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영 시 모음 6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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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향
정재영
왜 떠났을까
돌아가고 말 일
왜 모른 체 했을까
잊을 수 없는 것을
속금산 끝자락 마을
황토 흙
내 몸이라서 그런가
짧은 하루 해
멈추고 간
봄날만 아득히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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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속마음
정재영
용서란 망각하는 일이라서
땅이 만든 욕망을 잊기로 했다.
귀 달린 것이 무슨 슬픈 운명인가
바람결에 실려오는
삭풍이 깨우는 소리
난청으로 귀를 막고
부정맥으로 가슴 문 걸어 닫아도
거부할 수 없는 이명(耳鳴)과
멈추게 못하는 심장이 외치는 고백들
용서를 빌까
구걸이라도 해야 할까
하늘 뜻 알기 위해
두 귀를 바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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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리움
정재영
향수(鄕愁)만이 아니다
떠나고 떠나보낸 모든 이별은
가장 무서운 죄인이 되는 일이다
성묫길 돌아오는 길에 더 보고 싶은 어머니 아버지
잊고 살던 옛 친구 뜬금 없는 안부 전화
속으로 담아 둔 옛사람 풍문으로 달려온 흔적
곁에서는 밝아서 안 보이던 찟김으로 생긴 틈
이제는 먼 곳에서 그림자 불빛으로 더 선명한 죄목은
사형보다 중형인 죽어서도 안 되는 무기수 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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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난 버리지 못한 욕심
정재영
옷장 가득해도
옷걸이 하나씩 젖혀도
입성 하나 마땅찮다
유행(流行) 바뀌고 몸맵시 이미 달라져
맞을 수 없는 시간만 차곡차곡히 쌓인
낡은 추억(追憶)을 삭인 정지(停止)된 것들
혹시나 하는 생각(生覺)에 버리지 못해 끼고 온
헐벗은 몸만 무겁다
마음대로 웃지 못하는 안면마비(顔面痲痺)처럼
욕심만 가득한 가난한 옷장을
가득해도 채운 것은 욕심(慾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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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을 들판
정재영
쏟아지는 햇살 비수에 넘어지지 않는
비바람 한 다발 흔들려서 자란 고집통
추수 남긴 가을이 깊은 물감 들기 전
한가지로 푸르던 날이었으니
한 번쯤 고개정도 숙여준들
누가 비겁하다 할까
바람이 끌고 가는 늦은 철 끝자락에
어차피 숙여야 견디는 들판에서는
키 차이는 드러눕는 넓이가 아닌 걸
숨죽여 삭아져
흙으로 하나 되었다 다시 태어나
무명초라 잡초라 부르더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거름이 되어야 하는 날
낮은 키로 낮아져서 손을 잡아
부등켜 하나 된들 누가 어쪄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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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개나리
정재영
겨우내
연탄가스에 중독이 되어
빈혈기 가시지 않아
어지러움만 더하고
아직도 찬바람에
헛기침만 해대는 강가는 살얼음인데
황달기로 누렇게 뜬
영양실조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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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겸손
정재영
연해주 연어를 구워놓은
만찬식탁의 촛불 아래
영국산 본차이나 접시와
리델의 모슬리에 포도주 잔은 아니어도
막사기그릇 잡곡밥 소반 위에
당그랗게 놓여 있는
입맛 넉넉한 간장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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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계시는 場所마다
정재영
식탁(食卓) 하나 겨우 들어가는
(조각상)彫刻像 미소(微笑)만 아늑한 신전(神殿)
제단(祭壇)에 가득히 쏟아지는
눈빛으로 바치는 꽃향기(香氣) 긴 터널
가을빛 황금사원(黃金寺院) 은행잎 가로등불
어둠은 막을 내려 침묵(沈默)하는 시간(時間)
꽃들을 삼키는 브랙홀이 막혀
은하수(銀河水)가 되어버린 작은 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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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공간의 빛
정재영
열병(熱病)없이 자란 아이 없듯 사랑의 고통(苦痛)없는
아름다운 청춘(靑春)은 없다
마디 없는 대나무 없듯 아무리 고운 꽃도
갈라지 않는 꽃잎은 없다
밝은 불을 오래 피우는 관솔은 세월(歲月)이
만든 아픔을 송진으로 넘겨서다
껍질을 덮어 속살을 키우는 나무는 속으로 죽음을
매일(每日) 每日 나이테로 보듬는 것이다
산다는 일은 버려서 얻는 순환(循環)이라서 있는
것이란 없는 것이며 산다는 것도 죽는 것이다
每日 每日 자라서 일어나 다시 누워서 빛으로
태어나고 빛으로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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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기다리는 사람
정재영
눈이 침묵(沈默)으로 내리는 밤은
아무 생각 없는 책갈피를
아무 생각 없이 넘긴다
불러도 불러도
눈바람에 실려 가는 이름으로
검은 글자들이 흰 눈발로 날리고
종이는 아득한 설원(雪原)이 된다
눈 덮여 사라진 길
눈발 소리가 들려주는 발자국 소리 있어
저리고 시린 가슴 살포시 눈 감 듯 책(冊)을 덮으면
눈길 속에 희미한 사람이 보인다
가시는지
돌아오는 건지
