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 저항운동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인도 간디의 독립운동과 미국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흑인 인권운동입니다. 성공했느냐 못했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역사상 크게 주목을 받았던 중요한 사건들이었습니다. 폭력이 다른 폭력을 부른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지키고 권리를 지키려는데 그 반대세력에 맞서서 맨 몸으로 달려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도 같습니다. 우리나라 3.1만세운동도 비폭력 저항이었습니다. 그만큼 희생이 컸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 감내해야 하겠습니까? 목숨을 그렇게 쉽게 내줄 수 있는 일입니까? 그렇게 해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독재 정부에 저항하려고 두 집단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몽고’ 장군을 필두로 모인 무리입니다. 겉은 혁명군이지만 산적과도 같은 무리입니다. 또 하나는 존경하는 교수를 중심으로 모인 젊은이들입니다. ‘산토스’ 교수의 지침을 따라 비폭력을 내세우지만 만만하지 않습니다. 사실 교수를 존경하고 따르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모두 무기를 들고 있습니다. 다만 함부로 살인을 감행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한쪽은 확실하게 무장한 혁명군이고 다른 한쪽은 비폭력을 내세운 혁명군입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어쩔 수 없이 모두 총을 들고 있습니다. 아마도 중심인물인 산토스 교수가 체포되어 처형을 앞두고 있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어느 쪽도 혁명을 수행하려면 무기가 필요하고 당연히 그 자금이 필요합니다. 마침 몽고 장군이 점령하고 있는 마을에 막대한 자금을 비축하고 있는 금고가 있습니다. 문제는 아무리 용을 써도 이 금고를 열 수도 파괴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비밀번호를 알아내서 자연스레 열어야 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번호를 아는 사람이 다 살해되고 딱 한 사람 남았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산토스 교수입니다. 그런데 정부군에 붙잡혀 있습니다. 돈이 필요한데 이 한 사람이 있어야 가질 수 있습니다. 과연 정부군에 잡혀 있는 산토스 교수를 어떻게 빼내느냐 하는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쪽도 정부군에 대항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돈을 노리는 또 다른 무리가 있습니다. 역시 돈은 냄새를 풍기는가봅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듯 돈이 있는 곳에 탐내는 사람들이 모입니다. 돈이란 참 묘합니다. 흔히 필요악이라고 합니다. 사실 돈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필요해서 발명해낸 것입니다. 이용하려고 만들어냈는데 이제 거꾸로 이용을 당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말합니다. 돈이 악한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 6 : 10)라고 말입니다.
누구의 손에 들어가느냐, 거기에 따라서 선하게도 악하게도 사용됩니다. 물론 그 효과 또한 대단합니다. 그래서 탐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미안하지만 성직자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선한 사업을 위해서라도 필요하니까요.
몽고 장군 쪽으로 스웨덴 국적의 남자가 찾아옵니다. ‘요드’라는 이 남자도 사실 이 돈을 탐내어 찾아온 것이지요. 그러나 혼자 힘으로 이룰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집단의 힘을 빌려야 합니다. 친분이 있던 몽고 장군을 찾아온 것입니다. 함께 취하여 배분하자고 제의합니다. 서로의 원하는 양이 다르지만 일단은 손에 들어와야 가능한 일입니다. 서로 손을 잡습니다. 몽고의 측근 한 사람을 대동하여 산토스 교수를 구하려고 떠납니다.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미국 신사(?)가 자기 무리를 이끌고 껴듭니다. 그렇게 4 무리가 쫓고 쫓기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말도 안 되는 코미디가 생성됩니다. 잡혔다 놓쳤다 엎치락뒤치락 하며 황야를 오가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정부군만 이 돈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혁명군을 이끌고 있는 몽고 장군도 겉과 속이 다릅니다. 스스로 속내를 드러냈듯이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려 혁명군이라는 허울을 쓰고 있는 것뿐입니다. 요드도 이 돈을 탐내서 찾아온 것이고 미국 신사도 돈 차지하려 쫓아다닙니다. 정작 군자금으로 사용하려는 쪽은 바로 산토스의 젊은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실제 금고를 차지하고 있는 쪽은 몽고 장군의 혁명군입니다. 그 측근 ‘바스코’가 요드와 함께 산토스 구출 작전을 수행하며 여러 가지 고난을 헤쳐 나옵니다. 이야기의 흐름이 어찌 보면 이 바스코의 변화 과정에 맞추어져 있는 듯합니다. 산적의 무리 가운데서 활동하다가 제대로 된 혁명군이 되는 것입니다.
짧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당시 상황으로 본다면 그러려니 할 수도 있지만 다소 유치하다 싶습니다. 이게 서부활극인지 코미디인지 뭔 드라마인지 헷갈립니다. 그럼에도 유치한데 유치하지 않습니다. 특히 산토스 교수와 동행하면서 이런 영화답지 않게 다소 수준이 있는 대화가 오갑니다.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는 기분입니다. 뭐 이런 영화가 있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더구나 끝부분은 전혀 뜻밖의 마무리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아깝다 했다가 잘 봤다 하는 마음으로 끝납니다. 영화 ‘황야의 동업자’(Companeros)를 보았습
첫댓글 오늘은 시원한 하루길
기대합니다
복된 한 주를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