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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혜명동양학아카데미 원문보기 글쓴이: 혜명
공공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2차
경북신도청의 풍수와 명문가 집성촌을 찾아서
혜명동양학아카데미원장 류 동 학
1. 경북신도청의 풍수지리적 인문학
2008년 6월 8일, 21세기 경상북도의 운명을 결정할 신도청 소재지로 안동시와 예천군 일원이 결정됐다. 그 이후 2년이 지난 2010년 4월 29일 마침내 사업시행자를 경상북도개발공사로 지정하고 5월 4일 개발예정지구를 고시함으로써 신도시 조성을 위한 구체적이고 본격적인 사업이 궤도에 올랐다. 경상북도에서는 2014년 6월 도청 이전, 2027년 인구 10만의 신도시 완성까지 차질 없이 일정을 추진할 예정이다. 도청 이전으로 인해 안동·예천을 포함한 경북 북부지역 및 경북은 많은 변화와 번영이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안동·예천 도청이전지를 풍수적 입지조건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도청이전지는 서쪽으로는 백두대간인 소백산맥의 봉화군 선달산(1,236m)에서 시작한 내성천(109.5㎞)이 예천군의 동쪽지역인 보문면·호명면·지보면을 따라 흘러 삼강리에서 낙동강과 문경시 동로면 적성리 황장산에서 발원하여 문경시 영순면에서 금천(錦川,42.85km) 과 합류한다.
동남쪽으로는 낙동강이 영양군 일월에서 발원한 반변천(113㎞)을 안동시내에서 합류시키면서 도청이전지 앞을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지역으로, 두 강과 백두대간의 두 지맥인 문수지맥과 보현지맥이 남북으로 서로 마주보면서 지형을 형성하는 지역이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대간룡(큰산줄기)인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행룡하다가 태백시의 매봉산을 분기점으로 하여 한 맥은 동해안을 따라 뻗어 부산시 대대표 몰운대에서 끝나는 낙동정맥을 형성하고 , 다른 맥은 서남행하면서 태백산을 세운 뒤에 봉화군 옥돌봉을 거쳐 소백산과 지리산으로 향한다. 이 맥이 백두대간의 주맥이다.
한편, 옥돌봉에서 남쪽으로 고개를 돌린 용맥이 문수지맥으로 머리를 틀어 축서사를 품고있는 문수산과 조골산을 기봉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안동의 학가산을 세운 후 현재 신도청의 본청 뒤의 주산인 검무산(劍無山·해발 332m)을 세우면서 멈추었다. 검무산은 서울의 진산인 북악산(342m)의 높이와 비슷한 331.6m의 높이로 문수지맥에 있다. 문수지맥은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의 옥돌봉(1,244m)에서 시작되어 안동지역의 진산(鎭山)인 학가산(870m)과 검무산과 나부산을 지나, 낙동강과 내성천의 합수지점인 회룡포 부근의 비룡산에서 끝을 맺는 지맥이다.
검무산의 외청룡은 안동 권씨의 집성촌인 가일마을의 주산 정산(井山, 289m)과 쌍봉이 동쪽을 호위하면서 하회마을의 주산에 해당하는 화산(花山, 328m)에 이르고 다시 서쪽으로 감아서 강한 정기를 하회마을에 뿌린다. 검무산의 청룡에 해당하는 한 지맥이 다시 안동 김씨의 집성촌으로 명당으로 유명한 소산마을의 주산인 소산을 형성한다. 검무산의 뒤쪽으로는 역시 명당으로 유명한 풍산 김씨 집성촌인 오미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검무산의 우백호(右白虎)는 거무산(227m)과 호명면 산합리의 가일산(143.1m), 금릉리의 뒷산인 봉황산(200m)으로 연결된다. 검무산의 내백호는 거무산과 진천고개를 지나 마봉(173m)을 형성한다. 마봉과 옆의 시루봉(185m)이 검무산의 남쪽 주작인 안산(案山)에 해당한다고 본다. 남쪽의 조산(朝山)에 해당하는 지형은 검무산에서 낙동강 넘어 보이는 병산서원 앞의 병산과 봉화산(400.6m) 및 마늘봉(365m)으로 검무산을 멀리하여 병풍처럼 서있다. 바로 하회마을의 남쪽 산들을 말한다.
