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여성시대 나는사랑둥이
p.81
나는 부모님이 주는 용돈으로 이십사 년을 살았다. 내 학비를 비롯해 수년간의 용돈과 학원비를 계산하다, 금액이 천문학적으로 높아지자 그만두었다. 지금 이 길거리를 걷고 있는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계집애 하나가, 실은 살아오면서 억대의 돈을 먹어치운 것이다. 그 엄청난 돈을 먹어치우고 생산해내는 것이라곤 매일 쏟아내는 생리적인 배설물과... 배설물과....
이럴수가! 아무것도 없다....
희희낙락한 얼굴로 압구정동을 누비고 다니는 내 또래의 청춘들을 바라보았다. 이들 중 나처럼 돈 먹고 배설물만 쏟아내는 비생산적인 기계들이 몇이나 될까. 혹시 나만 이런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이들은 나와 다를지도 모른다. 이 동네의 일원인 척하며 강남을 기웃대는 허세 가득한 나 같은 인간이 아니라, 어느 정도 자신의 미래를 준비한 똑똑한 청춘들일지도. 아니면 황금 수저을 입에 물고 태어난 운 좋은 인간들일 수도 있다.
뒤처지고 있는 것은 나뿐인 걸까?
갑자기 온몸이 서늘해졌다.
p.113
막노동을 한 것도 아닌데 온몸이 피곤하다. 사실 일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단지 내가 몰라서 헤맨 것뿐이다. 그런데도 당장에 이 일을 때려치우고 싶어졌다. 엄마에게 잔소리 들을지언정 하루 종일 침대에서 뒹굴며 미드나 다운받던 며칠 전 과거가 그리워졌다. 무엇보다 나를 짜증나게 하는 것은, 연줄로 가까스로 얻은 직장을 이깟 일로 때려치우고 싶어 하는 나약한 나 자신이다.
p.34
"어디 살아요?"
"목동이요."
"목동? 목동 사는데 왜 여기까지 와? 그냥 홍대에서나 놀지."
마치 '너무도 강남에서 놀고 싶어 버스를 타고 꾸역꾸역 기어올라온 촌년'에게 던지는 심심한 위로답지 않은가.
그래, 어쩌면 내 자격지심일 수도 있다. 알고 있다. 강남에 살지 못하면서 늘 강남을 기웃거리는 나 같은 인간들은, 마음 한구석에 형태 불분명한 자격지심이 뜨거운 시멘트 바닥처럼 납작하게 깔려 있다. 강남 사람들이 별 뜻 없이 던진 말 한마디가 소나기가 되어 내리면, 금세 자격지심이란 수증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전신을 뒤덮는 것이다.
강남이 무슨 대수야? 내 친구들 만나러 내가 나오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하는 일도 없이 압구정동에 엉덩이 붙이고 사는 게 자랑이야? 한심한 인생들.
혼자서 뚱한 얼굴로 끊임없이 공격적인 자기변명을 만들다가도, 친구들에게 걸려오는 전화 한 통이면 금세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압구정동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우리 넷의 중간 지점은 명동이나 삼청동이라고 할 수 있다. 어째서 나만 한 시간이나 걸려 압구정동으로 가야 하는지, 그 이유는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내가 그 동네를 동경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기 때문이다. 압구정동을 당당하게 '내 동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들처럼.
p.42
밥벌레지만 주제파악까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한 학기에 500만원 가까운 등록금을 여덟 번이나 쏟아 부었지만 지금 내가 이력서를 낼 수 있는 회사는 한 군데도 없다. 물론 서울 변두리 어딘가 쾨쾨한 담배 냄새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회사의 비서직 정도는 기웃거려 볼 수 있겠지. 그래도 학교 간판만큼은 상당하니, 면접만 잘 보면 들어갈 수 있는 회사가 쑤시고 쑤셔보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싫다. 할 줄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해놓은 것도 없으면서, 내 능력에 맞는 단순 노동이나 내 취향에 안 맞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건 죽어도 싫은 거다. 쥐뿔도 없는 주제에 콧대만 높다는 표현이 딱 맞겠다.
p.46
우리는 앉아서 건전하고 면접 분위기가 나는 대화들을 나눈다. 그대의 비전과 나의 비전에 대하여. 그대가 지나온 삶과 내가 지나온 삶을 비교하며. 나는 그 시간들이 너무 고되다. 소개팅으로 만나 당연히 밟아야 할 기본 절차들이 괴로운 것이다. 그의 질문들이 너무 괴롭다.
