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6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 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하시자
그는 곳 나병 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 (마르1,40-45)
A leper came to him
and kneeling down begged him and said, “If you wish, you can make me clean.” Moved with pity, he stretched out his hand, touched the leper, and said to him, “I do will it. Be made clean.”
The leprosy left him immediately,
and he was made clean.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인들은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투에서 패하자 계약 궤를 진영으로 모셔서 승전을 꾀하지만, 오히려 사력을 다한 적들에게 섬멸되고 계약 궤마저 빼앗긴다. 이때 합당하지 않은 모습으로 사제직을 수행한 엘리의 두 아들도 죽임을 당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간절히 청하는 나병 환자를 낫게 하신다. 그는 예수님의 분부를 어긴 가운데 자신의 치유 이야기를 널리 퍼뜨린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에서 엘리의 아들들과 이스라엘군은 계약 궤의 힘으로 적에게 승리할 수 있다고 믿고 그 궤를 진영으로 옮겨 옵니다. 언뜻 보기에 이는 주님에 대한 신뢰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결정은 기대와 달리 파국으로 이어집니다. 이스라엘군은 섬멸당하고 계약 궤는 적들에게 빼앗깁니다. 또한 엘리의 두 아들도 죽고 그 집안은 몰락합니다. 우리는 이 비극적인 사건을, 이보다 앞서 서술되는 ‘엘리의 집안은 망한다.’는 내용의 주님의 말씀(2,27-36)과 엘리의 아들들의 악행(2,22-26)에 관한 내용과 연관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엘리의 아들들과 이스라엘인들이 계약 궤에 대해 보인 태도는 참된 신앙이 아니라 가장 거룩한 것을 ‘수단’으로 여긴 사실을 성찰할 수 있습니다. 그들 삶의 방식을 주님의 말씀과 계명에 따라 변화시키려는 노력 없이, 그리고 하느님의 현존을 그 자체로 경외하는 가운데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참된 경건함도 없이, 주님께서 함께해 주신다는 사실을 자신들의 목적과 계획을 성취하는 영험한 도구로 여기는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어쩌면 주님을 모르고 있는 ‘이방인’보다도 신앙의 참모습과 더욱 동떨어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많은 경우에 이러한 교묘한 불신앙의 유혹과 직면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거듭 확인하게 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전체의 삶을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절반의 삶만을 내어놓으며 그것을 믿음이라고 자족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진짜 관심이 머무는 나머지 절반의 삶을 위한 수단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격하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절반의 인생이 아니라 온전한 삶을 바란다면, 삶의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던지는 신앙생활의 용기와 진실함이 필요할 것입니다.
제가 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러니까 이제 막 이등병 계급장을 떼고 어느 정도 군대에 적응되었을 때 주일 저녁에 보았던 텔레비전 방송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신인가수들이 몇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고 심사위원들이 이 가수의 노래에 대한 평을 하고 채점해서 점수를 매기는 프로였었지요.
그런데 그때 나왔던 신인가수들 중에서 가장 적은 점수를 받은 신인가수가 있었습니다. 심사위원들의 평가 역시 다른 신인가수들과 비교했을 때 거의 혹평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 신인가수가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지금은 가요계 역사를 바꿨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서태지와 아이들’이었습니다.
사실 그때 나왔던 심사위원들 모두 그 분야에서는 전문가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심사위원의 평이 근거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지금 현재 사람들의 기억 속에 더 많이 남는 사람은 그 심사위원이 아닌, 혹평을 받았던 ‘서태지와 아이들’입니다.
이러한 상상을 해봅니다. 만약 ‘서태지와 아이들이’ 심사위원들의 이러한 평가를 받고서 좌절하고 포기했다면 어떠했을까요? 과연 사람들의 기억 속에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이름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굴하기보다는 자신을 믿고 앞으로 나아갔기에 가요계의 전설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경우를 보면서 우리들이 살고 이 세상 안에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굳은 마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올바른 모습인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행한 기적들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병자들에 대해 요구하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돈을 요구하시지도 않습니다. 또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만 치료해주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딱 한 가지,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당신 앞에 나아가는 굳은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며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나병 환자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따라서 천형(天刑)이라는 말까지 듣는 나병환자를 근처에 다가오도록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나병환자가 다가오면 돌을 집어 던져 쫓아내던 모습을 떠올릴 때, 이 나병환자가 예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웬만한 용기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인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예수님께서는 그에게서 발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나병은 깨끗이 없어집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에 쉽게 흔들리는 나약한 마음 때문에 혹시 주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실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각종 조건을 내세워서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갖추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믿음도 용기가 있어야 가능함을 깨닫습니다.
소망의 위대함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진실로 평화롭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기를 그대여, 소망하고 또 소망하라.(이외수)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양승국신부-
<그분께서는 반드시 오십니다>
어쩌면 이렇게 혹독한 시련이 내게 다가왔는지요? 너무나 끔찍한 병, 한번 걸리면 인생 종치는 병, 그래서 나와는 전혀 무관한 병이라고 생각했던 나병이 내게 다가왔습니다.
그간 그럭저럭 잘 나가던 인생이었는데, 그리 나쁘게 살지도 않았는데, 천벌 받을 일은 꿈에도 한 적이 없었는데, 어찌 천형(天刑)이라 불리는 나병이 나를 찾아왔는지... 너무나 억울하고 원통해서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떻게 해서든 이 나병을 숨겨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병은 순식간에 내 영혼과 육체를 공격해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루하루 내 모습이 달라져만 가는데 정말이지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나병으로 인해 드러나게 달라진 내 모습에 주변 사람들은 관할 나를 당국에 신고했습니다. 당시 율법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조치였습니다. 나는 그날로 인간 세상으로부터 추방당했습니다. 가족들은 물론 친지, 친구들조차 나로부터 등을 돌렸습니다. 당시 나병환자들은 정상인들이 사는 성안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전염을 방지하기 위해 언제나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인기척이 나면 큰 목소리로 “나는 부정 탄 사람이요?”라고 외쳐 사람들의 접촉을 막았습니다.
자연히 내 거처는 따뜻하고 편안했던 성안에서 성 밖 토굴로 옮겨졌습니다. 밤이 오면 뼛속까지 시린 추위에 시달렸습니다. 길고도 긴 밤이 지나가면 제일 먼저 습관처럼 하는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혹시나 간밤에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내 병을 고쳐주시지나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자신의 몸을 만져보는 것이었습니다.
혹시나 병세가 완화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개울가로 달려가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도 아니라면 이 지옥 같은 세상살이 하느님께서 간밤에 끝내시지 않았을까 기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김없이 새날은 밝아오고 병세는 어제보다 더 악화되어만 갔습니다. 또 다른 하루를 견뎌야만 하는 절망감에 나는 들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그렇게 성 밖 무덤가를 떠돌았습니다. 긴
하루하루 무너져 내리는 내 삶을 바라보며 하느님이 자비의 하느님이시라면서 어떻게 내게 이러실 수가 있냐며 하느님께 대들었습니다. 선하신 하느님께서 어찌 내게 이런 비참함을 허락하시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지금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나는 이렇게 들짐승처럼 산천을 헤매 다니는데, 세상을 어제와 별 다름 없이 돌아가고, 친구들은 내 불행에 상관없이 저리도 깔깔대며 웃고 즐기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나병환자는 목숨이 붙어있었지만 사실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몸이 움직이기는 했지만 시체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은혜롭게도 나병환자에게 하느님 자비의 손길이 다가갑니다. 더 이상 한 발자국도 물러설 곳이 없었던 나병환자였기에 목숨을 건 마지막 모험을 감행합니다. 율법을 어기고 인간 세상 안으로 달려 들어옵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까지 꿇으며 간절히 청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의 그 가련함, 그 비참함, 그 절박함, 그 간절함에 예수님 마음을 움직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손을 내밀어 그 나병환자의 몸에 대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느님 뜨거운 사랑의 손길이 썩어가는 나병환자의 육신에 닿는 너무나 특별한 순간입니다. 어찌 보면 이 순간은 무죄한 예수님의 신성과 죄 투성이인 우리 인간의 인성이 합일하는 축복의 순간입니다.
하느님 손길이 인간에게 직접 닿는 그 강렬한 은총의 순간, 나병환자가 지니고 있었던 그 끔찍했던 나병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한 가지 노력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터치(touch)를 가져오는 간절함이요 절박함입니다. 겸손함과 강렬함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철저하게도 희망의 종교입니다. 아무리 오늘 하루 우리의 삶이 혹독하고 비참하다 할지라도, 때로 더 이상 나아갈 의미를 못 찾는다 할지라도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합니다. 단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현존과 자비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비참하고 절박한 처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비록 조금 늦을 뿐이지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오십니다.
회는 싱싱한 무채와 함께
-전삼용신부-
오늘 성당 한 봉사자 단체와 옻 오리 요리를 먹으러 갔었습니다. 벽에는 옻 오리의 효능에 대한 설명이 커다랗게 붙어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대충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끝까지 다 안 읽으셔도 될 듯합니다.
[여성들의 생리불순 및 생리통에 탁월한 효과, 허리 통증, 근육통, 어깨 결림, 멍들었을 때 어혈(나쁜 피)제거, 항암 효과에 뛰어난 우루시올 50% 함유, 숙취해소, 위장보호 효과, 원기 회복과 정력 증진의 효과, 속이 냉하거나 손발이 찬데 효과, 장이 부실하여 설사가 잦은데 효과, 위장에는 소화제가 되고, 간에서는 어혈약이 되어 염증을 다스림, 어혈과 적취를 풀고 혈액과 체액의 순환을 돕는 효과, 만성질환의 치료와 기력을 활성화하는 효과, 폐암, 위암세포, 생장억제기능 항암제보다 더 뛰어나 면역력이 강해져 탈모, 구토 같은 부작용을 적게 하는 효과, 뼈의 부러짐, 소화기관과 만성위장병(위염, 위궤양, 위무력증, 위하수증), 골수염 및 골수암 오장의 안정, 가래 및 기침 , 월경불순과 여성 냉대하, 묵은 응혈과 적체의 해소, 자궁암 및 부인병, 만성류마치스, 중풍 , 구충제 , 당뇨병 , 신장병 , 발기부전, 피로회복 주독(술독) 관절염, 신경통 피부병, 암의 예방 및 수술 후 전이방지, 당뇨병 지방간에 효과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만병통치약입니다. 그런데 옻에는 독성이 있어 체질에 따라 많은 차이로 반응을 하는데 심장이 약하면 그 발열 때문에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선 겁을 집어먹고 식당에서 주는 약을 미리 받아먹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옻나무에 스치기만 해도 반응을 하시는데, 저도 그 피부를 물려받았기에 살짝 겁이 났던 것입니다. 물론 그리고는 옻 오리요리를 맛나게 먹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하느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들도 이와 같지 않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병 환자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치유해 주십니다. 그리고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사제에게만 보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불순종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이후로 드러내놓고 다니실 수가 없으셨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이 문제라기보다는, 당신의 적들이고 방해꾼들인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까지도 불러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방해하던 사람들입니다.
