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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근소한 차이지만...
House of Capet 즉 카페 가문이 House of Přemyslid 즉 프레미슬 가문을 앞질러서 인기도 1등을 차지했습니다.
확실히 명품을 선호하시는 경향이 강하신 듯...
아무래도 보헤미아 왕국을 아시는 분은 게임상 상당한 난이도와 독특한 매력을 사랑하시는 숨은 마니아층으로 보이네요..
여기에서 언급되는 시대는 위그 카페 이후 종가가 그대로 내려와 보통 역사에서 House of Capet로 지칭하는 987년에서 1328년까지 가문의 역사를 소개합니다.
비록 1453년 비록 동로마제국이 몰락하면서 중세가 끝나지만, 왜 여기까지 가지 않느냐고 물으신다면 다음 기회에... 발루와 가문(House of Valois, 1328–1589)이나 부르봉 가문(House of Bourbon, 1589-1830)에 대해 소개 글을 작성할 예정입니다. 언제가 될런지...
지금 심정으로는 가능하면 게임 스타팅에서 만날 수 있는 가문만 한정해서 언급하려고 합니다.
프랑스의 역사에서 위그 카페의 후손들만이 987년 이후의 프랑스 왕위를 차지한 건 사실입니다. 이건 거의 만세일계(萬世一系)를 주장하는 일본 왕실이나 다름없다는 사실... 그만큼 사회체계가 정체되었거나 아니면 기형적인 정치체제를 유지해왔다는 반증도 됩니다. 한 가문이 모든 걸 독점해왔다면 분명 무언가 특징은 있는 법이니까요.
카페 가문의 왕실 문장입니다.
푸른 바탕에 백합 문양...
카페 가문 일원이라면 문장에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넣죠.
프랑스의 역사에서 카페 가문은 총 15명의 프랑스 왕을 배출했습니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고보니 모두 별칭을 하나씩 달고 있군요. 프랑스어는 발음이 정말 어렵습니다. 혀 꼬여야 되니...
그러나 규칙적인건 변함없어요.
987–996, Hugh Capet (Hugues Capet), Count of Paris, King of the Franks
996–1031, Robert II, the Pious (Robert II le Pieux)
1031–1060, Henry I (Henri Ier)
1060–1108, Philip I (Philippe Ier)
1108–1137, Louis VI, the Fat (Louis VI le Gros)
1137–1180, Louis VII, the Young (Louis VII le Jeune)
1180–1223, Philip II Augustus, the God-Given (Philippe II Auguste Dieudonné) King of France
1223–1226, Louis VIII, the Lion (Louis VIII le Lion)
1226–1270, Louis IX, the Saint, ("Saint Louis") (Louis IX le Saint, Saint Louis)
1270–1285, Philip III, the Bold (Philippe III le Hardi)
1285–1314, Philip IV, the Fair (Philippe IV le Bel)
1314–1316, Louis X, the Quarrelsome (Louis X le Hutin)
1316–1316, John I, the Posthumous (Jean Ier le Posthume)
1316–1322, Philip V, the Tall (Philippe V le Long)
1322–1328, Charles IV, the Fair (Charles IV le Bel)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위그 카페가 카를링거 가문을 몰락시키고 즉위할 때
서프랑크의 왕이 아니라 King of the Franks이라고 호칭을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동프랑스와 중프랑크는 역사서에서 일찍 사라져 버렸고 동프랑크 왕위는 게르만왕으로 변경되어 사용되어 집니다.
프랑크란 호칭은 유물이 되어 서프랑크에서만 남게 되었으므로, 게르만왕에 대해서 프랑크왕국의 정통성을 주장하려고 쓴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카페 가문은 필립 2세가 잉글랜드를 물리치고 아키텐 정복이라는 승리를 얻기 전까지, 찬탈자의 가문으로 왕권 유지조차 버거워 합니다. 프랑스사를 보시면 일반 민중들조차 카를링거의 찬탈자로 카페의 왕들을 꼽고 있었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거든요. 허약한 왕권과 얼마 되지 않는 왕실 직할령을 가지고 카페 가문은 초기 고군분투해야 했습니다.
역사는 원래 내부의 적을 제거하기 위해 외부의 적을 일부러 만들곤 합니다. 우리의 경우 임진왜란도 그러했죠. 토요도미 히데요시가 천하를 통일하여 내부 전쟁을 없애고 자기 부하들에게만 영지를 나눠주자 전쟁을 통해 먹고 살던 용병들이나 소외된 영주 계층들이 불만을 토로하죠. 결국 국내의 불만을 외부로 돌려 조선 정벌을 성공하면 영지를 주겠다는 말로 대외전쟁을 일으킵니다. 그 덕에 죽어나는 건 조선 백성들이었죠.
프랑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을 통해 잉글랜드가 남부 프랑스 지역을 차지해버리자 억울한 겁니다. 자신들도 권위가 없어 왕실조차 유지하기 힘든데 외부의 힘이 들어와 국토의 절반을 차지해버리는 겁니다. 결국 존이라는 멍청한 인물이 잉글랜드 왕이 되자 이를 기회로 삼았던 필립 2세는 존이 조카를 죽였다는 풍문을 빌미로 ‘일국의 왕’을 프랑스왕의 재판장으로 나오도록 하면서 일이 벌어집니다.
