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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barnabak
헌금으로 드리는 감사
고린도후서 8:7-15
충주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이 쓴 책 가운데, “십일조 안내면 받으러 가자”는 제목의 칼럼집이 있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과수원을 매매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 중도금 받은 날짜가 지났는데도 십일조를 안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잔금을 받는 날짜에 무조건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과수원을 매매했으니 그 십일조를 내라고 했습니다. 집사님의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내가 교회에 내면 되는 것이지 목사님이 잔금을 받는 곳까지 와서 십일조를 내라고 하니 어이도 없고 뭐 이런 것이 있나 싶어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계속 가지를 않습니다. 십일조를 낼 때가지 안 가겠다고 버티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정말 더러워서 십일조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십일조를 받아오는 목사의 기분은 어떠했을까요? 그 칼럼의 마지막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목사는 성도의 앞날을 행복의 날로 인도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바르게 양육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십일조를 받으러 가서 독촉을 하니 훗날에 그가 충성된 제직이 되는 것을 많이 보았다.” 목사가 자기 잘 살고 자기 사례비 많이 받으려고 십일조를 내라고 하고 받으러 간다고 하면 이렇게까지는 못할 것입니다. 성도들이 잘 되고 성도들이 축복받게 하려는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십일조를 강제로라도 내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헌금에 대한 말씀을 전하게 되는데 여러분, 오늘 설교를 하는 저도 바로 이 목사님과 같은 심정으로 설교를 한다는 것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성도가 침례를 받는데 주머니에 들어있던 돈 지갑을 빼놓지 못하고 그냥 가지고 물속에 들어왔습니다. 침례는 의미는 세례와 같은 것인데 방법이 조금 다릅니다. 세례가 물을 손에 찍어서 머리에 대는 데 비해, 침례는 물속에 사람을 푹 잠갔다가 일으킵니다. 그러니까 지갑을 가지고 있으면 물에 젖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에게 “목사님, 제가 지갑을 빼놓지 못하고 그냥 가지고 왔습니다. 조금 기다려 주십시오.” 황급히 말하자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냥 계세요. 당신 뿐 아니라 당신 지갑도 침례를 받아야 하니까요.” 여러분, 여러분의 지갑은 세례를 받았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광야 생활가운데 인도하신 후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 말씀의 내용이 십계명에 잘 나타나고 있는데요, 크게 볼 때는 하나님을 잘 섬기라는 것과 이웃과의 관계를 잘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중요한 두 가지 강령입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설명하시면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2장)
그러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구약 출애굽기와 레위기 신명기 등을 보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방법이 몇 가지 나타납니다. 먼저는 다른 신이나 우상을 섬기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막과 제단을 만들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안식일 안식년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과 같은 절기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절기를 지키는 이유는 모든 것의 배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할 때는 그냥 빈손으로 오지 말고 정성을 다한 예물을 가지고 와서 감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3장 19절에 보면, “네 토지에서 처음 거둔 열매의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신명기 16장에서도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16-17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감사를 할 때가 있고 감사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보통 정성껏 마련한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이것이 인간생활에서 통용되는 감사의 방법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은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감사를 드릴 때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말로도 감사할 수 있고요 찬양으로 감사할 수 있고요 그림으로도 할 수 있고 시로도 할 수 있고 몸으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빅터 프랭클이 쓴「곡예사의 헌신」이란 책에 나오는 한 난쟁이곡예사는 거꾸로 서서 공과 접시를 돌리며 먹고살았는데 나이가 들자 그 일 하기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이 그를 성당에 데려와서 살게 되었는데 자신이 하던 일을 하지 못하니까 생기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구든지 자신의 재능을 드리면 주님이 기뻐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새벽마다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물구나무를 서서 발가락으로 접시를 돌리게 됩니다. 이것을 본 청소부가 신부에게 알렸습니다. 신부도 요상한 일이다 생각하고 엿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난장이가 나타나더니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저는 재주가 이것뿐입니다. 이거라도 받아주십시오.” 그리고는 온갖 쇼를 부립니다. 그것을 보고 신부가 혼내주려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기적이 일어납니다. 성모 마리아가 곡예사에게 다가와 그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며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의 땀과 눈물을 받아 기쁘단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우리의 몸과 재주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고 하나님은 이것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감사가운데 빠질 수 없는 것이 물질을 드려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헌물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감사요 헌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헌금으로, 물질을 드려 감사하는 것을 원하시고 바라시는 것일까요? 왜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먼저, 물질은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것을 자신께 드리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가장 소중하고 가장 귀하게 섬기는 방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향하여 네 아들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무자비하신 분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아들을 바칠 수 있을 만큼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테스트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이 아들, 이삭보다도 더 소중한 분이심을 행동으로 증거 하였고 이를 확인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가장 소중한 인간으로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섬기시는 하나님이 정말 귀하신 분이요 정말 감사한 분이요 우리 삶의 근본이 되시는 분이라고 믿는다면 거기에 합당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을 그 분께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물질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물질을 싫어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좋아하고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생각해서 문제입니다. 그 귀한 물질을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만큼 소중하고 고귀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구세주이십니다. 