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육
잠곡유고 제14권 / 녹(錄)
조경일록(朝京日錄)
22일 맑음.
아침에 강씨(姜氏) 성을 가진 관상쟁이가 와서 보았다.
관상쟁이가 말하기를,
“귀상(貴相)입니다. 돈후(敦厚)하고 안중(安重)하여 토(土)에서 형상을 취하였으며, 얼굴색이 희미한 붉은빛인데, 붉은빛은 화(火)가 되는바, 화는 능히 토(土)를 생성합니다.
그리고 손바닥의 옥주문(玉柱文)이 곧장 중지(中指)를 꿰뚫고 있고, 아래턱의 각이 두툼하게 솟았는바, 여러 가지 귀격(貴格)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58세에 호랑이 귀를 하였으니 군대를 관할하여 왕지(旺地)에 임할 것이고,
60세에 이르러서는 수성(水星)이 영(令)을 맡을 것이어서 10년 안에 왕의 후설(喉舌)이 될 것이며,
그 이후로 극히 창성할 것입니다. 다만 수염이 물고기의 꼬리처럼 갈라지고 용궁(龍宮)이 깊이 들어갔으니,
아마도 일찍 쉬기가 어려울 것이며, 처궁(妻宮)에 재앙이 있습니다.
현재는 기색이 아주 밝으며 기쁜 기운이 겹쳐 있어서 조금도 막혀 있는 곳이 없으니, 돌아가는 길에는 걱정이 없을 것으로, 또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하였다.
1) 잠곡은 그 생애에 있어서 전반기와 후반기가 너무도 대조적이다.
전반기는 소년기의 유리곤고(流離困苦) 시기와 30대에서 40대 초기까지 직접 농사에 종사한 가평(加平)에서의
농사꾼 생활 시기로, 사대부 출신(士大夫出身)으로서는 실로 참기 어려운 고생을 겪어 왔다.
그그러나 후반기인 40대 중반에 관계(官界)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부터는 순조롭게 승진하여 여러 요직을 거쳐
70대에 들어오면서 우의정ㆍ영의정으로 인신(人臣)으로서 최고위(最高位)에 올랐다.
그리고 그의 가문(家門)은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중앙 귀족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