당연히 거절하겠죠. 존도 왕인데... 외부에 적을 만들어 내부의 무력을 총 동원... 애국심을 일으켜 결국 잉글랜드 세력을 몰아내죠. 그러나 일글랜드에서 에드워드 1세와 같은 군주가 나오면서 그러한 억지에 순순히 응할 리 없죠. 결국 잉글랜드가 반대로 총공격을 가해 프랑스는 칼레와 같은 도시와 아키텐 지방을 도리어 상실하게 됩니다. 소위 100년 전쟁은 합법적으로(물론 결혼에 의한 상속) 프랑스 내 영토를 가진 잉글랜드왕에 대한 프랑스 카페 왕가의 고도의 생존 전략에 따라 일어난 전쟁으로도 볼 수 있죠. 그 일례로 필립 2세(재위 1179-1223)가 죽을 무렵 카페 가문의 직할 영지는 몇 배가 증가합니다. 결과를 두고 해석한다면 잉글랜드 왕이 가진 영토를 빼앗아 카페 가문의 직할 영지를 얻기 위해 죽어라 프랑스 군대가 동원된 셈이죠. 물론 외부의 적을 무찌른다는 애국심을 앞장 세워서요. 민족주의는 언제든지 최고의 무기입니다.
이제 서론은 끝내고 편년체 식으로 가문의 역사를 소개하겠습니다.
위그 카페가 왕이 되었을 때 왕국의 영역은 조금씩 성장했지만 서프랑크왕국의 경계를 넘지는 못했죠. 당시 동쪽의 게르만왕은 스스로 황제라 칭했고 오토 대제라 불린 자와 그의 후손들이 원활하게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 선출된 황제들도 대부분 오토 가문과 인척이나 외손들이 제위를 차지합니다. 그 권위는 실로 대단했습니다. 카페 가문은 여전히 살아남은 카를링거의 후손인 로렌공작 카알에게 왕권을 도전받았습니다. 언제든지 카페 가문은 1대천하는 끝날 수 있었죠. 그가 자손을 남기지 않고 죽어주는 통에 가문에도 서광이 비칩니다. 바로 세습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죠.
위그 카페는 살아있는 동안 아들 로베르를 부왕(副王)으로 임명하여 공통통치하는 형식을 취합니다. 옛날 로마제국이 후계자의 권위를 높여주기 위해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 제도을 이용한 것과 비견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카페 가문이 프랑크왕위에 대해 후계자에게 부왕 자리를 만들어 준 것은 그만큼 통치자로서 자신감이 없었다는 반증도 됩니다.
로베르 2세는 부친 위그에 이어 즉위합니다. 흥미로운 건 위그 카페가 죽은 후 ‘위그’라는 이름을 더 이상 후대 왕들이 사용하지 않아 위그 2세가 나타나지 않는 다는 점입니다. 아무래도 카를링거의 찬탈자로서 후대 왕이 쓰기엔 부담이 적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어떻게 보면 위그는 찬탈자로서 후손들조차 인식했던 것일지도 모르죠. 원래 후손의 이름은 자랑스러운 선조를 따르기 위해 붙이기 마련입니다.
로베르는 상당히 온순한 인물로 보입니다. 별칭이 ‘the Pious’ 였거든요. 조심조심 통치한다고 고민 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어차피 형제라고는 누나 둘 뿐이라 외동아들인지라 왕위를 도전하는 친족은 없었죠. 그는 오랫동안 적통 자식을 얻지 못했죠. 물론 왕비는 디브리 가문의 12살 연상의 여인인지라... 그녀가 43세 죽자 재혼을 단행합니다. 물론 명예를 가지고 올 수 있는 여성을 골랐는데... 처음에는 게르만왕 오토 가문처럼 동로마제국의 공주를 맞이하려 했습니다만 거절당해서 결국 벨프 가문인 부르군디 백작 콘라드의 딸 베르타를 왕비로 맞이합니다. 문제는 그녀가 아이 둘 딸린 과부였는데... 교황 그레고리 5세가 친족간의 결혼이라고 이의를 제기하죠.
당시 캐논법이라는 교회법이 있었는데 이 조항에 7대 선조가 동일하면 친족으로 간주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웃기는 교회... 합스부르크는 훗날이지만 5촌 조카 데리고 살아도 아무말 안하더니... 법을 고무줄처럼 늘였다 줄였다 집행하는 교회... 아무튼 이 결혼을 교황이 반대하지 난감하게 된 로베르... 결국 교황에게 파문당하고 맙니다. 2대만에 카페 왕가는 위기에 놓이죠... 이렇게 반대가 많을 줄이야...
결국 로베르는 그리고리 5세 후임 교황인 실베스터 2세랑 협상하여 이혼하고 다시 결혼하겠다고 맹세하죠. 그리하여 전혀 혈통이 닿지 않은 여인을 데리고 옵니다. 세 번째 왕비가 된 콘스탄스(Constance of Arles)는 프로방스 백작 기욤 1세의 딸로 총 여섯 자녀를 낳죠. 그 중 장남 위그 마그누스(Hugh Magnus)는 아버지와 함께 부왕이 되어 통치훈련을 받다 요절합니다. 그래서 차남 앙리가 후계자가 되자 이에 대해 이의를 제가한 것은 바로 막내 로베르(Robert I, Duke of Burgundy)였습니다. 형제들의 어머니 콘스탄스는 이 막내를 좋아했고 로베르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 주도록 앙리에게 강요했죠. 그리고 1027년 앙리1세가 즉위할 때 로베르는 어머니를 후원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킵니다. 내 몫을 내 놓아라...
