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신시도 ‘최양업 신부 난파 체류지’
우리나라 사람으로 두번째 신부였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부제 서품을 받고 최초로 고국땅을 밟은 곳이 군산시 신시도임이 밝혀져 신시도 현장에 작은 표석을 설치하였다.
전주교구는 최양업 신부가 중국에서 부제서품을 받고 1847년 고국 선교를 위해 탑승한 프랑스 배가 거센 풍랑으로 난파돼 표류하다 도착하여 30여 일간 천막을 치고 생활하며 조선 신자들과 접촉을 시도했던 새만금 신시도에 2013년 11월 30일 안내판을 설치하여 최양업 신부의 신앙문화유산을 기념하기로 하였다.
1836년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로 신학도의 길을 떠난 후 1842년 7월 마카오를 떠나 고국 땅으로 돌아오기 위해 여러 번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시 세 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참수한 것에 대한 항의 서한에 대해 조선국의 답신을 받으러 오는 프랑스 함대 통역관으로 매스트로 신부와 함께 동승한 최양업 신부는 부제의 신분으로 고국땅 밟기를 고대하며 1847년 8월10일(음력 6월 30일) 생면부지의 고군산 부근에 도착하였으나 수심이 낮은 탓에 그만 글로와르호와 빅토리외즈호가 동시에 좌초되고 말았다.
이에 당시 함대 사령관이었던 라 피에르는 8월 12일 일단 북서쪽 2마일 섬(현재의 신시도 배수갑문 안쪽으로 추정됨)에 560여 명의 수병을 상륙토록 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총 6번의 귀국 시도를 했는데 신시도 방문이 4번째 시도이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이곳을 관할하던 만경현 고군산진을 통해 만경 현감으로, 전라 관찰사로 그리고 조정으로 보고하게 되고 전라감사는 만경 현령, 고부 군수, 위도 첨사, 여산 부사, 익산 군수 등으로 하여금 물과 식량, 배 등의 필요 물품을 제공하되 이들의 행적으로 지속적으로 감시하게 된다.
고군산진에 속하는 신치도 해양에 도착한 뒤 좌초된 곳에서 ‘북쪽 혹은 북서쪽으로 2마일(약 3.2km)’ 혹은 ‘10리쯤’ 떨어져 있는 섬에 상륙해야만 했으니, '일성록'에는 이곳이 ‘고군산진 신치도(현 신시도)의 신치산 아래 남쪽 모래사장’으로 나온다. 최양업 부제와 매스트르 신부가 입도한 신치도 남쪽 모래사장의 위치를 추정해 보면, 좌표상으로 '북위 35도 81분, 동경 126도 47분 부근'으로, 바로 이곳에서 1847년 8월 12일부터 9월 12일(음력 8월 4일) 상해로 떠날 때까지 정확히 한 달 동안 체류, 프랑스 해군과 조선 관리들 사이의 통역으로 활동했다. 바로 그곳이 신시도 기념탑 부근이라는 것이다.
한편 프랑스함대는 대형 보트를 상해로 보내 구조 요청을 하게 되는데 이를 접수한 영국 다다러스함 등 3척의 군함이 그해 9월 5일 신시도 현지에 도착하게 되고, 일주일 후인 9월 12일(음력 8월 4일) 프랑스 수군을 태우고 신시도를 떠나게 되는데 이때 동승했던 메스트로 신부와 최양업 부제도 떠나게 되어 이로써 30일간의 신시도 체류 일정을 마치게 된다.
한편 최양업 부제는 이 30일 동안 프랑스 함대와 조선 조정 간의 통역을 맡아 하면서도 시시탐탐 현지인과 접촉을 통해 천주교 신자를 접촉하려 노력하는데 하루는 고군산진(현 선유도) 고을의 관원들에게 협상을 하고 돌아오면서 몇 명의 조선인들을 만나 '예수님과 마리아를 아는냐?고 물으니 '알고 말고요 잘 압니다'라는 답을 얻었는데 그들의 가족 모두 대공소(현 부안군 변산면 석포리의 대소 공소)에 살고 있다는 답을 얻는 등 성과는 있었으나 더 이상은 관원들의 감시로 인해서 신자들과 접촉은 이뤄지지 못하고, 영국 함대가 와서 프랑스 수병들이 철수할 때도 최양업 부제는 조선에 남기를 간청했으나 당시 함대 사령관이었던 라 피에르는 남아 있을 경우 생명의 위험이 있다하여 거절하는 통에 천신만고 끝에 밟은 조선 땅 고국을 등지고 불가피 상해로 함께 철수하게 된다.
이로써 신시도는 최 신부가 귀국로 탐색 과정에서 처음으로 조국 땅을 밟았던 곳이고, 한 달동안 체류하면서 조선으로 완전한 귀국을 염원하던 의미 있는 장소이며, 비밀리나마 최양업 신부가 조선 신자와 상봉할 수 있었던 만남의 장소였고,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매스트로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장소이기도 하다.
전주교구는 최양업 신부와 신시도의 인연에 대한 교회사적 재발견과 추모 방안을 논의하고자 11월 30일 오후 2시 신시도에 안내판을 설치하고, 최양업 신부 신시도 행적 기념 학술 심포지엄을 열었다.
이날 안내판이 설치된 곳은 최양업 신부가 중국에서 부제 서품을 받고 1847년 고국 선교를 위해 탑승한 프랑스 배가 거센 풍랑으로 난파돼 표류하다 도착한 장소로, 최 신부는 그곳에서 30여 일간 천막을 치고 생활하며 조선 신자들과 접촉을 시도했으나 관원들의 감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교구는 이후 안내판이 설치된 곳에 표석을 설치해 신시도에 서린 최양업 신부의 신앙문화유산을 기념하고 새만금을 찾는 이들에게 종교적, 역사적 의미와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할 예정이다.
한편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루카) 소장은 신시도는 최양업 신부가 귀국로 탐색 과정에서 처음으로 조국 땅을 밟았던 곳이자, 한 달 동안 체류하면서 완전한 귀국을 염원한 의미 있는 장소라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