나병까지도 치유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지녔었지만, 그 치유의 은혜와 함께 교만까지 들어왔던 것입니다. 사람이 칭찬을 받거나, 높아지거나, 성공하거나, 은혜를 입으면 그것과 함께 들어오는 것이 ‘교만’입니다.
치유된 나병환자는 예수님께서 그 이야기를 퍼뜨리지 말라고 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자신의 생각으로는 많은 사람에게 퍼뜨리는 것이 예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생각이 더 커져서 불순종하게 만드는 것이 교만입니다.
어떤 대령으로 진급한 사람이 새로운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와 거울에 계급장을 비춰보다가, 한 사병이 들어오자 잘난 척 하느라고 장성들과 전화 통화를 하는 흉내를 냈습니다. 그리고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잘난 체하는 표정으로 사병에게 근엄하게 말했습니다.
“무슨 일로 왔는가?”
“대령님 사무실에 전화선을 연결해드리라고 해서 왔습니다!”
계급장을 달았으면 그것과 함께 들어오는 교만을 해결해야 이런 창피를 당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을 치유하거나 기적을 일으키던 사람이 나중에는 사탄에게까지 그 신비한 힘을 청한다고 하는데,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그 교만 때문에 하느님께서 더 이상 도움을 주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그 교만의 독을 그때그때 없애지 않으면 쌓이고 쌓여서 자신을 죽이게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생선회는 성인병을 예방하는 불포화지방산인 EPA와 뇌세포를 활성화시키는 DHA 등이 함유돼 있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산소와 궁합이 잘 맞아 육류지방에 비해 산화가 무척 빠르고, 일단 산화하면 불포화지방산인 EPA와 DHA의 기능이 상실되면서 오히려 몸에 해로울 수 있고 합니다. 사람이 산화된 음식을 섭취하면 몸도 역시 산화가 됩니다. 산화는 곧 노화로 연결되기 때문에 우리 몸에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를 쓸어 ‘싱싱한 무채’ 위에 놓고 또 무채와 함께 먹으면 그 무채에 듬뿍 함유된 비타민 C가 이들의 영양소의 산화를 막는 항산화제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많은 경우 약을 복용할 때 식후에 소화제와 함께 먹는 것처럼, 그 뒤처리도 확실히 해 주어야 위를 보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느님께로부터 받는 모든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새로 배우던, 기도한 것이 이루어졌던, 무엇에 성공을 했던, 오로지 그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고 더 겸손해지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어떤 은혜건 오히려 독이 되는 것입니다.
치유받기 위한 용기
-김수환 신부-
어느 숲에 어미 곰이 겨우내 새끼를 한 마리 낳아 봄이 되어 굴에서 새끼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새로 만나는 동물들과 꽃, 나무들과 하루 종일 놀다 보면 아기 곰의 얼굴은 흙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미 곰은 아기 곰에게 숲 가운데 맑은 물이 흘러드는 연못을 알려주며 가서 씻고 오라고 말했습니다. 얼굴을 씻으려고 연못을 들여다본 아기 곰은 놀라 도망쳤습니다. 맑은 연못에 비친 얼굴이 너무나 더러워 다른 무언가를 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연못에 갈 때마다 아기 곰은 또 놀라 달아났습니다. 이러기를 며칠, 엄마 곰은 직접 아기 곰을 데리고 연못에 갔습니다. 엄마는 아기 곰을 연못에 밀어넣었습니다. 아기 곰의 얼굴과 몸에 묻었던 오래된 때가 씻겨 내려갔습니다. 아기 곰은 연못가에서 자기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았습니다. 거기엔 뽀얀 아기 곰 얼굴이 있었습니다. 엄마 곰이 일러 주었습니다. “더러워진 얼굴에 무서워 말고 물에 풍덩 뛰어드는 거야, 알았지?” 예수님 시대 당시, 나병 환자가 길에 나와 보통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그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나올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나병 환자는 대담하게 예수님께 다가섭니다. 용기를 내었던 것입니다. 때로 우리 죄의 추악함 때문에 우리는 용서를 청하기보다는 숨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죄를 숨김없이 예수님께 드러내 보일 때 그분의 치유와 용서를 만나게 됩니다.
나한테 무슨 냄새가 날까?
-한상갑-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본 한 나병 환자는 ‘스승님께서는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라며 무릎을 꿇습니다. 이를 본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라는 한 말씀으로 그를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이 함구령을 내리셨음에도 이 행적은 널리 알려지고 퍼져서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분께 모여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매달리는 이 나병 환자한테서 신앙인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예수님한테서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알게 됩니다. 제 작은아버지께 신앙을 갖도록 말씀드릴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아무개가 네가 다니는 성당 회장이라며? 그런 사람이 회장이라면, 나는 신자 안 되어도 천당에 갈 수 있으니 걱정 말거라.” 아마 그 아무개 회장한테서는 예수님 냄새가 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첫 신자 공동체’는 날마다 함께 지내고 가진 것을 나누며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갖게 하여,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니 ‘생명의 향내’를 피우라고 이르십니다. 그래서 문득 저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나한테서는 무슨 냄새가 날까?’
악에 담겨 있는 사랑의 신비
-김찬선신부-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실 수 있는 하느님과 하고자 하시는 하느님 중에서 어떤 하느님이 더 하느님답고, 우리는 어떤 하느님을 그래서 더 사랑하게 될까?
지혜서 11장은 이렇게 얘기하지요.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그들의 죄를 보아 넘겨주십니다.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 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원하지 않으셨다면 무엇이 존속할 수 있었으며 당신께서 부르지 않으셨다면 무엇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겠습니까?”
제가 사랑하는 성경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하느님은 자비롭다고 합니다.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전능하심, Omnipotence가 하느님 자비하심의 힘입니다.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면 괴악하고 패악스러울 이유가 없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말로 안 될 때 주먹이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든지 사랑으로 할 수 있으면 다 좋게 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악이란 자기 좋을 대로 할 수 없음에서 나오는 겁니다.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아이가 짜증을 부리고 투정을 하는 것과 같지요.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악령은 있어도 악신은 없으며 우리가 경험하는 악들은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우리에게서 나오고 하느님께서는 다만 그 악들을 허락하신 것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악령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합니다. 악령도 우리에게는 능력의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보다 훨씬 큰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힘을 좋게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럴 때 그 큰 힘은 폭력에 불과하기에 그 힘이 클수록 오히려 사랑과 거리가 멀어지고, 마치 조직폭력배가 그 힘을 가지고 사람들을 못살게 하듯 악령도 그 힘으로 인간을 못살게 하고 자기 하수인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너무나 고맙고도 다행스럽게도 이런 악령에 비해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심이 곧 사랑입니다. 한 번도 그 힘을 나쁘게 쓰시지 않습니다. 우리 눈에 나쁘게 보이는 것도 사랑으로 그렇게 하시는 것이고, 심지어 악령조차도 하느님께서는 어떤 때 사랑으로 활용하십니다.
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능력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랑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능력에 대해서만 믿고 사랑에 대해서 믿지 못하면 그것이 사실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악신을 믿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능력의 주님께 대한 믿음만 있고 사랑의 주님께 대한 믿음은 없는 것 같이 보입니다. 고쳐주고픈 마음이 없으실 수 있다는 듯이 말하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고쳐주고픈 마음이 없으실 수 있습니다. 오늘 사무엘서의 하느님도 이스라엘이 필리스티아인에게 대패하도록, 그리고 당신의 궤도 빼앗기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그러나 이 경우, 안 고쳐주시는 것, 그리고 패배하게 내버려두시는 것,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 악에 담겨 있는 사랑의 신비를 깨닫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주님의 따스함으로
- 황지원 신부-
떼제 기도 모임에 참석하면 참으로 단순한 기도와 선율이 주는 편안함과 진솔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하며 그 안에서 예수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끼게 되는데, 그 가운데서도 커다란 십자가에 손과 머리를 대고 그분을 만나는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행위에 자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십자가를 만지고 거기에 자신을 의지할 때, 단순한 나무가 아닌 그분의 체온을 느끼고 그분의 손길을 체험하게 해주십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것에만 머물렀던 저에게 그분을 만지고 함께하는 체험은 그분께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소중한 순간이었습니다.
나병 환자는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으로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사람들과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환자이면서 또한 부정한 죄인이었습니다. 그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가서 병을 고쳐주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부정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께 다가가서 깨끗하게 해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러한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얹어주십니다. 누구도 가까이 하길 원치 않던 그에게 다가가시며, 그에게 손을 얹어주신 것입니다. 그의 병은 깨끗해지고, 그의 마음 또한 예수님의 손길에 의해 따스해짐을 느낍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 누구도 위로해 주지 못할 때, 누군가를 용서하기 힘들어 마음이 어두워질 때, 그 순간 우리도 그분께 다가가 깨끗하게 되기를 간절히 청해 봅시다. 나병 환자처럼 우리의 상처가 다른 사람들과 멀어지게 하는 순간 그분께 다가가 간절히 청하고 그분의 십자가에 우리의 머리를 조아리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따스함을 만나봅시다. 분명 그분께서 손을 얹어주시고 우리의 아픔과 어둠을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독수리의 서식지로 매우 유명한 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의 독수리들은 산을 넘어가는 두루미들을 공격해서 배를 채웠습니다. 그런데 항상 독수리의 먹이가 되는 것은 소음을 내는 두루미라고 하네요. 원래 두루미는 요란스럽게 떠들기를 좋아합니다. 하늘을 날 때도 계속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요. 그러나 이 소리는 독수리들에게 먹잇감을 알려주는 좋은 신호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독수리들은 이렇게 요란스런 두루미를 공격해 어김없이 먹잇감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많은 노련한 두루미들은 거의 희생을 당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왜냐하면 노련한 두루미들은 여행을 떠나기 전, 입에 가득 돌을 물고 하늘을 날기 때문입니다. 이 두루미들은 입에 문 돌 때문에 침묵을 지키며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귀는 항상 열려 있어야 하지만 입이 너무 오래 열려 있으면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그 어려움의 대부분은 주로 입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조금만 돌이켜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말의 위력을 잘 아셨을까요? 말이 많았던 곳은 피하셨음을 복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나병환자 한 명을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단단히 이르셨지요.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필요한 말과 행동만을 할 것을 이야기하셨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는 이 일을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하긴 저 같아도 그럴 것 같기도 합니다. 누구도 고칠 수 없었던 병을 어떤 분을 통해서 치유를 받았다면 그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고, 자신의 깨끗함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그 결과는 다른 사람들의 측면에서는 별로 좋지 않게 되었음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나병환자는 치유의 은총을 얻을 수 있었지만, 자신의 말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편하게 만날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즉, 자신의 말로 인해 사람들이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한 것입니다.
