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유형문화재 제8호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1동 185-2
01. 개설
1978년 총 면적 49,40㎡에 33종 15,000주의 수목으로 조경된 사육신 공원에는 사당인 의절사(義節祠), 홍살문, 삼문(불이문), 육각비, 신도비 등이 있다. 신도비 비각과 마주보고 있는 육각형의 사육신비는 1955년에 세워진 것이다.
1456년(세조 2) 단종 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을 하다가 순절한 여섯 신하의 묘가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다. 원래는 박팽년(朴彭年)·유응부(兪應孚)·이개(李塏)·성삼문(成三問)의 묘만 있었고, 하위지(河緯地)와 유성원(柳誠源)의 묘는 없었다. 그러다가 서울시에서 1977∼1978년까지 사육신 묘역의 정화 공사를 할 때, 하위지와 유성원의 가묘(假墓)를 추봉(追封), 사육신의 묘를 모두 갖추게 되었다.
불이문 ☞불이문(不二門) : 불이문이라면 일반적으로 사찰에서 사용하는 문이다. 속계에서 법계로 들어가는 문 말이다.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가 국교였던 시절의 충신들을 모신 사당에 들어가는 문 이름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약자라고 하지만 이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일반인들 누가 불이문을 그렇게까지 연구해서 보겠는가.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몰라도 된다는 배짱인가. 좀 생각하고 명칭 하나라도 지었으면 한다.
김문기가 추가 된 것은 『조선왕조실록』과 『추강집』등 사료의 내용이 서로 달라 육신에 대한 논란이 있은 후 김문기를 현창(顯彰)하고 그의 가묘도 추가되었기 때문에 7인이 되었으나 여전히 사육신묘라고 칭하고 있다. 김문기가 왜 추가 되었는가에 대해서 시기적으로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의 선조라서 그렇다는 설이 있었지만 당사자는 부인했다고 전한다.
이 묘가 있는 곳은 지난날 사형이 집행되던 곳이라는 말이 전하기는 하나, 사육신 중 박팽년은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옥사했고, 유성원은 잡혀가기 전에 자기 집에서 자인(自刃 : 칼로 자결함)하였다. 또 다른 사람들은 군기감(軍器監) 앞길에서 거열(車裂)을 당했으므로 이곳에서 처형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정중히 장사지내 줄만한 사람도 당시에는 없었다. 사육신의 아들들은 모두 교형(絞刑)을 당했고, 남은 가족들도 노비가 되었다. 또, 먼 일가나 이웃들도 국가적인 기휘(忌諱)를 받은 이들을 장사지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므로 이곳에 육신묘가 처음 마련된 과정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누군가 묘를 조성했기로 뒤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이다. 살벌했던 당시에 목숨을 걸고 그 일을 할 만한 사람이 누구일까? 바로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으로 추정되어 그에 관한 많은 기록들이 전해진다. 김시습
02. 김시습과 사육신 묘
김시습의 육신묘 조성 전설은 조선의 역대 군주가 신하들의 충절을 고취시키기 위해 사육신과 생육신에 대한 제사의 예식의 등급을 올리고 또 시호를 올리는 과정에서 점차 형성되어간 듯하다. 숙종은 1703년(숙종 29) 2월에는 유생들의 소청에 따라, 육신의 신주를 모신 영월의 사우에 ‘창절(彰節)’이라는 편액을 내리면서, ‘처사(處士) 김시습’의 신주를 모신 홍산(鴻山)의 사우에 청일(淸逸)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부여(홍산) 청일사
그 해 10월에는 경상도 유학(幼學) 곽억령(郭億齡) 등이 함안에 조려(趙旅)의 사당을 짓도록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생육신의 사당을 건립하자는 의견도 함께 올렸다. 영조는 1736년(영조 12) 6월에 영월의 유학 박현제(朴賢齊) 등이 김시습ㆍ남효온 등 8인의 사우에 편액을 내려주기를 청했다.
또한 영조는 1747년(영조 23)에 경기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육신묘에 비를 세우도록 명했는데, 이 때 유생으로서 민절사의 유사(有司)로 있던 민백흥, 홍인한, 심우 등이 예조판서로서 홍문관제학을 겸하고 있던 조관빈에게 비문을 청했다. 조관빈은 이 글에서 처음으로, “대개 당일에 앙화가 일어나 일가 친족이 모두 죽임을 당해 아무도 그 유해를 거둘 수가 없었는데, 어떤 승려가 그 시신을 등에 지고 가서 묻었다고 한다. 혹자는 그 승려란 바로 매월당 김시습 공이라고도 말한다.”라고 언급하여 김시습이 육신의 시신을 수습해서 노량진에 묻었다는 전설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김시습이 사육신의 시신을 노량진에 암장했다고 하는 설화는 이 시기에 이르러 널리 유포된 듯하다. 정조는 재위 6년(1782) 4월에 김시습ㆍ원호ㆍ남효온ㆍ성담수에게 이조판서를 특별히 추증했다. 재위 8년(1784) 3월 11일에는 김시습에게 청간(淸簡)이란 시호를 내렸다. 우리나라 시호법에 보면 ‘청(淸)’은 ‘피원불의(避遠不義: 불의를 멀리 피함)’의 뜻을 나타내고, ‘간(簡)’은 ‘정직무사(正直無邪: 정직하여 삿됨이 없음)ㆍ‘거경행간(居敬行簡: 경의 자세를 지켜 몸가짐을 잘 지킴)’ 등의 뜻을 지닌다. 이렇게 하여 김시습을 추증하고 제사지내는 모든 예식이 정조 때에 매듭지어졌다. 의절사
정조는 즉위 7년인 1731년의 정월 17일(음력)에 처음으로 화성의 현륭원(顯隆園 : 사도세자 능)으로 거둥하다가 노량진을 지나게 되자 승지를 보내 육신사(六臣祠)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 당시 정조가 작성한 치제문(致祭文)이 『홍재전서(弘齋全書)』에 남아 있다. 정조는 그 이후로도 육신사에서 제사를 올렸으며, 역시 별도의 치제문이 『홍재전서』에 남아 있다.
