늄오천이란 간판 달고 안내한다. 온천장은 그 크기가 시골 사랑채만한 규모다. 우리는 다가갔다가 집 구경만 하고 돌아섰다. 하도 조그마하여 온천이 혹시 남녀 혼탕이 아닌가 하는 상상도 들었다. 되돌아 필례약수터에 한잔을 하고 나와서 간판을 보니 인제군청에서 부착한 안내문에 대장균이 검출되어 끓여 먹으라는 문구내용이 빨간 사선으로 진하게 두 줄로 그어 있었다. 나는 대장균 2잔을 맛있게 마시고 삼남면 방향으로 달리며 가을풍경을 감상했다. 내린천 따라 도로가 형성되어 주변 구경거리가 쏠쏠했다. 내린천가에 민박집이 널려있고 펜션들이 즐비하다. 한여름 피서지로 한 몫 하는 고장 기린면 삼남면은 가을의 시골 풍경이 진하다. 오늘따라 마을주민들이 녹색 조끼를 입고 포대 한 개씩 들고 도로변을 걷는다. 오늘이 노인의 날이란다. 산골들판에 추수하지 못한 논에 벼들이 노란황금색으로 고개를 숙이고 콩대 수확하는 할아버지 겨울잠바가 이곳도 가을이 깊어감을 느낀다. 삼남면에는 무시래기 산지로 양구만큼 유명한가보다. 무청을 담은 가마니가 밭에 널려있고 무청 잘린 무가 밭에 널려있다. 버리는 무를 한 개 주어왔다. 무우가 실하게 생긴 것도 많았다. 땅 주인은 그냥 며칠 지나면 노타리를 친단다. 차는 어느새 아홉사리 고개를 올라섰다. 도로가 넝쿨 나팔꽃으로 도로변을 장식했다. 아홉사리 고개에는 현리전투 전적비가 있다. 3사단, 15사단이 중공군에게 패한 기록을 전하고 있다. 이 고개 너머는 홍천군이다. 고개 너머 바로 아래에 주막에서 감자전 올챙이국수 잔치국수각종차 등 음식을 팔고 있었다. 우리는 올챙이국수 한 그릇 4000원짜리 두 그릇을 시켜먹었다. 양념간장이 맛깔스럽고 열무김치가 너무나 시원했다. 주인은 홍천에서 출퇴근하는 60대 꽁지머리남자다. 모든 반찬을 자기가 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홀아비 같다. 떠나는 우리보고 다음에 또 오라는 인사로 환송한다. 우리는 다시 홍천군 내천 쪽으로 달려 동홍천IC로 진입 서울-양양고속도로를 달렸다. 피곤했던지 부인이 옆자리서 잠이 들었다. 운전을 해온 나도 피곤과 잠이 찾아온다. 일산에 도착한 시간은 3시 35분이다. 하루인생도 이렇게 피곤하게 지나간다. 이 나이에 인간을 따뜻하게 느낄 수 있는 열쇠가 무엇인지 처지마다 다르지만 나는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피곤해도 삶의 황혼이 찾아올 무렵에는. . . .
첫댓글 이율천님의 가을여행풍경 잘 감상하였읍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