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과 한국 교회
2열왕 4,8-11.14-16; 로마 6,3-4.8-11; 마태 10,37-42
연중 제13주일; 2023.7.2.; 이기우 신부
⒈ 교황 주일의 의미 :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을 지낸 후 처음 맞이하는 주일인 오늘, 한국 교회에서는 교황 주일을 지냅니다. 다른 나라 교회에는 없는, 한국 교회만의 전통입니다. 그래서 오늘 교황 주일을 맞이하여 교황은 누구이고 그 직무는 어떠한지를 또 한국 교회와 맺고 있는 관계는 어떠한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역대 교황들은 하나같이 한국 교회에 대해서 각별한 관심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한국 교회가 선교사의 직접적인 선교활동 없이 자생적으로 생겨난 교회인데다가, 교황청에서 내린 제사금지령으로 말미암아 무지막지한 박해를 무려 백 년 동안이나 받아야 했는데도 공식기록상으로만 만여 명이 넘는 치명자들을 내면서도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한 교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청에서도 교황청 직속의 파리외방전교회에게 조선 선교를 명령해서 박해받는 조선 교회를 돕게 했으며, 그 결과 오늘날에 와서는 경제적으로 성장한 선진국의 교회들이 침체일로를 걷는 데 반해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나라의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신앙활동이 활발하고 성직자와 수도자 및 선교사 성소가 상대적으로 많이 늘어나고 있는 교회라는 이유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보다 선교역사가 더 오랜 이웃 나라들의 교회, 즉 일본 교회나 중국 교회는 물론이고 유럽 대륙의 교회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어서 21세기 복음화의 등대가 되고 있는 교회가 바로 우리 한국 교회여서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두 번이나 방한했고 프란치스코 교황도 아시아 대륙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으며, 두 교황 모두 시성식과 시복식을 로마 교황청에서 거행하던 관례를 깨고 파격적으로 한국 현지에서 거행해 주었습니다.
⒉ 교황과 교황직 : 교황은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의 사도직을 계승한 후계자를 뜻합니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은 베드로 이후 제266대 교황으로서 선출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의 나머지 열한 사도들의 직무를 계승한 후계자들을 ‘주교’라고 부릅니다. 또 다른 명칭으로는 교황을 교종(敎宗)이라, 주교를 감목(監牧)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교황과 주교단이 합하여 서방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단을 이루고 있고, 주교들이 책임지고 있는 각 교구는 사제들의 보좌로 운영되는 교회법상 사목의 큰 단위입니다. 본당은 교구를 이루는 작은 단위이지요. 교황과 주교들로 구성된 교회의 조직은 교회가 성경을 해석하고 교리를 수호하는 교도권(敎導權)과 전례 거행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전달하는 성화권(聖化權), 그리고 신자 공동체를 돌보는 사목권(司牧權)을 신자들을 대표하여 행사합니다. 이는 성직자와 수도자와 평신도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모든 사도직 활동을 보호할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조직 구성의 뿌리와 뼈대를 예수님께서 시작하셨으며, 그 열매는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교회의 성원들이 실천하는 사도직 활동을 통해 세상 안에서 맺게 될 것입니다.
⒊ 선교, 박해와 순교, 시복과 시성 : 자생적 교회 설립, 선교사 파견과 박해와 순교, 그리고 시복시성이 한국 교회와 교황청과의 관계를 상징하는 열쇳말입니다.
교황청에서는 이미 1658년에 동양 선교를 전담할 수 있는 파리외방전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교회가 각각 국왕의 책임하에 외방선교를 맡고 있었지만, 선교 성과는 지지부진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선에 자생적으로 천주교회가 생겨났을 무렵에는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가 아니었으므로 교황청에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784년에 중국 북경에 있던 북당에서 이승훈이 그라몽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천진암 강학회에서 함께 천주교 교리를 공부했던 선비들에게 세례를 베푼 이후 천여 명으로까지 신자가 늘었고, 이를 관리하기 위하여 가성직자단을 조직하여 성사를 베풀어서 5천여 명으로 늘어나던 무렵 문득 의문이 생겨서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문의했던 그 무렵에 교황청에도 조선 천주교회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구베아 주교는 이미 중국 천주교회의 조상제사에 대해 교황청에서 내린 금지령을 조선 천주교회 대표들에게 전달했고, 이에 따라 1801년 진산 사건을 시작으로 조선 천주교회는 백여 년에 걸친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조상제사뿐만 아니라 천주교의 교리가 성리학과 배치된다고 보았으므로 천주교 신자들의 씨를 말려서 조선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려고 할 수 있는 수단을 다 동원하여 박해하고 탄압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상제사 금지령의 배경에는, 당시 교황청에서는 중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조상제사에 조상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적 요소가 있음을 우려했고, 구베아 주교는 이미 중국에서도 조상제사 금지령이 내려져 있기도 했거니와, 중국과 비슷하게 조상제사를 지내는 조선을 예외로 할 경우 조선 교회가 이단의 길로 걸어가지나 않을까 염려한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로서는 제사금지령이 교황의 뜻이기도 해서 순명한 것이기도 하지만, 성리학에 따라서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지도 않고 신분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조선 조정의 정책보다는 만민이 평등하며 남녀가 동등함을 가르치는 천주교 교리가 옳다고 믿었으므로 조상제사를 거부한 대가로 주어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치명할지언정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이러한 신자들이 교우촌에서 복음을 살아가는 신앙생활과 박해에 임하여 보여주는 용감한 치명 자세에 감명 받아 교황 레오 12세는 조선 선교를 파리외방전교회에 맡기기로 결정하였고, 이에 따라 조선에 파견된 프랑스 선교사들도 기꺼이 교우들을 위해 봉사하다가 치명하였으며, 또 그 뒤를 이어 후임 선교사들을 파리외방전교회에서도 계속해서 조선에 파견하였습니다. 또한 조선 천주교 신자들의 치명 기록을 번역하여 교황청에 보냈습니다.