제자리에 멈춘 사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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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기약
정재영
지는 바람에
덩달아 기우는 저녁노을이
서둘러 걸치는 초저녁달을
싸리문 열어두고 기다리면
혹여나 기다리는 사람 대신(代身)
별 밝게 깨어서
어둠이 먼저 짙은 다정(多情)한 밤
어둔 귀에 달빛 소리 커지면
가슴속에 사라지는
고샅 끝 멀어
점점 작아지는 발자국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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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꽃잎에게
정재영
노을 진 눈빛으로
찬란한 순수 앞에 서면
바람의 손으로 흔들어도
당신은 숨긴 침묵으로 있다
흔들리는 것은 나
깊은 심연의 바다에 파문을 일으켜
찢어진 깃발로 나부끼는
내 영혼 낡은 배 한 조각을 찢어
마지막 힘으로 짜낸
한 방울 물기는
순수의 이슬로 있으리
그래도 침묵으로 계신다면
마른번개로 혼백을 불태워
입가 굳어버린 無言처럼
작은 재 한 톨로 남아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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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나이테
정재영
늙어가도
낡아지지 말자
벌거벗은 가을 나무 나이테처럼
겉모습 달리
당신과 나 사이에 숨겨 둘러친
나날이 새로워지는 속살 무늬의 말들
첫눈 내리는 날
눈뜨는 지나간 이야기를 위해
눈 속에 갇혀도 좋다
산 속 바람 길에서 늙어가도
새로워지는 당신을 향한 설렘이 있는 한
이른 봄날 불어나는 냇가 나무가
고목으로 꺾어지는 날까지
꽃비 내리지 않아도 속으로 그리는 절기는
언제나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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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늦은 歸鄕
정재영
긴 길이었습니다
먼지를 뒤집어쓴 버스에서 내려
달구지 바퀴 움푹 패인 길을 한 시오리 걸어야 했습니다
혼자 터벅터벅 걸으면 바람이 서들러 달려와 고개 숙여야 가는 길 중간
동란 시절 배고파 죽은 어린애 하얀 찔레꽃 울음소리로
낮 길도 가슴 조이던 아장터 산모퉁이를 돌아
산비탈 끝자락에 작은 옹기처럼 옹기종기 모인 동네
장독대 가운데 큰 독처럼 세월로 버티고 있는 고샅길 끝 집
반절은 뛰듯 항상 열려 있는 문으로 들어가
먼저 인사를 하는 두엄 냄새 가득한 마당은 모두 들일 나가 텅 비어있어
언제나 한가로움으로 적적한 집안 안팍
어머니 부르는 소리만 권태를 깨트려 툇마루에 앉아 있으면
허물어진 뒷담 사이로 허둥지둥 들어오시는 흙손 모습에
뒷산 비탈진 밭고랑들도 함께 웃어주고 있었습니다
금년은 고향집도 모두 출타 중이나 봅니다
밤늦어도 마당에 내려와 쉬고 가던 달이
아는 이 하나 없어 하늘 중턱에 걸려 오도가도 못하는
만월이 배불러 그리움마저 체한 오늘 같은
그리움은 장소가 아닌 사람인 것을 아는 순간
가슴 속 깊이 비치는 달빛을 따라
누구나 다시 긴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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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단념과 포기
정재영
봄꽃 꺼져 굳어버린
검은 심지 촛대 휘도는 작은 흔들림
가지 끝에 걸린 회오리바람은 몸부림으로 자라
바위 방파제 때리며 부서지는 너울이 되듯
당신 눈동자 자장(磁場)이 일으킨 작은 바람은 해일 되어
투명천으로 둘린 마음 모래 둑을 무너뜨리며
부서지는 물결은 다시 바람을 일으켜 세운다
부서지고 부서지는 파도에
덜썩 주저앉아 정작 무너진 것은 나였던 걸
잊을만 하면 철없이 밀려오는 당신에게
안기면 또 부서지고 말 건데
나는 무얼 어쩌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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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당신 계신 곳
정재영
오르면 내려가고
내리는 듯하면 다시 올라오라는
산바람이 마주치는 길목' 굽이치는 산비탈에
자리 지키며 솟아 있는 작은 봉우리는
어찌 이름이 없을까
생전에 이름 하나쯤 가졌을 턴데
산정을 잡고 있는 하늘에 올렸는가
오르던 길 계곡에 주어버렸는가
고개 숙인 잡풀을 쓰다듬는
달도 멈췄을 능선 구석에
산이라는 동네 이름에 묻혀
잠들고 있는 담신
햇빛이 불러온 구름그림자
침묵으로 말하는 하늘 아래
이름 모를 무덤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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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당신은 지금도
정재영
꽃은 흔들리는 작은 바람에
떨어져 적요 속으로 사라지나
당신은 봉긋이 다문 봉우리 속에
향기로 숨으셨습니다
강은 흘러 흘러 앞 뒤 흔적을
지우려 하지만
당신은 들판에 뿌리는 빗방울로
깊게 새긴 비석입니다
어둠은 산을 지우고 가던 길을
덮어버리지만
당신은 저녁 툇마루에 비쳐
창문을 밝히던 달빛입니다
해가 지면 밤이라서 모두
잠들 때라 하지만
당신은 가슴 안 골목 외톨 전구로
깨어 께시는 가로등입니다
당신은
당신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러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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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덮어줌
정재영
비와 바람과 눈을 먹고 자란 별들이
단칸방 불빛을 키우는 겨울
썩을 지푸라기 밑으로 흙이 되어 가는
낮게 덮인 지붕 아래
방 안 도란거리는 부산한 마음
달빛이 다독거린 말일까
쏟아진 눈발 탓일까
하현달도 구름이 같이 가며
덮어주는 몸짓 덕에
조용히 삭아지듯
태어날 때보다
더 낮은 한 칸 방
모든 걸 용서로 덮은 산더미처럼
따스함이란
온도의 높낮음이 아니라
덮어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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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만남 그리고 작별
정재영
꽃잎으로 온 봄은
눈송이로 사라졌습니다