이 산들은 병풍을 펴놓은 듯 원형의 봉우리들이 여러 개 연결되어 있는 문곡수성체(文曲水星體)의 산으로, 어병사(御屛砂)나 금장사(錦帳砂)라고도 한다. 문신이나 재상및 거부가 난다는 곳이다. 이 산들은 백두대간의 매봉산에서 남쪽으로 갈라져 부산 몰운대까지 이어지는 약 370㎞의 낙동정맥이 동해안을 따라 이어지다가 청송군·포항시·영천시 등의 경계를 이루는 보현산(1,124m)을 지나 석심산(石心山, 750.6m)에서 남쪽줄기의 팔공지맥과 갈라져 다시 북서쪽으로 향하여 위천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의성의 비봉산(579.3m)에서 끝을 맺는 보현지맥의 한 갈래가 하회마을 쪽으로 갈라져 나간 곳이다.
이와 같이 도청후보지는 백두대간을 척추로 하여 북쪽과 서쪽으로는 문수지맥이, 남쪽으로는 낙동정맥의 지맥인 보현지맥이 자리하고 있고. 태백산 부근에서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으로 갈라졌던 산의 지세가 경북지역을 돌아서 다시 합쳐지는 곳이다. 또한 이곳은 내성천과 낙동강 사이에 있는 산맥과 강이 어우러진 21세기 경북의 미래를 선도할 ‘웅도 경북’의 자존과 영광을 지켜줄 도청이전지로서 손색이 없는 명당지역으로 본다.
도청 이전지(안동시 풍천면과 예천군 호명면의 경계)의 5개 마을은 500여년간 동족부락의 생명을 그대로 유지해 왔다. 풍산읍의 가곡리는 안동 권씨·순흥 안씨·최씨, 갈전리는 한양 조씨·김씨·최씨, 도양리는 김씨·임씨·조씨의 집성마을이다. 예천 호명면의 산합리는 김씨·이씨·최씨, 금능리는 이씨·권씨·임씨의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이전해야 할 분묘가 가곡리(559기)·갈전리(562기)·도양리(630기)·산합리(574기)·금능리(364기) 등 5개 마을을 통틀어 2천689기나 된다.
풍수지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여자지’가 주산인 검무산과 명당터의 명당수를 머금어 주는 못(池塘)으로 음양이 상보하는 길지다.
2. 하회마을과 풍산류씨
안동에는 양반이 많았던 특성상 그 어느 지역보다도 동성마을이 많다. 대표적인 동성마을로는 하회리 풍산류씨 집성촌인 하회마을, 임하면 천전리 의성김씨 집성촌인 내앞마을, 임동면 수곡리 전주류씨 집성촌인 무실마을과 박곡리 전주류씨 집성촌인 박실마을, 가곡리 안동권씨 집성촌인 가일마을, 주하리 진성이씨 집성촌인 주촌마을과 온혜리 진성이씨 집성촌인 온계마을, 오미리 풍산김씨 집성촌, 망호리 한산이씨 집성촌인 소호마을 등이 있다.
도청이전지 인근의 명문가 집성촌을 인문학적으로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가장 남쪽의 마을이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문화유산인 하회마을이다. 하회마을은 처음에는 허씨(許氏)와 안씨(安氏) 중심의 씨족마을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이들 두 집안은 떠나고 풍산 류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중요민속자료 제122호인 하회(河回)마을의 ‘하회(河回)’라는 이름은 마을 주위를 감싸 안고 흐르는 낙동강의 모습이 ‘회(回)’자와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졌는데, 풍수지리학적인 관점에서는 마을이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의 형상과 같다 하여 길지(吉地)로 꼽는다. 이와 관련하여 과거 이 마을에서는 담장을 만들 때 돌을 섞지 않았다고 하는데, 마을이 물에 가라앉지 않기를 바라는 풍수의 관점에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 하회마을에는 100여채의 전통 한옥이 있는데, 그 가운데 12채가 보물 및 중요민속자료로 등록되어 있다. 또한 서민들의 놀이였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선비들의 풍류놀이였던 ‘선유줄불놀이’가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어 하회마을은 우리의 전통 생활문화와 건축양식 모두를 경험할 수 있는 귀중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회마을의 전체적인 모습을 감상하고자 한다면 부용대에 올라 회(回)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 쌓아 안고 흐르는 낙동강과 그 안에 자리한 마을을 보는 것이 백미이다.