결국 앙리1세는 어머니와 동생에게 굴복하여 1032년 부르군디 공작령을 로베르에게 나누어 줍니다. 결국 로베르는 영지를 받고 형에게서 물러나게 되죠. 로베르는 카페 가문의 첫 방계 가문인 부르군디 가문(House of Burgundy, 1032–1361)을 창설하면서 시조가 됩니다. 이 가문의 종가는 1361년 단절되지만 또 다른 방계는 포르투갈 왕실을 생성하죠. 시간적 여유가 난다면 언급하습니다. 분명 게임상 스타팅 군주로 계속 등장하거든요.
앙리1세는 재위 초기부터 동생의 반란을 먹고 나서 정신이 없었죠. 진짜 통치상의 실수 한번이라도 하게 된다면 왕좌의 주인은 바뀌는 겁니다. 앙리 자신도 차남이었던 터라 아버지에 대해 형 위그 마그누스의 죽음 이전부터 영토를 달라고 투쟁한 경력이 있었죠. 가문에는 얼마 되지 않는 영지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나 형에게 달라고 투쟁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기 힘들다는 사실을... 왕자로 태어나면서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앙리1세는 아버지가 결혼 과정에서 캐논법에 의해 파문 당했던 경험을 인지하여 자신의 결혼을 무지 신중하게 합니다. 즉 7대 조상 중 겹치지 않는 신부를 택해야 했기에... 처음에는 프리지아 변경백의 딸 마틸다와 결혼했지만 그녀가 요절하자 다시 재혼해야 했습니다.
재혼 상대는 대사관에 사람을 보내 그녀의 신분과 조상들을 확인 한 후, 저 멀리 키예프 대공 야로슬라프의 딸을 데리고 옵니다. 저 정도로 멀다면 절대 교회법에 저촉되지 않으리... 이리하여 류리코비치 가문의 여인이 프랑스 왕비로 오게 됩니다.
류리코비치 가문 출신의 안나(Anne Yaroslavna)는 3남 2녀를 낳았는데 어른으로 성장한 아이는 아들 둘로 장남 필립과 차남 위그였죠. 위그에게 영지를 줄 수 없었기 때문에 귀족가문에서 후계자가 없는 집안을 골라 데릴사위로 보내기로 합니다. 결국 베르망두아 백작 외드에겐 자식이 없고 누이가 후계자로 있었기 때문에 그녀와 결혼하게 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아델라이드(Adelaide of Vermandois)로 최후의 카를링거 가문의 여인이었죠.
그녀는 마지막 베르망두아 여백작이 되어 남편 위그와 공동 통치하게 됩니다. 위그는 여백작이 된 아내를 따라 베르망두아로 들어 갔고 그의 후손들은 두 번째 카페 가문의 방계인 베르망두어 가문이 됩니다. 훗날 위그는 자손들을 위한(자식 수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영지를 확보하기 위해 십자군 전쟁에 맹렬하게 뛰어들었고 결국 터키에서 전투 중 부상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12세기 초 프랑스 왕령 내 제후들의 세력 판도입니다.
짙은 파란색이 왕령이 즉 카페 가문의 직할영지입니다.
붉은색이 잉글랜드 왕실인 플랜타지네트 가문의 영지로군요.
그리고 각 제후들의 영지 규모가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너무나도 강려한 제후들이 많았죠. 이 당시에는...
필립 1세(Philip I)... 7세에 아버지의 부왕에 임명되어 1060년 8세에 즉위하게 되는... 이른바 ‘아청왕(兒靑王)’으로 등극합니다. 그의 이름은 그리스인 성인의 이름에서 따 왔는데... 당시 그리스인의 이름을 따는 건 아주 이례적인 작명이었다고 합니다. 전번에 막시밀리안의 이름도 그리스식 이름에서 명명되었다고 언급 드린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그리스어를 알 정도로 유식하면 그리스식 이름을 아들에게 명명하는군요... 흠... 역시 이국적인 뭔가가 있긴 있어요. 그의 아버지의 통치 기간(33년간)이 상당히 오랜 기간 유지되면서 카페 가문의 통치도 많이 안정되어 가고 있었죠.
필립1세의 별칭은 ‘the Amorous’였는데... 2번의 결혼을 통해 7명의 자식을 둡니다만 많은 자식을 둔 것은 아니었죠. 그럼에도 그가 이러한 별칭을 갖게 된 원인은 바로 너무 한 여인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필립의 첫 아내는 홀란드 백작의 딸 베르타(Bertha of Holland)였습니다. 그녀는 1093년 죽기 전까지 3남 1녀를 낳았고 어른이 된 건 후계자 루이 뿐이었죠. 그녀가 죽기 전 이미 필립 왕은 18세 연하의 어떤 고귀한 귀족의 아내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죠. 그녀의 이름은 베르트레드(Bertrade de Montfort)로 앙주백작(Fulk IV, Count of Anjou)의 아내였습니다. 그녀는 한 아이(훗날 Fulk of Jerusalem)의 어머니였고 남편이 그녀를 무지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이라도 대놓고 다가가기 힘들었죠. 그러나...
왕비가 죽자 필립의 태도는 돌변... 앙주백작에게 아내와 이혼하도록 강요했죠. 나약한 앙주백작은 겁에 질러 아내를 놓아 보냈고 왕은 그녀와 당당히 결혼하여 왕비로 삼죠. 이 결혼에서 2남 1녀가 태어납니다.
일설에는 아들이 태어나자 그녀는 프랑스 왕위에 욕심을 냅니다. 필립이 죽고 그의 첫 번째 아내가 낳은 루이가 즉위하자, 자신이 낳은 아들 필립을 후계 왕으로 세우려고 잉글랜드에 편지를 띄웁니다.