나의 부족한 말로 인해 예수님을 쫓아낼 수도 있습니다. 즉, 나의 부족한 말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는데 방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귀는 항상 열려 있어야 하지만 입은 너무 오래 열려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숨을 쉬고 있다고 해서 다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 숨을 쉰다는 것은 아직 땅에 묻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일 뿐이다(무탄트).
전하지 않을 수 없다
- 김광태-
수십 년 동안 죽음의 질곡에 묶어 두었던 나병에서 치유되었는데, 어찌 침묵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지킬 수 없는 너무 무리한 요구였습니다. 어차피 말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모르겠습니까? 깨끗해진 몸 자체가 이미 외치고 있는 걸요. 우리가 왜 신앙을 전하는 일에 소극적일까요? 자신감도 부족하고 부끄러움을 타는 것도 문제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오늘 복음의 나환자처럼 죽었다 살아난 것 같은 강한 치유의 체험이 없다는 것 아닐까요?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만 신경쓰며 살다 보니, 자기 영혼이 나병에 걸린 것처럼 썩어 문드러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도 문제고, 그것을 치유해주실 예수님께 간절하게 매달리지 않는 것도 문제고, 예수님께 다가가긴 해도 그분이 하시는 신기한 일과 말씀에 놀라워하면서도 여전히 구경꾼으로만 머물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오직 나 하나만을 찾아오신 분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구원을 받고, 그 소식을 전하면서 다른 사람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선하심을 노래하리라!
-김찬선신부-
인간의 안타까운 한계를 잘 나타내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한데 오늘 나병환자의 말은 이런 우리 인간과는 다른 주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능력의 주님은 믿지만 듣기에 따라 善의 주님은 믿지 못하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왜냐 하면 ‘하실 수 있는데 과연 하시겠습니까?’, ‘당신은 善意가 있으십니까?’하고 묻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께 대한 믿음 중에서 능력의 주님께 대한 믿음보다 선의의 주님께 대한 믿음이 더 갖기 힘든 것 같습니다.
능력에 한계가 있다면 그것이 무슨 하느님이겠습니까? 全能, Omnipotence는 하느님의 본질이요 속성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살아가다 보면 악을 수없이 경험하게 되는데 이렇게 나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이 과연 선하신 분이신지, 설사 선하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과연 나에게 선한 분이신지 의심이 갑니다.
사실 우리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할 때는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하듯 하느님 선하심을 믿으라고, 지금은 고통을 주시지만 더 좋은 선을 주시기 위한 것임을 믿으라고 말하지만 막상 내가 고통을 당하면 믿음이 한 없이 흔들립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가 믿음이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이보다 더 큰 고통이 닥쳐도 선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흔드시는 것일 수 있습니다. 편안할 때 하느님의 선하심을 찬미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고 큰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빼앗아 가실 때,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하느님께서 앗아 가실 때, 그때도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우리는 진정 선하신 하느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욥을 생각해봅시다. 하느님께서 사탄을 통하여 차례로 소중한 것들을 빼앗으십니다. 처음에는 소유물들, 일꾼들과 소와 나귀를 앗아가시고, 이어서 양떼와 일꾼을 앗아가시고, 다음으로 낙타 떼와 일꾼을 앗아가시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유물이 아니라 자녀들을 앗아가십니다. 이때도 욥은 하느님을 다음과 같이 찬양합니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거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 이런 욥도 자신의 몸에 종기가 생겨 너무도 고통스럽자 하느님께 대한 찬미가 원망으로 바뀝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바로 이런 욥이었었습니다. 한 때 주님을 원망하던 사람이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 나아옵니다. 주님의 선하심을 믿지 않았으면, 아니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의심했으면 나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극심한 고통을 통과한 지금 주님의 선하심을 믿기에 나온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하느님 찬미를 다시 깊이 묵상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온갖 영적, 육적 고통을 다 겪고 난 뒤에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지어 레오 형제에게 줍니다. “당신은 선 자체이시며 모든 선이시며 至上善이시나이다.” 찬미는 믿음의 꽃이 아니던가요?
사랑은 비밀스러운 것
-전삼용신부-
요 며칠 연예인 김혜수와 유해진의 열애 소식이 밝혀지자 많은 사람들의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이 3년 동안이나 몰래 사귀어 왔던 것입니다. 그 얼마 전에는 장동건과 고소영이 또한 몇 년 동안 사귀어 왔다는 것이 이야깃거리가 되었었습니다.
사실 이들이 몰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공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친구에게든 누구에게든 살짝 자랑을 하고 싶은 것이 보통 사람들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어떤 분이 저만 알고 있으라고 한 이야기를 가장 친한 친구에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주책없게 그 이야기를 해 준 분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해 버린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해 주신 분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야만 했지만 사실 그런 비난을 받아야 했던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관계란 것이 깊어질수록 서로간의 비밀도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많을수록 둘은 남이 모르는 비밀의 방을 만들어 단 둘만이 머무르게 됩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어렸을 때에야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은근슬쩍 드러내고 싶지 사랑을 조금씩 알아갈수록 둘의 관계는 점점 비밀의 베일로 감싸이게 됩니다.
이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벌어집니다. 성당에서도 예수님을 만났다, 성모님을 만났다고 이야기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믿지 않습니다. 그렇게 쉽게 드러낸다면 100% 하느님과의 참 사랑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의 사랑도 둘만의 장소에 숨어서 하고 싶다면 하느님과의 사랑은 더욱 비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어떤 것들은 세상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밝혀야 하는 것들이 있지만 그 사람을 위해서 비밀로 남겨두는 것들도 있습니다. 파티마의 세 가지 비밀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말해도 되지만 이 세 가지 비밀만은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절대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비밀을 왜 알려주셨을까요? 바로 비밀을 지키는 그 사람들의 성모님과의 더 비밀스런 관계를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성모님의 교리들은 매우 늦게 정립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모님께서 당신의 비밀들을 드러내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이들의 믿음을 위해서 꼭 필요한 비밀들은 드러내셨습니다.
예를 들면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한 것이나 엘리사벳을 방문하셨던 일,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실 때 벌어졌던 일들, 또 이집트로 피난 가셨던 일, 혹은 성전에서 예수님을 잃고 찾아 해맨 사건들은 성모님께서 설명해주시지 않았다면 알기 어려운 사건들입니다. 이 사건들은 후대의 그리스도를 이해하게 되는데 중요한 것들이기 때문에 성모님은 잘 기억하셨다가 후대의 복음사가들이나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이 우리에게 이야기 해 주시지 않은 것들이 사실은 더 많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성모님께 발현하셨다는 이야기는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께 먼저 발현하시지 않으셨을 리가 만무합니다.
또 당신과 하느님만이 가질 수 있었던 수많은 비밀들을 간직하고 계셨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심이라든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신비라든지, 평생 동정으로 사셨다든지, 승천하실 몸을 지니고 계셨던 것 등은 전혀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이런 교리들을 정하는데 거의 이천 년이란 세월을 숙고해야 했고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비밀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정배로서 하느님과의 사이에서만 숨겨져 있는 수많은 비밀들을 지니고 계십니다. 물론 그것들을 밝히셨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겠지만, 첫 번째는 그것을 이야기하면서 교만해질 것과 두 번째는 사랑의 비밀이 세상에 들추어지는 것이 죽기보다 싫으셨을 것입니다. 사랑은 비밀스럽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나병을 고쳐주신 사람에게 사제를 제외한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교만해 질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느님과의 귀중한 비밀을 잃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널리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닙니다. 그럼으로써 육체적 병은 고쳐졌지만 정신적으로는 더 교만해지고 하느님과는 더 멀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더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시키면 다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커다란 집의 침실은 가장 깊숙한 곳에 있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이루어지는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은 어떤 비밀들을 지니고 있는지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예수님께... 그대에게...
-상지종신부-
선생님께
선생님을 귀찮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제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온통 당신에 대한 것 뿐이었습니다.
당신은 제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만나기 전에 저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어느 누구 하나 말상대가 되기는커녕 시선조차 주는 이 없었습니다.
그들을 결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제 팔자려니 생각했을 따름입니다.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 저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다가 그날 당신을 만났습니다.
낫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선생님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기특한 청원이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저를 낫게 해주십시오’라고 떼를 쓰고 싶었을텐데.
어쩌면 그것이 당신을 향한 소박한 믿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항상 외톨이로 당하면서 살아온 제가,
당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제가,
낯선 당신을 만나 드릴 수 있었던 말씀의 전부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은 달랐습니다.
썪어 문드러진 제 몸을 만져주셨지요.
저는 이미 그것으로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굳이 제 몸이 다시 깨끗해지지 않았더라도,
당신은 제가 분명 살아있는 한 사람이라는 잊혀졌던 사실을 일깨워주셨기에
저는 새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학대하며 살아온 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저를 향한 쌀쌀맞은 시선과 공동체의 냉대가 얼마나 정의롭지 못한 것이었는지,
당신은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당신을 만난 이후,
제가 새롭게 태어난 이후,
저는 사람들을 떠올렸습니다.
저의 깨끗해진 몸을 보아야 할 제관이 아니라,
저처럼 자신을 학대하며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죽을 날만을 기다리던 벗들이,
공동체의 이름으로, 보잘것없는 이를 철저히 소외시키는 이들이 떠올랐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던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정말로 죄송합니다.
제 이야기 때문에 선생님께서 더욱 힘들어지셨다면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제가 원했던 것 단 하나는 제가 받은 새 삶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는 것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은 믿어주십시오.
어쩌면 제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선생님 이야기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아직까지도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이름없이 죽어가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참된 삶인지,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인지 모르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이름으로 가난한 이들, 못난 이들, 부족한 이들을 철저히 내리누르는 현실이
버젓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당신을 귀찮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당신의 엄하신 말씀을 어기려는 생각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구요.
더이상 무슨 말씀을 필요 하겠습니까.
언제 다시 선생님을 뵈올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저와 함께 계심을 믿기에,
오늘도 당신께서 주신 새 생명으로 기쁘게 나아갈 것입니다.
그럼 다시 뵈올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사랑하는 그대에게
그대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대를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용히 외딴 곳에 머물면서 이제까지 만난 이들을 떠올립니다.
물론 당신도 그 중에 하나이구요.
나는 그대들에게서 아름다운 생명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께서 곱게 곱게 넣어주신 그 생명을 말이지요.
그러나 너무나 안타깝게도 그 생명을 철저히 찢겨져 있었답니다.
찢는 이들, 찢기는 이들 모두가 고통스러운 현실이지요.
찢는 이들은 고통을 못 느끼고,
찢기는 이들은 자신의 고통을 당연하게 여기기에
나의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대가 자신의 고귀함을 되찾기를 바랬습니다.
그대는 나에게 너무나도 절절하게 말을 건넸습니다.
"선생님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대는 어느 누구보다도 내 뜻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대의 말을 들으면서 세상 어느 무엇도 갈라놓을 수 없는 완전한 일치를 느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는지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시오."
나와 그대는 분명 그 순간 하나였습니다.
