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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성령과 지혜로 충만의 달☜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창16:1-10절) 인간의 방법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인간적(人間的)인 방법이 쓸모가 있고, 실제적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옛날 고대(古代) 그리스에 콜레라가 퍼졌을 때, 이것은 신(神)의 진노라고 생각해서 아무런 대책 없이 기도만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히포크라테스 같은 사람은 병(病)에 걸린 사람들을 일일이 조사해 보았더니, 그들이 모두 같은 우물물을 사용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히포크라테스는 콜레라는 신(神)의 진노가 아니라, 물에 의해서 전염되는 전염병이라고 주장했는데, 그 당시 그리스 사람들은 히포크라테스가 *미쳤다*고 조롱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신(神)의 영역이라고 생각되던 것을 파헤치고 연구를 해서 인간에게 유익한 지식을 많이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면, 옛날에는 아기들의 출산을 돕는 것은 산파들이 했었는데, 이제는 시험관 시술(施術)이라든지 제왕절개 같은 방법을 통해서 많은 아기들이 태어나기도 하고, 또 옛날에는 죽을 수도 있었던 많은 산모와 아기들을 살리기도 하고 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한 암센터에서 일하는 한국인 의사는 말하기를 한국 사람들은 암에 걸리면, 꼭 앞으로 자기가 얼마나 살 수 있느냐고 물어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는지는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시는 것이지, 의사가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환자들을 치료해보면, 의학적으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기적으로 치료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크리스천 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적인 방법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구원(救援)에 대한 영역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우리 한국 교회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교회가 커지게 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데려오거나, 혹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헌금을 많이 내게 해서 예배당을 크게 지어서 교인들의 수를 늘리거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적인 방법을 쓰면, 부흥의 효과는 빠르고, 교인들의 수가 빨리 증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교인들의 마음속에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유명한 시카고에 있는 빌 하이벨스 목사의 월로크릭 교회의 사역자들은 어느 날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거기서 *우리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즉 그들이 그동안 해왔던 교인 훈련 프로그램이나 제자 삼는 사역이 진정한 교인들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브라함에게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주시지 않으니까 아내(사라)의 말을 듣고 여종을 첩으로 받아들여서 아이를 가지게 되는데, 그 아이는 전혀 믿음이 없는 들나귀 같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이였던 것입니다.
Ⅰ.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 약속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이라고 하면, 아마도 수만 명이나 수십만 명 되는 후손을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아브라함은 나이 팔십 오세가 되도록 단 한 명의 자식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현실의 차이인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아내(사라)는 가나안에서 산지. 이미 십년이 되었을 때, 아마 이 십년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데드라인(deadline)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십년이 되면, 아이가 생기겠지? 하고 기대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려 십년을 기다렸지만, 자식이 생기지 않으니까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잘못 알아들은 것이 아닐까?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나름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면서 마음속으로 데드라인(deadline)을 정해 놓고 기다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으면, 믿음이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더 참지 못했던 쪽은 아브라함의 부인(사라)였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에게‘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나의 여종과 동침해서 아이를 얻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라가 이미 여자로서 임신을 할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남편 아브라함도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더 늦기 전에 *나의 여종과 동침해서 아이를 가지자*고 제안을 했던 것입니다.
이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은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해 놓고서 이렇게 늦도록 아이를 주시지 않으셨을까? 그것을 우리가 당장은 알 수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얼마나 잘 견디는지, 인내심을 테스트(test)해보기 위해서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과 사라도 이 부분이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실 자식(子息)은 믿음의 자식을 말하는 것이고, 믿음의 자식은 반드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만들어져야만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아이를 가진다고 해서 전혀 죄(罪)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라가 말했던 것처럼 본부인이 임신이 되지 않을 때, 주인이 여종을 첩(妾)으로 삼아서 아이를 낳게 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적인 방법들을 많이 쓰고 있고, 또 그것이 유익할 때도 있습니다.
