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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유대인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이자 통치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유대인의 역사와 철학에 놀라운 족적을 남겼으며,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후 거의 2,000년이 지난 지금도 로마 황제이자 군 사령관,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현대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여전히 예상치 못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로마 제국의 전성기에 통치했던 그는 대중을 위한 저술가가 되려 한 적이 없었지만, 여전히 수백만 명의 독자를 끌어모으고 있습니다. 그리스어로 쓰여졌으며 출판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던 사적인 성찰을 모은 그의 저서 『명상록(Meditations)』은 여전히 인쇄되고 판매되며, 놀라운 열의로 널리 인용되고 있습니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의 국경을 방어하고, 장기적인 전쟁을 수행하며, 고대 세계를 통치하는 데 따르는 일상적인 요구를 처리하는 등 제국의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수년에 걸쳐 이 성찰들을 썼습니다.
오늘날 그의 스토아 철학적 통찰은 회복탄력성과 자기 수양의 지침으로 소개되며, 『명상록』은 잘 사는 법을 알려주는 시대를 초월한 지침서로 꾸준히 칭송받고 있습니다. 타임지는 이 책을 “자기계발의 고전”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는데, 이는 로마 황제 중 극소수만이 상상할 수 있었을 만한 영예입니다.
유대인의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는 중대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이 매혹적인 로마의 철학자 황제에 관한 유대인 관련 사실들을 소개합니다.
탈무드에 등장하는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본명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Marcus Aurelius Antoninus)였으며, 유대 전통에서는 그를 탈무드에 언급된 자비로운 로마 통치자 안토니우스(Antonius)와 동일합니한다. (일부 학자들은 안토니누스를 엘라가발루스(Elagabalus) 황제를 비롯한 다른 로마 지도자들과 동일시하기도 합니다.)
전승에 따르면, 훗날 황제가 될 안토니우스는 갓난아기 시절, 그의 어머니와 위대한 유대 지도자 시몬 벤 감리엘 2세(Shimon ben Gamliel II) 랍비 사이에 일어난 특별한 사건을 계기로 유대인들에게 깊은 애정을 품게 되었습니다.
당시 시몬 벤 감리엘 랍비와 그의 아내는 갓 태어난 아들 예후다(Yehuda)를 두고 있었는데, 그들은 유대인의 삶을 제한하는 로마 제국의 가혹한 칙령을 무시하고 아들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이 문제로 로마 당국에 소환된 부부는 아기를 데리고 로마로 향했습니다.
라비 시몬 벤 감리엘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지혜와 자비로 유명했으며, 여정 중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었는데, 안토니우스의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이에 그녀는 대담한 행동으로 자신의 갓난아기를 예후다와 바꿔치기했습니다.
라비 시몬 벤 감리엘과 그의 아내가 로마 재판관들 앞에 아기 안토니우스를 데리고 나섰을 때, 당국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이는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석방되었고, 귀국길에 두 아기는 다시 원래대로 바뀐 채 돌아왔습니다. 그 순간, 두 어머니는 두 아들이 평생 친구가 되기로 맹세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이후 서기 161년에 삼촌을 계승하여 로마 황제가 되었습니다. 한편 예후다는 이제는 랍비 예후다로 불리며, 그의 위대함 때문에 단순히 “랍비”라고만 불리었습니다. 그는 서기 163년에 아버지를 이어 이스라엘 땅 유대 민족의 지도자인 나시(Nasi)가 되었습니다.
각자의 세계에서 저명한 지도자로서 랍비와 안토니우스는 철학에 대한 공통된 사랑으로 묶여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탈무드에는 안토니우스가 통치 문제에 대해 랍비 예후다의 조언을 구했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땅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 시기는 흔히 이스라엘 땅에서 유대인의 삶이 꽃피었던 황금기로 묘사됩니다. 로마 당국은 대체로 유대인의 생활이 거의 간섭받지 않고 지속되도록 허용했습니다.
이 시기, 랍비 예후다 나시는 갈릴리의 베이트 쉐아림(Beit She’arim)에 주요 예시바를 설립했으며, 이곳은 유대인 지적 생활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스라엘 땅에서 기독교인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했지만, 유대인들을 대상으로는 같은 방식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스라엘 땅을 한 번 이상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황제로 즉위 후 그가 취한 첫 번째 조치 중 하나는 파르티아 제국(현재의 이란, 이라크, 중앙아시아)에 대한 전쟁을 벌이는 것이었으며, 이때 이스라엘 땅을 군대를 집결시키는 전진 기지로 활용했습니다. 이 원정에서 돌아온 로마 병사들은 전염병을 퍼뜨렸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스라엘 땅의 유대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여, 그들이 병사나 다른 이들에게 희생양으로 삼히지 않도록 했습니다.
한편, 후대의 로마 역사가 마르켈리누스(Marcellinus)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유대인들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품고 있었다고 기록하며, 그가 유대인들을 다른 여러 천대받는 소수 집단보다 “더 나쁘다”고 여겼다고 썼습니다. 이런 기록과 관련하여, 175년, 이스라엘 땅을 포함하는 시리아의 로마 총독 아비두스 카시우스(Avidus Cassius)가 스스로 황제를 자칭했습니다. 당시 많은 현지 유대인들이 그의 반란을 지지했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극도의 잔혹함으로 이 반란을 진압했으며, 카시우스와 그의 유대인 지지자들 다수를 살해했습니다.
스토아 철학과 유대교(Stoicism and Judaism)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열한 살 때 고대 로마 철학자들의 독특한 복장을 차려입기 시작했습니다. 철학과 예술을 탐구하며 보낸 청년 시절을 거쳐, 그는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을 삶의 지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스토아 학파는 우리 각자가 유한하고 제한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사우스 캘리포니아 대학교(USC) 철학대학 학장이자 철학 교수인 랄프 웨지우드 교수는 설명합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며, 우리는 그 두 가지를 구분하여 인식하고 각 영역에 대해 서로 다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삶의 목표입니다. 즉, 이러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스토아주의는 두려움, 분노, 슬픔과 같은 감정을 진정으로 중요한 것에서 벗어나게 하는 ‘비이성적인(irrational)’ 방해물로 간주합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평온함(ataraxia: 그리스어로 아타락시아)이 인류의 최상의 목표여야 한다는 스토아주의적 이상을 따랐습니다.
스토아 철학의 일부 측면은 호기심, 우리 주변의 세계에 대해 배우려는 의지, 자기 인식 등을 포함하여 유대교 사상과 유사점을 보입니다. 그러나 유대교는 근본적인 면에서 스토아주의와 차이를 보여 줍니다.
스토아주의가 변할 수 없는 운명(unalterable fate)을 강조하는 반면, 유대교는 인간의 행동력(power of human action)을 강조합니다. 즉, 각 사람은 선택, 친절, 유대교 학습, 자선, 선행, 기도를 통해 자신의 삶을 형성하고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유대교는 각 개인이 성취해야 할 독특하고 절실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스토아 철학,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는 유대교의 신에 대한 개념과, 모든 사람이 우주에서 동등하게 중요한 일부이며 오직 자신만이 수행할 수 있는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이해가 전혀 없습니다.
거의 2,000년이 지난 지금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여전히 끝없는 매력을 지닌 인물로 남아 있습니다. 유대교의 역사와 사상을 통해 바라볼 때, 그의 삶은 의미 있는 연결점과 깊은 대조를 보여주며, 그의 사상이 왜 여전히 공감을 불러일으키는지, 그리고 유대교가 어디에서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By Dr. Yvette Alt Mi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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