‘헨리여... 루이를 독살시킬 수 없을까...?’
여기서 헨리 2세로 예루살렘왕 풀크의 손자였죠. 그녀는 헨리의 친증조모였죠(이 이야기는 앙주 가문에서 언급하였습니다. 참조). 그러나 이 이야기는 허구일듯 합니다. 그녀는 1117년에 죽었는데 헨리는 1133년에 태어나거든요. 아마도 베르트레드의 두 아들이 잉글랜드의 힘을 빌려 왕위를 차지하고 싶어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런 기록이 등장하는지도...
결과적으로 필립과 베르트레드 사이에 태어난 두 아들은 이복형 루이에게 푸대접 받았고 자손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결국 앙주백작의 후손들(플랜타지네트 가문)이 살아남아 프랑스왕에게 복수를 합니다. 우리 할배가 너희 할배 때문에 독수공방... 다시는 재혼도 못하고 혼자 살았다... 알간...?
필립이 애정왕으로 등극하는 순간...
유부녀를 데리고 온 업보 때문입니다.
그녀와 그의 다정한 모습이군요.
1108년 27세로 즉위한 루이 6세(Louis VI)는 어맂거부터 아버지의 부왕이 되어 통치에 관여하였고 노르망디공작이자 잉글랜드왕 윌리엄과 일드 프랑스 지역 소유 문제로 엄청나게 투쟁을 합니다. 윌리엄은 루이의 힘을 꺾기 위해 베르트레드의 아들 필립을 대립왕으로 세우고 싶어 하죠. 결국 필립이 죽으면서 이 문제는 해결되지만 잉글랜드는 카페 가문의 팽창을 저지하고 싶어 한 건 사실입니다. 루이6세는 이 문제로 가문의 모든 것을 이 투쟁에 걸어야했습니다.
루이 6세는 워낙 뚱뚱해서 별명이 ‘the Fat’이었죠. 왕자시절 첫 결혼은 오직 사랑 하나 때문에 신분이 낮은 귀족 여인과 결혼했다가... 왕이 되기 직전 이혼해버립니다. 그리고 왕이 된 후 사보이 백작의 딸과 결혼... 7남 1녀 총 8명의 자녀를 얻습니다. 그가 말년에 공들인 건 아키텐공작의 딸과 자신의 후계자 루이(훗날 루이 7세)와의 결혼이었습니다. 당시 아키텐공작 기욤10세에게는 딸 엘레오노라만 있어서 사위에게 자신의 영지를 물려주겠다고 공언했고 이 약속은 지킵니다. 엘레오노라(Eleanor of Aquitaine)는 부왕이었던 루이 7세(Louis VII, 'the Young')와 결혼합니다.
루이 7세는 차남으로 태어나 형이 요절하자 후계자가 되어 부왕이 되었고 아키텐공녀와 결혼하면서 카페 가문 출신의 왕으로는 가장 거대한 영지를 차지합니다. 형제가 많아서 그의 부왕 루이 6세는 살아남은 아들들에게 영지를 다 챙겨줄 수 없어 결국 왕자 2명을 주교로 만들어 버리죠. 그리고 성직자 길을 거부한 왕자 2명은 그나마 다정다감한 형 루이 7세의 배려로 로베르는 왕령지 일부인 드루스 지역을 받아 Count of Dreux가 되었고 막내 피에르는 쿠르트네이 영주의 상속녀와 결혼해 Lord of Courtenay가 되었죠. 왕령지를 쪼개기를 싫어해 아들을 주교로 내몬 아버지에 비해 너그러운 형이 그나마 낫군요...
세 번째와 네 번째 카페 가문의 방계로 House of Dreux와 House of Courtenay가 이렇게 성립됩니다. 이중 쿠르트네이 가문은 훗날 라틴 제국을 차지하게 됩니다. 종가의 왕국보다 더 발전해서 제국으로 등장하는 방계...
루이의 이러한 너그러움은 곳간이 가득 찼기 때문에 가능한 일... 아키텐이란 거대한 영지를 손에 넣은 루이 7세는 너무나 느긋했죠. 왕비는 보기 드물게 여장부였는데... 말입니다. 왕비 엘레오노라는 두 딸을 낳고 한숨만 쉬고 있었죠. 왕과는 성격이 영 맞지 않아... 딴 방 차리고 살고 있음... 이때 앙주 백작령 때문에 매년 신년에 파리로 인사하러 오는 잉글랜드의 새 군주 헨리의 굵은 목을 보고 반합니다. 저 젊은 나이에... 저런 신체 조건에... 그에 비하면 나의 남편은 거의 내시 수준???
1152년 루이 7세의 나이 32세... 엘레오노라의 나이 28세에 합의 이혼합니다. 루이는 간과하고 있었죠. 아들이라도 얻고 이혼했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터인데... 조금만 밤일(?)을 열씨미 했더라면 아쉬움을 뒤로 하고... 엘레오노라는 아키텐을 챙겨들고 잉글랜드로 달려갑니다. 연하의 헨리가 왕비의 왕관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여기도 왕관 비워두었음... 어서오세요~ 환영~!!!
헨리 2세가 루이 7세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취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푸른 색 백합 문양은 카페 왕가를 상징하고요. 붉은 색 사자들은 잉글랜드를 상징하죠.
헨리는 앙주 및 노르망디 영지 때문에 프랑스왕을 존숭했었죠. 옛날에는...