부용대가 내려다보이는 마을 북쪽으로 강학(講學) 공간인 원지정사, 빈연정사가 있으며, 이 두 정사 앞의 강 너머로 부용대, 옥암정사, 겸암정사가 자리 잡고 있다. 예전에는 강을 건너려면 배를 타야 했는데 요즘에는 풍천면 소재지에서 광덕교의 다리를 건너면 차로 이동할 수 있어 누구나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부용대를 마주하고 있는 원지정사와 빈연정사는 류성룡과 류운룡(柳雲龍) 형제가 학문에 정진하며 많은 책을 남긴 장소로 동쪽과 서쪽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류성룡의 강학 공간인 원지정사와 류운룡의 강학 공간인 반연정사의 두 정사는 모두 출입문이 협문처럼 작은데, 최대한 외부와 단절한 상태로 나만의 공간에서 학문을 닦고자 하는 선비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물이다.
원지정사의 창문 너머로는 부용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이 부용대의 꼭대기에 오르면 낙동강이 굽이치는 하회마을이 손에 잡힐 듯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모습을 볼 수 있다.
풍산 류씨는 하회마을 입향조인 류종혜 이후 관찰사 류중영과 아들인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 형제에 의해서 명문가로 발돋움한다. 특히 서애에서 시작한 9대에 걸친 벼슬길은 풍산 류씨 대종가인 겸암에서 분리하여 소종가를 형성했다. 현재 하회마을에는 대종가인 양진당(養眞堂,보물 제306호)과 소종가인 충효당(忠孝堂,보물 제306호)이 하회마을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양진당(養眞堂,보물 제306호)은 조선 명종 때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과 그의 맏아들 겸암(謙唵) 류운룡(柳雲龍)이 살던 집으로 류중영의 호를 따서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랑대청 앞 처마 아래에 ‘입암고택’ 현판이, 사랑대청 안 북쪽 벽 바라지창 위에 ‘양진당(養眞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지금의 이름인 ‘양진당’이라는 당호는 이곳을 크게 중수한 류운룡의 6대손인 류영(柳泳)의 아호(雅號)에서 따온 것이다.
풍산류씨 대종택인 양진당은 원래는 아흔아홉 칸이었으나 지금은 쉰세 칸만 남아 있다. ‘ㅁ’자형 안채에 행랑채와 대문채가 ‘一’자로 합쳐져 열세 칸의 3량 집의 긴 건물이 전면에 배치되어 있는 형상이다. 평면도를 그려보면 경상도 가옥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ㅁ’자형 안채에 대청 옆으로 ‘一’자형 별당을 이은 형태이다. 마을의 다른 가옥에서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우뚝 솟은 솟을대문과 사랑채의 높은 기단, 좌우로 뻗은 행랑채 등은 이곳이 대종택임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하회마을에서는 드물게 정남향을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양진당은 연화부수형(連花浮水形) 형국의 하회마을에서 꽃술에 해당하는 자리에 있다 하여 가장 명당자리로 꼽는다.
사랑채 옆으로 난 협문을 나서면 넓은 후원과 함께 다른 고택에서 볼 수 없는 양진당만의 특징으로 두 개의 사당이 은행나무 밑에 자리하고 있다. 이 사당은 이 집의 자랑거리로 류중영과 류운룡 두 불천위가 부자(父子) 관계이기 때문에 한 곳에 모실 수 없어 두 개의 사당이 세워진 것이다. 아버지인 류중영의 사당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크기에 반 칸의 퇴를 두고 있고, 류운룡의 사당은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규모이며, 기둥의 간격과 규모 또한 아버지의 사당보다 작다. 이러한 부분에서도 위계질서가 건물로 표현되는 예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우리 조상들이 지금의 우리나라를 예의 나라로 만든 초석이 되었다고 본다.
