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73
1월17일[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연중 제2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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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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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xJ1XvKoAexM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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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물고기가 바다로 돌아가듯이 끊임없이 사막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보다 주님께 가까이 다가서고, 더 주님을 깊이 느끼고, 더 주님을 잘 따르기 위해 깊은 광야나 사막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메시아 오심을 준비했던 구약 시대 마지막 대예언자로서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를 잇는 가교 역할에 충실했던 세례자 요한도 깊은 유다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아무도 없는 황량한 광야에서 최소한의 옷을 걸치고, 최소한의 음식만 먹으며 자신의 내면을 갈고 닦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직전 유다 광야로 들어가셔서 홀로 40일 간의 대피정을 실시하셨습니다. 더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기 위해 단식을 하셨는데, 적당한 단식이 아니라 철저한 단식이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기도에 기도를 거듭하셨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안토니오 아빠스를 비롯한 사막의 교부들 역시 현란하고 요란스러운 도시를 떠나 깊은 사막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냥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간 축척해 두었던 재물이며 학식이며 명성이며 사회적 기반이며... 모두를 내려놓고 사막으로 들어갔습니다.
훌훌 털고 혈혈단신으로 아무런 미련도 없이 깊은 사막으로 들어가는 은수자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멋있다, 쿨하다고 박수칠 수도 있겠습니다. 사막 생활의 낭만도 없지 않았습니다. 까마득한 사막 저 너머에서 태양이 떠오를 때라든지, 서녁 하늘을 장엄하게 물들이는 일몰 시간에는 기도가 저절로 흘러나왔을 것입니다.
해가 떨어지고 나면 또 어떤가요? 캄캄한 밤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의 잔치가 벌어지겠지요. 인간 세상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손에 잡힐 듯이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낭만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낮의 더위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강풍이라도 불어오면 함께 날아오는 모래 때문에 눈을 제대로 못 뜰 지경입니다. 건기가 되면 물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 굶주림과 목마름은 기본이었습니다.
은수자들이 깊은 사막으로 들어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더 온전히 주님을 추종하기 위해서, 오로지 주님만 선택하기 위해서, 하루 온종일 주님 현존 속에 살아 숨 쉬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집트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던 안토니오는 일찍이 부모와 사별했습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성전에서 기도하던 중 다음과 같은 복음말씀을 들었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
안토니오는 전율과도 같은 느낌을 받은 동시에 그 말씀은 바로 자신에게 하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안토니오는 37만 평이나 되는 비옥한 토지를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그 외롭고도 허전한 길, 쓸쓸하고도 고통스런 사막의 길-십자가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안토니오의 위대함은 쉼 없는 기도생활과 한결같은 겸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안토니오는 한 은둔소에서만 20년간 칩거하며 기도생활에 전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수많은 방문객들을 모른 척하며 그 오랜 세월 하느님과 만남에만 몰두하셨습니다.
안토니오에게 하느님 이외의 것들은 다 부차적인 것, 큰 의미가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오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떠받들었지만 거기에 조금도 연연해하지 않았습니다.
안토니오의 주옥같은 권고 말씀이 오늘 하루 삶의 양식이 되길 빕니다.
“물고기가 마른 땅에 머물러 있으면 죽듯이 수도자들이 세상에 오래 머물게 되면 정신이 해이해집니다. 그러니 우리 수도자들은 물고기가 바다로 돌아가듯이 끊임없이 사막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을 지속하기 위해서 부단히 산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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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hSypwA6JIM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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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안식이 없는 이유: 물에 빠졌으면서 땅을 잊었기에!>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밭에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옹호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7-28)
여기서 예수님만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모든 인간이 안식일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겼다고 하니까 안식일은 사람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에게는 안식일이 그들의 주인입니다. 그들이 지켜야 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쉬며 하느님을 찬미하라고 있는 날인데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삶을 옥죄는 율법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왜 사람은 자신들이 지배해야 할 것의 지배를 받고 살까요? 돈의 지배를 받고 명예나 쾌락의 지배를 받고 삽니다. 그 집착 때문에 마음의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돈 때문에 목숨을 걸고 잠깐의 쾌락을 위해 양심을 저버립니다. 반드시 무언가는 삶의 이유로 삼아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는 유일한 이유는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 글로리’라고 넷플릭스에서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내용은 한 아이가 학교 폭력을 지독히 당하여 이 악물고 커서 복수한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참으로 공감되는 내용은 이것입니다.