당당히 왕관 쓰고 인사하는 이 차림은 대체 무슨 심뽀일까요...?
그녀가 떠난 뒤 루이도 재혼을 합니다. 레온과 카스틸라왕의 딸 콘스탄스였는데 그녀도 딸 둘 낳고 요절합니다. 그래서 다시 삼혼에 들어간 루이... 1160년 40세 나이에 20세의 샹파뉴백작의 딸 아델라라 결혼... 1165년 드디어 기다리던 아들 필립이 태어납니다. 루이는 아들 필립이 14세 되던 해 부왕으로 삼아 통치에 참여케 합니다. 이때까지도 카페 가문의 장남은 부왕에 임명되어 아버지와 공동통치하는 형식을 취합니다. 여전히 취약한 왕권...
필립 2세(Philip II Augustus)는 루이 7세의 1남 5녀 중 유일한 아들이었고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성장했습니다. 이혼해 간 전 여편네가 잉글랜드 왕의 자손들을 엄청 낳아주는 통에... 남부 프랑스는 완전히 잉글랜드 판이 된 상태였죠. 더 이상 카페 가문의 힘으로 밀어붙히기에 곤란할 정도로 성장해버린 플랜타지네트 가문...
이 가문과는 이미 필립 1세 때부터 악연이 있었죠. 플랜타지네트 가문의 앙주백작 아내를 강제로 데려온 전례가 있었고 선대는 카페 가문의 부인이 플랜타지네트 가문으로 건너갔고...
아무튼 이 두 가문의 악연은 필립 때까지 이어지고 있었죠.
필립 2세의 별칭은 "God-given"... 이게 뭡니까...? 이정도인 겁니까...???
그가 승천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저 무능한 헨리의 자식들 때문입니다.
형제끼리 다투는 통에 외아들 출신의 필립은 유리했습니다. 이쪽는 혼자야... 너희들은 박 터지지...?
잉글랜드에서 왕자들간 영지 빅매치가 열리는 동안... 카페 가문은 외아들에게 물려주어 속이 편했죠.
이제부턴 나의 폭풍성장만이 남았지...
1214년 필립은 12년간의 투쟁을 종식 시키고 앙주백작령을 지배하게 됩니다. 물론 덤으로 노르망디공작령도 따 내죠. 잉글랜드왕이었던 존이 ‘결지왕’이란 별칭을 얻었으니 그 만큼의 영토를 획득한 사람은 바로 필립... 그래서 신이 내린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필립은 잉글랜드와의 투쟁에서 얻은 자신감으로 1190년부터 스스로 ‘King of France’이라 부르도록 합니다.
이제 프랑크의 왕이 아닌 카페 가문만의 고유한 프랑스왕이 된 것입니다.
필립은 노르망디와 앙주뿐만 아니라 플랑드르 지방까지 손을 뻗습니다. 결혼 지참금으로 아르토와 백작령을 가지고 온 이사벨(Isabella of Hainault)과 결혼합니다. 이후 아르토와 지방은 영구히 왕령지가 됩니다. 장남 루이 8세는 부왕에 임명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어머니 영지로 물려받은 아르토와 백작(Count of Artois)에 임명되어 후계자로 살다 즉위합니다. 결국 필립에 이르러 카페 가문은 정당한 프랑스를 통치할 힘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1223년 필립 오귀스트가 죽을 때 마련한 왕령지...
그야말로 상전벽해가 따로 없죠. 파란색이 카페 가문의 영토입니다.
붉은 색은 플랜타지네트 가문 소유령입니다. 확실히 다르죠?
녹색은 프랑스 왕권이 미치는 영역입니다.
필립의 치세는 다양성의 연속이었습니다. 십자군에 직접 참전하였고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승리도 했죠. 그리고... 결혼문제도 거국적으로 일으켰죠. 1190년 아내가 죽자 재혼을 하게 됩니다. 1193년 재혼 상대는 덴마크왕녀 잉게보르그... 그녀가 파리에 도착하자 왕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습니다. 못생겼다거나 몸매가 나쁘다는 등등의 정확한 사유는 기록에서 적시하지 않아 상세한 내막은 모르겠습니다. 결론은 단지 왕의 마음에 안 드니까... 결혼을 무효로 하자는 겁니다. 그러자 이 왕녀는 교황에게 하소연합니다. 나쁜 남자 프랑스왕을 벌주세요...
교회가 이 문제를 다그치자 필립 曰... 캐논법에 의하면 조상 7대 중 같은 선조가 있으면 무효라고 했으니 그녀와는 선조 일부가 겹쳐지기 때문에 당연 결혼은 무효라고 답변을 합니다. 이 깨알 같은 복수...
과거 선조였던 로베르의 파문 전례를 이렇게 공박... 교회는 다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남생동이신 덴마크왕 발데마르는 분노... 교황을 다시 다그칩니다. 저노무 새끼 어떻게 좀 해줘~
필립을 향한 교황의 파분 위협은 무시로 끝납니다. 니가 무슨 힘이 있냐...? 난 프랑스왕이라구...
이처럼 필립의 권위는 교황을 우시하기에 이릅니다. 이건 카페 가문의 상전벽해...
결국 잉게보르그의 결혼은 무효가 되었고(물론 교황 이노센트 3세는 필립의 무효선언을 인정하지 않음, 필립의 삼혼도 인정하지도 않음) 파리 근교에 머물면서 기다리다가 지쳐 화가 난 잉게보르그가 결국 덴마크로 돌아가면서 사건은 종결됩니다. 필립은 보란 듯이 1198년 다시 삼혼을 합니다. 교회가 뭐라고... 카페 가문의 위상이 이 정도로 발전합니다.