우리를 눈동자같이 보살피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 보다 더 귀한 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늘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그렇게 노래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분에게 가장 합당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헌금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귀하게 여기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돈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주님이 그만큼 귀하지 않다거나 아니면 귀하신 그 분께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가장 귀하신 분이시기에 가장 귀한 것을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합당한 모습입니다. 그 하나님께 잘못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바르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헌금은 신앙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7절에 보면,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이미 말씀 드린 대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으로 나타납니다. 절망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고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말로도 나타납니다. 주님을 전하는 말을 하고 주님을 찬송하는 말을 하고 긍정적인 말을 하고 사랑스러운 말을 합니다. 또한 지식과 간절함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대로 찬양대, 구역장, 교사, 차량봉사, 식사봉사 등 주님을 섬기는 모습으로도 나타납니다. 이러한 것들이 다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러한 신앙의 모습가운데 하나가 바로 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배 목사님들이 하시는 말 가운데 헌금을 잘 하는 사람이 훌륭한 신앙인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신앙의 정도를 측정하는 많은 요소들이 있겠지만 헌금생활을 잘 하는 사람이 그 신앙이 분명하다고 보면 틀림없다는 어른 목사님들의 말씀은 거의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이것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헌금생활을 잘한다는 것이 많은 금액을 내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부의 두 렙돈처럼 적은 것을 내더라도 얼마든지 헌금생활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왜 헌금을 드리는 자가 신앙생활을 잘 하는 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헌금을 드리는 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 중에 십일조가 있습니다.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이 십일조헌금인데요, 여러분 한 달 동안 뼈 빠지게 일해서 벌은 그 귀한 돈 가운데 10%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100만원 가운데 어떻게 10만원을 떼어서 하나님께 바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지 못하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근원이시라는 믿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헌금은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체험한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신앙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헌금하는 일에도 풍성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헌금으로 드리는 감사를 주님은 기뻐하시고 원하십니다. 헌금으로 드리는 감사가 풍성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 번째로, 헌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표이기 때문입니다.
9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하여 부요하신 분이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경제적인 차원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를 갖고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입니다. 가난하게 되신 주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부요한 자가 되었기에 이제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이웃과 형제들을 구제하는 일에 앞장섬으로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구제를 위하여 헌금을 작정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교회가 문제가 발생하여 그 일을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니 다시 그 일을 계속하고 완성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헌금은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표일 뿐 아니라 주님을 닮아가는 표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닮아가기 원하시는 성도 여러분, 헌금에서도 주님을 닮아 가시기 바랍니다. 구제헌금을 통하여 이웃을 사랑할 때, 선교헌금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될 때 이것이 주님을 닮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이 되는 줄 압니다.
충북 노회 연합 부흥성회 강사로 오신 정성진 목사님이 설교 중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 목사님 교회에 모 여 집사님의 남편이 의사인데 바람이 나서 다른 여자와 삽니다. 그러니 가정이 어떻게 되겠어요? 할 수 없이 이혼을 하게 되었는데 위자료로 5억을 받았습니다. 그 돈으로 앞으로 자녀들을 가르치고 생계를 꾸려나가야 할 상황입니다. 그 집사님이 목사님께 묻기를 이혼 위자료도 십일조를 해야 하느냐?고 묻더랍니다. 목사님이 그렇게 대답을 했답니다. “내가 목사로써는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말해야 하겠지만, 인간적으로는 십일조를 드리라는 말을 못하겠습니다. 그러니 집사님의 믿음대로 하세요.” 그랬더니 그 집사님이 그 다음 주일날 십일조 5,000만원과 감사헌금까지 하나님께 드렸답니다. 여러분, 그렇게 믿음이 좋은 집사님이 왜 이혼을 당하고 가정이 깨지는 환난을 겪어야 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목사님이 어찌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매일 새벽 마다 그 가정을 위해서 축복 기도를 해 주셨답니다. 하나님께서 그 집사님의 믿음을 보시고 전화위복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얼마 후에 그 남편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그런 남편을 받아 줘야 합니까? 안 받아줘야 합니까? 목사님! 미쳤어요? 그런 인간을 왜 받아줍니까? 요즈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런 죄인들도 다 용서하고 품는 것입니다. 그 남편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온 것입니다. 이혼 위자료에서조차도 십일조를 드리는 그 집사님의 소중한 믿음을 주님이 축복하신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결혼식을 하고 들어온 축하금에서 십일조를 드린 분이 있습니다. 장례식을 하고 그 부조금에서 십일조를 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주님이 어떻게 축복하지 않겠습니까?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생활은 이미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므로 드리는 감사의 표시입니다. 아울러 주님이 나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분이심을 고백하는 신앙의 진정한 표입니다. 가장 소중한 분이시기에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이 헌금입니다. 헌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고 그 주님의 삶을 본받아 살아가는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런 헌금생활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축복하신다는 것이 또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소망교회 장로님이시며 참존그룹의 회장이신 김광석 장로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예전에 그 분은 절을 여러 개 지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면서 십일조 생활을 말씀대로 정확하게 지켰습니다. 회사수익이 자기 개인 수익은 아니지만 전체 수익의 십일조를 반드시 지킵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한 달에 한 번 드리면 너무 금액이 많아 망설이고 부정직할까봐 매주 드린다고 합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하니까 하나님이 장로님을 축복하시는데 참 자유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업을 계속 확장시켜주었습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이런 간증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