그대는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온 세상이 새롭게 태어날 그 날을 향한 소중한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새롭게 태어난 그대는 기쁨은 곧 나의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날의 기쁨이 퍼지고 퍼져 온 세상을 가득 메울 날을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내가 그대에게
왜 그날의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는지 알겠습니까.
행여 그대의 이야기를 듣고,
그날 그대와 내가 함께 나누었던 기쁨의 의미를
잘못 받아들이는 이들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거듭남이 지닌 깊은 뜻을 모르는 이들이
단지 겉으로만 변하려 할 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행여 나에 대한 그릇된 선입관이 생겨 나를 마치 현실적인 이익을 챙겨주는 이 정도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지금 이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다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이 조금은 아쉽습니다.
나는 삶을 통해 내 자신을 서서히 드러낼 것이고,
시간이 흐른 후에 나에 대한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내가 나의 편안함을 때문에 나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피하기 위해서,
그날 일이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언제 어디서나 그대가 함께 해주기를 바라는 그들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만나면서 나는 그대를 떠올릴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대가 지닌 그 아름다운 믿음과 희망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우리들만의 비밀 제스처>
-양승국신부-
식당이나 운동장에서 마주치는 몇몇 아이들과 제가 만날 때마다 주고받는 우리들만의 비밀 제스처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동작이지만 아주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멀리서부터 얼굴을 확인한 우리는 손가락을 V자 모양으로, 또는 셋을 펴서 흔드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합니다. 손가락을 두 개를 편 V자 모양은 2년을 의미하고, 3개는 3년을 의미합니다.
2년은 어떤 의미에서 2년인가 하면 곧 다가올 6개월 만기기간을 끝내고도 2년간 더 살겠다고 다짐하는 의미에서의 2년입니다.
이곳 살레시오 근로청소년회관은 약간의 실수로, 또는 어쩔 수 없는 환경 때문에 한 때 방황을 했던 아이들이 6개월간 신부님 수사님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청소년시설입니다.
저를 가장 안타깝게 만드는 일이 가끔 생깁니다. 이곳에서 6개월을 무사히 채워 저희와 기쁜 얼굴로 작별인사를 나누고 떠나간 아이들이 몇 일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연락이 올 때입니다. 집에서가 아니라 경찰서나 법원에서 말입니다. 그 때 마다 "아! 그 녀석, 그때 나간다고 했을 때, 억지로라도 잡아둘 것인데..."하는 아쉬움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만기가 다 되어 가는 저희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재계약을 체결하자"고 협박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조건을 내거는 아이들의 소원은 너무도 소박합니다. "그럼 연장하는 보너스로 뭘 해주실래요? PC방 10시간 알았죠?" 그게 아니면 "그럼 좋아요. 같이 멀리 낚시 한번 갔다와요" 등등의 조건을 내거는 아이들의 모습은 너무도 사랑스럽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저는 아이들이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하느님 자비의 손길을 정말 진하게 체험합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묻는 말에 전혀 대꾸도 안던 아이, 어떻게 하면 이곳을 뛰쳐나갈 수 있을까 눈이 반짝반짝하던 아이, 불안한 표정으로 힘겨워하던 아이들이 이곳 신부님들과 수사님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천천히 본래의 예쁜 모습들을 되찾아 가는 모습을 옆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 한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예수님의 손길은 생각할수록 놀라운 손길입니다. 그분의 손길이 닿는 곳은 그 누구든, 그 어디든 다시금 생명력을 회복합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슬픔과 통곡의 장소는 기쁨과 환희의 장소로 변화됩니다. 그분의 손길이 닿는 부위마다 그분 자비와 사랑에 힘입어 다시금 원래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게 됩니다.
"아이들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무엇일까?" 생각해봤을 때, 인간적인 노력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그 가장 밑바탕에는 하느님 자비, 하느님의 손길이 있었음을 오늘 다시금 확인합니다.
불치병에 걸린 부자가 있었습니다. 불치의 병으로 죽는다면 돈이 아무리 많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이 부자는 매일 절망 속에 빠져서 힘들게 살고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이 부자의 집에 도둑이 들은 것입니다. 침입한 도둑은 주인을 협박합니다.
“조용해! 갖고 있는 현금 다 주면 목숨만은 살려준다.”
이 말에 부자가 어떻게 말했을까요? 그 부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야 이놈아, 의사도 살릴 수 없다는데 네가 어떻게 살린다는 거야? 살릴 수만 있다면 내 전 재산을 네게 주마.”
사람이 사람을 살릴 수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살릴 수도 또한 죽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생명에 관한 부분은 하느님의 영역에만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우리들은 이 생명에 관한 부분을 인간의 영역에 들어있는 듯 한 착각 속에 있습니다.
전쟁을 통해 무고한 생명이 죽어가고 있지요. 또한 많은 생명이 이 세상에서 빛을 보지도 못하고 낙태되어 버려집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생명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습니까? 이 모든 것이 생명을 인간 스스로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착각과 오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앞선 이야기에서 도둑이 주인을 진정으로 살려줄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생명에 대해서 어떻게 할 수 없고 단지 주님만이 관장하는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나병환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면서 도움을 청하지요.
이 나병환자의 아픔을 생각해봅니다.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나병이 걸리는 순간, 모든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하게 되지요. 심지어 고향과 가족에게서 쫓겨나게 됩니다. 지금도 혼자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데, 모든 사람들로부터 내쳐졌을 때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나병환자를 쫓아냈던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러한 흉측한 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이렇게 해도 된다면서 돌을 집어 던지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생명을 간단하게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마음으로 다가오십니다. 이 장면을 복음은 이렇게 표현하지요.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더럽다고 흉측하다고 만지지 않던 사람들, 나병환자를 향해서 돌을 던져 생명을 파괴하려는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가엾이 여기는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손을 직접 내밀어 만져 주십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을 보고서 사랑을 접는 것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것이 사람의 생명이기에 사랑의 마음으로 손을 직접 대신다는 것이지요.
감히 하느님의 영역인 생명을 침범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도 이 사랑을 간직해서 적극적으로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때 모든 이가 주님 안에서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탓하고 원망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법이다.(앤드류 매튜스)
가까이 하기 쉬운 사람 -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람
-오기백 신부-
오늘 복음에서 드러난 사건은 당시로써는 놀랄 만한 일이었습니다. 유다법에 의하면 나병 환자들은 일반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복음에서 이 나병 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가까이 하기 쉬운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특별히 어려운 사람들에게 편한 느낌을 주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리감 없이 그분께 다가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가까이 하기 쉬운 사람일까요? 아니면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람일까요? 이를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나를 찾아와 자신의 삶에 대한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나는 가까이 하기 쉬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남들이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람일 테지요. 그런 경우에는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믿고 있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가?’라고 자문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하느님을 어떻게 선포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할 일입니다.
서로를 가슴에 품고
- 조정희 수녀-
부산에서 만난 백 루미네 수녀님이 생각난다. 6·25전쟁 후 우리나라에 와서 농사도 짓고 땀 흘려 일하시느라 거칠어진 손이 말씀보다 더 많은 말을 했던 수녀님, 가난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살며 엄마 노릇을 하던 푸른 눈의 수녀님을 만날 때면 ‘무엇이 이분으로 하여금 익숙한 땅을 떠나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이며 가난한 우리의 이웃으로 살아가게 했을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하느님의 존재를 가슴으로 느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올해 네 분의 수녀님이 에콰도르로 파견받아 떠났다. 적도의 나라, 우리나라의 중복과 비슷한 날씨에 먹는 물, 씻는 물 한 방울이 귀하고 수술 중에도 정전이 되는 나라, 미사 시간에 성당 중앙에 개가 돌아다니고 새들이 유유히 날아다니는 가운데 신자들이 뜨겁게 박수치며 축제처럼 즐기는 나라. 가난하지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며 에콰도르 사람으로 강생하길 바라는 수녀님들이 스페인어 단어 하나하나를 배우며 어린 아기가 된 느낌이라는 소식을 전해 왔다. 수녀님들이 파견될 때 어떤 수녀님이 “우리 모두 함께 가는 것”이라고 했다. 수녀님들이 떠나면서 남은 분들이 일을 더 나누어 맡고,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으로 수도회가 다 함께 가는 거라고…. 수녀님들이 우리를 가슴에 품고 에콰도르로 가시듯 우리도 수녀님들을 가슴에 품고 각자의 사도직을 열심히 하는 것이란 마음이 들었다. 주님의 손길이 닿아 구원되고 자유로워지는 기쁨을 누린 나병환자가 공동체에 통합되어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시는 님의 마음과, 당신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부르시는 사랑이 오늘 새롭게 다가온다.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명 강의로 유명한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이 신부님의 강의가 워낙 훌륭해서 항상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지요. 어느 주일 날, 이 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신부님의 명 강의를 듣기 위해서 성당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강의는 아침부터 시작해서 저녁 늦게야 끝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부님의 강의에 큰 힘을 얻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매님께서 강의를 듣고 집에 갔으나, 남편이 화가 나서 문도 열어주지 않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쉬는 날이라 집에 있는데, 하루 종일 어디를 갔다 온 거야?”
“오늘 성당에서 신부님의 강의를 듣고 오느라 늦었어요. 용서해주세요.”
그러자 남편은 여전히 문을 꽉 닫아걸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신부 얼굴에 침을 뱉고 오기 전까지 이 집에 얼씬도 하지 마!”
결국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친구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이 사실을 강의를 했던 신부님께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미사 때, 신부님께서는 강론 시간에 이러한 말씀을 하십니다.
“제가 지금 눈이 몹시 아픕니다. 그런데 이렇게 눈이 아플 때에는 침이 효과가 크다고 하네요. 앞에 계신 자매님, 괜찮으시다면 제 눈에 침을 좀 뱉어주시겠습니까?”
신부님께서 지목하신 자매님은 바로 신부님의 강의로 인해서 집에서 쫓겨난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매님께서는 신부님의 말씀을 따라서 얼굴에 침을 뱉었지요. 그런데 이제 이 자매님은 집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신부님 얼굴에 침을 뱉었으니까요. 신부님의 이런 사랑 깊은 배려를 알게 된 남편도 이제는 성당에 열심히 나가게 되었다고 하네요.
말만 잘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진정한 평화와 사랑을 위한 실천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말만으로 끝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예수님께서도 훌륭한 말씀,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말씀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힘이 있는 이유는 말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직접 실천을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를 위한 말만 하기에 급급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치유된 나병 환자를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라는 말씀을 들었지요. 하지만 그는 이 이야기를 널리 알라고 퍼뜨리기 시작합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이 이제 깨끗하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은 깨끗하다고 평가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결과 예수님을 그 고장에 들어가지 못하게 해서 치유되어야 할 다른 사람들의 혜택을 막고 말지요.
자기를 들어내는 말은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격언이 생각납니다.
“비난 받기를 원하면 스스로 높이고, 존경 받기를 원하면 스스로 낮춰라.”
여러분은 비난 받기를 원하십니까? 존경 받기를 원하십니까?