두 불천위를 모신 두 개의 사당
양진당과 함께 하회마을을 대표하는 반가로 꼽히는 충효당은 서애 류성룡의 종택이다. 지금의 충효당의 모습은 류성룡 선생 사후에 선생의 유덕을 기리는 많은 유림들의 도움을 받아 그의 손자 류원지(柳元之)가 안채를, 증손자 류의하(柳宜河)가 사랑채를 확장 중수한 것으로, 류성룡이 낙향한 후 말년을 보냈던 소박한 생가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가옥이라 한다. 대문채는 선생의 8대손인 류상조(柳相祚)가 지었는데 일반 기와집과 달리 전면에 긴 행랑채와 함께 일자 모양의 독립된 건물로 배치돼 있어 눈길을 끈다.
이 가옥은 커다란 바깥마당을 지나 긴 행랑채인 대문채를 지나 끝나는 지점에 좌측으로 동선이 꺾이면서 솟을대문을 만나게 된다. 대문채의 몇 개의 계단을 올라서면 사랑대청에 걸린 ‘충효당’ 편액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 글씨는 류의하가 사랑채를 중수할 때 당대 명필가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전서(篆書)로 쓴 것이다. 당호를 충효당이라 짓게 된 연유는 서애가 임종할 당시 자손들에게 남긴 시구절인 ‘충과 효 외에 달리 할 일은 없다(忠孝之外無事業)’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사당 앞에는 서애 선생의 유물전시관인 영모각(永慕閣)이 자리하고 있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썼다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곳에는 서애 선생의 대표 저서인 『징비록(懲毖錄, 국보 제132호)』을 비롯해 많은 교지와 고문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 책은 (국보 제132호)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애 유성룡(1542~1607)이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징비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서애파는 서애 류성룡-우복 정경세-수암 류진-류원지로 연결되어 학봉파와 더불어 퇴계학파의 양대산맥을 형성했다.
3. 오미마을과 풍산김씨
신도청지역 북쪽에 위치한 오미(五美)마을은 풍산김씨(豊山金氏)들이 500년 동안 세거해 온 씨족마을이다. 학가산의 한 갈래인 대봉산 줄기가 수십 리를 남으로 뻗어내려 죽자봉(竹子峰)을 만들고, 동쪽으로는 아미산(峨嵋山)이 굽어 돌아 마을을 감싸며, 서쪽으로는 멀찍이 도인산(道仁山)이, 남쪽으로는 곱게 솟은 검무산(劍舞山)을 바라보는 아늑한 동네다. 학가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보문산과 대봉산을 거쳐 남쪽의 검무산으로 이어져 마을 앞을 서쪽으로 감싸 안고 가곡마을 앞산에서 멈추는데, 때문에 마을에 다섯 가닥의 산줄기가 뻗어 내려 있다고 해서 오릉동(五陵洞)이라 불렸다.
그 후 한차례 오무동(五畝洞)으로 고쳤다가 의정공의 손자인 유연당(悠然堂) 김대현(金大賢)공의 아들 8형제가 모두 진사에 이르고, 그 가운데 5형제는 문과에 급제하자 인조 임금이 팔연오계(八蓮五桂)라 하여 마을 이름으로 지금의 오미동이라는 지명을 하사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오미마을이 되었다. 안동 하회마을과 소산마을, 가곡마을 등에 비해 오미마을은 예천-안동 간 국도에서 4km 넘게 더 들어가야 찾을 수 있기 때문인지 이곳까지 방문하는 이는 거의 없다. 입구에 세워진 표지석에는 마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풍산김씨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金銀說)의 후예로 고려 고종 때 좌리공신 풍산백에 봉해진 김문유를 시조로 한다. 김문유의 증손 김동성이 충렬왕 때 문과에 올라 찬성사를 지내고, 안동 풍산 석릉촌에 옮겨 살면서 오릉동(五陵洞, 지금의 오미리)에 별장을 두었다.
후손들은 대대로 고려에 벼슬하면서 송도(松都, 일명 개경·개성)에 옮겨 살았는데, 조선이 개국하고 송도의 사족(士族)들을 정책적으로 한양에 이주시킬 때 직장(直長)을 지낸 김문적(金文迪)공의 8세손 김자순(金子純)이 한양 장의동(壯義洞, 지금의 삼청동)으로 옮겨 살았다. 김자순의 형 김자량(金子良)이 병조판서를 지내다가 왕자의 난에 연루되어 죽게 되자 김자순은 화를 피하여 안동으로 내려와 오릉동에 숨어 살면서 후손들의 교육에 힘썼다.