1223년 즉위한 루이 8세(Louis VIII)는 과거의 전례였던 부왕에 임명되지 않고 상속자 신분으로 즉위한 첫 사례가 됩니다. 그는 아버지 밑에서 잉글랜드와의 전투에 여러 번 참가하여 'the Lion'이라 불리웠고 그 자신감으로 1216년 스스로 잉글랜드왕으로 선포할 정도였죠.
와라 잉글랜드... 나는야 사자왕이라네... 그래 많이 컷다... 카페 가문... 헐...
당시 존 왕에 반대한 잉글랜드 제후들이 루이를 잉글랜드로 초빙... 루이는 성 바울 성당, 윈체스터 사원과 왕궁의 절반을 점령하죠. 그리하여 그 자리에서 추대 받고 자칭 잉글랜드왕으로 선포...
귀국하다가 해전에서 대참패... 결국 조약 맺고 끝나고 말죠. 역시 최강의 잉글랜드 해군력...ㄷㄷㄷ
그렇지만 3년의 짧은 치세 기간 동안 조용한 해가 없었습니다. 결국 프랑스 남부에서 내부 충돌을 벌이다가 귀가 도중 이질에 걸려 사망합니다. 왕비는 카스틸라 왕과 잉글랜드 공주 사이에 태어난 블랑쉬(Blanche of Castile)와 결혼했습니다.
이 결혼은 존 왕의 반발을 일으키는데 존의 누이 딸인지라... 잉글랜드 왕위계승과 관련 있는 여인이었기 때문이죠. 아무래도 루이 8세는 먼 미래를 보고 결혼했던 것 같습니다.
저 집안 남계 단절하면 우리가 잉글랜드 접수한다... 뭐 이런 전략이었겠죠.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12세 나이로 즉위한 루이 9세는 네 번째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존한 장남이라 계승자가 됩니다. 그래서 소위 '아청왕'으로 즉위한 터라...
어머니의 막강한 섭정 기간을 거치게 됩니다. 이 루이 왕의 엄마도 장난 아니었거든요.
루이는 프로방스 백작의 딸 마가레트(Margaret of Provence)와 결혼을 했는데... 어머니는 아들이 이 조신하고 착한 며느리에게 아들이 홀딱 빠진 걸 보고 질투... 둘이 같이 자지도 못하게 방해를 했다고 합니다.
사연인즉... 보다시피 루이 9세의 별칭은 ‘Saint’ 였습니다. 독실하고 경건하고 독서 및 학문, 음악, 승마 등등을 사랑하는 왕의 취향에 왕비 또한 이 취향이었거든요.
두 사람이 엄청 취향이 같아서 둘이 떨어질 줄 몰랐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찰떡궁합...
그러자 왕의 어머니가 질투신공으로 두 사람이 밤을 함께하는 걸 막았다는 전설 아닌 전설이...
이 나이에 과부된 것도 억울한데 아들까지 빼앗기고... 둘이서 러버 띄우고 난리도 아니넹~
그러나 이 집요한 왕의 어머니에 의한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부부 사이엔 총 11명의 자녀가 태어납니다.
적어도 11번 이상 방해 공작이 실패했다는 반증도 되네요. 그렇습니다... 파리의 궁전은 생각보다 넓으니까요.
왕비는 74살까지 장수했습니다. 왕은 7살 연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56세로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납니다.
보기 드물게 사이가 좋았던 국왕 부부가 오래 해로하지 못한 것은 아쉽네요.
역사서에서 프랑스 왕 하면... 여자에 껄떡 되던 인간들이 너무나도 많았기에...
이런 군주가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 세인트 아무나 하는 거 아냐~
이 자상한 형님 왕님은 동생들을 끔찍이 아껴서 왕령지를 분봉해 줍니다. 바로 밑 동생 로베르에게 자신이 물려받은 아르토와 백작령을 넘겨주죠. 이에 다섯 번째 카페 가문의 방계 가문이 떨어져 나갑니다. 그리고 다음 동생 알폰소를 푸아투아 및 툴루즈 백작령 상속녀와 결혼시켜 줍니다. 물론 자식 없이 죽자 툴루즈를 왕령지로 복속시키지만요. 그리고 가장 마음에 걸린 동생은 바로 막내 샤를이었죠. 유복자로 태어난 동생을 안쓰럽게 생각합니다. 내 동생 영지 만들려면 희생양이 필요해...
이 희생양으로 선택된 불쌍한 어린 양은 바로 시실리의 호엔슈타우펜 가문 출신 어리석은 아청왕 이었죠. 1266년 형님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샤를은 시실리를 정벅...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제 여섯 번째 카페 가문의 분가인 앙주 가문이 성립됩니다. 그러고 보니 앙주 백작령과 프로방스 백작령까지 다 들고 가버렸군요. 샤를은... 동생 중 제일 많이 챙겼군요.
1270년 부왕을 이어 즉위한 필립 3세(Philip III)는 왕관과는 먼 거리의 차남이었습니다. 2살 위의 형 루이가 있었기 때문에 자상하신 아버지의 배려로 오를레앙 백작령을 받고 아라곤 왕의 딸과 결혼하여 분가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형이 17세로 급사하자 갑작스럽게 후계자가 됩니다.