스스로 낮추는 존경받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측은지심(惻隱之心)
-박기호 신부-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셨습니다. 제아무리 영성의 대가요 말씀의 탈렌트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의 사람됨이 부족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강론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데 그와 함께 생활하거나 일하는 사람들은 고개를 흔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독선적이고 괴팍하고 손님에겐 친절하지만 가족에겐 짜증내고…. 그런 류의 사람은 참 힘듭니다. 인격이 ‘덜된 사람’입니다. 머리가 좋아서 ‘난 사람’은 되었지만 ‘인간됨’은 멀었다는 뜻입니다. 예수살이가 ‘예수의 인간성 닮기’를 수덕생활의 방법론으로 삼는 것은 ‘좋은 품성을 가진 사람이 되자’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됨에 완전한 분이십니다. 더 이상 좋은 품성을 찾을 수 없기에 하느님이 아니고선 그런 인간성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인간이면서 하느님’이십니다. 유학 사상에서는 ‘사람 됨’이 교육의 목적이었습니다. 예의염치를 아는 인의예지의 인간을 만드는 것이 교육입니다. 인의예지의 품성은 인간의 네 가지 본성, 즉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에서 나온다고 보았는데 그의 자양을 강조했습니다. 그중 품성론의 으뜸되는 것이 측은지심입니다. 타인의 불행한 처지를 자기 처지로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기적의 힘은 바로 이 측은히 여기며 손을 내미는 데서 온 것입니다. 인간의 좋은 품성은 하늘이 알아주는 덕이고, 긍휼한 마음은 기적을 이끌어내는 힘입니다.
연민을 느낄 때
-박영대-
딸들이 아프면 우리 부부는 딸 걱정도 걱정이지만 어머니 걱정을 더 한다. 손녀들을 안쓰러워하시는 어머니께서 식욕도 잃고 걱정을 태산같이 하시기 때문이다. 또 딸들의 병은 거의 틀림없이 부모님이 다투시는 이유가 된다. 안쓰러워 약을 먹여서라도 빨리 낫게 하려는 어머니, 약은 자연 치유력을 약하게 하니 약 없이 스스로 이겨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아버지. 그 다툼은 딸들이 나을 때까지 계속된다. 나도 생각이야 아버지와 같지만 결국 딸들에게 약을 먹이는 쪽을 선택한다. 어떻게든 빨리 나아야 어머니 걱정이 끝나고, 약이라도 먹여야 어머니가 마음을 놓기 때문이다. 가끔 막내딸을 데리고 어머니와 함께 병원에 가곤 한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약을 먹이는 게 안쓰러워 이것저것 의사에게 묻곤 하는데 그 대답은 대부분 퉁명스럽다. 어머니의 연민, 어린 손녀를 가엾이 여기는 그 마음에 의사는 함께해 주지 않는다. 그때마다 속상하고 화도 난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얼마 전 오래 감기로 고생한다는 후배를 다그쳐 아는 한의사 선생님께 갔다. 진료를 마친 후배 말. “처음 만났는데도 나를 정말 걱정해 주셔서 고마웠어요.” 의사는 연민의 사람이어야 한다. 의사의 연민을 느낄 때 이미 환자는 치료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어디 의사뿐인가? 사제도 수도자도 평신도도, 예수님을 따라 살겠다고 작정한 사람은 모두 연민의 사람이어야 한다. 흉하게 짓무르고 고름 흐르는 얼굴이 아니라 나병환자의 고통과 슬픔이 먼저 보여야 한다. 그런데 연민을 가진 의사를 만나기 어려운 것처럼 연민을 가득 품은 신자를 만나는 것도 어렵다. 나부터 그렇다. 난 아무래도 어머니보다 아버지 쪽을 닮은 모양이다.
그래, 그렇게 해 줄께!
-오상선신부-
내가 누구에게 무슨 부탁을 했을 때 그가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면서 <그래, 그렇게 해 주마!>해 준다면 얼마나 기쁘고 좋은가? 반대로 내가 누구에게 무슨 부탁을 했는데 그가 망설이면서 <글쎄, 한번 생각해 보지> 이렇게 말하면 좀 찜찜하겠지. 한걸음 더 나아가 내가 누구에게 무슨 부탁을 했는데 그가 일언지하에 <안돼, 딴 데 가서 알아봐!> 이렇게 말하면 욕나오겠지... 반대로 누가 나에게 부탁을 해 올 때 나는 어떻게 하고 있지??? 흔쾌히 <그래, 그렇게 해 주마!>라고 하는가? 항상... 이렇게 생각하며 돌아보니 이렇게 흔쾌히 <그래, 그렇게 해 주마!> 한 적이 많지 않은 것 같구먼... 어떤 사람이, 그것도 인간 취급도 못받던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에게와서 <저를 깨끗하게 좀 만들어 주소> 하고 청한다. 예수께서는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그래, 그렇게 해 주마!> 하신다. 예수의 이 자세를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든지 다른 이의 부탁,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든 무시하는 사람이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든 그 어떤 부탁에도 <그래, 그렇게 해 주마!>라고 답하자. 오늘 누가 나에게 부탁 좀 안 하나??? 흔쾌히 <그래> 한번 해 보게 말이다... 사실 보잘것없는 나에게 도움이 되어달라고 부탁받는 자체가 감사할 일이 아닌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나인데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거 하나만으로도 내 인생은 충분히 살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깨어진 세상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
-양승국신부-
요즘, ‘세상이 험하다’ ‘사람들이 무섭다’ 말들이 많지만, 복지시설을 운영해보면, 꼭 그렇지만 않다는 것을 즉시 깨닫게 됩니다. 남몰래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들, 소리 없이 조용히 왔다가는 사람들, 극구 손사래를 치며 황급히 돌아서서 뛰어가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가끔 봉사자들을 위한 피정이나 교육을 준비하면서 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곤 합니다.
이웃사랑의 실천, 그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봉사와 선행의 근본적인 동기가 무엇인가?
혹시라도 세상 사람들의 우러러봄을 유도하기 위함은 아닌가요? 봉사 끝에 얻게 되는 자기만족은 아닌지요? 적절한 품위 유지를 위한 하나의 몸짓인가요? 아니면 사회적 변혁을 이끌어내기 위한 바람의 표현인가요? 이런 것들이 전부라면 그런 이웃사랑의 실천은 절대로 오래 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한 개인이 하느님을 추구하는 삶의 표현입니다. 자비의 구현은 신앙인으로서 지녀야 할 자연스런 존재방식입니다. 봉사활동은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분이 보여주고 계신 사랑의 실천, 자비의 표현은 절대로 유별나지 않습니다. 요란스럽지도 않습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습니다. 그저 꼭 해야 될 일을 조용히 해내십니다.
반면 당대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을 보십시오. 환자 한 명 앞에 두고 뭔 사람들은 그리도 많이 끌어오는지? 준비물은 또 얼마나 많은지? 폼이란 폼은 있는 대로 다 잡습니다. 뭔 사설을 그리도 구구절절인지, 몇 시간이고 그렇게 푸닥거리를 해댑니다. 그 결과는? 증세가 더 악화될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행하는 이웃 사랑의 실천을 한번 곰곰이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그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웃 사랑 실천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 불치병 환자들, 이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그토록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늘 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솔직한 현실입니다. 늘 반복되는 가난과 불행, 거듭 되풀이되는 비참의 악순환 앞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들이 불행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더 나은 삶에로 나아가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꾸준히 행하는 사랑의 실천이 중요합니다. 가난하고 불행한 이웃들은 깨어진 세상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또 다른 얼굴임을 굳게 믿고, 한결 같은 마음으로 계속 사랑의 봉사를 해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자비심, 측은지심을 하느님으로부터 나누어받게 되면 새로운 삶의 방식이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내 안에 내가 줄어듭니다. 내가 줄어든 그 자리에 하느님의 영이 자리 잡습니다. 그렇게 될 때 이웃들의 시선이나 평가에 더 이상 연연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 하느님의 시선에 우선권을 둘 수 있습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 그저 예수님 때문에 이웃 봉사에 전념하는 사람들, 세상 가장 밑바닥에 현존해계시는 하느님 때문에 진흙탕 같은 세상 밑바닥으로 기꺼이 내려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토록 염원하던 하느님의 얼굴을 뵐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자신들이 행하는 사랑의 실천 그 한 가운데서.
이런 사람들에게 돌아가게 될 하느님의 선물은 마음 깊은 곳에서 샘솟는 기쁨이며 감사입니다. 진실한 사랑의 실천이 있는 곳에 참 기쁨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참 사랑의 실천, 그 한가운데 하느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차별을 없애신 예수님
-이중섭 신부-
이스라엘 백성은 나병을 천형(天刑)으로 생각했습니다. 나병환자는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따로 살았고, 성한 사람을 만나면 ‘부정한 사람이요’ 하고 소리치며 먼저 피하여 도망쳤습니다. 오늘 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그런 나병환자와 대화하고 손을 대시어 나병을 고치십니다. 이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은 상상도 못할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나병환자와 대화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에게 손을 대는 것은 더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약의 정결제도를 거부하셨습니다. 사람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제도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보셨던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예수님 앞에서 정죄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볼 때 부정한 사람은 구별하고 분리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아파해야 할 자비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속성 중에서 거룩함보다는 자비하심을 보십니다. 그래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면 어떤 사람이 의로운지 아닌지 따지며 구분 짓는 것을 그만두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먼저
-문화순 수녀-
알래스카의 여름은 천국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온통 숲은 초록으로 빛나며 불어오는 바람도 초록바람이다. 호수가 300만 개가 넘는다 하니 물 또한 싱싱하고 어느 곳에서나 물소리가 정겹다. 지난 여름, 숲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배가 등가죽에 붙은 개 두 마리를 만났다. 나를 보고 흠칫 놀라면서도 애처롭게 쳐다보며 꼬리를 감춘다. 목줄이 끊어진 것으로 보아 도망쳐 나온 것 같았다. 나는 개를 무서워한다. 하지만 애원하는 눈빛을 외면할 수 없어 멀리 있는 수녀원까지 되돌아와서 먹을 것을 챙겨주었다. 개들은 맛있게 먹고 보답이라도 하듯 한 시간 내내 뒤를 따라오며 한적한 숲길에서 나를 보호해 주었다. 외진 숲길은 무스라는 큰 짐승과 곰이 나올 수 있어 조마조마한데 녀석들 덕분에 마음놓고 걸을 수 있어 무척 행복했다. 개들과 헤어지는데 아쉬움이 남았다. ‘부디 좋은 주인 만나 행복하기를….’ 돌아오는 길에 개들의 눈빛이 지워지지 않았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자신을 비우고 겸허하게 낮출 때 구원이 온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는 떠돌이 신세로 가난한 동네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자, 병자와 죄인들 사이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붙잡혀 매질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분의 십자가는 오늘날 우리에게 구원의 상징이 되었고 내 구원이 이루어지는 곳이 되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저주했던 그 십자가가 인간을 구원하는 도구가 되었고, 매일의 삶에서 자신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자만이 구원의 길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오늘 저 나병환자처럼 겸손되이 무릎을 꿇어야 한다. 내가 먼저 고개 숙여야 하고 먼저 손을 내밀어 상대편 손을 잡아야 한다. 내가 양보하여 한걸음 물러섰을 때 그리고 내가 한 계단 내려섰을 때 화해와 용서와 사랑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모두들 위로 올라가기 바쁜 세상이다. 매일매일 바벨탑을 쌓기에 여념이 없는 이 시대에 나병환자는 자신의 구원을 진정으로 바란다면 먼저 겸손되이 무릎을 꿇는 것부터 배우라고 가르친다.
