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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을 통하여 워치만 니를 존경하고 있었고,지금도 책이 내 서재에 몇권 있다.
그런데 이 카페에서 그가 쓴 글을 요약한 자료에
집교회,가정교회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사실 평소에 내가 그의 글에 대하여 영해가 너무 깊은데, 어딘지 성경적이라기 보다는
다른 경향이 있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가볍게 좋아했고,깊이는 잘 몰랐다.
내가 장로교를 비롯한 교파 교회들이 카톨릭을 나온 개혁파의 신학이나 성경 해석 교리와는
달리 실천적으로 변질 타락한 것이 한탄이 되고
그 잘못을 바로 잡을 가능성이 없어 보여서 절망하고
형제교회나 가정집 교회에 성경적 실천이 있는 것을 보고 위로를 얻었다.
나 자신은 목사 옷을 벗고 가정교회로 바꾸었다.
좋게 생각하던 워치만 니가 가정교회를 경계하고 사이비라는 극단의 글까지 남긴 것의 사정을
알고 싶어 이리 저리 자료를 찾아 보지만 찾기가 어렵다.
그래서 유추해 본다. 가정집 교회는 지방교회의 교회 개념과 비슷한 면이 있다.
사실은 카톨릭이나 개혁교회들도 다 한 지방의 지역교회가 성경적인 것을 인정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전혀 이론과 다르게 각각의 사역자들이 일하고 있다. 이 점이 지금
부딪치는 점인 것 같다.
의문이 드는 것은, 워치만 니가 그런 글을 쓰고 지방교회의 앞날을 생각하고
가정교회와 구분하고 싶었던 그 시대의 어떤 배경이 있었나 하는 점이다.
누군가 이점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자료가 있거나 설명해 줄 수 있다면 참 고맙겠다.
지방교회가 상당히 무게를 두는 워치만 니의 지침인데, 염려가 되는 것이다.
다른 교파교회에서는 성도들의 가정모임이 성경의 중요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심지어 교회 성장 전략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내가 지금 파악한 것은 이렇다.
불행히도 시작한 워치만니가 원하지 않았지만 교파처럼 되어버린 지방교회가
상당히 예민하게 다양한 비판에 과잉 반응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차분한 설명을 하면 그만일텐데 이 카페에서 글을 쓰는 몇분 만이 아니라
다른 데도 보니 지방교회 자체의 성격인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보인다.
오죽이나 이단이니 사이비니 하는 교리적이며 정치적으로 악의적인 공격을 받으면
그렇게 과민 반응을 할까? 한편 안쓰럽기도 하다. 아예 경우마다 반박문이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해해야 할 것은 기독교 변론가들이 성경 잣대로 비판,비평이나 분별을 할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지방교회 뿐만 아니라,어느 교파나 단체나 개인도 성경으로 확증이 필요할 경우
서로 대화하고 비판하고 분별하는 것 아닌가?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진리 분별의 방법이다.
분별이라는 단어가 참 좋다고 생각하며 이 카페에서도 즐겨 여러 분들이 쓰고 있어 나도 배웠다.
그런 분별을 통하여 진리가 더욱 진리로 확인이 되고,비진리는 걸러 내지는 것 아닌가?
우리 현실의 문제는 어떤 사람이 어느 특정 교단이나 기관에 이해 관계가 얽혀 있어서
진리 문제에 공정하도록 자유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개신교의 목사들이 생활의 경제 문제,생활비가 걸려있기 때문에
교회와 목사제가 잘못인 줄 알게 될지라도, 그놈의 먹고 살아야 할 돈 때문에
목사직업을 버리지 못하는 것 아닌가?
모르고 속는 경우도 있으나,일부 알고도 먹고 사는 생존 문제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정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사표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억지 변명을 하는 것이다.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므로 며칠간 나도 괴로웠다.
그러나 차후에 이런 일이 또 많이 일어 날 것으로 안다.
진리 문제도 토론이 정오,찬반으로 나뉘어 이해의 각도 차이로 격론이 많지만
정치적이며 현실적인 이해 관계, 경제 문제 때문으로도 그러하지 않은가?
