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와 거북
곽 흥 렬
이번으로 벌써 몇 번짼지 모르겠다. 세상 구경 하겠다고 나온 생명붙이들을 불과 며칠 만에 또 몽땅 잃고 말았다. 어저께까지만 해도 고물고물 살아 숨 쉬던 귀엽디귀여운 아이들이었다. 그렇게 번번이 벌어지는 집단 죽임의 현장에 마음이 아렸다. 대관절 어떻게 된 영문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뒤란 한구석에 닭장하고 나란히 토끼장이 놓여 있었다. 오일장이 선 어느 날, 장골 주먹 크기만 한 토끼 한 쌍이 입양되어 왔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그랬던가. 내가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계속 “토끼” “토끼” 하면서 노래를 불러대자,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가물에 콩 나듯이 쓴 당신의 선심이었다. 새하얀 털이 함박눈처럼 소담스러운 앙고라였다. 그 녀석들이 보고 싶어,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와 책가방을 마루에다 휭 내동댕이치다시피 하고는 곧장 우리로 달려가곤 했었다.
토끼 부부가 새끼를 낳은 건 그로부터 몇 달쯤 지나서였다. 어머니는 갓 태어난 새끼의 보금자리가 불편할까 봐 한쪽 옆의 깔밋한 곳으로 옮겨 주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질척한 데서 오글거리는 어린것들이 안쓰러웠던 게다. 그렇게 돌봐 놓고는, 젖먹이 동생에게 자장가를 들려주듯 무럭무럭 탈 없이 잘 크라고 혼잣말처럼 빌면서 뒤란을 돌아 나오셨다.
사달이 벌어진 사실을 안 것은 다음 날 이른 아침이었다. 그 아이들의 안부가 궁금해 부스스 졸리는 눈을 비비며 토끼장으로 갔을 때였다. 순간, 그 자리에서 그만 얼음기둥이 되고 말았다. 내무반에 머물다 적의 폭격을 받아 몰사한 병사들처럼 새끼가 한 마리도 남김없이 떼죽음을 당한 채 널브러져 있는 게 아닌가. 태어난 지 겨우 며칠 만에 벌어진 참사의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두 눈으로 번연히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우리의 불결한 환경 탓이었을까. 간밤에 외부 침입자의 습격이 있었던 것일까. 어미에게 치여서 그리되었단 말인가. 아니면 혹여 원인 불명의 돌림병이라도……. 갖가지 추측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혀 왔지만 끝내 뾰족한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나동그라진 주검들을 수습하는 마음은 참담한 심경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이 흘렀다. 어미 토끼는 새로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오종종하게 귀여운 새끼들을 여럿 낳았다. 나는 시나브로 지난 아픔은 잊고 새 식구들을 맞은 기쁨에 들떠 있었다. 어머니는 접때와 같은 불상사가 또다시 생길까 봐 더욱더 정성을 기울여 새끼들의 자리를 보송보송한 곳으로 옮기고, 낡아서 입지 않는 폭신한 털 재킷까지 깔아 주었다. 그렇게 살뜰히 보살피며 건사에 신경을 썼건만,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여지없이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녹화된 필름처럼, 집단 도륙의 현장이 고스란히 재연된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도, 네 번째도……. 단 한 번도 제대로 포동포동 젖살이 올라가는 새끼를 보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토끼장은 늘 포로 교환 끝난 수용소처럼 휑해져 버렸다. 아! 훗날 그것이 다른 누구의 짓도 아닌 제 어미의 소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토끼는 천성적으로 몹시 예민한 동물이다. 특히 새끼를 낳을 때가 되면 더욱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에라도 갓난것을 만지는 일은 절대 금물이다. 일단 사람의 손이 탔다 하면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새끼들의 목숨을 해치는 돌출행동을 보인다. 토끼의 그런 습성을 까맣게 몰랐으니, 딴에는 잘해 준다고 한 관심과 배려가 결과적으로는 외려 독이 되고 만 셈이다. 적군의 칼에 죽게 할 순 없다며 자기 손으로 처자의 목을 치고서 황산벌싸움에 나간 계백 장군처럼, 녀석에게도 앙증맞은 겉모습과는 달리 저리 매운 강단의 구석이 숨어 있었던가 보다. 말하자면 외유내강형外柔內剛型이라고나 할까.
