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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베드로
베드로전서 2:19-25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린다. 세계교회가 이어온 부활절 인사를 해보자.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지난 주간에 남해 노화도에 다녀왔다. 해남 땅끝 항에서 떠난다. 수요기도회 후 4속 주관으로 간식을 먹으면서 먼 길 다녀올 이야기를 했더니 앞에 앉은 분이 “남해안에 폭풍이 오면 주일은 쉬나요?”라고 즐거워하던 분이 있었다. 알고 보니 오늘 기도 순서였다.
돌아오는 토요일 아침, 새벽부터 잔뜩 해무가 끼어 불안하였다. 신양진 항 매표소에 전화를 걸었더니 오전 내내 앵무새처럼 짙은 안개로 대기 중이라고만 하였다. 조금씩 걱정스러운데 천혜교회 이재윤 목사님이 말한다.
“섬에는 걱정거리가 없어. 걱정해야 소용 없거든. 아무 계획이 소용없어. 해무가 끼면 배가 못 떠.” 그러더니 곧 안심을 준다. “걷힐 안개야. 주의보가 안 내렸기 때문에 배가 뜰거야...”
다행히 1시에 첫 배가 떠서 돌아올 수 있었다. 바다를 건너니 안심이 되었다.
1)
본문은 베드로가 쓴 편지이다. 베드로전서는 소망을 주제로 한다. 당시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닌 편지 수신인들은 적대와 멸시를 당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 편지는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바른 방향을 제시하려고 한다.
앞으로 위기와 박해가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내용이 아니다.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진리 편에 서게 하고, 고난을 이겨내도록 격려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의미가 무엇일까? 베드로는 말한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25).
성경에서 부르심의 의미는 길 잃은 양을 찾는 일이고, 종살이로부터 속량 받았다는 뜻이다. 고대 세계에서 노예는 양과 같이 재산이었다. 양을 사고 팔듯, 종과 전쟁 포로들을 매매하였다. 마찬가지로 금이나 은으로 노예를 해방시킬 수도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노예가 자유인이 되듯 속량 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금이나 은이 아니라, 이에 비하여 훨씬 더 비싼 것으로 자유롭게 되었는데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산 돌’(living Stone)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는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전서는 말하기를 너희는 ‘신령한 집’을 세우는 일에 쓰임을 받고,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란 명예로운 이름을 얻었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은 고난 가운데 오직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며 제자의 길에 동참하는 사람이다. 먼저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의로운 길의 본을 보여주셨다. 만약 지금 길을 잃었다면, 영혼의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듣고 따라야 한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1).
2)
사실 베드로는 그 자신이 길 잃은 사람이었다.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배신한 장본인이다. 평소 베드로는 흠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흠과 결격사유,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실함 속에 담긴 믿음을 통해 초대교회의 위대한 사도 베드로의 모습을 발견해 주셨다.
예수님은 갈릴리 어부 시몬에게 베드로란 이름을 주시고 그 이름을 직접 부르신다. 그의 사람다움 그대로를 받아들이셨다.
베드로는 천성처럼 신앙의 기복이 심한 사람이었다. 즉각적인 결심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며, 예수님의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의 모든 행적을 소상히 본 측근이었다. 그는 제자단의 맏형 노릇을 단단히 하였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가장 많은 비난을 받은 제자였다. 그는 덤벙대기를 잘한다. 끊임없이 궁시렁거렸다. 다른 제자는 감히 생각조차 못하던 일을 저질렀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예수님을 말리다가 “사단아 내 뒤로”(마 16:23)라는 비난을 들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발 씻어 주심을 거부하다가 나중에는 온몸을 씻어 달라던 철없는 사내였다. 여종의 추궁에 못 이겨 그만 홀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다.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에 통곡했던 마음 여리기가 문풍지 같은 사내였다.
돌아보면 이것은 모두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행동이었다. 베드로의 옛 이름은 시몬이다. 그리고 주님에게 받은 새 이름은 베드로이다.
그는 평생 옛 이름 시몬과 새 이름 베드로 사이를 왕래하며 살았다. 때로는 변화하지 않은 시몬의 모습으로, 때로는 변화된 사람 베드로의 모습으로. 전 생애를 통해 시몬과 베드로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갔으나, 결국 시몬에 머물지 않고, 시몬을 극복하고 베드로의 삶을 산다.
베드로의 부활 체험은 부활하신 주님을 발견한 데 머물지 않고, 그 사랑의 깊이를 확인하고 그렇게 사는데 까지 나아 간다.
주님은 세 번 질문하셨다(요 21:15-17).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세 번 대답하였다. 세 번째 대답할 때는 근심이 들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사람인가? 아니다. 다만 거룩한 물음이 필요한 사람이다. 그 물음에 근심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러한 거룩한 물음이 나를 일으켜 주고, 길을 돌아가게 하고, 새로운 삶을 다시 결단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게 한다.
예수님은 비난과 책망보다 질문하셨다. 그 거룩한 물음이 나를 살리신다. 예수님의 사랑은 베드로에게 용서와 사명을 주었다.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이제 사랑을 긍정할 기회를 허락하신 것이다.
비로소 베드로는 명예를 회복하였고, 거룩한 위임을 받았다. 이러한 예수님의 위탁과 위임은 베드로전서에서 계속 확장된다. 그리고 베드로는 세상으로 흩어진 나그네 된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것이 오늘 본문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 베드로는 진실하게 예수님을 쫓았다. 사도행전에서 만나는 베드로, 베드로전서에서 만나는 베드로를 읽으면 복음서에서 만났던 베드로 그 사람이 맞는가 싶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래서 변화 이전과 이후의 지점에서 ‘그 사람 베드로’를 배운다.
베드로는 말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났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24).