정조가 민절사에 제사를 올린 이후에, 민절사의 유사 이동직 등이 빗돌을 준비하고 박팽년의 후손 전 현감 박기정(朴基正)이 진력하여 조관빈의 「노량육신묘비명 병서」를 빗돌에 새기려 했다. 그들은 1782년(정조 6)에 공역을 마치고 원임 영의정 완산 이휘지(李徽之, 1715∼1785)의 지어(識語)를 받았다.
한편, 이긍익(李肯翊, 1736∼1806)도 『연려실기술』에서, 김시습이 박팽년·유응부·성삼문·성승 등(다른 한 사람은 기록이 없다) 다섯 시신을 수습하여 노량진에 묻고 작은 돌로 묘표를 대신했다고 하는 전설을 채록해 두었다.
성대중은 『청성잡기』에서 「사육신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이란 논문을 적어, 노량진의 사육신 묘에는 하위지가 들어 있지 않고, 또 유성원 대신 성승이 들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하위지의 시신은 조리돌려 그의 고향에 이르렀을 때 그 김에 고향 선산(善山)에 부인과 함께 묻혀 있고, 성삼문의 무덤 남쪽에 성승의 무덤이 있는데, 남효온이 「육신전」을 지으면서 유성원을 포함시킨 탓에 노량서원(鷺梁書院)에서는 성승 대신 유성원을 사육신으로 모셔 제사지내고 있다고 했다. 성삼문도 연산(連山)에 팔다리 중 하나가 묻힌 무덤이 있다고도 했다.
또 성대중은 노량진의 육신묘는 사육신이 죽은 곳은 아니라고 했다. 곧, 세간에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그곳은 옛날에 사람을 처형하던 곳이고 사육신을 묻어 준 자는 승려인데 아마 김동봉(김시습)일 거라고 하지만, 실록을 조사해 보면 병자년에 절개를 지키다 죽은 자들은 모두 군기시 앞에서 죽었지 노량진에서 죽은 것이 아니며 박충정(박팽년)은 옥중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대중은 사육신의 시신을 노량진 언덕에 함께 묻고 무덤마다 푯대를 세운 사람은 김시습이라고 했다. 곧, 이 일은 지혜와 의기를 겸비한 자가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니 김시습이 아니면 그렇게 할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김시습이 과연 사육신의 시신을 업고 가서 노량진에 묻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성대중이 말했듯이, 육신을 묻어 주고 무덤마다 푯대를 세운 사람은 김시습이 아니면 그렇게 할 사람이 없었다고 사람들은 믿어 온 것이다. 신도비각(사육신묘비)과 의절사
03. 박팽년 후손만 살아남아
당시 박팽년의 유복자만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대를 이었다고 하는데, 그에 관한 이야기는 대구(달성) ‘육신사’ 편에서 이야기한바 있다.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이 살아 남은 ‘대구 묘골 한옥마을’ 안녕하세요 큐레이션curation-낭만도사 박팽년의 후손이 있는 곳이거나 박팽년의 유적이 있는 대표적인 곳... blog.naver.com
04. 사육신묘의 세월
그러나 지금 육신묘가 있는 곳에는 일찍부터 박씨지묘·유씨지묘·이씨지묘·성씨지묘라 새겨진 표석이 서 있는 4개의 묘가 있었고, 그 뒤편에 또 하나의 묘가 있었는데, 일찍이 민간에서 이 묘소를 육신묘라 일컫고, 뒤편에 있는 묘는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묘라고 전해왔다.
이렇게 민간에서만 인정되어오던 육신묘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숙종 때부터였다. 1679년(숙종 5)에 왕이 노량에 열무(閱武 : 군사 검열을 관람)갔다가 유사(有司)에게 명해 육신묘를 봉식(封植 ; 흙을 북돋우고 나무를 심음)하였다. 1691년에는 왕이 김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노량사장(露梁沙場)에서 열무를 하고 나서 관원을 보내 사육신묘에 치제(致祭)하게 했으며, 곧 이어 사육신을 숭장(崇奬)하였다.
한편, 1681년에는 사육신 묘역에 사육신의 사우(祠宇)로 민절서원(愍節書院)이 세워지고 1692년에 편액(扁額)이 하사되었다. 또, 이 때 박팽년의 7대 손인 좌익찬 숭고(崇古)가 육신묘를 수축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사육신묘가 공식화되어 사람들의 존숭을 받게 되었다. 그 뒤 1782년(정조 6)에 이르러 육신묘비(六臣墓碑)인 신도비(神道碑)가 건립되었다. 신도비의 비명은 태학사 조관빈(趙觀彬)이 찬하고, 글씨는 당(唐)나라의 안진경(顔眞卿)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별도 포스팅 되어 있음) 신도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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