김동은이라고 하는 아이가 학교 폭력에 시달리고 부모는 이 아이의 합의금을 들고 도망을 갑니다. 더는 살 이유가 없는 김동은은 자살하려고 몇 번이나 건물 위에 오르고 바다 앞에 섭니다. 그러나 무언가가 그를 죽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은 ‘복수심’이었습니다. 복수심은 그녀를 견디게 했습니다.
만약 복수가 끝나면 그녀는 무엇으로 살아갈까요? 사람은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이유를 찾아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존재입니다. 짐승들이야 그저 생존하면 그만입니다. 다른 이유가 필요 없어서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유를 찾습니다. 물론 그 이유들도 동물들과 결국엔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살기 위한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살기 위해 찾아낸 삶의 이유는 결국 나를 지배하게 만듭니다.
김동은은 복수하고 싶으면서도 복수를 질질 끌 것입니다. 빨리 끝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복수가 끝나면 어디에서 삶의 이유를 찾아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무석 정신분석학 교수는 군대에서 군의관으로 있을 때 계속 자해하는 군인을 만났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생채기를 내지 않으면 우주에 붕 뜬 존재처럼 느껴져서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상처가 나고 피가 흐르는 것을 보면 그래도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살 이유가 없는 것은 벌써 죽은 것보다 더 고통스럽습니다.
영화 ‘기억의 밤’은 자기 부모가 죽는 것을 목격한 한 아이가 부모의 복수하기 위해 평생을 기다렸는데 그 대상이 기억상실증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가 기억을 회복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그래야 복수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억을 회복한 그는 본래 매우 착한 사람이었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지금의 자기보다 훨씬 착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수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는 삶의 의미를 잃었습니다. 더는 살 이유가 없습니다. 복수하려던 그가 자살합니다.
인간이 삶의 이유를 찾는 이유는 ‘이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계속 ‘존재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나의 존재 이유를 정합니다. 돈이 될 수도 있고 쾌락이 될 수도 있고 권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결국 그런 것들이 없으면 나도 존재 이유를 잃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들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돈이 나의 것이라 여기지만 실제로는 내가 돈의 것이 됩니다. 안식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인간이 지배하라고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것들을 지배하지 못하고 지배당합니다. 그것들이 삶의 의미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에게는 안식일 법이 삶의 의미였습니다. 그것을 지키며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이 그들이 선택한 존재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그 존재 이유로부터 자유로운 누군가를 보면 참아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은 내가 저절로 존재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존재 이유를 나를 만든 분으로 삼으면 됩니다. 그분이 있건 없건 그렇게 믿고 그분의 뜻을 따라야 세상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돈이나 명예, 쾌락이 존재 이유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에 묶이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창조자를 위해 살지 않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세상 것의 노예가 되는 시스템에서 우리에게 어떤 선택의 삶이 더 낫겠습니까?
영화 ‘그래비티’는 결국 내가 존재하게 된 이유, 곧 지구에 발붙이고 살지 않으면 우주에 떠도는 먼지와 같은 존재가 되어
무엇이라도 잡으려고 하는 존재가 된다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지구에 발을 붙이고 있을 때 우주에 떠도는 것을 굳이 붙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주 공간에서 헤맬 때는 자신을 잡아줄 무언가에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출처를 인정하지 않는 삶과 그것에 순종하는 삶의 차이가 이럴진 데 사람 대부분은 그래도 지구로부터의 자유, 그러나 우주 쓰레기에 집착하는 삶을 선택합니다. 그것이 자유라고 여기면서.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사람이 모든 것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하고 지구에 발붙이지 않으면 우주 쓰레기라도 움켜쥐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뭍으로 가는 게 의미여야 하고 우주에 떠 있는 사람은 땅에 발을 붙이는 게 의미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찮은 것에 목숨을 겁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안식이 없는 이유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려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주인이 되십니다. 그분은 이제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으로 이웃의 발을 씻기 위해 내어줄 수 있는 용기를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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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바오로 사도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 12)” 저는 강론을 준비하면서 이 말씀을 스쳐지나가듯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이병호 주교님의 글을 읽으면서 말의 힘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교님은 매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복음 말씀을 모두 암송하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매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여전히 복음 말씀을 암송하신다고 합니다. 