천식처럼 헛기침으로 겨을을 끌고 간 강물
봄까지 끌 고갈 줄 아무도 몰랐습니다
5월 산천 푸른 붓질이
봄마저 지우는 일이라면
우리 만나 꽃 피우며 남긴 꽃씨도
봄 지우는 일인가요
가득히 덮은 잎사귀 녹음 끝에 벌써
가을의 열림과 떨어짐이 함께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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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만추(晩秋)
정재영
하늘을 받치던 산이 힘에 부쳐
감추어둔 붉은 마음 속살 드러내는 날
희미한 당신은
천연색 그림으로 하늘에 걸린다
사랑은
속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을
오늘처럼 후회한 일 없다
시간도 바보라서
숨어 있던 영원한 색을 보이려
겉에 칠한 순간의 색을 걷어내
횃불로 함성을 지르는가 보다
희미한 젖빛 유리창에
화려해서 아픈 상처들이
모자이크를 만들고 있다
당신에게 들킨 마음 붙들고
언젠가 깊이 잠드는 날 오면
당신도 오늘처럼 다시 깨어
나를 바라보고 계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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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말복
정재영
생애 가장 뜨거운 오늘 하루 가슴에 담아 넘기면
가지 매듭마다 찬바람 스며드는 가을 꽃잎 청초한 들판
이름 모를 꽃들을 세고 있을거다
열정의 지난 잠들지 못한 날 모두
뜨거운 것이 뜨거움을 잉태하는 축제여서
열매를 맺어 풍성한 가을 서늘한 날은
노을 불길이 들판을 태우는 곳도
한상 설렘의 잔치일 거다
어느 한 순간 축제가 아니었던 날 있었던가
한 장 들판 그림 위에
서로 붙잡은 손길로 붉은 태양을 낙관 삼아
마지막 그림 한 흭을 그어 걸어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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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먼 훗날 그 날에
정재영
사라진 겨울 산길로
적멸(寂滅) 소식(消息) 궁금하면
시(詩)를 쓴다
백자의 말(言)을 풀어놓고
바둑알을 이리저리 옮겨 집을 짓듯
엉킨 생각을 채울 빈집을 찾는다
잠시 생각을 쉬게 하고 눈감고 있으면
저절로 한 칸씩 채워 나가
한 채의 집이 새롭게 지어진다
언젠가 마지막 날
못다 진 그 집에 혼지 있을 그 날이라도
이처럼 고맙고 다정(多情)할 수 있을 거라고
훈훈한 마음으로 다독거려 불을 켜본다
돌고 돌아 온 먼 길이라
설혹 연락 끊어진 산 속에 혼자 누워 있어도
어느 날 당신은 낮은 대문(大門)을 열고 들어와
나의 좁은 정원(庭園)에 심을 꽃씨 봉투 내밀고
지금처럼 웃고 서 있을 거라고
꼭 그럴거라고 생각하면
비바람 불고 눈에 덮인 어떤 경우에도
여전히 당신 향한 詩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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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명절 소감
정재영
어릴 적 명절은 모든 게 부족한 세월이라서
입성과 먹을거리로 신나는 날이었지만 지금은
일상을 접는 그냥 휴일일 뿐이다
지지미 부치는 일상을 아파트 베란다로
옮기면 접어둔 옛일들이 새삼 분주해저
좁은 거실은 넓은 마당이 되어도 어머니!
부르고 들어가던 대문은 토라져 허물어지고
부모님 해후도 성묘 정도로 끝낼 빈약한
만남이어서 제각각 나들이해야 할 적막
속 유배에 갇히면 나이가 나를 먹어
헛배가 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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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바람 부는 날
정재영
비탈 언덕 흔들리는 나무 밑에 앉아
소리 없이 차곡차곡 삭인 마음
먼 곳에게 곁으로 오시는 당신 가을 길로
남은 한 뼘 마지막 하늘에 걸린
까치 밥 붉은 낙관인 찍어 날려보낸다
앙상한 가지 사이 하늘은 더 푸르고
마른 잎에 새긴 시린 서리 마음
회오리치는 잡풀 넝쿨 날리는 언덕에서
하늘을 향해 가지로 빈손을 내밀어
어둠에 잡힌 시간을 날려 지운다
생각은 바람처럼 휘날리고
현실은 나무처럼 언제나 제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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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백 인의 초대
정재영
만약(萬若)에
아니 만약(萬若)이 아니라도
누구나 정해진 남은 날이
얼마쯤 남았다 일러주는 한 마디 있다면
마지막 축복(祝福)이겠습니다
때를 정(定)한 그 분의 초청(招請)으로
보고 싶은 이 계신 곳 먼저 간다고
눈짓으로 말하는 단 둘의 식탁(食卓)을 준비(準備)해 두고
하루에 한 분씩 초대(招待)해
한 사람씩 손을 잡고 말하겠습니다
박복(薄福)하여 남은 시간
단 몇 시간(時間)도 무방(無妨)하겠지만
한 백 명 인사 드릴겸 짬이면 정말 좋겠습니다
예측(豫測)이 틀려 다급(多急)해지는 날 되면
한꺼번에 몇 분씩 함께 만나서
웃지도 울지도 말고
그렇다고 너무 심각하지도 말고
차 한 잔씩 권(勸)하겠습니다
우리 이 날처럼
믿음으로 다시 만나자는 단 한 마디
한가로운 가을 햇빛 코스모스 눈빛언어(言語)로
그동안 감사(感謝)를 나누는 잠깐의 시간(時間) 있다면
내 생애(生涯) 가장 큰 행운(幸運)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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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벽시계
정재영
양날의 가윗날로
종일 잘라내고 잘라내도
잘라낼수록
자라나는 시간의 둔갑
저 가위로
세월의 등도 도려내
멈추게 할 순 없는가
늘어난 얼굴의 주름 사이로
세월이 길 재촉하며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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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봄 달
정재영
발코니 넓힌 방 창틀 액자에
겨울이 끌고 가던 걸음 멈춘 달
목련(木蓮)에 젖어 창백(蒼白)한 빈혈기(貧血氣)
창(窓)에 비치는 살구꽃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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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봄이 오는 길에서