손자 김휘손(金徽孫)은 진산군수를 지냈고, 증손 김양진(金楊震)은 참판을 지냈다. 김양진의 아들 김의정(金義貞)은 인종이 세자 시절 서연관(書筵官)을 지내면서 두터운 신임을 얻어 인종이 즉위하자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이 되었다. 인종이 왕위에 올라 곧 승하하자 병을 칭하고 낙향하여 오릉동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호를 잠암(潛庵)이라 하고 아들 이름을 김농(金農)이라 지어, 시골에 숨을 뜻을 굳혔다.
김의정의 손자 김대현(金大賢)은 현감을 지냈고, 김대현의 아들 8형제는 모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그중 5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인조는 오형제가 문과 급제를 한 것을 가상히 여겨 오릉동을 오미동으로 고치게 하고, 경상감사로 하여금 마을 어귀에 봉황려(鳳凰閭)를 세우게 하였다.
김대현의 아들 중 맏이인 학호 김봉조(鶴湖 金奉祖), 넷째인 심곡 김경조(深谷 金慶祖), 막내인 운송 김숭조(雲松 金崇祖)는 오미동에 세거하였고, 둘째 망와 김영조(忘窩 金榮祖), 셋째 장암 김창조(藏庵 金昌祖), 여섯째 학사 김응조(鶴沙 金應祖)는 봉화 오록(梧麓)마을로 새 터전을 마련하였으며, 다섯째 광록 김연조(廣麓 金延祖)는 예천 감천으로 이거하였고, 일곱째 학음 김염조(鶴陰 金念祖)는 재종숙인 정헌공 김수현(靖憲公 金壽賢: 김양진의 둘째 아들인 순정(順貞)의 손자)에게 입양되어 김포로 이거하였다.
八蓮五桂 이후 문과 급제자 중 죽봉 김간(竹奉 金侃: 1653~1735), 독산 김종규(獨山 金宗奎: 1765~1830), 낙애 김두흠(洛厓 金斗欽: 1804~1877)은 심곡 김경조(深谷 金慶祖)의 후손이며, 왜적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추강 김지섭(秋剛 金祉燮)의사는 설송공의 후손이다.
현재 오미동에는 학호 후손이 10여호, 심곡공 후손이 40여호, 설송공 후손이 30여호가 살고 있다. 그리고 마을에는 유연당 9父子가 글 읽던 죽암서당(竹岩書堂), 위패를 모신 추원사(追遠祠), 후손들이 공부하던 도림강당(道林講堂), 풍산김씨 종택(민속자료 38호), 영감댁(令監宅: 민속자료 39호), 참봉댁(參奉宅: 중요민속자료 179호), 죽봉사당(竹奉祠堂), 마을회관으로 사용되던 화수당(花樹堂) 등 많은 고건축이 남아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오미마을을 대표하는 문화재는 추원사와 도림강당이다. 추원사는 유연당 김대현을 위시하여 그 자제 八蓮五桂 등 모두 아홉 분의 위패를 모셔두고 선조의 공덕을 기리는 향사를 지내는 곳이고, 도림강당은 이 분들의 학덕을 숭모하여 후손들이 자제들의 학업을 증진하기 위하여 세워진 곳이다. 후손들은 이 둘을 아울러 ‘도림추원사’라 부르며, 집안의 자부심을 대표하는 문화재로 인식하고 있다.
오미마을은 독립투사를 많이 배출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일본천황이 사는 궁궐에 폭탄을 던졌던 김지섭(金祉燮) 의사,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일본 총영사를 사살하고 자결한 김만수(金萬秀) 의사,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규탄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전국의 사림들에게 알린 후 자결한 김순흠(金舜欽) 선생 등이 바로 오미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때문에 오미마을 언덕 위에 독립운동기념비와 정자가 세워지게 되었는데, 그 옆에 노송이 마을을 향해 절을 하듯 굽어 내려다보고 있다. 이러한 역사가 켜켜이 묻어 있는 마을에는 풍산김씨 불천위 사당을 모시는 종가댁과 소종가, 참봉댁, 학남유거, 삼벽당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여러 기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전통 마을의 고즈넉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오미리 마을로 가는 길
오미리 마을 동산
그 가운데 삼벽당(三碧堂,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73호)은 조선 후기 안동지방 민가의 특성이 잘 보존된 건물로 꼽히고 있다. 마을회관에서 왼쪽 골목을 따라 올라가면 담장 없이 정침에 사랑채가 붙은 ‘ㅁ’자형의 건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이곳이 삼벽당이다. 현재 이 집의 소유자는 김승현으로 그의 8대조인 김상구(金相龜) 선생이 분가할 때 건립한 가옥이라고 한다. 삼벽당이라는 당호는 김상구의 아들인 종한(鐘漢)의 호에서 비롯된 것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 자헌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고 한다.