16:2절)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그 사회의 일반적인 관습(慣習)을 전혀 무시할 순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 살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관습(慣習)이나 문명(文明)의 방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부분에서는 세상적인 방식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우리의 구원(救援)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救援)하는데 있어서는 인간적인 방법이 개입되는 것을 일체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구원(救援)이 100%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그래서 구약 율법(律法)에 보면, 구원(救援)과 관계되는 부분에는 모두 기름을 바르셔서 거룩하게 구별하셨는데, 이것은 적어도 여기에는 인간의 방법이 개입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Ⅱ.인간적인 방법의 결과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내가 더 늦기 전에 인간적인 방법을 써서 아기를 가지자고 했을 때, 선뜻 그 말에 동의해서 실천에 옮겼습니다. 이때 사라에게는 하갈이라는 여종이 있었는데, 아주 젊고 튼튼한 여성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이 해주실 것을 기다릴 때에는 무려 십년을 기다려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방법을 쓰니까 전혀 기다리지 않고, 즉시 응답이 나타났습니다. 즉 하갈은 아브라함의 첩(妾)이 되자 말자 곧바로 임신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인간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미련하며, 얼마나 어리석게 보이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아도 젊은 여자를 첩(妾)으로 얻으니까 바로 즉시 임신이 되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약속(約束)을 기다린다 하여 무려 십년을 질질 끌어도 응답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때 아브라함과 사라가 얼마나 기뻤고 좋았겠습니까? 아마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모두 이젠 우리 집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리겠구나 하면서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리나 이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를 두고 사라와 하갈 사이에 갈등(葛藤)이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16:4절)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여기에 보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이 사라의 말을 듣고 인간적인 방법을 썼을 때. 너무나도 쉽게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첩(妾)하갈은 오래 기다리지도 않고, 즉시 임신을 했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는 아브라함의 가정 안에서 평화가 깨어지고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갈이 자기가 임신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늙도록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주인 사라를 업신여기게 되었습니다.
아마 하갈은 자기가 임신하게 되니까 자기가 사라를 제치고 아브라함의 정식 부인(婦人)노릇을 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갈은 사라를 무시하거나 업신여긴 것입니다. 마치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라의 마음을 굉장히 아프게 했고, 결국 사라는 이것을 참지 못해서 남편 앞에서 분노(忿怒)를 터트리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즉 아브라함과 사라는 서로 의논을 해서 이 일을 했고, 그 결과 자신들이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 자기들 생각으로는 하갈이 임신을 하게 되면, 하갈의 배를 만져가면서 부부가 서로 기뻐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아무 말 없이 여주인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던 하갈이 임신을 하자 말자 180%싹 태도가 달라진 것입니다.
즉 하갈은 여주인을 무시했고, 눈에 뜨일 정도로 사라를 멸시하는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기들이 원하는 것은 가질 수 있게 되었지만, 가정의 평화가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방법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방법을 쓰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을 써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가지려고 했을 때, 이상하게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심을 잃어버리고,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멸시를 당하게 됩니다.