그의 정책은 시실리 문제에 집중됩니다. 워낙 십자군 전쟁 여파가 길어졌고 남부 유럽의 이슬람 제국을 공격하려는 숙부 샤를의 팽창정책을 지지하는 통에 여러 전쟁에 휘말려들게 되죠. 더구나 이베리아 반도 문제까지도 간섭... 아무튼 국제무대에 안 끼어든게 없는 군주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는 돌아다니다가 이질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러니 아무데나 가서 물을 먹으면 안됩니다. 끊여 먹어야 됩니다. 그런 공중위생을 알리 없는 사람들...
필립은 두 번 결혼해서 총 8명의 자녀를 얻었습니다. 첫 번째 결혼에서 후계자 필립을 얻었고 두 번째 결혼에서 딸 이사벨을 낳았는데 그녀는 잉글랜드왕 에드워드1세의 후처로 들어가서 노퍽백작과 켄트백작을 낳았습니다. 그토록 줄기차게 영토 전쟁을 하던 잉글랜드왕에게 시집 간 첫 공주가 되었습니다. 왜 보냈는지도 의문...
1285년 17세로 즉위한 필립 4세(Philip IV)는 차남으로 태어나 형이 12세로 요절하자 계승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결혼을 통한 영토 확장을 우선 순위로 둔 부친에 의해 16세 때 나바라왕국과 샹파뉴백작령을 물려받을 조안(Joan I of Navarre)과 결혼합니다. 그리하여 정식으로 나바라왕국을 획득하죠. 이제 카페 가문은 두 개의 왕관을 가지게 됩니다.
장남 루이 10세가 처음으로 두 왕관의 주인이 됩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을 얻지 못했습니다. 1316년 27세로 죽을 때 그에게 공주 2명만이 남게 되죠. 그래서 아랫 동생 필립이 필립 5세가 되어 계승합니다. 그는 일찍 푸아투아 백작령을 받고 분가한 상태였죠. 형님이 아들을 얻지 못하자 두 왕관을 물려받습니다. 그도 결혼으로 부르군디백작령을 확보하지만 1남 4녀 중 아들이 요절해서 딸만 남게 됩니다. 딸에겐 아무 것도 줄수 없는 상황... 결국 아깝지만 그 다음 동생에게 왕관은 넘어갑니다.
1322년 두 형님이 딸만 남기고 죽자 얼떨결에 즉위하게 된 샤를 4세(Charles IV)는 정말로 자신만은 아들을 얻고 싶었습니다. 14년간의 결혼 생활로 2명의 자녀를 얻었지만 아들이 죽자 바로 이혼을 단행... 이웃 신성로마황제의 딸에게 새 장가를 듭니다. 어떻게든 아들 보려고... 20세의 황녀는 바로 아들을 낳아주었지만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죽고 왕비는 산후 후유증으로 이틀 뒤에 세상을 떠납니다. 당시 출산은 목숨을 걸어야 되는 것...
그래서 샤를은 세 번째 결혼을 단행합니다. 상대는 카페 가문의 분가인 데브루 백작 딸... 그녀는 딸 둘을 내리 낳고 임신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왕이 급사합니다. 만일 아들이 태어나면 문제는 없지만 딸이라면... 두 달 후 블랑쉬란 이름을 가진 공주가 태어나면서 모든 것은 끝나버립니다.
즉 1328년 2월 1일 샤를 4세는 사망했고 왕비가 임신한 상태인지라 모두가 기다렸습니다만... 4월 1일 공주가 태어나면서 왕관은 주인은 다시 정해야했습니다. 직계가 단절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면서...
셈은 복잡해지지요. 누가 이을 것인가...?
당시 샤를 4세의 바로 밑 누이 이사벨(Isabella of France)은 잉글랜드왕 에드워드 2세와 결혼하여 에드워드 3세를 낳은 상태였죠. 물론 계승할 공주는 여러 명이었습니다. 전왕 루이 10세의 딸 조안의 경우 여계 상속도 인정하는 나바라 왕위를 순리대로 물려받았습니다. 문제는 프랑스 왕위였습니다. 여성 상속이라면 조안이 두 왕관을 물려받아야 되었습니다만 프랑스 귀족들은 그녀를 인정하지 않고 프랑스 왕위를 분리하려 했습니다. 결국 추정상속인으로 발르와 백작을 내세우게 됩니다.
발르와 백작령은 1284년 필립 3세의 차남인 로베르가 분봉 받으면서 떨어져 나간 분가였죠. 로베르는 세 번 결혼을 통해서 엄청나게 다산을 합니다. 특히 두 번째 결혼은 라틴 제국의 쿠르트네 가문이랑 하면서 명목상의 라틴 제국 황제이기도 했습니다.
로베르의 14명에 이르는 자녀 중 장남인 필립은 어머니(나폴리왕 샤를 1세의 손녀)로부터 앙주 백작령과 멘 백작령을 받았고, 아버지로 부터 발르와 백작령을 물려받아 상당한 위치의 영주로 부상한 상태였습니다. 아내도 루이 9세의 공주 아그네스와 부르군디공작 로베르 2세 사이에 태어난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종가를 이을 수 있는 후계자로 추대 받길 고대하고 있었죠. 어떻게 보더라도 필립은 자신의 가계와 혈통이 에드워드 3세보다 우위에 있기 위해 할 수 있는 대로 노력했었습니다.