정재영
봄이 느린 걸음을 멈춘 산모퉁이
산 꽃 숨어 핀 흙무덤 앞에서
흰나비 한 마리 날고 있습니다
산그늘에 고집을 피우는
얼음덩어리 우리 사랑도
이만큼 견뎠으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사랑을 묻을 겨울 묘지 앞
봄을 解産잔치에
나비들 날개 짓과
푸르게 웃는 꽃 소리들은 모두
고이 가꾸어 온 당신의 몫인 것은
당신의
바람과
따스함과
촉촉한 입김 탓으로
사랑의 싹을 내밀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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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분원의 소묘
정재영
가랑잎 후다닥 떨어지며
하늘을 둘로 가른 날은
가슴이 얼음조각으로 쨍 부서지며
숨겨둔 이야기가 비취(翡翠)로 쏟아진다
강변(江邊) 달리던 가로수(街路樹) 길 멈추고
구름도 멈춘 허공(虛空) 끝 아래
메마른 갈대가 고개를 위 아래로 흔들어도
새들 사랑의 움막을 위해 흐르다 중지(中止)한 강(江)은
호수(湖水)의 자리를 넓힌다
짧은 하루는 산허리에 걸쳐
흔적(痕跡)으로 남아 있는데
강(江) 건너 이른 가로등(街路燈)
깜빡이는 눈으로 서둔다
강(江)은 멀리 끌고 온 이야기를
차곡 차곡 적고 있는 수면(水面)을
이제는 버려야 할 시간(時間)이라고
손을 내밀어 다독거리는 바람
쉬는 듯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호수(湖水)를 쓰다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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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비석
정재영
달은 닳았다가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오나
녹슬지도 닳지도 않는 시간(時間)의 흔적(痕跡)만
바람에 풀어지는 것일까
할미꽃 가는 허리 잔털에 비치는
아늑한 햇볕 손길처럼
평생(平生)을 지켰을 따뜻한 자존심(自尊心)
명함(名銜)보다 선명(鮮明)하게 새긴 이름
영원(永遠)히 저절로 내쉬고 들이킬 줄 알았던 호흡(呼吸)이
한 번 빠져나가 돌아오지 않는 매정(媒精)한 순간(瞬間)
차갑게 굳어진 가슴 한복판에
생전(生前) 불리던 다정(多情)한 소리를 문패를 보듬고 있네
사랑한다는 말처럼
해도해도 다하지 못해 침묵(沈默)하는 벙어리 냉가슴에
너무 길어 다 쓰지 못하는 서사(敍事)이야기를
한 줄로 응축(凝縮)한 단행 시로 조각(彫刻)한 암각화는
누구나 한번은 그려야 하는 단색추상 표현주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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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사랑의 초상화
정재영
애초에 옳고 그름을 만든 적 없어
어떤 경우에도
탓하지 않고 감사해지는 일
설명 불가능한 이론과
늘 곁에 있어
보고 만질 수 있는 실재
주근깨 하나라도 버릴 것 없는
바로
당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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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사랑이여
정재영
두리번거리며 찾아도
보이지 않던
곁에 계신 분
세월(歲月) 지나
노안의 작은 눈
지그시 감지 않아도
속마음까지 보이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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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사랑처럼
정재영
시(詩)가 무언지
알고나 쓰는 시인(詩人) 있을까
줄이고 줄이려다 정작 침묵(沈默)으로 말하는 마음을
해설(解說)해 준다고 숨겨둔 속마음까지 들을 수 있을까
가방끈 길다고 혀도 길어진 것일까
제 혼자 생각으로 재단(裁斷)하는 잔소리
수다스러워 엉뚱한 곳에서 헤멘다
꿈보다 해몽(解夢)이라고
음양(陰陽) 이치 다루는 사람이
떨리는 마음 설명(說明)한들
팔자마저 바꿔 사랑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하루 종일 울고 웃는 5월 넝쿨장미 얼굴처럼
당신에게 드리는 하소연 열지 못해
정작 보여주지 못한 마음
시(詩)로 만드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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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사명
정재영
파랗게 고여 썩지 않고
푸른 마음 태초를 품은 바다
너울 치는 몸부림으로
걸러내지 못하는 소금기 숨은 물맛에
하늘까지 붙들고 온 바람이 손을 내밀면
덩달아 솟아오르는 용틀임 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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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選擇과 評價
정재영
낮게 그러나
떨림의 초청은
꿈보다 상상이었다
넉넉한 눈으로 보아도
이어지지 않는 수 없는 생각을
발자국으로 찍어 그리는 절묘법 내 그림
검은 물감 범벅된 그림을 보고
조금만 그럴 듯 해도 썩 좋다고
침묵으로 괜찮다 지긋이 바라보는 당신
해몽이 좋은 제목으로
당신의 전시회에
작품 하나 걸고 싶다'
☆★☆★☆★☆★☆★☆★☆★☆★☆★☆★☆★☆★
《36》
섣달그믐 하루
정재영
지나간 그림자
삭아진 사연(事緣)이 가득하여
텅 빈 무대(舞臺)
마지막 장
무거운 막이 내려
고요가 소란(騷亂)을 덮는 순간(瞬間)
삼백 예순 날 이야기가
하루로 뭉쳤습니다
일 년 내내 어둠의 틈에 낀
연출자(演出者) 당신은
조용히 곁으로 다가와
맞닿은 서로의 가슴으로
하루로
한 해를 보듬고 있습니다'
☆★☆★☆★☆★☆★☆★☆★☆★☆★☆★☆★☆
《37》
성탄전야
정재영
기별 없는 흰 눈을
속도 없이 기다린다
북새통 거리 소식(消息) 텔레비젼은
난청(難聽)으로 혼자 바쁘고
선이자(先利子) 빚쟁이 독촉장(督促狀)처럼 날아온
멀리 사는 애들 성탄카드 앞에서
아내는 낡은 성경(聖經)을 소리 없이 읽지만
정작 기다리는 것은
천사(天使) 소리 대신 문(門) 소리다
눈 없이 더 차가운 날
아내에게 아무 소식(消息) 되지 못하는 겨울이 된 나는
이제는 흐르다 멈춘
식어버린 용암의 무거운 고요
아내와 문만
번갈아 쳐다본다.