16:5절)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왜 사라가 자기 여종으로부터 멸시를 당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하라고 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네 상속자가 태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다면, 사라는 아무리 사람의 머리로 불가능해 보여도 그 말씀을 믿었어야만 했습니다. 즉 그 시기나 방법은 알 순 없지만, 좌우간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몸에서 상속자가 난다고 했으면 난다고 믿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믿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생각하고, 그것으로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했을 때, 사라는 생각지도 못하게 여종에게 무시를 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라를 멸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라는 다시 아브라함을 찾아가서 그 무시당한 것을 분풀이 했습니다. *내가 받은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사라는 자기 남편 아브라함에게 분풀이를 했는데, 아브라함이 모욕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부인이 아무리 인간적인 방법을 제안했더라도 중심을 잡고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했어야 하는데, 아내의 인간적인 방법의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붙들지 않고, 인간의 말을 들은 하나님의 종은 자신도 멸시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종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면, 이때는 하나님의 종이나 세상 사람이나 차이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물론 인간적인 방법을 쓴다고 해서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이 세상의 것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기다려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응답받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福)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적으로 응답받고, 믿음의 큰 축복(福)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부인(婦人)을 주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무조건 남편이 자기 부인(婦人)의 말을 들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남편을 신앙적으로 조언(助言)해주고, 또 위해서 기도해주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은 부인(婦人)의 말을 분별하고, 결정을 해야 합니다. 즉 아무리 부인(婦人)이 하는 말이 세상적으로는 맞는 말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과 맞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야 하고,또 마음 상하지 않도록 잘 설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가 인간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가진다면, 교인들의 마음속에는 목회자에 대한 존경심이 없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종의 자세라기보다는 기업체(企業體)사장이나, 세상 사람들이 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아무리 누가 뭐라고 해도 끝까지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서 응답을 받는다면, 교인들에게 말할 수 없는 신뢰(信賴)를 받게 됩니다. 즉 *아, 우리 목사님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분이구나 그렇다면 다른 모든 일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 다 해결될 것이다*라는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아주 다양한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세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임보다 훨씬 무질서하고, 예의 없는 집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적인 방법을 썼는데, 일이 형통하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자기가 하던 일을 중단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합니다.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 앞에서 여종 하갈의 문제를 두고 분통을 터트리니까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사라에게 다 떠넘겨버렸습니다.
16:6절)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대개 남편들은 집에서 자기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 다툼이 생기면, 빠져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어머니를 편들려고 하니까 자기 부인이 섭섭해 할 것이고, 자기 부인을 편들려고 하니까 어머니가 배신감을 느낄 것 같으니까 비급하게 뒤로 빠져 버리게 됩니다.
이런 행동은 남자로서 무책임한 것입니다. 일단 남자는 어느 쪽에서 와서 울고불고 하소연을 하면, 일단 양쪽 이야기를 다 들어본 후에 지나치다고 생각되는 쪽을 타이르든지 해서 어느 한 쪽도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두 여자 사이에 중재하는 것을 포기하고, 아내 사라에게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떠넘겨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아마도 사라가 어느 날 하갈을 불러서 심하게 야단을 쳤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갈은 사라의 말을 듣지 않고, 화가 나서 임신을 한 채로 도망쳐버렸습니다. 하갈이 도망쳤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붙잡지 않았을 때, 이들은 한 여종에 의해서 무시를 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고, 그들이 원하던 것마저도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셔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2:30) (경멸(輕蔑)=깔보고 업신여김)
아브라함과 사라는 인간적인 방법을 써서 자신들이 원하던 것을 얻은 것 같았지만, 결국은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집은 여종의 도주로 완전히 수습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개입해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사랑하셔서 이 가정이 더 이상 파괴되고, 상처 입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천사가 도망을 치는 하갈에게 나타났습니다.
16:7-8절)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곧 솔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사자(使者)의 질문은 우리 모든 인생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중요한 질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생에게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느냐*고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지는 알지만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모르고*있습니다. 하갈은 사라를 피해서 임신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울며 열심히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갈에게는 갈 수 있는 곳이 없었습니다. 하갈은 여주인의 야단을 듣고, 너무나 화가 나서 대책도 없이 가출(家出)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갈은 자기가 이런 식으로 계속 가면, 어떻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하갈이 이런 식으로 계속 간다면, 분명히 어느 남자에게 붙들려서 더 무시무시한데 종으로 팔려가게 되거나, 죽도록 두들겨 맞거나, 매춘부(賣春婦)로 팔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지금 하갈이 가고 있는 길은 애굽으로 가는 길인데, 그 샘물부터 무서운 죽음의 사막이 시작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자(使者)가 광야 샘 곁에서 하갈을 만나서 말씀하십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내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하나님의 사자(使者)는 하갈이 아직 위험 지역에 들어가기 직전에 하갈을 만나서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하갈은 아무도 자기를 모르는 줄 알고 있었는데, 자기 이름을 정확하게 아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하갈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이것은 이 세상을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생들에 대한 하나님의 질문이기도합니다.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느냐* 다시 말해서 *너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으며 앞으로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향하여 던지시는 질문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14:12)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 우리는 생명을 건질 수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위기의 순간을 겪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때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느냐?*
아마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행복(幸福)을 위해서 살아왔으며, 또 그 야망(野望)을 위해서 살아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신기루를 따르는 인생입니다. 광야에서 신기루를 따라가다가는 결국 목말라 죽든지, 강도(强盜)를 만나든지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使者)는 하갈에게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하셨습니다.