이러나 저러나... 에드워드 3세는 원활하지 못한 계승에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계승했더라도 전쟁은 어쩌면 필연적이었을 것입니다. 과거 프랑스왕 필립이 잉글랜드왕 존이 궁지에 몰렸을 때 공격을 가해 영토를 넓혀 나갔듯이, 에드워드 3세 또한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을 최대한 노리고 이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1328년 방계였던 필립(Philip VI of France)이 즉위하면서 카페 가문은 정통성이 훼손되었고 결국 1337년 백년전쟁이 발발하면서 발르와 가문의 위기가 도래합니다. 알고 보면 필립의 업보입니다. 결혼을 통해 확보했던 잉글랜드의 영토를 밀어내기 위해 시작했던 싸움이 결국 카페 가문의 위기에서 다시 발발한 셈이니까요.
저의 사견입니다만... (이건 ‘史臣은 論한다’의 모방 쯤... 됩니다)
카페 가문의 출발은 역성혁명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0세기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이 그러한 결과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결국 카페 가문은 공동통치라는 부왕제도까지 만들면서 왕권을 유지했고, 필립 오귀스트의 치세가 한창일 무렵에야 비로소 ‘프랑스 왕국’이라는 명칭을 쓰게 됩니다. 결국 이때 프랑스식 중앙집권화가 발달되기 시작되었다는 반증도 됩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잉글랜드와의 투쟁이라는 외부적 요소가 강했습니다.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외부로 눈을 돌려 애국심을 발휘하도록 유도하는... 이른바 민족국가로의 시발 선상에서 카페 가문은 정치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셈입니다.
그리고... 결혼을 통해 조금씩 영지를 넓혀 나갔고 가능하면 자신들의 왕령지는 분할하지 않고 타 귀족들의 영지를 결혼을 통해 잠식해 나갔습니다. 즉 장자계승원칙을 채택하여 게르만적 균분상속을 탈피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게르만 지역은 여전히 균분상속을 고수한데 반해 카페 가문은 외부 투쟁을 통해 획득한 경험과 왕권 신장을 바탕으로 장자계승을 확립할 수 있었죠.
이러한 정책은 훗날 보더라도 상당히 효과적이었고, 거기다 남부 귀족들의 십자군 원정 참여 덕분에 그 속도는 가속화되었습니다. 분권화 된 많은 영지가 경제적 곤란 속에 빠지고 후손이 단절되면서 빚 갚기 위한 매도와 후손 없는 영지로서 왕령지 귀속 등이 이루어집니다. 이런 것들을 반영해 보면 실로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의 백미는 카페 가문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흥하고 성장한 세력은 오직 프랑스 뿐 이었으니까요. 아... 더 있군요.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 어느 한 사건으로 흥하고 망하는 건 하늘의 이치라고는 하지만 동로마제국이 망하면서 가장 큰 덕을 본 건 역시나... 프랑스와 북이탈리아라는 말을 자주 듣곤 합니다. 프랑스는 중앙집권을 통해 중세를 가장 먼저 탈출했고 북이탈리아는 인문주의가 발달하면서 르네상스의 부흥 시기를 맞이하게 되니까요.
여기서 자른 점은 아쉽지만 발르와 가문까지는 힘들어서 여기서 카페 가문은 끝내겠습니다.
가능하면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고 했습니다. 줄인다고 줄였는데도 A4 11장이 나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랑 동일한 수량이군요... 헐...
글 쓰기는 당분간 쉬어야 될 것 같습니다. 다음 기회에 시간이 나면 보헤미아로 건너가도록 하죠.
여태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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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 입니다.
프랑크는 독궈인와 빵국인들을 모두묶어 말하는겁니다.
아퀴텐 공작령이 정말 짱인듯 허허 크킹1때도 아귀네스였나요 딸한명 있어서 1등 혼인감이었는데
아 근데 왜 아퀴텐 공국은 아퀴텐왕국으로 진화를 못한걸까요? 브루군디공작도 로랑기티아 왕해보려다 못하고.. 왕작위 새로만드는게 참어려운중세..
거대했지만 아키텐공이 실질적으로 다스린게 푸아티에와 보르도 지역인지라ㅜ 그런연유로 루이6세는 강려크한 왕권발휘 못했죠
읽기가 편해서 좋아요.. 잘읽고 가요.ㅎㄴㅎ
저당시 키예프의 문화수준이 어땠냐면. 프랑스로 시집온 안나가 결혼식때 서약을할때 안나는 자신의 이름을" 글"로썼는데 남편되는 냥반은 십자가 아나그램으로 대충떼우고.. 안나는 파리에 대해서 엄청난 불평을했다죠. 먼미래의 이 위치가 바뀌게 되니 참.
역시 최고네요. 1066이든 867이든 다시한번 카페가문 잡아서 플레이해보고싶은ㅎㅎ
역시 논평 부분이 재미지네요,ㅎㅎ
카페!카페! 잘봤습니다
근데, 바벤베르크 편에서 비텔스바흐가 언급되지 않은 건 의외의 일이네요.
뭐, 비텔스바흐는 차지했던 왕위의 숫자만 놓고 보면 ㅎㄷㄷ한데 바이에른과 팔츠 밖에서는 제대로 정착을 못하는 듯한 느낌이지만.
한때 브란덴부르크, 겔러 등 영지가 컷는데 뿌리 못내려서ㅈㅈ
오오 역시 유럽 최대가문! 잘봤습니다!
흠... 개인적으로 팬픽을 쓰면서 가페 가문을 너무 얕잡아 봤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정도로 근성 있는 가문이 앙주에 알박기한 잉글랜드에서 무단 임명한 마녀 시장한테 다털린다는게 말이 안되잖아...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위그카페가 왕이된 이면엔 오토왕조 즉 루돌핑거가의지원도 한몪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