연중 제1주간 목요일
- 이차룡 신부-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나병환자를 고쳐주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나병은 흔히 ‘문둥병’이라 하여 옛날에는 한번 걸리면 그 시간부터 완전히 죽은 인생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육체적인 모습도 그러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늘로부터 천벌을 받은 중대한 죄인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들이 겪어야 했던 마음고생은 그 어떤 병자들보다도 심했습니다. 육체적인 아픔도 아픔이지만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상의 싸늘한 시선이 그들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천 년이 지난 지금의 현실도 그리 달라진 것이 없는 듯합니다.
하지만 어쩌면 진짜 나병환자는 그들이 아닙니다. 그들을 받아주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손과 발이 문드러진 것보다 마음이 문드러져 버린 모습이 더 보기 흉한 나병환자가 아닐까요? 세상의 아픔을 함께 아파해 주지 못하는 무관심으로 문드러진 마음, 남 잘 되는 꼴은 도무지 눈 뜨고 봐주지 못하는 그런 문드러진 마음, 알고도 저지르는 죄들로 문드러진 나의 마음이 문드러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왜 예수님께서는 율법에서 금지하는데도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셨을까요? 그 이유는 율법에 만져서는 안 되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심으로써 우리에게 겸손과 자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종속되시기보다는 율법이 당신 손 안에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따라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이제부터 그 어떤 것에도 불결하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병이 주님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주님의 거룩한 손이 나병이 든 몸을 치유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해준 나병환자의 치유기적은 그가 얼마나 큰 믿음이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신앙으로 산을 옮기고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확신을 지닌 사람 안에서 일어납니다. “어떤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며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사람은 주님의 권능에 복종하며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자비와 권능을 지니고 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나병환자와 같은 깊은 신앙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항상 하느님의 응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런 큰 믿음이 예수님께 동정과 자비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의 죄악으로 더렵혀진 우리들에게 다가와서는 “깨끗하게 되어라!”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축복의 말씀입니까? 그분이 아니고서는 누가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기뻐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온전히 죄사함 받아 깨끗해진 영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이제 주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간절히 애원할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언젠가 구역 소공동체 형제 모임에서 복음 묵상나누기 할 때 어느 형제님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바로 나병환자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까지 제 영혼은 더럽고 흉측하였지만 그분을 만나고서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은총의 생활을 하고 나서는 제 나병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영적인 발견입니까? 나를 죄와 죽음의 상징인 나병으로부터 치유해주시는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립시다.
나병환자는 사회생활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내몰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치유하여 공동체 안에 들어오게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정결한지 불결한지를 판정하여 선포하는데 있다면 그분은 더렵혀져 이미 얼룩진 죄 중의 인생들을 깨끗해지도록 만들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따돌린 그런 사회에 대하여 분개하십니다. 오늘 내가 소외시킨 사람은 누구입니까? 모든 사람을 예수님 대하듯이 사랑으로 품어주어야 합니다. 따돌림 받은 나병환자가 이제 예수님을 선포하는 살아있는 증인이 되고 사회를 깨끗하게 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용서와 헌신의 삶 -이기양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 한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1,41)는 예수님의 말씀에 나병 증세가 깨끗이 사라졌지요. 예수님께서는 치유된 나병환자를 보내시며 엄하게 이르셨습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르1,44)
그러나 나병환자는 이 놀라운 치유 기적을 온 동네에게 퍼뜨렸다고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오늘 복음을 대하면서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나병환자를 고쳐 주신 예수님께서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대목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엄하게 이르셨을까요? 우리는 나병환자가 한 것처럼 온 동네에 소문을 퍼뜨리는 것이 오히려 더 예수님을 잘 알리는 일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나 말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장면이 수시로 나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8,30)라고 고백했던 베드로에게도 함구령을 내리시지요. 그 이유를 알면 마르코 복음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천 년 동안 메시아를 고대하였습니다.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켰던 모세처럼 로마의 지배 하에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지요. 로마의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여 부유하고 강한 일등 국가로 만들어줄 메시아를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연약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셨고 마땅히 거처할 곳도 없이 이 세상의 삶을 마구간에서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 받은 사람들과 일생을 함께 하셨지요. 싸워서 이기기보다는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으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당신의 몸과 피를 아낌없이 내어 주시며 성체성사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한없이 낮은 이러한 모습을 당신의 삶으로 직접 보이시면서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를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10,43-45)
예수님께서는 부와 권력을 틀어쥐고 있던 권력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권력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 그리고 아낌없이 주는 삶이 세상을 구원하고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아가 권력과 부의 메시아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와 아낌없이 내어주는 메시아임을 드러내신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것임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메시아관이 전달되는 것을 막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시는 참된 메시아의 모습을 보여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마르코 복음 사가는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함구령의 이유이고 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메시아관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모시고 따르는 우리는 세상의 논리대로 힘과 권력의 삶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용서와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평화를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세상을 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마치 우리 몸의 혈액이 하는 역할과도 비슷합니다.
우리 몸의 혈액에는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 혈장이라는 성분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백혈구는 우리 몸에 어떤 이상한 침입자, 병균이 들어오면 얼른 그 침입자를 처리하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백혈구가 어떤 방법으로 침입자를 처치하는지 아십니까? 얼핏 생각하면 아주 강력한 방법을 쓸 것 같지요. 그런데 과학자들에 의하면 백혈구는 침입자를 향해 절대 무리한 힘을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백혈구는 그저 그 침입자를 품에 꼭 껴안아 버린다는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백혈구에게 안긴 그 침입자는 그냥 녹아버리고 말지요. 백혈구에는 보기 싫든 지저분하든 가리지 않고 모두 다 껴안아서 친구로 만드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골수에서 태어나 폐에 가서 산소를 받아들여 자기 몸에 지니는 적혈구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산소를 얻어야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우리 몸의 모든 기관에 있어서 산소는 생명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적혈구는 언제나 이런 생명의 산소를 풍성하게 얻어서 가지고 다니다가 혈액 속에서 산소가 필요한 곳이 있으면 아낌없이 다 전해 줍니다. 단 0%도 남기지 않고 100% 다 넘겨주지요. 그리고는 4일쯤 살아 있다가 비장에 가서 조용히 숨을 거둔다고 합니다.
우리 몸의 모든 것들은 세포 하나까지도, 자신을 위해 사는 친구가 하나도 없습니다. 백혈구는 모든 것을 감싸주는 반면, 적혈구는 모든 것을 나누어 줍니다. 그런 혈액이 바로 우리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고 있지요. 내가 남을 위해 100%로 봉사하듯이 남도 나에게 100% 봉사한다는 원리가 우리 몸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삶은 세상 사람들처럼 힘과 미움과 보복의 논리가 아니라 비록 고통이 따르더라도 그 모든 것을 포용하며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8,34)
예수님의 이 말씀이 바로 부활의 길이요 영생의 길임을 깨닫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노력
--이철구신부-
살아가면서 누구나 맑고 순수한 영혼으로 살아가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 누가 악하고 타락한 영혼으로 살아가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은 우리가 마음먹은 것처럼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맑고 깨끗한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신다 하더라도 우리의 노력이 없다면, 또 주님을 향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맑고 깨끗한 영혼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을 향한 믿음과 나의 원의는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것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주님을 향한 맑고 깨끗한 영혼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하시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으시지만 우리의 노력과 원의를 보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봉헌의 기도를 바치며 맑고 깨끗한 영혼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합시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유 루시아 수녀 -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겪으신 후에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시는 중에 일어난 일을 전해줍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래서 손을 갖다 대셨다고 하십니다. 우리보다 불행한 사람들을 볼 때 우리 마음도 측은해져서 남을 위한 사랑이 우러나옵니다. 그때 사람들은 나병환자를 만지면 감염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만사를 초월하고 이러한 위험을 넘어설 만큼 컸습니다. 우리 모두도 나병환자처럼 남들이 싫어하는 성격의 한 면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 앞에서 나 자신이 치유받아야 하고 그리스도교인으로서 더 잘 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 있는 나병을 고쳐야겠습니다. 주님, 제 마음의 나병을 고쳐주십시오. 오늘 다시 한번 노숙자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빌며 감사드립니다.
마음이 짠해서...
-이찬홍 신부-
예수님께서 지니신 마음 중에 저는 측은한 마음을 좋아합니다.
측은한 마음은 상대방이 느끼는 아픔, 고통을 똑같이 느끼게 하는 자세입니다.
그러한 자세에서 자신의 삶을 한 번 더 되돌아보게 하고, 회개로 이끄는 마음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늘 이런 측은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갔고, 우리들에게도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변에도 우리에게 측은한 마음.. 짠한 마음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측은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단순히, 지금 나보다 어렵다는 이유로... 고통과 아픔을 당한다는 그 이유만으로는 생기지 않습니다.
힘들고 아프지만.. 희망이 하나도 없어 막막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는 자세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이겨내려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측은한 마음이 생겨납니다.
측은한 마음은 단순한 동정이 아닙니다.
동정과는 분명하게 차이가 납니다.
동정은 ‘참 안 됐구나. 도와주어야겠다.’는 정도의 생각으로 그치지만, 측은한 마음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상대방은...‘저 사람도 저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데, 나는 무엇인가?’ ‘내 삶이 이래도 되는가?’ 라는 반성을 하게 합니다.
늘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여, 잃어버린 첫 마음을..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했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 바로 측은한 마음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다짐이 왜 지속되지 못하고 작심삼일 만에 그쳐버리는 것입니까?
왜, 회개가... 회개의 삶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지 못합니까?
바로, 쉽게 주어진 삶에... 환경에 안주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갖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버리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런 모습 속에서 예수님의 마음은.. 예수님께 받은 측은한 마음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측은한 마음을 간직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생활하는 것이요, 그 노력은 예수님께 함께 살아가는 노력입니다.
며칠 전에 오랜 만에 어렸을 적에 친구를 만났습니다.
자신이 아는 사람...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듯이, 저 역시 함께 들과 바다에서 뛰놀았던 친구들이 잘되기는 바랍니다.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힘들게, 어렵게 살아가는 것 보다는, 평범하고 소박하게 알콩달콩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친구를 만나 술 한 잔 기울이다보니, 참 많이 답답했고 안쓰러웠습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보증을 서준 것이 잘못되면서, 도망치듯이 모슬포를 떠나 제주시에 왔습니다.