매일 아침 미사를 봉헌하기 전에 성당 제대 앞에서 큰절을 올린다고 합니다. 매일 치명자 산에 오르는데 그곳의 경당에서도 감실 앞에서 큰절을 올린다고 합니다. 주교님의 삶에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정말 어떤 쌍날칼보다 날카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이 살아있으니 육체의 나이는 들어 시력이 예전 같지 않지만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말씀이 살아있기 위해서는 매일의 삶에서 감탄과 놀라움을 가져야 합니다. 놀라움과 감탄의 눈으로 보면 세상 모든 것들이 놀랍고, 감탄스러운 것들로 보입니다. 그냥 스쳐지나가는 일상으로 보면 아름다운 그림을 보아도 그 아름다움에 감동하지 않습니다. 좋은 말씀을 들어도 감홍이 별로 없습니다. 예전에 들었던 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통계와 수치로 나타는 이야기는 큰 감동이 없습니다. 하지만 교우들을 만나면 삶의 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제는 교우들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합니다. 주교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사실 사제들은 딸린 가족이 없고 교회가 생활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큰 우산 속에서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우들은 우산 없이 눈비를 그대로 맞으며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성서의 인물들도 대부분 세상의 온갖 어려움을 그대로 당하고 산 사람들입니다. 성서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도 교우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길가에 있는 신호등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파란 불에 이동하고, 빨간 불에 멈추면 안전하게 다닐 수 있습니다. 신호등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빨간 불에 움직이면 교통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신호등이 사람을 위해서 있지만, 사람은 신호등의 지시를 따라는 것입니다. 신호등의 표시가 중요하지만 때로는 사람이 신호를 줄 때가 있습니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는 신호등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경찰의 신호를 따르게 됩니다. 공사 중일 때도 그렇습니다. 신호등은 정해진 규칙에 의해서 표시를 할 뿐이지 공사의 현장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공사의 현장에서는 현장 근무자의 신호를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맞습니다. 긴급한 상황에서는, 재난의 상황에서는 안식일의 규정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기 때문에 안식일의 규정을 무시하거나 어겨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규정을 넘어서는 삶을 사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친구가 잘못하면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심리를 가주라고 하셨습니다. 친구가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내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제자들도 그렇게 하도록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전인수(我田引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법과 규정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안식일의 규정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였습니다. 그래서 권한은 행사하지만 책임은 소홀하였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말은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약속된 것을 믿음과 인내로 상속받는 이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 아브라함은 끈기 있게 기다린 끝에 약속된 것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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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2,23-28: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창조해 주셨다. 그래서 인간이 노력하면 그 결실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러므로 본래 안식일의 의미는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감사드리고 계속 그 축복을 비는 날이었다. 즉 생명의 하느님께 그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그 근본정신이다.
안식일이라서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여 생명이나 생명 유지에 필요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또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은 선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행을 베푸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이라는 것은 인간이 존재한 다음에 생긴 것이며, 그 법은 인간의 삶을 위한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법이 먼저 생기고 나중에 인간이 생겨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간은 칠 일로 되어있다. 하느님께서는 엿새는 노동을 위해 주셨고, 하루는 기도와 휴식과 죄 씻음을 위해 허락하셨다. 그러기에 우리가 엿새 동안 이런저런 죄에 떨어졌다면, 주님의 날에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다. 주님의 집에 가서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거룩한 전례에 참여하고, 주님께 대한 감사로 기도를 마무리하여야 한다. 그렇게 깨끗하게 된다면 제단으로 나아가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밀 이삭을 자르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항의를 하고 예수께서 그에 대한 답을 하시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27절). 이 말씀으로 바리사이들의 비난에 대해 대답을 하신다. 즉 하느님께서는 먼저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다음에 안식일을 정하셨다는 천지창조 사화(창세 1,26-2,4)의 이야기와 같다.