나는 워치만 니가 한쪽으로 치우친 면이 있음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내가 그를 너무 호의적으로 확실한 분별없이 생각하니까,주님이 이렇게 인도하신 것으로 믿는다.
지방교회의 좋은 점을 존중하며 사랑한다.
그러나 단점에 대하여 애석하게 생각한다.
내가 이번에 내 신앙 신념과 정서적 마음에 상처를 받았는지는 몰라도
현재로서는 지방교회와 더 이상 교제하고 싶지 않고, 멀리서 보고 싶다.
그리고 같이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지방교회는 다른 교파교회들의 극복하지 못할 문제점 위에
더 한 문제가 있다는 것에 안타까운 마음이다.
대나무
참조.
워치만 니의 <영적인 사람>, 과연 <영적>인가?
워치만 니의 <영적인 사람>이라는 책을 다시 펼쳤습니다. 이전엔 정동섭씨가 번역하여 생명의 말씀사에서 1968년도에 출간한 것을 읽었는데, 이곳 영국생활을 하면서 구할 수 있게 된 영역본을 구하여서 한글판과 비교하면서 읽었습니다. 한글번역의 미진함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다시 읽자니, 이전에 느꼈던 문제점이 새롭게 다가오고 더 큰 문제점들도 보이게 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점은 바로 워치만 니의 <영적인 사람>이 과연 <영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한 편으로는 <영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영적>이라고 하니 <영적>이란 말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 <영적>인 것이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영적>인가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의 본질입니다.
워치만 니는 영, 혼, 몸을 구분합니다. 그리고 이 구분을 하지 못하면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교회 역사를 통하여 그의 이론에 동의하지 못하는 수많은 신앙의 위인들이 그에게 있어서는 결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영적>인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영, 혼, 몸을 나누면서 <영>은 <가장 고상한 것>이고 <몸>은 <저질>이라고 합니다. <혼>은 그 중간에 매개적 기능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미 이런 정의 자체에서부터 그의 영,혼,몸의 삼구분은 헬라철학에 영향을 깊게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는 이 점을 부인할 런지 모르지만, 플라톤이 <영>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여기고 <몸>을 포함한 모든 <물질>을 천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플라톤적인 철학에 깊이 물들어 있는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자신의 주장을 각색하고 있습니다. 선한 의도로 그렇게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그의 주장은, 진리에 대한 심각한 훼손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말합니다. “나는 내가 책 속에 담은 내용이 단순히 영적인 교리로 전해지기 보다는 신령한 진리로 독자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랬다>(정동섭역,1권9쪽). 또한 이런 말도 한다. “읽는 도중에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해서 진리가 아니라고 거절하지도 말고 또 지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지도 말라는 당부를 해 두고 싶다>(1권11쪽). 이해하기 어렵고 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진리>라고 하는 주장입니다. 이 책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비평하는 것은, 아직 <영적>인 사람이 되지 못했거나 사탄의 훼방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장을 비판의 권외로 제외하는 이런 태도가 <영적인 사람>을 쓰고 있는 워치만 니의 태도입니다. 저는 그의 경건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의 신실함과 겸손함을 또한 인정합니다. 그의 주님을 위한 수고를 또한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그의 글을 비판할 수 없단 말입니까? 그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워치만 니라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일 것입니다. 그가 쓴 주장이 하나님의 주장이 아니라면 왜 그의 글을 비판할 수 없는 것입니까? 왜 그의 <영적인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 <아니다>고 비판할 수 없단 말입니까?
그는 독자들에게 권합니다. <이 책에 담긴 진리가 아무에게도 가볍게 취급되거나 무관하게 지나치게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진지하게 취급하기로 하였습니다.