고난 받는 종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욕, 아픔, 죽음을 통해 마침내 구원을 이루셨다. 십자가는 내게 주신 은총이었다.
베드로는 ‘구부러진 나무’와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한 제자였다.
우리 속담에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다. 베드로는 그런 사람이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입고,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 한없는 감격과 기쁨으로 복음을 널리 증거 하는 자가 되었다.
베드로에게는 특권이 있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예수님의 제자로서 함께 동고동락했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특별한 은총이었던가? 다른 사람들은 그런 기쁨을 누리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베드로의 말씀을 읽으면 눈물이 날 정도다. 눈으로 보지 못했으나, 사랑한다는 마음을 아는가? 얼마나 감격스러운 고백인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셨다. 그의 탄생과 생애, 말씀과 행하심, 하나님 나라와 기적,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셨다. 그리고 이를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변두리로, 낮은 곳으로, 그 소외와 곤궁과 비참의 자리로 자신을 이동해 온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
예수님은 내 인생을 사랑하시고, 지친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신다. 낡고 닳은 내 부끄러운 인생을 수선하기 위해 나와 함께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 헤진 삶, 고장 난 인생을 고쳐주시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그를 닮아 가는 일, 배우는 일, 믿는 일은 참으로 어렵지만, 그러나 나는 주님을 사랑할 수 있다.
3)
내가 남해 바다 노화도를 방문한 것은 이재윤 목사님을 만나기 위해서다. 사실 몇 년을 별렀는데, 마침 원로 목사님의 제안에 운전기사를 자임하였다.
그곳에 이재윤 목사님 부부가 11년째 산다. 그는 1980년대 서울의 쓰레기 산 난지도에서 목사로 일했다. 그는 준비된 목회자였다. 학창시절 넝마와 구두닦이로 단련된 삶이었다. 그래서 남들이 기피 하는 곳일 망정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곳에서 불행을 겪었다. 갑작스런 돌풍으로 모래가 눈에 박혀 한눈을 실명하였다.
거듭된 불행으로 목회를 접었다. 무려 20년이다. 그리고 다시 목회를 시작한 것이 남쪽 섬 노화도이다. 그곳에서 전도사 과정부터 다시 시작하였다.
노화도와 다리로 연결된 보길도에 망끝전망대가 있다. 바다 위로 떨어지는 낙조를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라고 한다. 너무나 아름다워서일까,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려는 사람들이 찾는다고도 했다.
한 번은 닭을 삶아서 놀러 갔는데, 마침 그곳에 마침표를 찍으려는 듯한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같이 먹자고 권하다가, 결국 교회까지 동행해 하룻밤 재워 보냈다. 문득 그 사람은 희망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남자가 자고 갔다는 예배당 곁방에서 이틀 밤을 지냈다. 섬은 여전히 추웠다. 가죽 잠바를 입고 잤다. 더 어려운 것은 가뭄이다. 이틀 물이 공급되고, 6일은 단수다.
노화도에서 3년쯤 지난 즈음, 모처럼 부부가 함께 섬에서 뭍으로 나들이하였다. 감리사가 묻더란다. “목사님,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 그만 뭍으로 나오시죠.” 아마 인사치레였을 것이다. 목사는 묵묵히 말이 없었지만, 아내가 대답하였다. “천국이 따로 없어요.”
몇 해 전 만해도 서울에서 여름성경학교를 도우러 왔다. 청년 교사들이 돌아가며 아이들에게 “너희도 한번 서울에 올라와”라고 했단다. 그해 가을, 애들 할머니가 조심스레 물으러 왔단다. 애들이 용돈을 꼬박 모으고 있는데 정말 가긴 가는 건지 조바심이 난 것이다. 아이들 목사는 더 조심스레 서울교회에 전화를 걸었는데, 어려운 물음에 비해 대답이 너무 쉬워 씁쓸하였다. “그런 계획이 없는데요.” 그래서 이듬해 아이들 소원에 따라 노화도 중리해변에 데리고 가고, 그 이듬해는 지리산으로, 또 한라산에도 다녀왔다.
할머니 밑에서 자라는 아이를 격려한다고 무심코 “너도 대학 가야지” 했단다. 그랬더니 아이가 정말 결심을 했다. “목사님, 대학가려구요.” 이젠 그 아이 등록금 마련하느라 여기저기 전화를 건다. “재윤아, 너만 어려운 게 아니다”라는 친구의 말을 애써 귓등으로 들으며 딴청을 부린다. “우리가 다 빌어먹고 사는 거 아니냐? 나도 기도하고(빌고) 전화한다.” 얻어먹는 게 일상이 되었다며 그가 웃었다. “난 난지도 출신이야.” 그의 말대로 섬에는 걱정거리가 없다. 걱정해야 소용없기 때문이다.
천혜교회 이재윤 목사는 남다른 인물이다. ‘난지도에서 노화도까지’, 그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살았다. 자신의 말로 학교에서도 내놓은 자식이라고 했다. 중도에 20년을 떠났으나 다시 돌아왔다. 그리하여 교회 이름 천혜(天惠)처럼 ‘하늘이 주시는 은혜’로 산다.
결국 주님을 따른다는 우리도 어슷비슷하다. 자주 실수하고, 상처를 주고, 원망을 사고, 무책임하고, 사랑은커녕 입발림조차 미숙하다.
사실 우리는 세상에서 언제나 시몬과 베드로 사이를 왕래하며 산다. 때로는 변화하지 않은 시몬의 모습으로, 때로는 변화된 새 이름 베드로의 모습으로 산다.
시몬들인 우리에게 베드로란 이름을 주신 주님은 우리가 시몬일 때도 베드로로서 가능성과 역할을 발견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길에서 방황하지 않도록 내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