그리고 이 말씀은 안식일의 의미 자체를 밝히는 원칙적인 답변이다. 즉 법보다도 사람을 중요시하는 인본주의적 법이념을 내세우셨다. 즉 법률 만능주의가 아니라 인권을, 즉 안식일 법보다 인간애를 앞세우셨다(참조: 마르 3,1-6; 루카 13,10-17; 14,1-6; 요한 5,1-8; 9,1-41). 그리고 하느님의 전권을 받으신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다.(28절)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떤가? 주일을 안식일 본래의 의미대로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데, 주일을 지키는 것을 강박관념 때문에,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죄가 되고,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아무런 느낌이 없이 미사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현대적인 율법주의일 것이다. 진정으로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는 제사를 지내는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주일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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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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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안식일은 예수님과 유다교 지도자들의 갈등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입니다. 유다인들은 안식일을 주간의 축제로 여겼습니다. 안식년과 희년이 있는 것처럼 매주 안식일은 하느님의 창조를 기억하며 일상의 일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함께 머물며 감사를 드리는 하루의 축제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똑같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을 한 주간의 축제로 지내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지키던 수많은 율법 가운데 1/3 정도가 안식일에 관련된 규정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안식일이 얼마나 중요하였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독실한 유다인들은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리사이들이 규정의 문구에만 집착하는 것을 비판하며 율법의 본래 정신과 의미를 기억하도록 합니다. 물론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창조된 것은 아닙니다. 안식일은 세상 창조의 모든 것을 완성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창조된 모든 것을 보존하고 보살피도록 맡기셨고(창세 1,28 참조), 사람은 그 창조 업적에 참여합니다. 그런데 사람도 피조물이면서 유한한 존재로 휴식과 회복이 필요합니다. 안식일의 의미는 모든 피조물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주객이 뒤바뀌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럴 때일수록 본래의 의미를 찾고 되새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이것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하느님의 뜻을 온 마음을 다하여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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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도회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충돌>
바리사이들은 주님의 일과 제자들의 행동을 언제나 못마땅하게 여기어 행동 하나하나를 시비와 충돌을 하였습니다. 어떤 때는 법을 앞세워 어떤 때는 관습을 앞세워 비난하고 비웃으며 그 이유는 주님의 일이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존경을 받는 것을 시기하거나 질투에서 나옵니다.
“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들이 합니다.“ 주님은 ”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시며 제자들의 행동을 정당화 하셨습니다.
우리는 서로 관계를 가지고 의존하면서 일정한 질서와 법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법이 사람의 존엄성이나 필요한 것을 충당하지 못하면 법의 존재 가치는 사라지고 또 다른 원칙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법은 모든 법을 초월하며 사랑을 거스르는 행위는 비인간적입니다.
우리는 가끔 교회법을 앞세워 인간적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법을 배울 때 주일의 의무를 충실이 지켜야 하지만 지키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는 예외의 규정을 배우게 됩니다.
미사 오던 의사가 중간에 교통사고로 죽어 가는 사람 돌보다가 미사를 못 간 사람을 죄인으로 단죄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주일 의무를 못 지킨 일에 신경을 쓰며 고해성사 거리로 생각하지만 내용을 들어 보면 죄가 되지 않은 것을 잘 모릅니다.
몸이 아프거나 가정에 인륜지대사가 있으면 미사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을 통하여 영적 행위와 육적 행위의 충돌을 막아주시며 안식법 위에 사람이 있다고 알려 주십니다.
우리는 법을 앞세워 서로 비난하고 미움을 가질 것이 아니라 법보다 사랑이 우선 한다는 것을 알고 법과의 충돌로 억압, 인색, 미움에서 벗어나 자유와 평화와 기쁨의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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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현영ㄷ 마태오 신부님]
<주님께서 주신 법은 '서로 사랑하라'이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시대에 율법을 지키며 사는 것을 가장 큰 삶의 덕목처럼 여기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법의 참된 의미를 당신의 삶과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당시대의 사람들 중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은, 하루의 끼니를 해결하기에도 벅찬 민중들에게 과도한 법과 관습을 부과함으로써, 스스로 죄인이라는 의식 즉 죄의식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가난한 이들 위에 군림할 수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그릇된 관행을 지적하시고 인간을 위해 마련된 하느님의 법 즉 사랑을 실천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하루를 준비하고 계시거나, 차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을 경청하고 계실 것입니다. 저를 비롯하여 많은 운전자가 알게 모르게 도로교통법을 위반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생활 속에서 작은 법률들을 어긴 일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러한 의미에서의 법이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 할 법에 대해 얘기하고자 합니다.
흔히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며 독이 든 잔을 마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얘기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당시의 사회 현실에서 드러나는 모순들을 파헤쳐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을 전하던 그를 당시의 지배자들과 기득권 세력들은 체제를 위협하는 불순한 사람으로 여겨 재판에 회부하고 사형을 선고 하였습니다.
그의 친구 크리톤이 감옥으로 찾아가 해외로 도피하라고 권고하였지만, 그는 자신의 삶이 옳았다고 생각하였기에 변명이나 타협, 그리고 도피라는 수단을 쓰지 않고, 부당한 법과 재판의 결과를 수용하였을 뿐입니다.
그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단순한 법이 아니라 법보다 더 위에 있다고 생각한 진리였던 것입니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진리를 위해 죽었던 것입니다.