☆★☆★☆★☆★☆★☆★☆★☆★☆★☆★☆★☆★
《38》
歲月
정재영
사진(寫眞) 보고 어제를 생각했고
거울을 보고 오늘을 깨닫는다
아마도 내일은
내 머릿속에 있겠지
사진 속 인물(人物)은 젊음 그대로이다
고생(苦生)과 희열(喜悅)과 사랑 등
추억(追憶)이 젖어 있고
거울 속엔
삶과 고해(苦海)로 출렁이는 바다
고해(苦海) 저쪽으로 세월(歲月)의 주름이 그어져 있다
나는 지금 흐르는 세월(歲月)에
조각배 하나 띄워놓고
피안(彼岸)의 세계(世界)로 열심히 노를 저어 가는 중이다
삶이 어두워 질 때면
밟고 왔던 세상(世上)을
한 걸음 한 걸음씩 돌아보게 된다
갈피갈피
기쁨의 눈물과 슬픔의 눈물
가슴 아파했던 순간(瞬間)들이
낡은 한편의 영화(映畵) 필림 처럼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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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歲月이 가도
정재영
벌써 입동 지났다 해도
눈 내리지 않으면
여전(如前)히 가을로 하기로 하였습니다
길거리 바닥에 낙엽(落葉) 쌓여 휘날려
가지 끝마다 단풍(丹楓) 몇 잎 매달려 있는 지금은
분명히 가을입니다
이파리 떨어져야 더 잘 보이는 감처럼
삭은 바람에 지워진 먼 사람
눈앞에 선명(宣明)히 인화(印畵)되는 지금
서쪽 하늘 물든 노을처럼
붉은 단풍(丹楓) 물든 가슴은
눈 없으면 언제나 가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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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소리의 벽
정재영
당신은 우주(宇宙) 끝
소리보다 빨라 날아가는 나의 눈빛이
가다가다 멈춘 끝에는
벽(壁)이 있었구나
당신에게 보낸 나의 속엣 말이
투명(透明) 속에 부딪쳐 메아리로 돌아와
다시 날아가서 미아(迷兒)처럼 헤멘다
당신의 첫 마디
나의 고막(鼓膜) 벽에서
연리지 처럼 얽혀 떨고 있는데
차마 다시 건네지 못한
곁에서 혼자 늙어 홍어처럼 삭은 말만
곡조(曲調) 없는 노래로 속으로 쌓인다
심장(心臟)이 북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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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소파
정재영
살짝 비틀어 쓰러지면 곁에서 기다리는
새벽은 언제나 푹 꺼진 곳이다
무언으로 수종을 드는 작은 탁자는
조촐한 반찬도 성찬이 되는 영주의 식탁이다
코앞에서 항상 충성스럽게 정성을 다하는
가수들이나 무용수가 대기하고 있는 낡은
텔레비젼은 폭군들도 누르지 못한 넘치는 호사다
팔 베고 누워 옆 눈으로 보는 작은 거실은
달리는 말도 가보지 못했던 사라진
지평선의 초원이다
길게 다리를 뻗어 눈을 감으면 이발소
의자 위처럼 아늑함의 잠이 덮치는
행운은 곧바로 수면마취 중독자가 된다
잠 못 깨는 마지막 그날 부서진 가루
옴팍한 산에 뿌리면 아무도 찾지 않는
상석 없는 깊은 산도 긴 소파자리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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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瞬間순간
정재영
낙엽 한 장 뚝 떨어져
차가운 땅을 부등켜 안고 있듯
긴 겨울이 짧은 가을을 잡고 있습니다
그리 보내면 안 될 귀한 날들
가을은 그리 지나갔습니다
기다리던 날이었지만
다시 기다림을 주고 가는
짧은 가을은
휘어진 시간(時間)을 이어 만든
원형(圓形)의 궤도(軌道)를 도는 열차(列車)가
그냥 스쳐지나 가는 간이역이라서
산다는 일은
우리에겐 언제나 가을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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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시실리
정재영
물 건너 비행장(飛行場)을 다녀올 필요(必要) 없는
시간(時間)을 잃어버린 곳
시실리(時失里)를 다녀오셨나요
신발 뒤끔치를 질질 끌며 그냥 걸어서
손을 길게 뻗으면 닿을
어슬렁거리면 쉽게 다녀올 수 있는 곳입니다
낮에 이름 없는 꽃들의 꿈을
밤에 이름 없는 별들에게
꽃 등으로 매다는 곳
누군가 있을 것 같지만
아무도 가보지 못해
돌아올 길 아직 만들지 못한 곳
시간(時間)들이 해찰하여
늙은 아들이
젊은 어머니를 만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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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十一月 하순
정재영
입동 지나
이른 눈 없는 날
이파리 떨군 붉은 감은
하늘이 그린 수채화다
나이 흔적을 다닥다닥 매단
은행열매 가로수도
가진 것 다 버린 빈순으로
세월을 뜨게질한 자수(刺繡) 평풍이다
하늘마저 푸른 까닭은
진물 나는 기다림으로
마음마저 먼 곳이 더 잘 보이는
원시(遠視)라는
노안(老眼)의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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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아버지의 계절
