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을 거울삼아 마음속 眞佛을 찾아라**
한국사회 정신적 황폐화 악화일로…‘종교역할’절실
불교 ‘다르마’가 21세기 문명사회 지탱하는 힘 될 것
우리에게는 왜 종교가 필요한가. 지금 우리는 정신적으로
대단히 황폐화된 시대를 살고 있다. 이른바 정신적 오염현상이
만연돼 있다. 시민정신은 갈수록 잔인해지면서 악화일로에 놓여
천박해지고 있다. 사회적.종교적으로 병리현상을 앓고 있다.
한국의 불교, 한국의 기독교가 국제사회에 나가면 마땅한
종교로서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이상한 형태로 변질돼 있다.
한국인이 만들어놓은 ‘해괴한’ 종교가 되어 버렸다.
가정 역시 붕괴되고 있다. 도덕성은 무너져가고 있다.
불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는 근본을 중시하고 마음을 청결.
담백하게 지니고 사회를 계도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잠재하고
있는 의식을 갖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고귀해질 수도 있고 혹은
천박해질 수도 있다. 즉 우리들 스스로 머릿속에 지니고 있는
의식구조에 따라서 천박하거나 고귀해질 수 있다. 태생 자체가
고귀한 사람은 없다. 천당이니 지옥이니 하는 것은 우리들
심성에서부터 비롯된다.
부처님은 최후의 만찬 자리에 모인 부처님의 10대 제자를 비롯한
수많은 제자들에게 ‘나를 알고자 하는 모든 제자는 제일먼저
아라한이 되어라’고 말했다. 아라한이 되고자 하는 의욕이
없이는 불교를 믿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부처님은
‘위대한 성자가 되어라. 그래서 위대한 사상가가 되어라.
그리하여 삼업이 청정하여 도덕적 결함이 없는 청정한 사회를
만들라’고 했다. 우리는 그냥 불교 믿으면 좋다니까 믿는다고
말한다. 한 외교관이 한국서 오래 살다 한국을 떠나면서
한국사회를 한마디로 ‘더티(dirty)’하다고 표현했다.
이유를 묻자 ‘한국사회는 세속적인 지식중심 사회’,
‘너무나 권위주의적인 사회’, ‘매우 조급하고 대단히
편파적인 사회’, ‘사유하는 능력이 결여된 사회’,
‘자기과시를 좋아하는 사회’라고 말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특히 한국인은 자존심이 매우 강하다.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에 스승이 없다.
한번 생각해보라. 지금 내가 존경하는 스승이 마음속에 있는가
말이다. 국가는 국가로서 개인은 개인으로서 스승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스승이 없는 가련한 민족이다. 불교를 오래 공부하면
마치 바둑을 잘 두는 고수와 같아서 저 세상에 나가면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고수는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안다. 자식은 자식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국민 모두가 적재적소에서 ‘답게’ 살아야 한다.
불교는 믿음의 종교가 아니라 지혜의 종교다. 믿음은 지혜의
능력을 실천함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획득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야 믿음이 솟는다. 항상 자기 자신을 비판하고
점검해보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부처님 앞에서 나의 소원을
말하기 전에, 부처님을 바라볼 때 거울이라고 여기고 부처님을
통해 내 인생을 비춰봐라. 지금 내 인생은 어떠한 모습으로 가고
있는지 불성적인 자기를 재인식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기탐구요 수행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여기 컵 속에 물이 들어있다. 컵 속에 들어있는 물이 물일 때는
아무 그릇에 담아도 꼭 맞는다. 그러나 한번 얼어버리면
어디에도 맞는 그릇이 없다. 지금 우리나라 국민 전체가 마음이
경색됐다. 부부도 안맞고 부모도 형제도 싸운다. 끈끈한 정이
사라졌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거울을 보기 위해 강변으로 나갔다.
거울을 보기 위해 강변에 갔을 때 흐르는 연못에 얼굴이 비치는가,
잔잔한 연못에 얼굴이 비치는가. 적정(寂靜)을 알지 못하면 소위
고요를 알지 못하면 이법은 알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이 고요할 때
지혜가 나온다. 우리 마음이 와글거릴 때는 되는 일이 없다.
적정을 누리기 위해 참선을 한다.
