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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동무, 그가 성경을 풀고 떡을 떼시니
누가복음 24:13-35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린다. 세계교회가 이어온 부활절 인사를 해보자.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절기가 7주간 동안 계속된다. 예배 찬송으로 부르는 ‘부활찬양송’, 십자가에 걸려있는 흰 수의, 두 개의 초로 밝히는 파스카의 초가 지극히 상징적이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여러 가지다. 이른 새벽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간 이야기는 긴장으로 가득하고, 손에 못 자국과 허리의 창 자국을 확인해야 스승의 부활을 믿을 수 있겠다는 도마의 이야기는 극적 갈등을 보여준다.
‘그 여자, 막달라 마리아’나 ‘그 남자, 디두모 도마’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을 효과적으로 증언한다. 그리고 세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이다.
1)
문학 비평가 웨슬리 코트는 모든 드라마는 적어도 네 가지 요소를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이야기가 벌어지는 시간과 공간을 포함한 조건인 ‘세팅’, 구성과 줄거리인 ‘플롯’, 이야기의 색깔과 분위기인 ‘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는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13-14).
두 제자 이야기는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절망의 길’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다시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희망의 길’을 보여준다. 진행 방향을 180도 바꾼 놀라운 반전과 역전이다.
그 사이에 ‘길동무가 되신 예수님과 동행, 길에서 풀어주시는 성경의 말씀들, 엠마오 저녁 식탁으로 초대,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눈뜸’ 등 섬세한 전개 과정은 듣는 청중으로 하여금 마음의 시선을 맞추게 한다.
중요한 것은 청중이 등장인물과 동일시하는 과정을 통해,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점이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는 길 위의 존재인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두 사람의 나그네는 참으로 낯익다. 왜냐하면 두 길손은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낙심하여 다시 고향으로, 옛 직업으로, 과거의 생활방식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때때로 우리와 너무도 닮았기에 매우 공감이 가는 사람들이다.
흥미롭게도 성경의 무대는 대부분 길을 배경으로 한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은 길을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았고, 출애굽기는 애굽을 떠나 가나안을 향한 백성들의 발걸음을 소개한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생애를 대부분을 길 위에서 보내셨고, 바울과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교의 고전인 존 번연의 ‘천로역정’(天路歷程)에 따르면 우리 기독자(그리스도인)의 모습도 마찬가지라고 들려주고 있다.
사실 우리 모두가 길을 가는 당사자라는 반증이다. 그럼에도 아무도 목적지를 자신 있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무력함으로 가득하다. 평범한 우리는 자주 외도한다. 길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신앙의 외도이건, 또 다른 의미의 외도이건 번번이 그런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유혹 그 자체가 아니라 다시 돌이키는 회개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다. 위대한 부활 드라마는 십자가 사건 때문에 절망하여 예루살렘으로부터 등을 돌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다시 엠마오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다는 놀라운 반전, 전환, 회개 덕분에 더욱 극적으로 완성도를 높여 주었다.
미국 연합감리교회가 개발한 ‘워크 투 엠마우스’란 영성 프로그램이 있다. 그 내용인 ‘엠마오로 가는 길’은 바로 내가 주님을 만나는 과정이다.
사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주님의 부활 소식을 의심하고, 저마다 제 살길을 찾아 도망하는 모습은 내 속마음이기도 하다. 가장 극적인 드라마는 무엇인가? 바로 내가 그 길에서 돌아서서 방향을 전환함으로써 부활 사건의 진실한 증인이 되는 일이다.
2)
두 제자는 길을 가면서 며칠 동안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나사렛 예수였다. 두 사람은 입을 모아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는 행동과 말씀에서 힘이 있는 예언자였다고 회고한다.
두 제자는 모든 일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쉬운 면도 있었다. 두 사람 이야기를 듣자면 지금 자기들은 그 사건의 밖에 존재하고 있다. 물론 슬픈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라면서 둘이 하는 이야기에는 자신들의 감정과 고백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두 사람이 엠마오로 걸어가는 도중에 낯선 한 남자가 두 제자에게 다가왔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17).
낯선 한 남자는 두 사람에게 다가와서 그들의 동행자가 되었다. 이렇게 길을 함께 가는 사람을 길동무라고 부른다.
주님은 낯선 나그네 모습을 한 채, 이렇게 우리와 함께 하신다. 물론 두 사람은 그 새로운 나그네가 부활하신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 오히려 ‘당신은 예루살렘에서 오는 길이면서 며칠 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냐’면서 타박한다.
이런 저런 일로 길동무가 된 세 사람은 길을 함께 걸으면서 계속하여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일을 서로 말하였다.
특히 길동무는 성경을 풀어 설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을 역사적으로 조망하였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26) 라고 반문하고 있다.
‘눈앞이 캄캄하다’란 말이 있다. 사실 눈앞의 일에 연연하면, 조금 떨어진 앞뒤의 일은 잘 보이지 않는다. 길동무이신 예수님은 눈앞이 캄캄해져 당장에 눈앞에서 일어난 사건에 좌절한 그 두 사람에게 모세의 예언서로부터 하나님의 구원계획 그리고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의미를 찬찬히 말씀해 주셨다.
처음에 호기심으로 듣던 두 제자의 마음이 갈급한 심정으로 바뀌고, 이젠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으로 변하였다. 두 제자의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이윽고 엠마오에 이르자 그들은 더 가시려는 예수님을 붙잡았다.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29).