특별히 그의 책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이전에도 여러 사람들이 영,혼,몸을 나눠서 복음을 이해하려고 하였지만, 워치만 니처럼 한국교회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의 주장이 제시 펜 루이스 같은 사람의 주장을 답습하고 반복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한국교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이런 주장이 바로 워치만 니의 이름으로 개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것도 성경의 주장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의 주장이 비성경적인 주장>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회가 있는 대로, 그가 이 책에서 이용하고 있는 성경구절들을 하나씩 검토하면서 그의 성경인용과 해석이 얼마나 어긋나고 있는지를 드러내 보려는 것은, 유익한 시도일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영적인 사람>이란, 영, 혼, 몸을 구분하면서 그 요소들 중에 <영>에 치중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몸과 삶을 포함한 전인격이 <하나님 중심>인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저의 글을 읽어가시는 분들은, 워치만 니가 말하고 있는 <영적인 사람>의 허구와 참된 <영적인 사람>의 차이를 분명하게 깨달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워치만 니와 저 사이에 오직 주님께서 판단자가 되실 것입니다.
홀리죠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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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파를 떠나서 거듭난 사람들은 항상 자기를 돌아보고 남에게 비추어 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건물 교회는 어찌보면 초등학교와도 같고 군대로 말하면 훈련소와 같습니다. 때가 되면 졸업하여야 하고 훈련을 마치면 자대로 가야 합니다. 누가 초등학교를 평생다니는 사람은 없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한 것 하고 세상에서의 삶은 차이가 많이납니다.
초등학교를 다녀야 하는 것은 좋은 습관과 질서와 정직과 또한 기초가 되는 지식을 배우고 단체생활을 하며 협동심을 키웁니다. 세상의 건물 교회를 보면 졸업을 하고 각 분야에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곳에 머물러 누룩이 되었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16장)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
위의 말씀이 교회이고 가정교회는 이 말씀에 터를 잡아 소수의 거듭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 생각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3:23~24)
대나무님, 아마도 시간과 자료제한이라는 현실적인 형편때문에 그러시는 것으로 이해는 합니다만
최종판단(예를 들어 워치만니...)은 일단 유보하시고 그냥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기도로 가져 가셔서
그분의 음성을 들어보시면 어떨까요?
워치만니 형제님을 책 몇권 또는 인터넷에 떠 다니는 편견있는 자료들로 다 알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왜냐하면 니 형제님이 이야기 한 것의 대부분은 '계시'가 있어야 또 자신의 '주관적인 십자가의 체험'이 있어야 알수 있는 것들입니다. 적지 않은 분들이 '워치만니'를 거론하지만 그 삶의 열매를 볼 때 워치만니의 중심부담에는 여전히 미치지 못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만일 워치만니의 중심부담을 만졌다면 1. 자기부인의 삶, 2. 몸된 교회를 위해 일생을 헌신함. 3. 다른 지체들을 인간적인 어떤 것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함이 없음 (물론 교리적 진리적으로 워치만니는 많은 판단을 했습니다. 로마 천주교가 이단이다 라고 한 것이 한 예임) 이 열매로 드러나야 합니다.
워치만니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깊은 영성을 칭찬합니다.
그러나 그의 영성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것이었지 개인의 영성 자체를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워치만니 같은 영성을 갖기를 사모하고 어느 만큼 흉내를 내기까지 합니다.
그러다가 스스로 늪에 빠집니다. 영에 속한 사람들이란 책은 이런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지요.
생명의 말씀사가 니 형제님 책을 많이 펴 냈지만 니 형제님의 교회관련 책은 거의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 줄까요?
워치만니를 선택적으로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론까지 받지 않는 워치만니 추구는 미완성입니다.
제가 아는 워치만니는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이 교회에 있음을 분명히 본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우주교회가 각 지방을 단위로 나타난다는 것을 확신한 사람이지요.
이와 달리 지방교회에서 함께 동역 있던 어떤 형제는 그 당시 목사가 되고 미국에서 명예 학위도 받았습니다.
교회의 길을 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신앙의 끝은 결국 자기 영광을 얻는 것으로 마쳐질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길을 갈 때 자아도 부인되고, 이기는 자도 되고, 그리스도의 몸도 세워져 갈 것입니다.
이 길 안에서 우리의 존재가 뿌리채 폭로되고 처리되며 마침내 한 점의 육체도 남지 않도록 익어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