노나라 순자는 예의를 무시하고 내외가 무별하며 남녀가 음란하고
부자가 의심하면 세상이 어지럽다고 했다. 외부의 침략 때문에
망하는 나라는 별로 없다. 국민의 정신이 온전치 않고 스스로
부패해서 망한다. 가족들에게 불만을 표할 때 나의 가족은
나를 몰라준다고 생각하지 말라. 오히려 생각을 돌이켜서
내가 가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스님네가 사는 큰방 이야기를 잠시 들려주겠다. 큰방에서 중앙은
큰어른 조실스님이 앉는다. 이어서 주지와 총무 재무 선덕 이하
입승과 더불어 선사 강사에 이어 학인들이 죽 앉는다.
아침공양을 위해 모두 큰방에 모여앉아 있으면 한가운데 밥이
등장한다. 모든 대중이 밥통에 시선이 쏠린다. 그러면 학인들은
‘오늘 밥이 더럽게 질다’면서 불만섞인 표정을 짓고 절 살림을
하는 주지 이하 스님들은 ‘질다고 먹든지 말든지’라고 빈정거리는
표정이다. 이 때 조실스님의 말이 압권이다. ‘밥이 설면
설척해야 맛이 있고, 밥이 질면 질척해야 맛이 있다. 음식이 짜면
짠 맛이 음식맛이고, 음식이 싱거우면 삼삼해야 음식맛이다.’
즉 덜된 입에는 짜고 싱거운 맛이 분별되지만 무르익은 입맛은
설고 질고 짜고 싱거운 분별 자체가 사라지는 법이다. 가정에서도
가족끼리 무르익은 입맛으로 서로를 격려한다면 싸울 일은
없을 것 아닌가.
우리 마음가짐에서 직심(直心)이 곧 보살정토다. 모든 국민이
직심을 지니고 있으면 그 나라가 바로 극락정토다. 견성(見性)하지
않고서는 직심을 모른다. 견성은 큰 깨달음이 아니다.
처음 불교를 믿기 위해 첫발을 내딛은 것 자체가 견성이다.
왜곡된 생각을 하지 말고 심심(深心)을 가져야 한다. 마음가짐을
양은냄비 물끓듯 하지 말고 뚝배기 같은 깊은 헤아림을 갖고 살자.
그래야 보리심이 나와 적정을 누린다. 불교는 인간적 자기탐구이다.
밖을 향해 구하는 외도(外道)가 아니다. 쉼없이 탐구하여 근원적인
자기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종이를 자르는데 가위가 필요하고 거목을 자르려면 도끼가 필요하다.
거목이 잘 잘린다고 해서 도끼로 종이를 자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21세기 문명사회에서 어떤 도구가 필요한가. 그것은 법(法),
다르마이다. 법이란 반야사상이다. 반야의 놀라는 지혜가 아니면
21세기 문명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이 없다. 조주스님은
‘목불(木佛)은 불을 건너지 못하고, 금불(金佛)은 용광로를 거치면
녹아버릴 것이고, 진흙부처님(泥佛)은 물에 녹아 풀어진다’고 했다.
참된 부처(眞佛)는 마음속에 있다. 자신의 본래 청정한 법신인
진불을 깨닫고 한 생각의 망심(妄心)이 없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부처님이라는 거울 속에 비쳐진 나의 인생을 볼 줄 알아야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할 수 있는 소질이 있는 사람이다. 여러분도 거울을
보면서 거울 속에 비친 너의 진면목이 무엇이냐고 한번 물어봐라.
불교사상은 선하게 살려고 닦는 것이 아니다. 선악을 넘나드는 것이
불교가 아니다. 선한 일도 본래 없는 것만은 못한 법이다. 바람이
불면 먼지가 끼고 먼지가 눈속에 들어오면 눈이 아프다.
악한 먼지가 들어오면 아프고 금가루나 다이아몬드와 같은
선한 먼지가 들어가면 눈병이 안생기는가. 선도 병이고 악도 병이다.
선도 악도 없는 무념의 세계, 본래 아무것도 없는 무념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그곳이 극락이다.”
정리/하정은
사진/김형주 기자
무진장스님은
1956년 동산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무진장스님은 조계종 포교원장,
동국역경원 후원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동국대 불교대학원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지난 2005년 대한불교진흥원이 지정한
제3회 대원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불교신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