화가 렘브란트는 엠마오로 가는 길을 주제로 한 작품을 여러 점 그렸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이다.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함께 길을 가면서 말씀을 나누는 장면이다. 성경을 풀어 설명하는 장면일 것이다.
또 하나는 예수님과 두 제자가 식탁에 앉아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이다.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나눠 먹던 중에 두 제자의 눈이 열렸다. 이 장면은 마치 성찬식을 연상시킨다. 이제 두 제자는 자기들과 동행하신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줄 알게 되었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30-31).
화폭에 담긴 식사 장면을 보면 사방에 어둠이 깃들고 식탁에는 잔잔한 석양처럼 붉은 빛이 감돈다. 예수님이 함께 길 가던 두 제자와 식사하는 모습은 참 정겹다. 렘브란트의 작품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빵을 떼시는 순간, 바로 두 제자에게 떡을 떼어 주시는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임을 깨닫는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이제 예수님이 눈앞에서 사라진 후, 두 제자는 예수님을 돌이켜 생각하며 감격해 한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 하더냐”(32).
마침내 두 제자는 길동무이신 예수님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발견하였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동행하신 그분, 길을 걸으며 성경 말씀을 풀어주신 그분, 그리고 마주 앉아 함께 떡을 떼던 그분이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심을 깨달은 것이다.
3)
두 제자는 동행한 나그네인 예수님을 자신들의 식탁에 모시고, 함께 떡을 뗄 때에 눈이 열리는 체험을 하였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체험한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하였는가? 진리는 깨달음이지만, 그리스도교의 구원은 깨달음에서 그치지 않는다. 두 제자는 즉시 일어나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33).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아직 정치적 소용돌이가 있는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갔다. 빌라도의 군대가 여전히 예수의 잔당들을 색출하려는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갔다. 부활의 확신이 없어 제각기 자신들의 엠마오를 찾았던 제자들이 있는 그 예루살렘 다시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열한 제자를 만나 부활하신 주님을 자신들이 어떻게 만났는지 전하였다. 마침 열한 제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주하였다. 예수님은 열 한 제자에게도 성경을 풀어 주시고, 함께 생선을 나누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 제자와 또 열한 제자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오늘 우리를 통해 생생한 고백과 삶의 드라마가 되신다. 구체적인 생명의 양식이 되시고, 일용할 양식이 되신다.
엠마오라는 이름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여러 가지 사건을 계속 연출하고 있다. 프랑스의 유명한 빈민 공동체 엠마우스가 대표적이다. 현재 39나라 350여개 그룹이 활동 중이다.
창설자는 프랑스 사람 아베 삐에르 신부이다. 그는 프랑스 국회의원을 세 번이나 한 인물로, 엠마우스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가 정의한 엠마우스 운동은 “가난한 사람이 노동해서 더 가난한 사람을 돕는 아름다운 행위”이다.
배경은 이렇다. 한 신사가 자살하려고 마음을 먹고, 마지막으로 삐에르 신부를 찾아왔다. 그는 잘나가던 자신이 자살하려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경제적 파탄, 사회적 지위의 추락, 가정의 파탄 등 힘겨운 상황 때문에 지금 죽을 수밖에 없다고 괴로운 심정을 다 털어 놓았다.
삐에르 신부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깊은 동정심으로 이렇게 말했다. “자살할 이유가 충분하군요. 사정이 그렇게 어려우니 도무지 삶을 지탱하기 어렵겠습니다. 자살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왕 죽을 거라면 죽기 전에 나를 좀 도와 준 다음에 죽으면 안 되겠습니까?”
신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자살을 하겠다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다니...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신부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대답하길, “저야 어짜피 죽을 건데, 만일 신부님이 필요하다면 얼마 동안 신부님을 돕겠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 없는 사람을 위해 집을 짓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엠마우스 사업을 도왔다.
얼마 후, 이 사람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신부님이 나에게 투자를 했거나, 내가 살집을 주었다면 나는 얼마 후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부님은 내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신부님과 함께 이웃을 섬기는 일을 하면서 내가 계속해서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사는 게 참된 행복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매번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촉구하신다. 새로운 삶을 결단하도록 재촉하신다.
내가 인생길을 걸으며 의심과 회의에 빠져 있을 때마다, 엉뚱한 방향인 엠마오나 여리고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부활하신 주님은 나를 만나 주신다.
그러니 믿음보다 유혹이, 확신보다 의심이, 감사보다 불신이 있을 때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 도움을 요청하라.
믿음은 내 삶을 깨우는 북소리이다. 신앙생활은 이 세대가 무겁게 강요하는 행진을 멈추고, 다른 삶의 모습을 꿈꾸게 한다. 세상의 욕망에 매여 사는 삶이 아니라, 자유로운 영혼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그 북소리가 앞만 보고 행진하던 내 삶을 돌이키게 하고, 내 심령을 깨운다면 그것이 내게 일어난 엠마오의 기적과 같다.
그런 마음으로 믿음의 길을 가야 한다. 내가 믿음의 길을 걷는 동안 주님의 나의 길동무가 되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번번이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하신다. 우리가 상수리 나무 아래 쉬고 있을 때나, 길가에서 유혹의 함정에 빠져 있을 때나, 그리고 엉뚱한 반대 방향인 엠마오나 여리고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님은 다양한 길동무의 모습으로 우리를 만나 주신다. 그리고 격려하시고, 등을 두드려 주신다.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밥을 나누신다. 이제 우리는 주님이 나의 길에 동행하시고, 늘 길동무되심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날마다 길 위에 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과 함께 하시길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