현재 뭘 하고 계신가요? 앞으로 뭘 하고 싶으신가요? 유민 씨의 미래를 위해서 학교에서는 주로 어떤 공부를 해왔나요? 등등. 그가 심문에 가까운 질문을 퍼부을 때마다 카페나 레스토랑 웨이터에게 실과 바늘을 갖다 달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팁을 두둑이 드릴 테니 저 입 좀 꿰매 달라고.
꿈도, 비전도 없는 여자에게 앞으로 뭘 하고 싶으냐고 묻는 것은 고문의 한 종류가 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대답을 참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당장이라도 부모님이 허락할 만한 조건 좋은 남자 만나 결혼이나 해버리고 싶어요. 아무리 백조라도 젊고 어린 여자라면 환장하는 돈 많은 남자가 꼬인다면 더 바랄 게 없겠죠. 어쨌거나 저는 아직 어리고 늘씬한 데다 얼굴도 반반하거든요.
p.215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두렵게 하는지, 또 미치게 하는지,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나는 나의 부모 세대와는 다르게 모든 것을 지원받으면서 커왔다. 어느 집의 귀한 자식으로 갖고 싶은 것은 갖고 하고 싶은 것은 하면서 자랐다. 그러나 결국 이것밖에 안 되는 딸이 되어버렸다. 그 창피함과 미안함과 괴로움을, 어디 털어놓을 데도 없는 나 같은 애들은, 고통받아 마땅한 부류일까? 나는 정말 위로받을 가치도 없는 인간이 되어버린 걸까?
2-p12
무언가를 간절히 열망하는 사람이 늘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없다. 하지만 열망한 적도 없는 사람이 누군가가 열망하는 것을 쉽게 얻게 되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 열망하다 말다 하는 게으름뱅이의 얼떨떨한 쟁취는 또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걸까?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시니컬한 선배들의 한마디로 산산조각 부서진 믿음이 위로받을 수 있을까? 그냥 열심히 살아라. 불평해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네 할 일을 하는 수밖에.
결국은 현실적인 조언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세상의 흐름은 계산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두드리는 대로 정확한 답이 나오진 않는다. 오류가 나면 나는 대로, 한숨 한 번 쉬고 계속 진행시키는 수밖에 없다.
2-p107
사람은 그런 것 같아. 세상에 얼마나 가난하고 힘든 사람이 있든, 자기 세상이 아니면 관심 없어. 오로지 자기 세상에만 집중하게 돼. 그 안에서만 비교를 하고 그 안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거나 그보다 더 높은 곳만 바라보게 돼. 나도 그랬어. 좀 더 화려하게 살고 싶었고 편하게 살고 싶었어.
2-p84
성공한 사람들의 애정 어린 충고보다 실패한 사람들의 위로가 듣고 싶다.
'나도 열정 없는 이십대를 보냈어. 너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얼마든지 많으니 외로워하지 말렴. 열정 없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위로하면서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단다. 우리 모임에 들어올래?' 같은.
...... 아니다. 그건 싫다. 그건 마치 일찌감치 인생을 포기하고 서울역 지하도로 모여든 노숙자들의 모임 같다.
2-p116
우리는 어릴 때부터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나봐. 그래서 결국, 나이가 들수록 서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인생으로 갈라지나봐.
2-p201
내 팔과 다리를 결박한 현실이란 이름의 고문자가 내 얼굴을 거칠게 부여잡고, 내가 스물네 해 동안 쌓은 얄팍한 지식과 경험의 두께를 두 눈으로 보게 할 때마다, 내가 고작 이 정도밖에 안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뼛속 깊이 각인시킬 때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울고만 싶었다.
이미 흘러버린, 흐르고 있는, 흘러갈 시간이 두려웠다. 나는 이 세계의 정확한 중간 지점에 있었다. 포기하기엔 너무 이르고 무언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스무 살의 자서전도, 다시 시작하자는 서른의 자서전도 나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어느 곳으로도 한발 내딛을 수 없어 어정쩡하게 고민만 하다 맘 편하게 포기할 순간만 기다리는, 그런 멍청한 나 자신을 견디기 너무 힘들었다.
