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비이성의 세계사’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제목대로 인간사 중에서 매우 비이성적인 사태를 주목하여 뽑아낸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면 ‘중세 마녀사냥’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킬링필드’ 중국 공산당의 ‘홍위병과 문화대혁명’ 우리나라의 경우 ‘병자호란과 환향녀’ 등입니다. 그 사건들 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 대부분의 사건 속에 나타난 악랄한 학살행위들이 과연 그에 버금가는 살인마들의 잔치였는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냥 보통사람들이 악마로 바뀌더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요즘 일어나고 있는 ‘묻지 마 살인’과도 연관되는 이야기일까요? 그러나 이것은 주로 개인적 이유가 많은 줄 압니다.
그러나 세계사 속의 이 집단적 학살행위는 그냥 개인의 탈선이 아닙니다. 개인의 생각이 무리의 생각으로 환원될 때 괴이한 폭발력이 발생합니다. 그 때 전혀 모르고 있던 악마가 튀어나옵니다. 책임이 조직 안으로 스며들어 분산되어버립니다. 소위 책임소재가 불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단이기심이라는 것이 발생합니다. 사태가 진정이 되고 무마되려할 때 원인을 구명하고 책임을 따지려 하면 하나둘씩 물러갑니다. 아무도 남는 이가 없습니다. 그냥 멍 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직과 대항하는 개인이 결코 이길 수 없기도 합니다. 조직에는 권력은 있어도 책임이 희미합니다. 참으로 무시무시합니다. 이런 사실을 알기에 서로 조직에 합류하려고 합니다.
얼마 전 영화 ‘다음 소희’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학생이 자살하여 수사를 합니다. 모두가 단순 자살로 마무리하려 합니다. 그 어린 나이에 왜 죽음을 택해야 했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형사가 추적합니다. 학교 담임으로부터 학교 당국도, 관련한 교육부도 그리고 학생의 노동을 사용했던 기업도 그 누구도 관계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냥 묻자는 식입니다. 딸을 잃은 부모만 속 터지지요.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습니다. 형사가 관련된 사람들, 기관들을 쫓아다니지만 얻는 것이 없습니다. 분명 주검은 있는데 그에 따른 책임은 없습니다. 아니 찾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이지요. 왜 이렇게 됩니까? 조직 안에 숨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잔인해지고 잔학해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집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조직이나 집단 안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그 때부터 개인은 사라지고 해괴한 물체가 권력을 가지고 행동합니다. 그리고 그 힘은 눈덩이처럼 커질 수 있습니다. 힘이 커질수록 폭력의 수준도 더해집니다. 그 때는 개인적인 양심도 이미 멍든 상태가 되기 쉽습니다. 어떤 획기적인 동기가 부여되지 않는 한 지속됩니다. 그리고 재미가 붙습니다. 금기사항이었던 것들조차 시도해볼 용기가 덧붙여집니다. 멀찍이 떨어져보면 그야말로 해괴한 몰골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알던 주위 사람들이 놀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하는 것이지요.
주변 모든 주택과 건물들이 붕괴됩니다. 오직 황궁아파트 한 채만 댕그러니 남습니다. 주변의 생존자들이 이 아파트로 몰려옵니다. 어떻게 하지요? 낯선 사람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아이만이라도 맡아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그냥 내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한두 사람 집안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 그런 게 아니지요. 이러다가 주민의 수가 두 배 세배로 늘어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생활이지요. 기본적으로 먹고 싸고 자고 하는 일을 해결해야 합니다. 자는 거야 서로 껴서 잘 수 있다지만 양식은 제한되어 있고 다음으로 용변을 처리해야 합니다. 사실 먹는 것만큼 싸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냥 벌판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주택 안에서의 문제입니다.
일단 통제를 위해 주민 대표를 선출합니다. 그는 표어를 만듭니다. ‘아파트는 주민의 것’ 황궁아파트 주민에게는 그야말로 구원의 메시지 같은 말입니다. 그렇게 외치며 외부인들의 출입을 막습니다. 더구나 이미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까지 색출하여 쫓아냅니다. 자기네만의 성을 구축합니다. 무리를 지어 무장(?)하고 양식을 구하려 나갑니다. 물론 거두어 공평하게 각 세대에게 분배합니다. 잘 되어가는 듯합니다. 그러나 외부와의 갈등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때문에 양쪽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전쟁처럼 돌변합니다. 결국 살인까지 일어납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지만 전혀 새로운 경험입니다. 재앙이 일어나기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입니다.
그냥 보통 시민이고 큰 힘이 없는 일반 주민입니다. 결혼하여 얼마 안 되어 신혼의 달콤한 꿈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싸움이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을지 모릅니다. 그런 신랑이 살인에 동조했다고? 앳된 신부가 놀라지 않을 수 없지요. 이런 사람과 살을 맞대고 산다니, 얼마나 소름끼칩니까? 그래도 신랑입니다. 어쩌겠습니까? 그리고 사람의 죽음을 보는 것과 내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까운 가족의 죽음을 보는 것은 감정이 전혀 다릅니다. 속된 말로 뒤집어지지요. 주민들 속에는 나름대로의 사정이 들어 있습니다. 일일이 해결하기는 어렵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폭발할지 모릅니다. 위기는 아픔과 슬픔을 낳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 이길 힘도 만들어줍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Concrete Utopia)를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