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락
사람에게는 누구나 마음속에 하나쯤의 뜨락이 있다. 지친 날이면 말없이 찾아가 쉬어 가는 곳, 오래된 기억이 꽃처럼 피어나는 곳, 아무 말 없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자리 말이다. 나에게 그런 곳은 화려한 정원이 아니라 낮은 돌담과 기와지붕, 그리고 계절마다 다른 꽃을 피워 내는 작은 뜨락이다.
돌담 아래 하얀 꽃들이 소담스럽게 피어 있다. 이름을 크게 알리지 않는 작은 꽃이다. 누군가는 스쳐 지나갈 뿐이지만, 나는 한참을 발걸음을 멈춘다. 큰 나무는 하늘을 향해 자라지만 작은 꽃은 사람을 향해 핀다. 낮은 곳에서 묵묵히 피어나는 꽃은 늘 겸손을 먼저 배운 사람을 닮았다.
돌담은 오래되었다. 반듯한 돌도 있고 울퉁불퉁한 돌도 있다. 모양도 크기도 모두 다르지만 서로 기대어 담장을 이루고 있다. 사람 사는 세상도 이와 같지 않을까. 모두가 같은 모습이라면 오히려 풍경은 단조로워질 것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받쳐 줄 때 비로소 하나의 공동체가 완성된다.
한쪽 뜨락에는 커다란 화분이 놓여 있다. 그 안에는 초록빛 잎들이 무성하고, 작은 요정 인형 둘이 꽃밭을 지키고 있다. 햇살을 받은 요정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어른들은 그것을 장식이라고 말하지만 아이들은 친구라고 부를 것이다. 상상력은 언제나 현실보다 먼저 꽃을 피운다.
어린 시절에도 우리 집 마당에는 작은 화분이 있었다. 어머니는 계절마다 다른 꽃을 심었고, 나는 매일 물을 주는 일을 맡았다. 물을 주고 돌아서면 금세 꽃이 피는 줄 알았다. 그러나 꽃은 늘 조용히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기다림 끝에 피어난 꽃은 그래서 더욱 아름다웠다. 삶도 그렇다. 가장 소중한 것들은 서두른다고 빨리 오지 않는다.
뜰 한편에는 알록달록한 작은 의자들이 줄지어 놓여 있다. 빨강, 파랑, 노랑, 하양…. 마치 아이들이 잠시 놀이를 멈추고 어디론가 달려간 듯하다. 빈 의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웃음소리를 품고 있다. 아이들은 떠났어도 동심은 아직 그 자리에 앉아 있다.
그 의자들을 바라보다 문득 유치원 운동장이 떠올랐다. 친구를 기다리던 시간, 소꿉놀이를 하며 깔깔 웃던 오후, 넘어져 무릎이 까져도 금세 잊어버리던 마음…. 아이들의 세계에는 내일보다 오늘이 먼저였고, 경쟁보다 놀이가 먼저였다. 행복은 늘 그렇게 단순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기와지붕 너머로 여름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는다. 담장 곁에는 분홍빛 부용화가 고개를 들고, 하얀 수국은 둥글게 피어 있다. 자연은 서로 다른 꽃들을 차별하지 않는다. 키가 큰 꽃도, 작은 꽃도, 오래 피는 꽃도, 하루를 사는 꽃도 모두 계절의 한 식구다.
사람은 자꾸만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한다. 더 높이 오르려 하고, 더 많이 가지려 한다. 그러나 뜨락의 꽃들은 그런 법을 모른다. 자기 자리에서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꽃은 다투지 않고도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만든다.
바람이 지나가자 풀잎들이 한꺼번에 몸을 흔든다. 누구 하나 먼저 흔들겠다고 나서지 않는다. 자연은 늘 함께 움직인다. 혼자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모든 생명은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간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혼자 버틴다고 생각했던 시간에도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받쳐 주고 있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뜨락의 풍경도 조금씩 달라진다. 꽃은 더 부드러운 빛을 머금고, 돌담은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늙게 하지만, 동시에 깊어지게도 한다. 오래된 뜨락이 아름다운 이유는 세월을 이겨서가 아니라 세월을 품었기 때문이다.
나는 뜨락을 좋아한다. 화려하지 않아서 좋고, 크지 않아서 좋다. 무엇보다도 사람을 쉬게 하는 여백이 있기 때문이다. 삶에도 이런 뜨락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바쁘게 달리다가도 잠시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이름 모를 꽃 한 송이를 바라보며 마음을 쉬게 하는 자리 말이다.
돌담 아래 피어난 작은 꽃처럼, 화분 속 요정처럼, 빈 의자에 남아 있는 아이들의 웃음처럼 우리의 삶도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에게 잠시 머물다 갈 수 있는 따뜻한 공간이 되어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뜨락을 걸으며 배운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은 넓은 마당이 아니라, 작은 행복들이 오래도록 머물러 주는 마음의 뜨락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