이것은 토끼에 대한 내 생각의 틀을 바꾸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때까지는 녀석이 복슬복슬한 생김생김처럼 부드럽고 여린 성정을 지닌 동물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 나의 판단은 한참 허방을 짚고 있었던 게다. 그제야 토끼가 항시 핏발 선 눈빛으로 쏠듯이 노려보는 것하며, 등허리를 곧추세우고 앞발을 바투 잡아당겨 앉거나 혹은 까치발 자세로 서서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까닭이 비로소 헤아려졌다. 그것은 함부로 대해서는 큰코다친다는 엄중한 경고의 표시였다. 그들의 결기에 찬 성정을 나는 그때 똑똑히 보았다. 그러면서 토끼는 절대 우리가 평소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온순하다거나 유약한 동물이 아님을 확연히 깨달았다.
내가 책에서 그림으로나 봐 왔던 토종거북인 남생이의 실물을 만난 것은 토끼를 키울 그 무렵이었다. 하계 방학으로 학교가 문을 닫으면, 마을 앞 개울이 시골 아이들의 여름학교가 된다. 매일같이 책가방 둘러메고 등굣길을 재촉하듯, 날이면 날마다 일찌감치 후딱 점심을 해치우고는 달랑 팬티 하나만 걸친 채 개울로 달려가 오후 나절을 온통 물에서 살다시피 했으니 말이다. 자고 나면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산과 들 그리고 논밭뿐인 벽촌에서, 어쩌면 그만한 재밋거리도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여름이 깊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한참 풍덩풍덩 신나게 멱을 감고 있다 보니, 물가의 돌 틈에 꼭 끼인 희끄무레한 물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고전소설 『별주부전』에서의 표현대로, 영락없이 둥글넓적한 나무접시 모양이었다. 이 물속에 웬 접신가 싶어 살그머니 손을 가져가는 순간, 놈은 하마 낌새를 눈치채고 걸음아 날 살리라며 부리나케 헤엄쳐 줄행랑을 놓는 게 아닌가. 저리 비겁하게 온몸을 바짝 움츠리고 죽은 듯이 위장을 하고 있었다니……. 그것은 전에도 후에도 겪어 보지 못한 참으로 별스러운 경험이었고, 수십 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 장의 스냅사진처럼 선명한 기억으로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남생이는 생래적으로 빛이 들지 않는 수초 더미나 물가의 돌 틈 같은 으슥한 장소에다 몸을 숨기고 사는 습성을 지녔다. 자고로 그런 비밀스런 공간에선 항시 건전한 계획보다는 음충맞은 꿍꿍이수작이 모의 되는 법이다. 그러기에 두더지같이, 광명한 세상에의 노출을 꺼리는 거북이란 놈이야말로 스스로 당당하지 못하고 어딘가 켕기는 구석이 있는 위인일시 분명하다.
전래동화 『토끼와 거북』 이야기는 두 동물에 대한 우리의 사고 관념을 마치 수학 공식처럼 정형화시켰다. 대체 그 누가 토끼를 제 재주만 믿고 방일하게 처신하는 자의 대명사로, 거북을 묵묵히 땀 흘리며 인내하는 자의 표상으로 그려 놓았는가. 거북의 행동은 끈기가 아니라 오히려 휴식의 가치를 모르는 미련스러움일 뿐이다. 매일같이 톱니바퀴같이 맞물려 돌아가는 직장생활에서 놓여나 이따금 휴가를 떠나듯, 방전된 에너지의 재충전을 위해 가끔은 쉬어 줄 필요도 있는 것이 살아 움직이는 존재들의 공통된 속성 아니더냐. 휴식은 게으름이 아니라 철철이 찾아오는 세시풍속과도 같이 다음날을 위한 준비요 활력소일 터이다.
거북이란 놈은 노상 죽은 것처럼 납작 엎디어 눈치를 살피다가, 누가 살짝 건드릴 낌새만 감지되면 여지없이 네 발을 바투 당기고서 목을 쏙 옴츠려 버린다. 세상이야 지지고 볶고 난리를 치든 말든 나만 다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식의 복지부동, 그것은 순종이 아니라 굴종이다. 유연함이 아니라 줏대 없음이다. 그리하여 지상의 동물들 가운데서 가장 오래 살아남는 족속이란 영예로운(?) 이름을 얻었다.