삼벽당 전경
안동 풍산김씨종택(安東 豊山金氏宗宅,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8호)은 선조 때의 학자인 유연당(悠然堂) 김대현(金大賢) 선생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집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통훈대부 사헌부지평을 지낸 학호(鶴湖) 김봉조(金奉祖)공이 선조 33년(1600)에 다시 건립했다. 이 종택의 윗사랑채는 유연당의 조부인 장암 선생의 당호를 따라 유경당(幽敬堂)이라 부르고 이 집 전체를 가리킬 때는 유연당종택이라고 한다. 이 가옥은 마을의 가장 위쪽 죽자봉 줄기 끝에 위치하고 있다. 양옆으로는 산에서 계곡이 흘러내리고 앞에는 오미동 참봉댁(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79호)이 골목을 사이에 두고 앞에 서 있으며 왼쪽 아래로는 ‘ㅁ’자형의 소종택이 자리하고 있다.
4. 소산(素山)마을과 안동김씨
안동김씨를 가리켜 “금관자(金貫子)가 서 말(3斗)”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관자는 조선조 때 정 3품 이상의 고관(高官)들의 망건줄에 달던 옥(玉)과 금고리를 뜻한다. 따라서 안동김씨는 그만큼 많은 현관(顯官)을 배출시켰다는 것이다. 흔히 세간(世間)에서는 안동김씨라고 하면 조선조 말 60여 년간의 외척세도(外戚勢道)정치로 나라를 어지럽힌 집안으로만 알고 있는 경향이 있으나, 조선조 500여년을 통하여 15명의 상신(相臣)과 50 여명의 판서(判書), 7명의 대제학(大提學)을 배출하였을 뿐 아니라, 출사(出仕)에 기반이 되는 문과 급제자가 172명, 무과급제자가 146명에 이르고 선비로서 유고(遺稿)나 문집(文集)을 남긴 학자가 175명에 달할 정도로 현달(顯達)한 인물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장령공 김영수(金永銖)의 둘째아들인 서윤공(庶尹公) 김 번의 증손자로, 인조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족을 시종(侍從)하여 강화도로 피난 갔다가 성(城)이 함락되자 문루(門樓)에 폭약을 터뜨려 손자와 함께 자결(自決)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1561~1637)과 척화(斥和), 절의(節義)파의 거두(巨頭)인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2~1652) 형제가 유명하고 소위 장동김씨(壯洞金氏)로 일컬어지는 안동김씨의 경파(京派) 가운데 청음의 손자인 수증(壽增:공조참판), 수흥(壽興:영의정), 수항(壽恒:영의정) 삼형제와 세칭 “6昌”으로 알려진 수항의 아들 창집(昌集), 창협(昌協), 창흡(昌翕), 창업(昌業), 창즙(昌緝), 창립(昌立)은 당대의 학자요 문사(文士)로 명성을 떨쳤다. 장령공의 맏아들인 강원관찰사 삼당공(三塘公) 김 영(金 瑛·1475~1529)의 후예로서 고향 안동을 지키며 살아온 소산집들은 비록 서울집만큼 화려한 출사(出仕)나, 빼어난 명성을 갖지 못했더라도 이 고장에서는 어느 문중 못지 않은 문장(文章)과 가업(家業)을 잘 지켜오고 있다.
