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칼바람도 막지 못한 다음 세대 사랑
허연행 목사의 희망의 속삭임
해외에 나와 살고 있는 700만 한인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살피다 보면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숭고한 민족 성의 뿌리를 발견하고 감탄할 때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를 소개합니다.
1937년 가을 구 소련은, 서기장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서
극동 지방에 사는 한인들을, 중앙아시아 쪽으로 갑자기 강제 이주를 시킨 일이
있습니다.
그들이 내세운 공식적인 이유는
당시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을 앞둔 예민한 시점에서
극동 지방에 일본 첩자들이 침투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는데,
이는 소련 사람들의 눈에는, 외견 상 일본인과 한국인의 구별이 어려웠기 때문이
었습니다.
1937년 9월 9일, 첫 수송 열차가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이후
그 해 12월까지 3개월 간 약 18만 명의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했는데, 그 과정은 이루 말로 다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했습니다.
사람을 객차가 아닌 화물 칸이나, 가축 용 운송 칸에 빽빽이 태우는 바람에
잠도 제대로 누워 잘 수 없었고, 화장실도 없이 장시간을 달리다 보니,
웬만한 용변은 그 안에서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기차가 시베리아 벌판을 지나는 동안에는 그 매서운 칼바람이, 난방도 없는 화물 칸
안으로 파고 들어와서 그 어떤 건장한 사람도 하루 이틀 시달리다 보면,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동상에 걸리거나 얼어 죽기 일쑤였습니다.
그들을 강제 이주 프로젝트에는 인간의 존엄성이나 생존 가능성 따위는 아예 처음
부터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 참혹한 이주 과정에서 약 2만 명에 한인들이 추위와 굶주림 등으로 희생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차를 타고 6,600 킬로미터나 떨어진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인근의
우슈토베 지역에 도착 했을 때, 한인들을 실은 화물 칸을 열어본 소련 군인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소수 민족들은 제각기 웅크린 채, 이 구석 저 구석에 흩어져 있었는데,
유독 한인들은 기차 간 안에서 서로서로 어깨동무를 한 채 원형 써클을 이루고 있었
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가장 나이 많은 연장자들이 가장 바깥쪽에 있고 그 안쪽에
청장년들이, 그리고 맨 안쪽에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더욱 군인들을 숙연하게 만든 것은 맨 바깥에 있던 노인들이 나중에는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안쪽에 있는 어린이와 젊은이들에게 양보한 이들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그들 중 다수는 결국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열차 안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죽음의 열차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한인 이주자들은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동토의 땅에 내던져 졌지만 강인한 정신력과 단결 심으로 황무지를 개간하였습니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처음에는 맨손으로 토굴을 파고 그 안에서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여 살다가 곧바로 흙을 이겨 구워낸 타일로 온돌을 놓고 굴뚝을 뽑아,
중앙아시아의 혹독한 첫겨울을 가까스로 버텨냈다고 합니다.
그 후손들이 지금의 고려 인이 된 것입니다.
지금도 강제 이주 일 세대들이 도착하여 첫겨울을 지냈던 우슈토베 언덕에는 땅굴과
공동묘지가 보존되어 있는데, 이 자리에 세워진 기념비에는
"이곳은 원동(遠東)에서 강제 이주 된 고려 인들이 (*遠東 : 먼 동쪽, 연해주를 뜻함)
1937년 10월 9일부터 1938년 4월 10일까지 토굴을 짓고 살았던 초기 경작지다"라고
한글로 새겨져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다음 세대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였던 고려 인들의 숭고한 정신은, 어느 날 누가 가르쳐 줘서
갑자기 생겨난 것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우리도 몰랐던 그런 DNA가 우리 한국인의 혈관에 오래전부터 면면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받은 글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