현재도 지배층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때로는 부족한 지배논리를 메우기 위해 억지의 법을 만들고, 인간을 위해 존속되어야 할 법을, 인간을 구속하고 억누르거나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악법’이라고 외칠 때에는 쉴 틈도 없이 소크라테스를 인용합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악법의 수호자가 아니라 자신의 철학을 위해 스스로 독배를 마셨던 악법의 철폐자였음을 모른 채 자신들의 기득권만을 위해 사람들을 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직 하나의 법만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라는 것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 누가 감히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으로 세상에 태어나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지금 여러분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가족들, 직장이나 학교의 동료들 그리고 여러분이 매일 만나는 사람들에게 따스한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어 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평생을 살면서 지켜야 할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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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사람과 사람을 위한 것 사이에서>
마르코 2,23-28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사람과 사람을 위한 것 사이에서>
사람보다
사람을 위한 것에
마음을 두는 사람은
사람을 위한 것 때문에
사람을
그저 버리기도 있지만
사람을 위한 것보다
사람에게
마음을 두는 사람은
사람 때문에
사람을 위한 것까지
한껏 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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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법보다 사람이 중요하다>
우리는 수많은 법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법은 인간 행위의 옳음과 그름을 판단하는 잣대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모인 어느 곳에나 그것이 문자화 되었든 아니든 다양한 모습을 지닌 법이 있습니다.
국가에도, 교회에도, 여러 소모임에도 법은 있고 필요합니다. 또한 법은 우리 각자 안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갖가지의 법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평가하고, 그들의 행동을 판단합니다.
그 형태가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사람 사는 세상의 법은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이끌어가야 합니다. 이 법은 약육강식의 밀림의 법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어야 합니다. 이 법은 고유한 인격체로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닌 존엄성을 지켜주어야 하고, 상호 존중 속에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이루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법을 생각할 때 그 법에 규정을 받는 사람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아니 사람을 먼저 보고 그 사람에게 주어진 법을 생각하고 해석해야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안식일 법에 대한 해석을 놓고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이 맞섭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휴식의 시간입니다. 따라서 안식일 법은 자칫 삶을 짓누르는 일상의 노동에 매몰되어,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거나 자신을 돌볼 여유조차 갖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휴식을 내려주신 사랑의 법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이 사랑의 법을 아주 이상하게 해석하였습니다. 안식일 법에 따르면 39가지 노동을 금지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추수 작업이었습니다.
그런데 밀 이삭을 자르는 것도 추수작업에 해당된다고 해석하여, 배고픈 사람이 밀 이삭을 잘라먹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안식일은 평화와 안식을 가져오기 보다는 아무리 배가 고프더라도 먹을 것을 얻기 위한 최소한의 일도 해서는 안 되는 고통스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안식일의 의미를 왜곡한 이상 안식일 법은 이미 법으로서 존재이유를 상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법과 배고픈 사람 사이에서 안식일 법만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사랑의 법을 사람들의 삶에 족쇄를 채우는 강제 규정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안식일을 자기 멋대로 해석함으로써 바리사이들은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은 심각한 도전자로 나타나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법 이전에 배고픈 제자들을 보셨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있어서 참된 안식은 주린 배를 채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법을 상대화하고 사람을 중요시하는 인본주의적 법이념을 내세우셨습니다. 법률만능주의에 맞서 인권을 부르짖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안식일 법을 삶의 올가미로 덧씌우는 바리사이들이 더 이상 안식일의 주인이 될 수 없고,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몸소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 즉 사람의 아들이 진정한 안식일의 주인으로써 안식일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기에 ‘법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법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라는 예수님의 엄중한 선언에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바리사이 같은 법의 해석과 집행, 예를 들어, 노동자들을 생명 같은 일터에서 쫓아내고,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순박한 이들을 억누르며, 생명과 평화를 보듬으려는 고귀한 노력을 처절히 짓밟는, 더 이상 사람을 살릴 수 없는 불의한 법 집행에 과감히 맞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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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물러진 법>
“놀 때 놀고 일할 때 일하며, 쉬고 싶을 때 마음껏 쉬고 싶습니다. 주일 미사참례의 의무는 주님의 기도 33번으로 가름하고 휴일을 즐기고 싶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싶어서 성당을 찾았는데 미사참례의 계명이 오히려 자유를 옭아매는 느낌이 들어 싫습니다.”
교회법에서는 “미사참례 계명은 주일이나 의무축일 당일이나 그 전날 저녁에 어디서든지 가톨릭예식으로 거행되는 미사에 참례하는 것으로 이행된다”(교회법1248조1항).고 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사가 없는 공소에서는 공소예절(말씀의 전례)에 참례하여야 하고 공소예절도 참례할 수 없는 경우에는 개인이나 가족끼리 합당한 시간 동안 기도에 몰두하도록 권장합니다.