현재 소산마을에는 대종택 “양소당(養素堂)”을 비롯하여 청음 김상헌이 병자호란 후 낙향 은거하며 배청(排淸)사상을 지켜온 “청원루(淸遠樓: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90호)”와 장령공 김영수가 영천군수에서 물러난 후 87세의 노모(老母)를 위하여 지은 정자(亭子)인 “삼구정(三龜亭: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213호)”, 동야(東埜) 김양근이 태어난 “동야고택(東埜古宅: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193호)”, 소산 입향조(入鄕祖)인 비안공(比安公) 김삼근(金三近)의 구택인 “돈소당(敦素堂: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211호)”과 그 별채인 “묵재고택(黙齋古宅:경상북도 민속자료 제 85호)”, 상락김씨(上洛金氏) 지파(支派) 김용추(金用秋) 종택인 “삼소재(三素齋:경상북도 민속자료 제 66호)” 등 7개의 도 지정문화재(指定文化財)와 일제(日帝)강점기인 1910년에 설립한 안동김씨의 신교육기관인 “역동재(驛洞齋)”와 성균진사(成均進士) 김정근(金正根)의 효자 정려문(旌閭門)인 “홍문(紅門)” 등 2개의 안동시 지정문화재가 소재하고 있으며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로 시작되는 김상헌의 시가 새겨진 “청음시비공원(淸陰詩碑公園)”과 최근에 안동시에서 조성한 “삼구정 생태공원”, 그리고 서울 청풍계(淸楓溪)에 있던 삼당공(三塘公)의 정자를 중건(重建)한 태고정(太古亭)이 소요산(素耀山) 자락, 유서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이 마을의 기나긴 역사와 아름다운 풍광(風光)을 잘 보존해오고 있다.
5. 가일마을과 안동 권씨
안동시 풍산읍에서 하회마을 방면으로 2.5㎞가량 떨어진 곳에 풍천면 가곡리 가일마을이 있다. 가일마을은 경북신도청 좌청룡에 해당하는 정산을 주산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가일마을은 고려 개국공신인 권행(權幸)의 후손 가운데 한 갈래인 안동권씨 복야공파가 일가를 이루어 600여 년간 살아온 곳으로 세종 때 정랑(正郞)을 지낸 권항(權恒, 1403~1461)이 이곳의 부호인 류개(柳開)의 손자인 류서의 사위가 되어 재산과 토지를 물려받아 정착함으로써 동성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류개는 서애 류성룡의 5대조 유보의 아우이며 하회 마을 류씨 입향조인 류종혜의 숙부로서 고려말 인물이다. 권항이 1441년 문과에 급제하여 처가에 후사가 없자 사위가 처가재산을 물려받았다. 이러한 덕으로 같은 외손인 한 마을의 순흥안씨와 공동으로 외손봉사를 지금까지 행하고 있다.
가일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버드나무 보호수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수령 200년, 수고 12m, 나무둘레 5.7m이다. 마을 앞에는 커다란 연못 가곡지가 있고 그 너머 넓은 풍산들이 마주하고 있으며, 풍산들 건너에는 하회마을이 있으며, 멀리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인심이 좋기로 유명하며, 가일이라는 이름과 같이 산세가 아름답고 풍요로운 마을이다.
가일 마을의 안동 권씨는 하회 풍산 류씨, 우렁골 예안 이씨, 오미 풍산김씨, 소산 안동김씨와 더불어 안동 서부지역 5대 가문의 하나로 꼽히는 명문가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화산(花山) 권주(1457~1505)와 병곡 권구(1672~1749) 등과 같은 뛰어난 인물을 배출했는가 하면, 일제강점기 권오설(權五卨 1897~1930) 등을 비롯한 수십 명에 이르는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한 가문이기도 하다.
가일마을의 대표적인 문화재를 보면 다음과 같다.
남천고택(南川古宅,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24호)은 권장(權璋)이 조선 철종(哲宗) 1년(1850) 그의 아들 권수(權綏, 1832~1901)에게 지어준 집이다. 권수의 택호에 따라 남천고택으로 불려왔다. 사랑채는 서당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안동 권성백 고택(權成伯 古宅, 중요민속자료 제202호)은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양식으로 보아 1,800년대 후반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이어져서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뜰에는 연못과 정원수가 조화를 이루어 양반집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 1984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될 당시 명칭은 안동 권태웅 가옥이었으나 2007년 1월 29일 안동 권성백 고택으로 지정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 고택은 숙박이 가능한 곳이다.