정재영
하늘 끝은 멀고 높이는 낮던 계절
추석고개 넘지 않아 푸름으로 가득한데
가슴은 서둘러 갈잎으로 마르는 들판
늦더위 모는 바람이 서둘러 끌고 오는 갈바람 속에
자식 농사로 보낸 낮고 긴 소리 가득하다
봄부터 겨울 길목까지
언제나 철없이 서리 내려
거친 숨소리로 버틴 바람 길목
바람 먹은 무기 되어
뼈마디 주저앉은 허수아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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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어느 날 작은 돌풍이
정재영
미풍만 불던 나의 초원에
당신은 돌풍으로 불어와
태풍이 되었습니다
멈추지 않는 바람에
나의 모든 생각은
머릿결처럼 휘날립니다
나의 초원 모든 풀도
당신이 붙든 손길로
몸부림치지만
정작 돌풍을 만든 당신은
그 눈 안에
고요히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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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어떤 소묘
정재영
산골 비탈 다랑이 자운영 꽃밭 하얀 토끼를 새끼로 알고
걸음을 멈춰 내려보는 구름떼들로
빛 가려 그늘진 해가
구름을 치우려 휘젓는 손길
놀란 구름이 떨어뜨린 빨간 이슬 몇 알을
햇빛 물든 초록 잎 작은 손으로 잡아
토끼 작은 입술에 넣어 주는
파란 하늘빛에 물든 검푸른 산 속
나지막한 황톳길 곁에 가을 잎 맥없이 진 날
빨간 열매를 잔뜩 매달아 둔 명감 나무 넝쿨에 걸린
하루 종일 잡힌 햇빛 발걸음
펑펑 내리던 눈발 휘날려
산과 밭은 하얀 토끼가 되어
따스한 침묵으로 졸고 있는 겨울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색으로 평평해 지는 것을
단색 침묵이 정확히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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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어떤 초상화
정재영
뜨거운 입김으로
하얀 종이에 물들이는 붉은 마음
수북히 쌓인 눈 속 꽃 한 송이
겨울 들판 하얀 생베조각을 뜯어
초록 이파리 손가락이 뜨개질한
진분홍 꽃잎 얼굴
차가운 바람이 마른 몸을 덥히고 가는
겨울 햇빛 얇은 그늘에서
도톰한 붉은 입술에 햇빛을 가득 채운 노란 꽃술
멀리 있는 봄을
서둘러 입맞춤하고 있는
겨울 모란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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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어릴 적 모두가 그렇듯
정재영
누구나 집에서 걸어서 하교에 갔듯
고향은 매일 매일 벗어나야 하는 곳이었다
첫사랑은 헤어져야 하듯
가난은 죄악이 아니어서 언제나 그리움
모든 배고픔은 그리움을 담보한 떠남의 출발점
모두 떠나 돌아갈 수 없어야 고향이다
갈 곳 잃은 외짝 철새가 아무리 날아본들
고향이란 늙은 나이에 날아온 거리 먼 둥지
실컷 부리다 팔아버린 빈 헛간에 남긴 소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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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여름 새벽
정재영
소리만 남기고 지나간
소낙비로 급히 식힌 열기의 밤
남은 마음은 도리어 후끈하여 시원하다
열대야로 찾아온 사람 마음 속 가마에서
밤새워 구워 만든 선명해진 초상화 도자기를
밤잠 설친 헛 바람 소리가 아침 햇살에 얹혀 식히고 있다
오늘 하루가 다시 더워져 풀어져도
하루의 시작을 잡은 당신을
다시 기다려야 할 이유와
하루 동안 나눌 은밀하고 새로운 밀어가
푸른 바람으로 휘감겨
바람보다 더 앞서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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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연비(燃費)
정재영
경차(輕車)에 너무 실었다
버릴 것까지 실렸다
기름마저 무겁다
길도 비포장(非鋪裝)이다
당신을 향한 가슴 속 길에
솟아나는 주유소(注油所) 있나
타도 타도
줄지 않는 촛대처럼
가도 가도
줄지 않는 주유 눈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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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외길
정재영
반환점(返還點)이 없는 길을 가는 사람은
외톨이가 아니다
생각의 딱지들이 말라 떨어진 자리에
새로운 그리움이 대신 돋아나
신호등(信號燈) 하나 없는 길 끝까지 동행(同行)함은
손 붙들고 가는 누군가 곁에 있음이다
깊은 밤 숨죽인 월하향(月下香)의 손길은
속으로 난 깊숙한 길을 가며
생각을 흔드는 물결을 끌고 간다
휴대폰 전원(電源)이 끊어져 있다는 소리처럼
끊어지지 않는 반복(反復)의 호출(呼出)을 보내도
생각이 멈추는 곳에서 돌아오는 메아리는
종점(終点)이 가깝다는 신호(信號)다