그래서 부득이한 경우 예수님께서 33살까지 사셨으니까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33번을 바치라는 관습이 생겨났습니다. 사실, 예전에 우리 나라의 많은 사람이 한글도 모르고, 성경도 라틴어로 된 책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대신 바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경을 읽을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성당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주님의 기도 33번으로 주일 미사참례 의무를 대신하려 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2,28).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 계명은 일주일에 한 번은 무조건 쉬어야 함을 내용으로 합니다.
이는 인간이 일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규정은 선과 생명에 도움을 주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하느님의 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안식일 규정을 강화하는 가운데 본래의 의미를 잊고 자구에 매인 나머지 단지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데에 집착하여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규정들을 세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선과 생명에 보탬이 되기보다 되레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굴레와 족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려고 하셨습니다.
어떤 분이 고해성사를 보시면서 “안식에 해서는 안 될 일,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였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일상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규정을 생각하기보다 그 의미, 알맹이를 생각하십시오.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고 말씀드렸더니, “요즘 법은 왜 그리 물러졌어요?” 하셨습니다.
안식을 취해야 할 주일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영혼의 안식을 취하는 날로 보내야 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단순히 미사참례를 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취하고 구체적 사랑을 실천하는 날로 지내야 합니다.
이날은 우리를 구원에로 이끌어 주시며 성체성사의 양식으로 배 불리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날이어야 합니다. 주일은 분명,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날이면서도 인간을 사랑하시고 해방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마음이 완고하고 오그라들어서 안식일 법을 확대해석하며 사람들에게 짐을 지웠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구원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을 철저히 거부하셨습니다. 그것은 분명 하느님의 원의와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을 달리 말하면,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 곧 인간을 살린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인간에게 알려주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도록 가르치는 전권을 가진 분으로 안식일의 주인입니다.(이영헌)
그러므로 적극적인 마음으로 함께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미사성제에 참여함으로써, 주님의 수난과 부활, 영광을 기념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즐거움과 휴식의 날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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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이제 갑곶순교성지를 떠나서,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의 주임신부로 생활합니다. 13년 만에 본당신부로 생활한다고 하니, 기대도 되고 또 알 수 없는 두려움도 엄습합니다. 그러나 아주 열심하고 교회에 헌신적인 신자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들과 함께 재미있고 기쁘게 생활할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지난주, 이곳 김대건 성당으로 오기 위해서 가지고 있었던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포장 이사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가지고 있는 짐을 정리하려는 마음에 직접 짐을 정리했습니다. 평소에는 몰랐는데, 짐을 정리해보니 얼마나 많은 짐과 함께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옷장을 열어 옷을 정리했습니다. 20년 넘은 옷도 있었고, 살이 쪄서 맞지 않아 언젠가 체중을 줄여서 다시 입을 것으로 생각했던 옷도 많이 있더군요. 아깝다고 또 가지고 다니자니, 짐이 많아질 것 같아서 지금 당장 입을 수 없는 옷들 과감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의 옷장으로도 충분한 양이 되었습니다.
서랍을 정리했습니다. 문구류를 좋아해서 서랍 하나가 문구류로 가득합니다. 잘 쓰지 않는 펜을 정리하니 역시 통 하나면 충분했습니다. 책장도 정리했습니다. 책을 좋아하다 보니 언젠가 다시 읽을 것이라는 생각에 계속 끌고 다녔던 책이었습니다. 신학생 때 보던 책을 비롯한 15년 이상 된 꽤 많은 책을 과감하게 처분했습니다.
이렇게 짐을 정리하면서, ‘너무 많은 것들을 쌓아만 두었구나.’라고 반성하게 됩니다. 버려야 할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나눌 수 있는 것들도 기쁘게 나눌 수 있어야 했는데, 나 혼자만 쓰고자 하는 욕심과 이기심이 물건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했음을 깨닫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이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즉, 주님은 보지 않고 나만 보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히 알 수가 있지요.
안식일에 제자들과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다가,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바리사이들이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다?”라고 따집니다.
밀 이삭 몇 개 뜯은 것이 뭐가 대수일까 싶지만, 이들은 확대해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제자들이 지금 추수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려고 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기준만을 내세웁니다. 자기를 높이려는 욕심과 이기심에 주님의 뜻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트 2,28)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에 있다는 것입니다. 형식에 갇혀서 사랑을 실천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비워야 합니다. 대신 주님의 따뜻한 사랑으로 내 마음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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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의식 성찰>
오늘 주님과 제자들은 밀밭 사이를 질러가다가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고, 그로 인해 제자들은 영락없이 바리사이들에게 트집잡힙니다.