이러한 모든 노력이 바탕이 되어,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79위 순교자들이 시복되었고, 1968년에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24위 순교자들이 시복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에 걸쳐 복자품에 오른 103위 순교자들이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 여의도 광장에서 시성되었습니다. 최근에는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광화문 광장에서 124위 순교자들이 시복되었습니다.
⒋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방한 : 역대 교황 가운데 한국을 찾은 첫 교황은 요한 바오로 2세로서 1984년과 1989년, 두 차례나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역사적인 첫 방한은 1984년 5월이었습니다. 한국 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식을 계기로 방한하여 서울에서는 시성미사, 대구와 광주 및 부산 등에서는 세례성사, 성품성사, 견진성사 등을 집전했으며, 노동자와 농어민, 한센병 환자 등을 두루 만났습니다. 이때 한국 교회는 성 김대건 안드레와 성 바오로 정하상과 동료 순교자들 모두 103위의 성인을 탄생시키는 감격을 누렸습니다. 또한 1989년에는 제44차 서울 세계 성체 대회를 주관하러 두 번째로 방한하였습니다. 이 대회의 주제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로서 교황이 직접 골라서 권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이 바로 분단된 국가임을 의식한 배려였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동유럽의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 출신입니다. 그는 그 이전까지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 출신들이 교황직에 선출되었던 관례를 깨고 최초로 동유럽 출신으로 교황직에 올랐습니다. 과연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 교회를 재임 중 10여 차례나 방문함으로써 동유럽과 소련 공산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데에 결정적 공헌을 하였습니다. 군사력을 경쟁하거나 경제 제재를 하는 등의 위협적인 방식을 통하지 않고, 신앙심에 바탕을 둔 용기와 연대를 강조함으로서 평화적으로 공산주의 독재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공헌하였습니다. 또한 대희년을 맞이하여 가톨릭교회가 지난 2천 년 동안 조장하거나 방조했던 각종 범죄 및 불미스런 사건들에 대해 참회하고 반성하는 문서를 발표하였으며, 십자군 전쟁 이후 관계가 악화된 채로 남아 있던 동방 정교회와 이슬람교와 화해하려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는 2005년 4월 2일 선종하면서,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하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2014년 4월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요한 23세와 함께 요한 바오로 2세를 성인품에 올렸습니다.
⒌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 한국을 방문한 두 번째 교황은 프란치스코 현 교황입니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 대륙의 아르헨티나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교황직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부모가 이탈리아 출신 이민이어서 이탈리아 문화에 익숙한 편이었기 때문에 비유럽 출신이라는 데 대한 거부감은 상대적으로 적었고,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대륙의 교세가 이미 유럽의 교세를 능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들은 물론 세계의 여론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이 당시, 1984년에 시성된 순교자들이 병오박해(1846)와 병인박해(1866) 당시에 치명했던 순교자들이 대부분이었던 데 비해, 신해박해(1791)에서 처음으로 치명한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를 제외한 122위의 치명자들은 그 이전인 신유박해(1801) 이후의 초기 순교자들이었으며, 1984년에 시성된 103위 순교자들 중에는 파리외방전교회 출신이 10명이 포함되어 있었던 관계로 프랑스 교회가 주도했었지만, 이 2014년의 시복식 준비는 한국 교회가 처음으로 도맡아서 그것도 아주 빠른 시일 안에 해냈다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복식을 주례하는 한편, 세월호 유가족들도 만나 위로했으며, 솔뫼성지에서 열린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여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방한 일정의 마지막으로 명동 성당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주례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와 갈라진 민족의 화해를 기원하였습니다. 그 덕분에 이 문제가 한민족은 물론 교황청에서도 가장 우선순위를 높이 차지하는 기도 지향이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를 들으신 하느님께서 응답해 주실 날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