목줄에 잡힌 사랑이라는 포로(捕虜)는
한 번 올려놓으면
하얀 지팡이를 붙들고서라도
깔려 있는 궤도(軌道)만을 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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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욕심
정재영
새는 하늘 공중에서
천천히
날고 있는데
땅바닥에만
코를 대고
킁킁거리며
헤매며 쏘다니는
사냥개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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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우수의 강
정재영
추운 겨울 우리는 갇힘으로 따뜻했습니다
무심히 얹혀 흐르는 시간의 물결은 절기가
만나는 여울목이라서 서로 부비며 회오리친
뜨거웠던 이야기를 한 조각 얼음으로 녹여
그 자리에 강 안개로 풀어 두었습니다
이제는 하구언도 멀지 않아 봄빛 시샘
정도야 눈감아버립니다
추운 날이 풀어지는
안개 마음처럼 뜨거움이란 결국 식어져
없어지는 것을 알고 겨울과 봄이 잡은 강에
그리움이 뭉친 작은 섬을 남긴 청둥오리는
떠날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잊었던 사람의
열기가 얼음을 녹이는 순간에 강둑 나무마다
이파리로 손짓을 하며 이별을 달래려 합니다
아쉬운 떠남으로 강은 항상 슬픈 얼굴입니다
부르는 이에게 매정하게 끌려가는 강 걸음은
물결만 뒤로 밀어 흐른 듯 멈칫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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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일 마치고 가는 길
정재영
운동 삼아
청계천을 걸어 왕십리역까지 간다
몸도 시간처럼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여
집에 가는 길은 거의 오기다
누가 앞질러 가려면 덩달아 속도를 낸다
뒤 처지지 않으려 발악을 한다
중간에 지하철 갈아타도 충분한데
끝까지 걸어 분당선 종점 전철에 앉는다
체념도 안 되고 포기할 수도 없는
곁에서 흐르는 물결처럼
손잡고 이끌어 앞서주는 물소리 흐름으로
힘들어도 가야하는 길을 같이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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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임재
정재영
지금 보이는 별이 몇 억 광년이라니
빛으로 억 년도 넘는 곳에서 온다면
눈으로 보이는 바로 앞에 있는 물건도
이미 시간 지나간 빛
말소리마저 시간 걸려 온다 하니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모두
언제나 지나간 허상입니다
실상(實像)은
오직 손잡은 지금뿐
속에 계신 당신께서만
오늘을 같이 계시는 분
우주보다 멀어서 보이지 않던
수억 광년 당신께서
어느 순간 내 속에 와
보이지 않는 한 분께서만
지금 함께 사시는 분입니다
☆★☆★☆★☆★☆★☆★☆★☆★☆★☆★☆★☆
《57》
자유로
정재영
누가 이름을 붙였을까
나뭇가지 숨죽여 바람 없는 날
길 위에 흔들렸네
길 끝 다리처럼 오가지 못하는
건너편이 죽음 후 세상이라면
속도제한 표 가득한 통제 길 위에
없는 자유는 이 세상 이후일까
마른 산천이 차창에 노을로 가까워지는 날
촉촉한 석양이 느릿하게 젖어드는
다른 강이 끌고 가는 서편 강 물길에
자유라는 이름의 쪽배를 띄워 보낸다
☆★☆★☆★☆★☆★☆★☆★☆★☆★☆★☆★☆★
《58》
장마철 사랑
정재영
온 종일 검은 구름으로 막더니
하늘이 그럴 줄 알았다
쏟아지는 폭우에 실린
머리 푼 광기
나뭇가지 꺾어내려는 듯
덩달아 몸부림치는 바람의 비정
언제 그랬냐는 듯 간혹
배시시 햇빛 얼굴 보여주어도
덩달아 끈적거리는 속마음은
여전히 폭염의 중탕
잠시 식혀 다독거려 볼까
샤워 꼭지 돌리면
작은 폭우로 쏟아지는 물줄기
얼굴을 온통 막아
숨쉬지 못하기는
매양 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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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재회
정재영
이팝나무 아래로
꽃이 첫눈처럼 지던 날
당신은 하얀 얼굴 미소로 하늘을 바라보고
나는 시린 눈으로 흰 꽃 당신을 바라보았네
이제 잔설 머리 당신은
당신이라는 성(城)을 가진 성주
우리는 서로 포로가 되지 못하여
나는 당신의 잔치자리 맨 뒤끝자리에 앉아 있고
당신은 성벽 위 파수대 멀리 앉아 있어
그 날처럼 곁눈질로 바라만 보네
당신이 있는 곳은
여전히 하얀 꽃 수북히 쌓였던 빈자리
나는 하늘대신
허공만 바라봐야 하네.
☆★☆★☆★☆★☆★☆★☆★☆★☆★☆★☆★☆★
《60》
짝퉁
정재영
짜가와 진품의 기준은 모방과 창조
재현이라는 명분의 청자도 실은
진품처럼 그럴싸해도
모방이라는 이름의 그냥 짝퉁이다
지연은 사시사철 진품만 만드는데
나의 심장은 뜨거운 피로 가득해도
긴 혀 속에 차가운 피만 보내어
혀 굳은 벙어리가 된다
슬픈 나의 시
나의 사랑
세상에 단 한 줄 당신을 향한 노래마저
창조라는 이름으로 표절을 한
태초에 잃어버린 원작의 변주곡이어서
당신 앞에 보내는
고마워서 그만큼 미안하다는 침묵의 눈빛만
짝퉁이 아니다.
