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7주간 금요일
2026년 10월 08일
오늘의 말씀, 최 빠코미오 수사
1독서: 갈라 3,7-14 <믿음으로 사는 이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복음: 루카 11,15-26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제목: 은총으로 채우는 집
1. 셈법을 넘어서는 믿음
우리는 종종 신앙생활을 일터에서 하루 품삯을 계산하듯 대하곤 합니다. 미사 참례 횟수를 세고, 묵주기도 단수를 차곡차곡 쌓으며, 단식과 영적 독서의 분량을 채워 하느님께 떳떳하게 대가를 요구하려 듭니다. 그러나 내 힘과 공로로 의로워지려는 마음은 구원이 아니라 끝없는 짐과 굴레가 될 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갈라 3,11). 내 노력만으로 의로워지려는 시도는, 굴려 올린 바위가 다시 굴러떨어지는 형벌을 반복하는 ‘시지프스의 신화’ 속 끝없는 노역과 같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우리를 율법의 굴레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성 베네딕도께서 남긴 규칙과 수덕의 규율 역시 우리를 옭아매는 법이 아니라, 마음을 깨끗이 하여 주님의 사랑에 다다르게 하는 길입니다. 내 공로를 따지는 계산기를 내려놓고 십자가의 은총에 온전히 내맡길 때, 무거운 율법의 짐은 가볍고 감미로운 멍에로 바뀝니다.
2. 더 강한 분의 승리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 못 하는 마귀를 쫓아내시고 놀라운 진실을 밝히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구약 탈출기에서 이집트 요술사들이 하느님의 권능 앞에 무릎 꿇으며 고백했던 바로 그 손가락입니다(탈출 8,15 참조).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교회의 교부들은 이 하느님의 손가락이 곧 성령임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교회의 오랜 찬미가에서도 성령을 ‘성부 오른손의 손가락’이라고 고백합니다. 악한 세력이 아무리 단단히 무장하고 집을 지키고 있어도, 그보다 더 강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힘없이 무너집니다. 삶의 어둠과 죄의 세력은 내 주먹이나 결심으로 꺾을 수 없습니다. 오직 내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권능만이 그 어둠을 몰아내며, 그리스도의 권능 앞에서 악의 세력은 완전히 무장 해제됩니다.
3. 비어 있는 집의 위험
그러나 악한 생각을 몰아내고 마음을 정돈했다고 해서 영적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더러운 영이 나간 뒤 집이 말끔히 치워졌으나 주인이 없이 비어 있으면, 더 악한 영 일곱이 그 빈자리를 차지하여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나빠집니다(루카 11,24-26 참조). 유혹을 한 번 물리쳤다고 해서 찾아오는 방심은 영혼을 가장 메마르게 만듭니다. 악을 쫓아내는 소극적 정화에 머물러서는 영혼의 집을 지켜낼 수 없습니다. 비어 있는 집은 언제나 더 큰 유혹의 표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텅 빈 공간은 반드시 주님의 은총으로 채워야 합니다. 매일 드리는 끈기 있는 기도, 성경 말씀을 곱씹는 렉시오 디비나, 그리고 이웃을 향한 구체적인 겸손과 사랑으로 내면의 집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영적 싸움의 승리는 내 의지가 아니라 내 안에 살아 계신 더 강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 있습니다. 두려움과 의무감의 노예에서 벗어나 성령의 손을 잡고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甘味)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성 베네딕도 규칙 머리말 49항) 되는 충만한 신앙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