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를 받고, 그 주제 자체에 매력을 느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기’. 그동안 시도해보지 않았고, 생각해 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무지한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들었던 것이다. 우선 바로 시도해보았다.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신기했다. 3년을 걸었던 거리었지만, 그 자리에 이런 나무가 있었는지도 몰랐고, 벌써 단풍이 들어 있었는지도 몰랐다. 수없이 걸었던 거리였지만, 처음 걸어본 거리였다. 그때, “왜 나는 이것들을 인식하지 못한거지?”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익숙한 것에 신경이 가지 않는 것은 어찌보면, 사람의 진화에 따른 결과일 것이다. 바깥 세상의 자극을 모두 받아들이면, 뇌가 미쳐버릴 것 같긴 하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오감의 목적은 바깥 세상의 자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게 아닌가 싶다. 허나, 문득 교수님께서 강의중에 말씀해주신 내용이 떠올랐다. 옛 사람들은 고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씀하셨다. 바깥 세상의 자극을 극한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깨달음을 얻은 것이라면, 오감이 자극을 억제할 이유가 없지 않나? 그것이 아니면, 오감은 일종의 수도꼭지 역할이고, 그 수도꼭지를 열고 닫으려는 생각이 포인트인 것인가? 오늘의 나처럼?
골똘히 생각하던 와중, 나무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신기한 광경이 있었다. 은행잎이 나무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밑동에서도 자라나고 있었다. 찾아보니, 은행나무가 맹아력이 높아 뿌리목 부근에서 흔히 움이 많이 싹튼다고 한다. 허나 왜 뿌리목인가? 위에 있는 수많은 가지들이 햇빛을 다 차지해버리면, 뿌리목에 있는 움들은 햇빛을 많이 못 받을 텐데 말이다. 아마 단풍이 되기 싫었나보다. 혹 낙엽이 졌을 때에도 그 잎들이 살아있다면, 귀여워 해줘야겠다.
사실 밑동에서 자라난 은행잎보다 놀라웠던 것은, 그 짧은 거리의 길을 거닐면서, 구경할게 이렇게나 많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살면서 수많은 구경거리를 놓쳤다는 생각에 아쉬운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이제라도 세상을 낯설지만 새롭게 인식하는 재밌는 경험을 해서 우쭐한 느낌마저 든다.
첫댓글 외부의 자극으로 눈돌리게 되면 과잉 상태에 놓일 것이라고 우려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받아들이기에 너무 많은 정보들이 눈만 돌리면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정보를 수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순전히 본인 스스로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전보다 더 많은 정보를 생산하고, 축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택적으로 그것들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Chatgpt 등과 같은 인공지능에 그 정보의 선별을 대리하도록 하기도 합니다. 물론 디지털 정보로 넘쳐나는 우리의 삶은 예전 삶에 비해 상당히 복잡해졌고, 이것들을 수용하여야 삶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자연인이다"를 추구하는 현대인의 삶에서도 확인되듯이, 삶을 유지하는 데 그것 모두가 필요하지 않다는 점을 우리는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나무에 스마트폰을 들이대면 그 나무의 학명과 특징 등과 같은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이 나무의 "의미과 가치"는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