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집에서의 만남
정한용
20년 후의 나로부터 만나자는 문자가 왔다
20년 전의 나를 데리고 나가겠다고 답을 보냈다
그렇게 우리는 만났다
늙은 나주댁 아지매가 아직도 술상을 거들고 있었다
십구공탄에 삽겹살을 구우며
어린 나는 빨간딱지 진로소주를 마시고
지금의 나는 조껍데기 막걸리를 마시고
늙은 나는 이젠 술을 못한다고 콩나물국만 홀짝거렸다
우리는 각자 가져온 기억을 꺼내 식탁에 올려놓았다
아내와 아이들 이야기는 빼자고 했다
서로 조금씩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긴 했지만
망각과 불안이 우리 생의 기본이 아니겠냐고 서로 위로했다
어린 나는 마르크스를 읽는다고 했다
지금의 나는 여행서적을 읽는다고 했다
늙은 나는 책 같은 건 보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 담화는 애매모호하게 시작되었다
삽겹살 불판을 두 번 갈고 소주잔과 막걸리잔이 섞이고
식은 콩나물국을 다시 데워오는 사이,
나는 가장 즐거웠던 시절이 언제인지 물었다.
어린 나는 원래 행복한 현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조금 건방지다 싶자 늙은 내가
현재란 과거의 심연이며 늘 새로운 탈로 위장하는 것이니
겨우겨우 인생은 견뎌가는 것이 아니겠냐고 했다
그 순간 누군가 술잔을 엎었다
이후 세 시간 동안 끊어진 필름 조각을 이어보면
어린 나는 ‘진실’과 ‘사실’의 차이를 아냐고 악을 써댔고
지금의 나는 우리 회사 이부장 ‘썩을 놈’이라고 욕을 해댔고
늙은 나는 오래 전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를 자꾸 꺼냈다
나주집 아지매가 결국 등을 밀어낸 것은 알겠는데
우리가 어떻게 헤어졌는지는 기억이 없다.
우리 중 누군가가, 다시 또 만나면 개새끼라고
꿈속에서인 듯 말한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