도저히 감당이 안 되기에, 이제는 될 대로 대라는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서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다. 비록, 아버지 때문에, 집안이 이렇게 됐지만... 그 죄책감으로 술만 마시다가 쓰러져 이제는 교회에서 지내지만... 그 아버지께 따뜻한 아랫목, 밥 한 그릇 드릴 정도로 일어나리라. 부모가 된 지금에라도, 더 이상 천추의 한을 남기지 않으리라.’는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모습이 객기 일수도 있겠지만.. 월급에 50% 가까이가 빚을 갚는데 소요되어 버리지만.. 그런 모습이 참 대견스럽고 기뻤습니다.
‘이 모습이 진정, 그렇게 고삐 풀린 망나니 같던, 내 친구의 모습이란 말인가?’ 라는 생각에 측은한 마음이 들었고, 너무 미안했습니다.
‘그 친구는 내가 사제라고... 사제이기 때문에, 오랜 만에 찾아와 자신의 아픔과 허물을 꺼내놓고 있는데... 희망이 하나도 없지만,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하는데... 나는, 나의 삶은 왜 이런가?’ 라는 반성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삶은 치열하고, 간절해야 한다고 말을 잘 하면서도.. 실제 내 모습에는 간절함과 애절함이 없었습니다.
진정 주님의 사제로 살아가려는 노력이... 악습과 허물을 이겨내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친구에게 부끄러웠고, 하느님께 죄송스러웠습니다.
복음에 나병환자의 간절함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치유해 주십니다.
하느님은 간절하게 바라고 원하는 것을 들어주시는 분입니다.
이는 우리의 고백입니다.
저의 안일하고, 나태한 모습을 되돌아보게 해준 친구와 복음에 나병환자에게 감사를 드리며, 저 역시 주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주님께선 하고자만 하시면, 저의 삶에 중심이 되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해 주소서. 그리하면 제가 살 것입니다.” 아멘
“네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양승국신부-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어릴 때부터 피부가 몹시 약했던 저는 여러 가지 피부병으로 인해 엄청 고생을 해봐서 피부병이 얼마나 괴로운 병인지 잘 알고 있지요. 또 피부병 환자들이 겪는 말 못할 괴로움도 알고 있습니다.
요즘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질환이 되었는데, ‘옴’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아직도 단체생활을 하는 곳에서는 심심치 않게 발병해서 사람들을 괴롭히곤 하지요.
저희 집은 아직도 이 옴 때문에 가끔씩 비상이 걸립니다. 옴은 옴진드기가 피부에 기생함으로써 발생되는 질환으로 개선이라고도 합니다. 옴진드기는 각질층 내에 터널을 뚫고 살게 되는 데, 그로 인한 가려움증이 유발됩니다. 증상이 진행되면 정말 참기가 어렵습니다. 전염성은 또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신체 여러 부위가운데 가장 후미진 사타구니나 겨드랑이, 손가락이나 발가락 사이에 많이 생기는 데, 한번 긁기 시작하면 끝도 없습니다. 함부로 ‘박박’ 긁다보면 증세는 점점 더 악화되어 나중에는 되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번지기도 하지요.
언젠가 제가 옴 비슷한 피부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지독한 가려움증을 이기지 못해 자는 동안 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엄청 긁어버려서, 그 다음날은 손을 침대에 묶고 잔 기억도 납니다. 너무나 간지러워서 참다못해 소리를 지르기도 했습니다.
피부병 중에 별것도 아닌 옴이 이렇게 지독한데, 나병은 얼마나 사람을 괴롭혔겠습니까? 나병은 옴과는 차원이 다른 병이었습니다. 옴이야 어느 정도 고생하고 나면, 꾸준히 치료를 하면 원상복귀 된다는 희망이라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 시대 당시 나병은 특효약이 전혀 없던 불치병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고약한 것은 나병에 걸리면 끔찍하게도 매일 오그라드는 자신의 몰골을 바라봐야만 했습니다. 매일 손가락 마디가 조금씩 떨어져나가는 현실, 매일 조금씩 코와 눈썹이, 입술이 조금씩 사라져가는 현실을 아무런 대책 없이 그저 바라만 보아야 했습니다. 지옥 같은 나날이었겠지요.
유다 율법에 따르면 나병환자는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처럼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시절에 전염병이나 악성 피부병은 격리가 최상의 방책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병 혹은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은 자신이 입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나타나면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쳐야만 했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들은 성 밖으로 나가 살아야만 했습니다. 나병환자 표시가 나도록 누더기를 입고 머리도 깎지 말아야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당시 나병환자들은 인간사회에서 공식적으로 배척된 사람들이었고,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짐승처럼 산기슭에서 토굴을 파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환자는 그가 하는 언행을 봤을 때 꽤 중증의 환자로 여겨집니다. 자신이 앓고 있던 나병 때문에 얼마나 괴로웠던지 율법조차 어겨가며 예수님께 자비를 구하고 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원래 사람들이 모이는 공공장소로 들어올 수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까지 들어왔습니다.
그의 태도를 한번 보십시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간절합니다. 예수님임을 알아차린 그는 털썩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나병으로 인해 서러웠던 지난 세월이 그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떠올랐을 것입니다. 나병에 걸린 이후 인간사회로부터 추방당하고, 산짐승처럼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다면 어찌 내게 이런 일을 허락 하시는가’며 매일 울분을 토했습니다.
아침마다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혹시나’ 하고 자신의 손과 발을 만져보는 일이었습니다. 혹시나 하고 개울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이었습니다. 혹시라도 밤사이에 기적이라도 일어나서 나병이 낫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끝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였기에 이제 마지막 희망을 안고, 무례가 되는 줄 분명히 알면서도, 율법을 어겨가면서 예수님께로 달려온 것입니다.
눈물을 철철 흘리며, 간절한 마음으로, 있는 힘을 다해서 외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인생의 막장에서,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간절히 부르짖는 나병환자의 외침 앞에 마침내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권능의 손을 그에게 펼치십니다. 자비의 팔을 그의 어깨에 두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나병환자의 새 삶을 한번 살아보겠다는 간절한 마음,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한 메시아임을 굳게 믿는 확고한 신앙이 결국 기적을 불러옵니다.
오늘 저 역시 치유 받은 나병환자처럼 주님의 도움으로 다시 한 번 깨끗해지고 싶습니다. 다시 한 번 보란 듯이 새 삶을 살고 싶습니다
"홀로 서야하는 사람들"
- 이수철신부-
함께하지만 결국은 홀로입니다. 군중 속의 고독, 어쩔 수 없는 인간 현실입니다.
하늘 향해 홀로 선 나무들이 숲을 이루듯, 하느님 향해 홀로 선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룹니다.
홀로 선다는 것, 이웃으로부터 고립 단절을 뜻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 앞에 지극히 진실하고 정직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늘 사람들과 함께했지만, 내적으로는 늘 하느님 향해 홀로 선 나무였고, 온전히 무소유의 삶을 사셨습니다.
사람들에 대한 기대나 집착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사람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1,40).”
무릎을 꿇고 도움을 청하는 나병 환자에게, 예수님이 줄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현존이신 예수님 자신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1,41).” 하시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 환자는 깨끗이 나았다 합니다.
예수님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과 ‘따뜻한 손’, 그리고 ‘능력의 말씀’이 삼위일체가 되어 환자에게 전달되고 이어 치유 기적이 발생한 것이지요.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르1,44b).”
그를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신 후, 표표히 떠나신 주님이셨습니다.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에 다니시지 않고 바깥 외딴 곳에 머무르셨지만,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에게 모여들었다 합니다(마르1,45).
대중의 인기에 참으로 초연하셨던 주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내 자신뿐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진실한 마음과 진실한 말이 위로와 힘이 되고 치유가 됩니다.
내 자신 하느님 안에 올바로 서지 못할 때, 나의 모든 소유물들은 쓰레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오늘 1독서의 이스라엘 백성들, 주님의 궤를 모셨지만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무참히 패배하여 주님의 궤도 빼앗겼다 합니다.
바로 하느님 앞에 올바로 서지 못할 때, 그 무엇도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진리를 배웁니다.
하느님만을 배경으로 한 진실한 삶만이 능력의 원천임을 깨답습니다.
이 은혜로운 성체성사 시간, 주님은 겸손히 도움을 청하는 우리들을 깨끗이 낫게 해 주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아멘.
무릎을 꿇는다는 것!
-이인옥-
지금에야 이런 말 하는 것이 더 이상하지만, 당시엔 나병이라 하면 하느님이 내리시는 천벌이라 여겼다. 그러기에 나병은 하느님만이 다시 낫게 할 수 있는 병이었다.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환자도 자신을 그렇게 만드신 분은 하느님이시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하느님께 청해보지 않았겠는가? 하느님을 향해 울부짖지 않았겠는가? 기도하고 탄원하고 원망하고 다시 매달리고 온갖 것을 다 해 보았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번쩍 띄어서 예수님 안의 신비로운 능력을 알아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깨끗하게 되는 꿈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이 대목에서 '깨끗'이라는 단어가 무려 4번이나 나오고 있음을 주목한다.)
전에 나는 '무릎 꿇리기 좋아하는 하느님'이 싫다고 성사 신부님께 말씀드린 적이 있었다. '인간을 비굴하게 만드는 하느님'이라고 말씀드렸다. 언제나 인간이 항복하고 백기를 들고 나와야 직성이 풀리시는 하느님이시라고 원망했던 것은 그런 상황이 또 찾아왔다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불쑥 불쑥 찾아오는 시련과 역경들은 종류도 다양해서 생활과 생존의 기반을 뒤흔드는 너무나 감당하기 힘겨운 것들이었다.
그러나 원망과 미움, 분노마저도 모두 사그라지고 또 '무릎을 꿇은'것은 지나온 날들을 고요히 반추해보면서였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나간 날들의 나의 죄상을 조목조목 반성해서가 아니라, 지난 세월동안 내게 베풀어주신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컸던가를 하나하나 떠올리면서였다.
그런데 그 은총과 사랑을 그동안 얼마나 허술하게 관리하고 방치했었던가 하는 후회와 죄스러움을 생각하니, 그토록 완강했던 반항과 오기는 실없이 허물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토록 논리정연했던 미움과 원망은 맥없이 주저앉아 버리고 만 것이다.
....................
그런 상태에서 모든 것은 나의 뜻이 아닌 그분의 뜻대로 일 수밖에 없었다. 옹기장이이신 그분이 다시 나를 진흙으로 되돌려 버리신다한들 어떠하리.
..................