제 생각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은 생각 없이 한 행위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의식적으로 한 행위이지 고의로 한 행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무의식적 행위를 보고 바리사이는 영락없이 트집을 잡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과 관련해서는 영락없는 사람들입니다.
영락없다는 말은 그럴 경우에는 반드시 그러한 것입니다. 율법에 어긋나는 경우에는 반드시 뭐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에 어긋나는 것을 보고도 아무 소리 하지 않으면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로서 영락없는 사람이 아니지요.
그러니 그들은 그들다운 것입니다. 율법을 늘 의식하고 사는 사람다운 것입니다.
이에 비해 제자들은 무의식적으로 밀 이삭을 따먹습니다. 밀 이삭을 따먹을 때 율법을 전혀 생각지 않고 의식조차 없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에 이런 제자들은 개돼지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제자들 눈에 율법은 보이지 않고 먹는 것만 보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만 제가 예수님처럼 제자들을 두둔한다면 그들은 초월적인 무의식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율법을 초월하는, 곧 상위의 사랑을 더 의식하고 사람을 더 의식하지, 하위의 율법을 더 의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무엇을 더 의식하며 살 것인지, 사랑과 법 가운데 무엇을 더 중시하며 살 것인지 ‘의식 성찰’을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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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분별의 지혜>
-사랑은 분별의 잣대이다-
우리 가톨릭 교회의 참 좋은, 참 자랑스러운 보물이 성인들입니다. 우리 삶의 좌표가 되고, 끊임없이 회개의 표지, 희망의 표지, 구원의 표지가 되는 성인들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밤하늘에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같은 존재가 성인들입니다. 성인들이 없다면 우리 가톨릭 교회는 얼마나 쓸쓸하고 가난할까요? 가톨릭 교회는 성인들로 가득한 보물창고라 할 수 있습니다.
기억하고 기념할뿐 아니라 우리 모두 분발奮發하여 성인이 되라 있는 성인축일입니다. 사실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모두는 참나의 성인이 되라고 불림받고 있으며 이보다 더 중요한 평생과제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성인 축일마다 확인하는 습관이 생몰生沒 연대를 통한 나이요 이어 꼭 제 나이와 비교합니다.
오늘은 사막 ‘수도승들의 원조’요 ‘은수자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입니다. 또 오늘은 우리 요셉 수도 공동체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 김도완 안토니오 수사의 영명축일이기도 합니다. 동방의 4대 교부는 아타나시오, 대 바실리오, 요한 크리소스토모,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입니다. 이중 아타나시오가 쓴 ‘성 안토니오의 전기’를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된 성 안토니오 아빠스입니다.
놀라운 것은 안토니오 아빠스의 장수長壽입니다. 356년 빼기 251년이면 무려 만 105세 장수를 누린, 아마 가톨릭 교회의 성인들중 최고의 기록일 것입니다. 장수의 비결이 무엇일까요? 물론 하느님의 은총을 전제로 하고 지혜가 그 비결임을 깨닫습니다.
인간의 고질적 마음의 질병이 바로 무지입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죄, 무지의 악이라 할 만큼 참으로 뿌리 깊은 불치의 병이 무지입니다. 불가의 삼독三毒이라 일컫는 탐진치(貪瞋癡;탐욕, 성냄, 어리석음) 역시 무지의 결과입니다.
끊임없는 전쟁, 과소비의 탐욕으로 망가져 가는, 하나뿐인 공동의 집인 지구를 지속불가능하게 만드는 원흉의 뿌리에는 바로 무지의 탐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탐욕이나 전쟁 역시 무지의 두려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바로 이 무지에 대한 답이 바로 지혜이니 삶의 지혜, 분별의 지혜입니다. 사막 수도자들의 빛나는 특징이 바로 그 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지에 대한 유일한 답은 지혜뿐입니다.
그리하여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널리 읽히고 있는 사막교부들의 지혜를 모은 금언집입니다. 흡사 불가의 고승의 선사들이 남긴 일화도 이와 비슷합니다. 촌철살인寸鐵殺人 같은 삶의 지혜와 더불어 유머가 정신 번쩍 들게 합니다. 어제 재미있었던 일화에 크게 웃었습니다. 매일 규칙적으로 산행山行을 하는 수도형제가 아름다운 풍경 사진과 곁들여 털모자를 쓴 자신의 사진을 올렸고 주고 나눈 대화입니다.