*너는 지금 무엇 때문에 이렇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가출을 해서 도망치고 있으며 이대로 가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는 것입니다. 지금 사라가 도망치는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①아이를 빼앗기기 싫은 것이고, ②화가 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使者)는 *그러면 이렇게 계속 가면, 아이를 빼앗기지 않고, 목숨을 건질 자신이 있느냐?*고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使者)는 하갈에게 가장 안전한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갈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16:9-10절)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하나님의 천사는 하갈에게 현실을 인정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그가 살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언젠가는 하갈이 아브라함의 집을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가 아닌 것입니다. 지금은 하갈이 성질(性質)을 죽이고, 그 집에서 복종(服從)하는 것이 자신이나 아기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즉 하갈이 자존심(自尊心)만 조금 버리면, 얼마든지 살 수 있고, 복(福)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에게 교만(驕慢)을 버리고,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Ⅲ.아브라함의 첫 아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서 드디어 그렇게 기다리던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는 분명히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이상하게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16:11-12절)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 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하나님의 천사는 이스마엘이 마치 *들 나귀*같은 기질(器質)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들 나귀는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지만, 팔레스타인에는 야생마(野生馬)와 같이 들판에 자주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들 나귀의 특징은 너무나 고집이 세고, 기질이 강해서 어느 누구도 잡아서 길들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마엘은 아무리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들어도 말씀으로 길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은 말씀의 틀에 매이는 것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호세아선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홀로 떨어진 들 나귀처럼 앗수르로 갔고. 에브라임이 값 주고 사랑하는 자들을 얻었도다(호8:9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무리 말씀을 주시고, 고난을 주셔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망(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거기에 복종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틀에 매이는 것을 너무나도 싫어합니다. 그 대신 자신들의 목표(目標)나 야망(野望)을 따라서 끝없이 가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예수님은 마11:28절)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들 나귀같이 길들여지지 않는 기질을 가지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허무(虛無)이고, 인생의 피곤(疲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예수님의 멍에를 매어야 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의 멍에인데, 이 멍에는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평안(平安)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부러워하는 것이 무엇일까? 이 미친 광란(狂亂)의 춤을 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들에게는 평안(平安)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요14:27절)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는 것은 기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이제 우리에게 만족을 주시고, 평안(平安)을 주실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으로부터 충만한 은혜와 위로를 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아멘
찬송가 412장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오늘의 묵상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 예배 9월 11일(주일)
*매일 새벽 4-5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집시다.*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5) 오늘의 기도제목 ▣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주님! 셀(cell)공동체, 예배공동체, 선교공동체로 부흥.성장케 하옵소서.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고 하신 주님! 내게 맡겨주신 재물과 나의 생명 주님께 드려 도구로 사용되기를 원합니다.아-멘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 교갱원의 엄격한 규칙을 지켜 낙오자 없이 모두 성숙한 복된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 癸卯年 *신실하고 충성된 일꾼을 세워 성장하는 해* ※후반기는 필(必)히 행정서식을 작성제출해야 교갱원소속 A급셀(cell)로 자립 새출발 할 수 있습니다.(정착완료. 양식보존. 새벽기도. 교갱원설립후원.춘추심방.실명과 소통) 교갱원은 1단계 묵상, 생명의 양식과 필수과목(26과). 2단계 생명의 양식과 전도학교(13과).3단계 생명의 양식과 청지기 대학(17과)으로 정예부대가 됩니다. 누구든지 전화신청받습니다(유료 : 각 교재 1과당=1만원, 방법 : 교갱원 설립 때까지 카톡영상으로) 교갱원카페.카톡.천국백성이 은혜받고 감사하며, 기도로 화답하는 것은 기쁨의 열매. 후원계좌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 내용)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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