사람들과 접촉이 불가능했던 상황을 뛰어넘어 예수께 와서 무릎을 끓고 애원하는 그도 이미 해볼 것은 다 해보고 백기를 든 세상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은 이젠 자신의 꿈은 간데 없고 주님의 뜻만 남은 상태의 고백이다.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은 깨끗하게 고쳐주셔도 좋고, "'하고자 하시지 않으면' 그러셔도 괜찮습니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렇다. 그분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단순한 포기와 체념의 의미가 아닌 것이다.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 지어내는 비굴한 행동도 아니다. '그래요, 내가 졌습니다'라는 패배선언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그분께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자신은 완전히 없어지고 그분만 남는 오롯한 의탁인 것이다. 자신의 뜻과 의지를 뒤로 밀어두고 그분께 나아감이 아니라, '그분이 아니면 나도 없는' 뒤로 물러설 한치의 여지(餘地)도 없는 의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제서품식이 거행될 때, 수도자들의 서원식이 거행될 때, 무릎을 꿇다 못해 엎드리는 행위는 '그분이 아니면 나도 없다'는 온전한 의탁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성직자, 수도자만 그러한가? 초기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세례자 모두가 바로 그런 엎드리는 포복의 자세로 세례를 받았다한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 우리가 마지막까지 몰려 취해야 할 자세가 아니라
우리가 곤경에 빠졌을 때 나오는 행위가 아니라 '언제나' 그분 앞에서 취해야할 기본 자세가 아니겠는가?
惻隱之心
- 강영구 신부-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 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하시자 그는 곳 나병 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마르1,40-42)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마태22,39)고 가르치신 예수님, 당신은 나병환자의 불쌍하고 아픈 처지를 당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나병으로 몸이 문드러지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고통입니다. 자기 탓으로 나병을 앓는 것이 아닌데도 부정한 인간으로 낙인 찍혀 추방당하여 외톨이가 된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입니다. 그는 성전을 출입할 수도, 가족이나 형제들을 만날 수도 없는 처지입니다. 그는 하늘과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가족과 이웃과 형제들과의 관계도 단절된 체 지옥에 빠져있었습니다. 당신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은 그를 어루만져 병을 낫게 해주었습니다. 당신은 그의 고통을 당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치유 받아서 죽음과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서 새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누려는 당신의 惻隱之心이 그의 지옥을 천국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그렇게 해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하신 것은 “너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삼겠다.”하신 말씀입니다. 그 순간 나병환자는 새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예수님, 차돌처럼 딱딱하고 얼음처럼 차가워진 저희의 가슴을 당신의 가슴처럼 따뜻하고 부드럽게 만들어주십시오. 나와 상관이 없다면, 특별히 나의 이익과 무관하다면 어떤 일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저희들의 이기적이고 냉혹한 가슴을 惻隱之心으로 바꾸어주십시오.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보고도 외면하거나 무관심한 저희의 냉혹함이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불행은 돈이 없거나 기술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탐욕과 이기심에 사로잡혀 이웃의 불행을 외면하는데 불행의 근원이 있습니다.
당신이 허락하신 오늘 하루는 惻隱之心으로 이웃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 가지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一明)2004-01-15
부정(不淨)과 부정(不正)
-박상대신부-
소록도나 산청 성심원이나 삼랑진 루가원 등 한센병 환자들이 고생하며 모여 사는 곳에 한번이라도 가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들의 삶이 인간의 눈에 얼마나 저주받은 모습으로 보이는가를 말이다. 이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오늘 복음에서처럼 십자가의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애원하고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치유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는 한번도 들은 본 적이 없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자신의 험악한 처지를 오히려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정말 부정(不淨)한 사람들인가?
"선생님께서 원의(願意)만 있으시면, 저를 깨끗하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 앞에 무릎을 꿇은 나병환자의 애달픈 간청이다. 그러나 간청 속에는 확신에 찬 믿음이 흐르고 있다. 예수께서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원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그는 깨끗하게 되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나병환자의 치유기적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기적은 나병환자의 부정(不淨)함을 정(淨)함으로 바꾸어 놓았다. 예수께서는 율법이 정한대로(레위 14,2-32) 치유 받은 자에게 곧장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공적으로 인정을 받은 후 예물을 드림으로써 ’깨끗하게 되었음’을 증명하라고 하셨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오늘 복음의 기적사화가 일어난 장소는 대략 갈릴래아 지방 가파르나움 근처였을 것이다.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예물을 드리려면 예루살렘까지 가야 한다. 약 100Km 떨어진 먼길이다. 그러니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예수님의 엄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치유 받은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자기에게 일어난 기적을 선전하며 갔을 것은 뻔한 일이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어떤 모양으로든 깨끗하지 못함은 공동체나 하느님과 일치 될 수 없는 요소이다. 모든 부정함의 극치는 문둥병이다. 이는 인간적 삶과 종교적 공동체와의 결별을 의미한다. 모세를 비난한 대가로 문둥병을 얻었던 미리암을 보고 아론이 "저렇게 살이 뭉그러진 채 죽어 태어난 아이"(민수 12,12) 라고 했던 말을 기억해 보라. 문둥병에 걸린 자는 살아 있어도 곧 죽은 것과 다름이 없다는 말이다. 구약의 사제는 피부에 병이 있는 자를 진단하여 그것이 문둥병(악성 피부병)이면 그를 부정한 자로 선언하고 격리시켰다. 그들을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윗수염을 가리우고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쳐야 했다.(레위 13-14장) 누구든 레위기의 이 대목을 읽어보면 머리나 몸의 어딘가가 따갑고 간질거릴 것이다. 혹시 나의 몸에 부정(不淨)함이 있어서 그렇다기보다 나의 마음에 부정(不正)함이 있어 그럴 것이다.
그렇다. 오늘 복음을 몇 번이고 읽어 묵상하면 기적의 핵심이 육체적 악성피부병에 있다기보다는 내적인 ’깨끗하지 못함’과 ’깨끗하게 됨’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내적인 부정(不淨)은 곧 부정(不正)이다. 부정(不正)은 정직(正直)하지 못한 것으로서 죄(罪)를 말한다. 우리 중에 죄인이 아닌 자가 있는가? 없다. 따라서 우리 또한 부정(不淨)한 사람들이다.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이 취할 자세는 항상 겸손이다. 그러한 겸손으로 하느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깨끗함을 간청하여야 할 것이다
나병환자 한 사람이(마르1,40-45)
-유 광수신부-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한 나병환자를 만난다. 우리는 이 나병환자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묵상하자. 나병환자란 어떤 병자인가? 의학이 많이 발전하였지만 나병은 지금도 완전 히 치유되지 않는다. 나병이 더 이상의 진행되지 않도록 하기는 해도 완전치유는 불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다. 결국 나병에 걸리면 치유 불가능한 병이라는 낙인이 찍혀있다. 따라서 나병에 걸리면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다. 나병이란 우리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뚜렷이 보여 주고 있는 병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나병 환자임에 틀림없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분명히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하루 하루 자고 나면 자고 나는 만큼 그만큼 우리는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죽음이라는 병에 걸린 사람들이라는 면에서 볼 때 나병환자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 죽음의 병에서 치유 받을 수 있는가? 죽음이라는 거대한 강에서 구출될 수 있는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죽음의 행렬에서 어떻게 빠져 나올 수 있는가? 그것을 우리는 할 수 없다. 그 누구도 인간의 힘으로는 다가오는 죽음을 막을 수 없다. 또한 그 누구도 죽음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고 죽음이 좋아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없다.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 그것이 인간이다. 어떻게 하면 죽음의 거센 풍랑을 막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죽음의 행진에서 빠져 나와 생명의 대열로 들어설 수 있는가? 이 세상의 것으로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에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예외없이 다 죽음을 향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죽음에서 구해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 그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것을 믿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죽음에서 구해줄 수 있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해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나를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믿음이어야 한다.
나의 믿음은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가는 믿음이어야 한다. 그래서 하루 하루 나의 신앙생활은 점점 더 생명이 충만한 삶이어야 한다. 비록 육체는 죽음을 향해가고 있다 하더라도 나의 영혼은 늘 생명력으로 충만해져 있어야 한다. 믿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충만해지는 사람은 비록 나이를 먹어 육신은 늙어가고 힘이 없고 볼품없어도 영혼만은 늘 생기가 넘치고 새롭게 부활하고 생명이 충만해지고 더욱 사려 깊고 평화로운 생활을 할 것이다. 젊은이들보다도 더 진취적인 생각을 하고 늘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으며 미래를 예언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유식하고 똑똑한 사람들보다도 더 지혜롭고 따뜻하며 사랑이 넘치리라. 그것이 믿음이다. 매일 똑같은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죽음의 강물을 거술러 생명의 강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믿음은 육체가 죽는다고 해서 함께 죽어 가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육체가 늙는다 고해서 덩달아 늙어 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젊어지고 하느님의 기운이 차고 넘쳐 생명력이 넘치게 하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은 절대로 육신의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무기력해지거나 의욕이 사라지거나 절망과 외로움과 고통 속에 살지 않는다.
보라! 마더 데레사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모습에서 죽음의 그늘을 볼 수 있는가? 비록 몸은 병들고 나약해졌지만 그네들의 영혼은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온 세상 사람들을 끌어 않고 있으며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모든 이들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오늘도 건재하고 계시며 평화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그것이 믿음이다. 즉 죽음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이요 날로 더욱 더 생명력으로 충만하고 지혜로워지며 덕스럽고 개방적인 인간이 되며 언제나 모든 이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발산시키는 사람이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죽음의 병에서 구출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병환자처럼 예수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애원해야 한다. 믿음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요, 상대방에게 목숨을 내맡기겠다는 것이요, 상대방이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순명의 자세이다. 나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어본 적이 있는가? 무릎을 꿇고 애원해 본 적이 있는가? 무릎을 꿇은 사람만이 받는 은혜가 있다. 우리가 믿음의 은혜를 충만히 받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을 만큼 우리의 믿음이 진지하지 못하고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릎을 꿇고 애원할 때 내가 원하는 것을 고집하기보다는 오늘 나병환자처럼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리는 것이 믿음이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그분께서 하고자 하시는 것을 하시도록 그분께 맡겨드리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강요도 아니고 내가 원하는 것만을 고집하는 것도 아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이라고 맡겨드리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스승께서 하고자 하시는 대로 맡겨 드릴만큼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예수님은 하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신 분이라는 믿음이 있는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는 말씀은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나병환자에게 하신 예수님의 응답이다. 이 말씀은 나는 너보다 더 내가 너를 깨끗하게 해주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죽지 않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는 분은 나보다 더 예수님이 원하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자 곧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는 말은 말씀의 능력을 말한다. 우리의 나병을 치유시켜 주는 것은 곧 말씀이시다. 우리에게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는 것은 곧 말씀이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생명력을 얻고 말씀을 통하여 기쁨을 찾고 말씀을 통하여 총명해지고 지혜로워지며 말씀을 통하여 모든 이에게 전해줄 평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늘 생기 넘치고 주님을 찬양하는 영혼의 삶을 산다. 그래서 사람은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죄이다. 믿음이란 죽음의 원인이 되는 죄를 용서받고 다시 깨끗해지는 것이다.
믿음의 생활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청하는 것이고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깨끗해져 다시 생명을 얻고 일어서는 것이다. 즉 말씀으로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고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