야유당(野遺堂)은 수곡 권보(1709~1777)의 증손자 야유당 권장(1802~1874)이 1844년에 매입하여 기거하던 집으로 그 후 1921년에 권원탄의 조부 권동진(1887~1961)이 개축한 것이라고 전한다.
가일 수곡고택(佳日 樹谷古宅, 중요민속자료 제176호)은 조선 정조(正祖) 16년(1792)에 권조(權眺)가 조부 권보(權補)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고택이다.'ㄷ'자형의 안채와 '-'자형의 사랑채, '-'자형의 별당채와 문간채가 있다. 안채는 4칸인데 이 중에 2칸은 전면이 개방된 안대청이고 왼쪽 2칸은 안방이다. 사랑채는 8칸으로서 4칸은 큰 사랑방이고 왼쪽의 4칸은 작은 사랑방과 마루방으로 되어 있다.
별당인 일지재(一枝齋)는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마련된 곳이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3년간에 걸쳐 일지재를 비롯하여 안채를 보수하였다.이곳에서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금했던 독립운동가 우암 권준희 선생과 그의 손자인 독립운동가 권오상 선생이 태어났다고 한다.
안동권씨 병곡종택(屛谷宗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38호)은 조선후기의 학자인 병곡(屛谷) 권구 선생(1672~1749)의 종택이다. 선생의 7대조로 도승지. 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화산(花山) 권주(權柱)선생(1457~1505)이 살았던 집으로,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에 중건되었다.
멸실되었던 대청을 2011년 중건하였으며 보물 제549호 종손가문서와 보물 제1002호 종손가문적이 보관되어 있다.
당호는 시습재(時習齋)로 논어의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에서 취하였다. 선비의 전형적인 삶을 지향하였던 선생은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특히 성리학의 이론탐구에 그치지 않고 경전이 지닌 본래의 뜻을 익히고 몸소 실천하여 후학의 본보기가 되었다.
병곡 권구는 갈암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으로 일찍이 과거를 단념하고 유학의 전통을 지키면서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전념하여 수많은 문인을 배출했다.1728년(영조 4) 인인좌의 난으로 영남에 파견된 안무사(按撫使) 박사수(朴師洙)에 의하여 적당에 가담할 우려가 있다고 하여 압송되었으나 그의 인품에 감동을 받은 영조의 특지(特旨)로 곧 석방되었다. 사후 1859년(철종 10년)에 사헌부지평으로 증직됐으며 사림에 의해 불천위로 모셔졌다. 저서로는『병곡집(屛谷集)』10권 5책이 전한다. 병곡종택은 '종자종손(宗子宗孫)'으로 종택을 지켜온 보기 드문 집이다. 지금껏 양자(養子) 없는 적장 적통으로 종가를 잇고 있다. 입구에 서 있는 수백년은 넘은 회나무가 너무 인상적이었다.
노동서사는 1770년 권구의 학문과 유덕을 기리기 위해 지방 주민이 세운 서운으로, 사당이 없어서 서원이 못되고 서사로 불려지고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권구의 후손인 권오설(權五卨, 1897~1930)이 원흥학술강습소(元興學術講習所)를 열어 민족교육 운동을 일으킨 유서 깊은 곳이다. 권오설은 1926년 5월 6.10만세운동을 추진하다 발각되어 6월 7일 검거되었다. 1930년 4월 17일 권오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일제의 고문으로 온몸이 피멍이 든채 순국하였다. 그의 무덤은 가일마을 부근의 풍산들이 내려다 보이는 산기슭 공동묘지에 있으며 묘 옆에 '권오설지묘'라 쓰여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항일구국열사 권오설 선생 기적비는 2001년에 마을 들머리 저수지 옆에 세워졌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노동서사 옆에는 노동재사가 있다. 노동서사는 유생들의 글공부하는 공간으로 쓰였고 노동재사는 유생들의 숙식과 독서를 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가일마을은 34번 국도와 인접하여 있으나 마을이 잘 보이지 않아 지나치기가 쉽다.가일마을은 안동에 남아있는 많은 전통마을 중에서도 원형이 잘 보존된 마을 가운데 하나로, 가일권씨라 불릴만큼 안동권씨 가운데서도 독특한 정체성을 유지해 온 마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