하기야 손이 닿았다 하면 반사적으로 몸을 사리는 것이 어디 거북뿐일까. 달팽이가 그렇고, 다슬기가 그렇고, 조가비 또한 마찬가지 아니던가. 하지만 이런 녀석들의 행동은 차라리 어린아이 같은 애교로 보아넘겨 줄 수도 있다. 거북이란 놈은 그 당당한 덩저리에 어울리지 않게 참으로 가소롭지 아니하냐.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딴딴한 등껍질로 무장을 하였으면서도 웬 겁은 그리 많으며, 대추 씨처럼 빠끔한 눈은 어쩌면 그다지도 사악과 교활의 대명사인 뱀의 눈을 쏙 빼닮았는지. 거기다 개기름 번지레하게 흐르는 근육질의 대가리는 또 어떻고.
토끼의 생태를 관찰하면서 불현듯 우리의 애국지사며 의사, 열사들이 떠오르는 것은 어인 까닭일까. 그분들의 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어디에 그처럼 개결介潔한 의기가 숨어 있었나 싶게 하나같이 온화하고 유순한 얼굴상이다. 어쩐지 옆집 누님처럼 살갑게 느껴지고, 이웃 마을 아저씨와도 같은 친근감으로 다가온다. 그런 겉모습과는 달리 유독 눈빛만큼은 이글이글 불타는 애국혼으로 형형히 빛나고 있다.
그에 반해, 거북의 습성을 보면서는 비굴하게 일신의 안락만을 구하다 간 친일 매국노의 행태를 생각해 낸다. 유들유들한 얼굴판으로 권력에 빌붙어 호가호위하면서 요리조리 이 눈치 저 눈치나 살피다 위험신호가 감지되었다 하면 개미귀신처럼 쏙 모가지를 감춰버리는 보신주의자, 그리하여 그들은 마르고 닳도록 목숨을 보전하면서 갖은 부귀영화를 누리다 갔다. 백 년을 살아봐야 하루살이보다 못한 인생일 수 있는 것을……. 그들은 산 것이 아니라 단지 존재했을 따름이다. 아니, 그냥 단순히 존재했다기보다는 더럽고 부끄러운 이름으로 존재했다. 그리하여 우리의 순정한 역사를 좀먹히고 이 나라, 이 민족에게 영원히 씻을 수 없는 대역죄를 저지르지 않았던가. 그들의 삶에는 역사가 판관이 되어 반민자反民者라는 꼬리표를 달아 준엄한 심판을 내리고 있다.
내 설사 토끼처럼 동공이 벌겋게 충혈될지라도, 항시 부릅뜬 눈으로 세상을 경계하며 살아갈 것이다. 거북이처럼 납작 엎디어 요리조리 눈알을 굴려 가면서 살지는 아니할 것이다. 이렇게 어쩐지 거북이보다는 토끼의 삶의 자세에 더 마음이 끌리는 걸 보면, 아마도 나는 전생에 토끼였던가 보다.
- <문장> 2025년 봄호
첫댓글
우리가 알고 있던 토끼와 거북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시대에 따라,
우리가 알고 있는 가치관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토끼가 그런 면이 있었군요.
거북은 십장생에 들어가기도 하지요.
토까를 키워 보았는데 성격이 예민하고 급하더군요
거북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재미 있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당
나는 몇년전에 우리 5060 길동무를 통해서 경기도 어느 호수공원을 산책하다가
큼직한 자라가 뭍에 올라와서 뒤집어져서 버둥거리고 있는거를 보았는데?
그거를 줏어서 물에 놓아주었다
그렇다면 자라의 생명을 구해주는 좋은 일을 했으니 복이 와야 되는데?
표면적인 복이 오지를 않았다
그래서 걷기우 들에게 불평 불만을 말했더니
지금처럼 건강하게 몸을 유지하는게 복 받은거 아니냐고 이야기 하더라
그말을 들으니 맞는 말 이더라
좌우간 나는 자라를 살려주어서 복 받을거다
건강하게 오래 살거당
충성 우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