2-p35
난 너처럼, 쉽게 살고 싶어하는 여자를 경멸하지도 않고, 쉽게 살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여자도 아니야. 하지만 내 성향은 노아의 가치관에 더 가까워. 난 노력하는 걸 싫어해. 네가 기억하는 대로 고등학생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 그리고 난 요즘 내가 그런 여자라는 사실에 하루에도 몇 번씩 괴로워져. 네가 뒤에서 비웃지 않아도 나 스스로도 충분히 힘들어. 내가 어쩌다 이런 사람으로 자랐을까, 답 없는 고민만 반복하다 보니 인생 자체가 피곤하고 살기 싫어져. 아무 이유 없이 자살하는 이십대들이 내 자화상은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해.
2-p287
넌 아직 어려. 넘어져도 일어서면 그만이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2-p300
내게 서울은 원치 않는 훈장 같았다. 남이 억지로 달아준 훈장 때문에 예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다렸다. 서울은 내게 대가를 요구했고, 물질적으로 성공하는 삶을 요구했으며, 자신을 실망시키지 말아달라는 압박을 가했다. 모두가 좋다고 칭찬하는 도시로 이사 온 결과로 무엇을 얻었는지 증명해야만 했다.
2-p274
여행? 좋지. 엄마도 할 수만 있으면 평생 여행만 하면서 살고 싶어. 혼자 여행하면서 진짜 나에 대해 생각해보고 멋지게 고독을 즐기기도 하면서. 누군들 안 그러고 싶니? 너 어떤 생각 하는 지 알아. 요즘 이십대 그렇게 약하다고 하더라. 일 좀 하다가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으면 하나고 열이고 죄다 자아 찾겠다고 갑자기 떠나겠다는 거야. 황당하지 뭐. 여행이 자아를 찾아준다고 누가 그러디? 여행 책들이? 너 그거 알아? 그런 여행 작가들은 다 그런 여행기로 돈 벌어. 안 그런 사람들? 스물아홉, 서른 될 때까지 회사에서 죽어라 일하다가 어느 순간 마음 정리 할 겸 과감하게 휴가 내고 떠나는거야. 너처럼 아무것도 안 해놓고 도망치는 게 아니라. 충분히 커리어 쌓고 떠나는 직장인이나 여행으로 돈 버는 작가랑 너랑 같아?
2-p17
체육 시간에 편을 가를 때마다 맨 마지막에 남는 애들은, 자신이 그런 위치의 사람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편이 훨씬 행복하다. 자신이 인구조사에 포함되는 국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아는 그 순간부터, 사회를 이루는 데 필요한 측은한 구성원 역할을 떠안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의 인생은 절망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인생의 절반을 넘어섰을 때에냐 차츰 자각하게 되는 그 슬픈 사실을 너무 어린 나이에 깨닫게 되는 순간, 남은 삶은 두려움과 고통의 반복이다.
나는 이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없는 걸까? 나는 여기서 만족해야 되는 걸까? 사회가, 세상이 나에게 요구하는 역할은 고작 이게 다일까?
<나의 블랙 미니 드레스> , 김민서
이 글은 나의 블랙 미니드레스 라는 책에 있는 글이야
너무 좋아서 여시들과 공유하고싶어 가져왔어요
이렇게 여시들이 책이나 시 추천하는거 좋았어서 해보고싶었어 !
각 글에 책 페이지와 권수가 적혀있어요
2권짜리 책입니다
내용 대박!! 소장하고싶은 책이야 ♡♡나의 블랙 미니 드레스♡♡ 여시 고마워
맞아 마블미... 진짜 영화가 너무 망해먹었지... 책은 진짜 좋아
이거 이런내용이엇구나ㅠㅠ 읽어봐야겟다
대애애애박내게지금가장필요한책!!!!읽어야지고마워!!!
졸라 내얘긴줄....,, 당장사서읽어야지
또 보러왔어 마블미.....!
와... 이책뭐야... 내얘기같아..
대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