☆★☆★☆★☆★☆★☆★☆★☆★☆★☆★☆★☆★
《61》
치매와 천치
정재영
노랫말이나 시를 다 외는 것 아무것 없고
제목 말뜻 제대로 아는 것 없듯
머물렀던 장소 이름뿐
이어진 그 길 다 잊지 못하네
당신과 걸어온 길 멀어도 나 혼자 아닌데
서로 속삭였을 말
치매가 아니라도 모든 걸 다 기억 못하네
기나긴 세월에 눌려 주름진 길
굽이굽이 돌아온 모든 날
그냥 웃고만 있는 당신을 천치 웃음으로 바라보면
딱 한 가지 사실 분명해지네
당신은 항상 곁에 계셨고
나는 당신이 없는 듯
여전히 찾아 헤매고 있네.
☆★☆★☆★☆★☆★☆★☆★☆★☆★☆★☆★☆★
《62》
침몰하는 도시
정재영
도시는 고요로 간혹 마른번개 번쩍이는 불 꺼진 무대
막과 막 사이에 긴장만 길다
땅은 하늘로 올라가
사람들은 동작을 멈춰 허공에서 허둥대는 조각이다
나무뿌리는 하늘을 잡고
가지는 땅을 짚고 물구나무 서 있다
집마다 벽은 허물어지고
신호등은 모든 불을 켜고 있다
한 줌 공기가 끌고 간 곳에
음식점 모형들만 웃고 있다
도시를 물로 가득 채운
당신에게 묻는다
지혜의 숲 공원을 만든 자 누구인가
호수에 정화조를 묻는 자 누구인가'
☆★☆★☆★☆★☆★☆★☆★☆★☆★☆★☆★☆★
《63》
해변에서
정재영
지는 해 따라 어둠이 무거워질 때
노을에 끌려간 밀물이
섬으로 점을 찍어 느낌표를 펼쳐 놓았다
허공을 휘도는 바닷새 한 마리
갯별에 침묵의 망을 씌워
고요도 넓다
조수 너울처럼
하루 종일 밀고 당긴 집착을 지우려
어둠은 지우개질에 몰입하고 있는데
이제야 갈대 흔들어
속마음 보낸들
무엇을 어찌 하려는 건가
석양을 풀어서 색칠한 방파제에 막혀 바람도 잦아들고
잔물결에 흔들리던 생각도 멈춘
마음자리 종이에
눈발이 갑자기
서러움으로 휘몰아치는 것은
누구 탓으로 돌려야 할까.
☆★☆★☆★☆★☆★☆★☆★☆★☆★☆★☆★☆★
《64》
섣달
정재용
바람이 손가락 홀태로
이파리를 훑고 간 가지 끝에
작은 등불이 분주히 꿈을 켜고 있는 거리
겨울밤은
고요마저 얼은 조용한 시간이
어둠의 구멍으로
모래시계처럼 강물로 흘러내립니다
오늘 발 담근 강물이
어제 그물이 아니듯
떠나고 다시 오는 절기(節氣)처럼
철새도 작년(昨年) 그 새가 아닐지라도
당신만
작은 등불 켜 있는 정원(庭園) 그곳에
언제나 소리 없이
조각상(彫刻像)으로 한 해를 서 있습니다'
☆★☆★☆★☆★☆★☆★☆★☆★☆★☆★☆★☆★
《65》
가고 오는 마음
정재영
떠나면 하늘과 땅은 멀고멀어
마음도 오가지 못한다 해도
아버지 부르라 하신 분이
어찌 부모 마음 이치를 모르실까
기일(忌日) 딱 하루
한 번 정도야 허락될 것 같다
손 한 번 제대로도 못 흔든
황급하게 가신 길
다시 돌아온 늦은 시간
한 번쯤 다녀오라 하실 것 같다
눈감고 부르는 마음 들으시고
이승과 저승을 나누는 이 밤 지나 해 뜨기 전
서둘러 애들 집에 한 번
다녀 오라 하시겠다
바리바리 보따리 싸들고
두 분 함께 상경하셨던 날처럼
평생 어머니 아버지 그 힘으로
얘야, 하시며 오실 것 같다.
☆★☆★☆★☆★☆★☆★☆★☆★☆★☆★☆★☆★
정재영 시인 약력
【조선문학】신인상(1998)
【현대시】등단(2005)
★ 한국기독시문학학술원 원장
★ 한국기독시인협회 회장(역)
★ 한국문인협회 특별위원
★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자문위원
★ 한국시인협회회원 중앙위원
수상
☆ 조선시 문학상
☆ 기독시 문학상
☆ 장로 문학상
☆ 총신 문학상
☆ 중앙대 문학상
☆ 현대시 시인상
☆ 미당시맥상
시집
①《흔적지우기》
②《땅에 뜬 달》
③《옹이 속의 나무테》
④《濃霧(농무)》
⑤《유리숲을 걷다》
⑥《꿈꾸는 물의 날》
⑦《어두운 밤에야 너의 소리를 듣는다》
⑧《벽과 꽃》
⑨《모퉁이 돌면》
⑩《짧은 영원》
⑪《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
⑫《자유롭게 그러나 고독하게》
⑬《드론, 섬을 날다》
⑭《소리의 벽》
⑮《마이산》
저서
《현대시의 시법과 창작실제》
《문학으로 보는 성경》
《융합시학》
역서
《효과적인 성경공부》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32길 2
정치과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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