-“아름다운 사진 선물 감사합니다! 산악인이자 탐험가 같습니다!”
“개장수”-
유머로 번뜩이는 바로 ‘개장수’, 이런 말마디가 선사禪師들의 용어입니다. 사막 수도자들의 원조인 성 안토니오 아빠스가 남긴 지혜 가득한 일화는 참 많습니다. 무엇보다 성인을 결정적 회심으로 이끈 다음 예수님 복음 말씀이 주목됩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19,21)
복음에서 재산이 많은 젊은 부자는 슬퍼하며 떠났지만, 안토니오는 지체없이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아마 이 말씀은 안토니오의 평생 삶의 중심을 잡아 주는 지혜로운 말씀이 되었을 것입니다. 말그대로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에 나오는 ‘희망의 닻’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몸을 피한 우리가 앞에 놓인 희망을 굳게 붙잡도록 힘찬 격려를 받게 하셨습니다. 이 희망은 닻과,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멜키체덱과 같은 영원한 대사제가 되시어, 우리를 위하여 선구자로 그곳에 들어가셨습니다.”
과연 여러분에게 희망의 닻이 될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까? 제가 고백성사시 보속으로 써드리는 말씀 처방전 역시 희망의 닻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우리를 천상의 지성소로 이끌어줄 예수님보다 더 좋은 희망의 닻은 없습니다.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 예수님인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삶의 지혜, 분별의 지혜가 빛납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입니다. 어제의 단식논쟁에 이어 오늘 사건의 발단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는 것에 시비를 건 바리사이들로 인해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예를 들면서 자신의 처신을 옹호합니다. 다윗처럼 예수님이 얼마나 하느님 마음에, 사랑에 정통해 있는지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면, 하느님 사랑의 마음에 정통해 있지 않으면 다음같은 대답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 답은 너무 자명했습니다. 분별의 잣대는 안식일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새삼 분별의 잣대는 사랑이요, 사랑에서 나온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사랑만이, 사랑의 법만이 모든 율법을 상대화하는 절대적 법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사랑이자 지혜요, 하느님의 사랑이자 지혜이신 예수님이야 말로 분별의 잣대이자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천상 지혜로 빛나는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의 주인인, 하느님 지혜와 사랑의 화신인 예수님이야말로 유일한 분별의 잣대이자,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이요, 참 좋은 희망의 닻입니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예수님이 분별의 최종 잣대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날로 당신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깊게 하시며 참 좋은 사랑과 지혜를 선물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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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2,27)
오늘 복음(마르2,23-28)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는 말씀'입니다. 바리사이들은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2,24)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그것은 생명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엿새 동안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렛날은 거룩하게 지내야 하는 안식일, 주님을 위한 안식일이니, 이날 일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탈출35,1-2)
탈출기의 말씀처럼 안식일은 주님을 위한 날인 거룩한 날입니다. 엿새 동안이 우리 일을 하는 우리의 날이라면, 이렛날인 안식일은 주님의 일을 하는 날,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날입니다. 단순히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쉬는 날이라기 보다.
안식일에 해야 하는 주님의 일은 어떤 일일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 기뻐하시는 일은 무엇일까?
가정이 있는 사람들은 이날만큼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해야 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신앙가족이라면 온 가족이 함께 거룩한 미사에 참례해서, 엿새동안 지켜주시고 돌보아 주신 주님 은총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혹시라도 주님과의 약속과 계명을 잘 지키지 못했다면, 주님의 자비를 청하고, 이 자비의 힘으로 다시 태어나는 날, 부활하는 날이 바로 안식일인 주님의 날(주일)입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율법의 형식을 쫓아가지 말고, '율법의 본질을 살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 그래서 우리가 약속한 영원한 생명에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
@신앙을 청합니다.
+신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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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T_xe0AUhF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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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 28)
우리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이라는 것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기에
안식일의 주인까지도
모른채 살아갑니다.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습니다.
사람을 위해
사람을 이끌고
계시는 분은 언제나
예수님 그리스도
이십니다.
안식일과 사람이
뒤바뀌어서는
안됩니다.
안식일을 내세우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까지도
받아들이지 않는
차가운 우리의 모순을
반성하게됩니다.
정녕 우리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사람의 삶이란
짜여진
안식일의 조항처럼
흘러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향한
따뜻한 사랑은 없고
안식일 규정만
남아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그 무엇으로도
규정될 수 없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사람답게 사는
행복에 있습니다.
행복은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있습니다.
안식일은
사랑에 있음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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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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