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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
카카오 환단원류사 박민우 카톡강의방에서 발췌
원작: 이능화(李能和)
번역; 함석헌
한국사상의 근본을 찾아가는 데는 이능화(李能和)씨의 조선도교사를 배놓을 수 없다.
이 책은 원래 한문으로 쓰여진 것인데, 아직 일반에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은 유감이다.
이번 한국사상 특집에 함선생님은 한국사상의 기본 바탕이 무엇인지 밝혀주시기로 했는데, 일자관계도
있었지만, 이능화씨의 한국도교사가 한국사상의 기저로 아는데 꼭 필요한 글이라고 하신다.
우선 3장만 함선생님께서 번역해 주셨다.
편집자 주
1. 총설
조선 맨첨의 임금을 단군이라고 하고 그 신시(神市) 건국 이야기에
주곡(主穀) 주병(主病) 주형(主刑) 주명(主命) 주풍백(主風伯) 우사(雨師) 하는 말들이 있는데,
이것은 중국 옛날 신농 황제의 일과 서로 비슷한 것이 있다.
대개 어떤 나라 어떤 민족을 말할 것 없이 그 고대의 일은 처음에는 신화(종교 이야기)로 서로 전해오다가
후대에 와서 글자가 생긴 다음에야 그것을 글로 기록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후대의 자손들이 그것을 그대로
믿게 되는 것이다.
단군 삼세(三世)의 일이나 최근 도가들의 삼청(三淸) 이야기나, 대개 우리 해동(海東)이 신선의 연총(淵叢)이
되고 있다는 것은
내외의 문헌이 다같이 일치해서 말하고 있는 것인데, 예로부터 신선을 말하는 사람들은 다 말하기를
황제(黃帝)가 공동(崆峒)산의 광성자(廣成子)에게 가서 도를 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진(晋) 때 갈홍(葛洪)이 쓴 포박자(抱朴子)에는 황제가 동으로 청구에 이르러서 자부(紫府)선생께서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았다고 했다. 자부선생이란 동왕공(東王公)인데 동방에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동군(東君)이라고 하는 이다.
단군은 동방 맨첨의 임금으로서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했다 해서 단군(壇君)이라고 하는데,
그 군(君)자가 선가(仙家)에서 말하는 동군(東君), 제군(帝君), 진군(眞君)하는 이름들과 비슷하고,
또 운중군(雲中君), 상군(湘君)하는 신군(神君)들의 칭호와도 비슷하다.
그러고 보면 단군이란 이는 선(仙)이라 할 수도 있으며 신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신이니 선이니 하는 것은 고대의 일이니 깊이 찾으려 해도 찾을 길이 없고,
그저 아득한 그대로 두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진(秦)나라 때의 방사(方士) 한종(韓終)이 동으로 왔다는 자취는 증거가 아주 확실하고,
노생(盧生) 장생(張生)도 아마 동으로 와서 녹도(籙圖)를 구했거나 도우(道友)를 찾거나 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 둘의 한 일로 미루어 보아서 십중 칠팔은 사실이다.
또 고기(古記)에 있는 하백의 딸(柳花)이 우발수(優勃水)에 놀았다는 이야기는 삼륜(三倫)이 천지에 목욕했다는
이야기와 같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말하기를 은고륜(恩古倫), 정고륜(正古倫), 불고륜(佛古倫)이 장백산 천지에서
목욕을 하는데 주조(朱鳥)가 과일을 물고 와서 막내 불고륜의 옷 위에 놓아서 불고륜이 그것을 먹었더니
임신이 되어 아들을 낳아 이름을 애친각라(愛親覺羅)라 했는데 이가 청태조가 됐다고 했다.]
또 동명왕이 북부여에서 났다는 이야기는 간적(簡狄)이 상계(商契)을 낳았다는 것과 같다.
[계(契)은 현조(玄鳥)의 알에서 났고 주몽도 알에서 났다.]2) 그러니 신 이야기 아니면 선 이야기다.
비류국송양왕(沸流國松讓王)이 고주몽 보고 말하기를 나는 선인의 자손인데 대대로 왕이 된다고 했으니
이것도 신비로운 계통에서 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고구려는 해동(발해 동쪽)에 나라하고 있어서 부여의 풍속을 이어받았고 중국 문화에 접근했는데,
장도릉(張道陵)이 오두미교(五斗米敎)를 수입하매 나라 사람들이 다투어 믿었다 했고,
당태종이 8도사를 보내옴에 왕국이 환영하였다 했으니, 국민이 신화의 풍속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오천문(五千文)3)의 교리를 한번 듣고 곧 물에 젖을 타듯이 잘 받아들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백제에 관하여 후주서(後周書)는 도사가 없다 했지만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麗, 濟, 羅, 삼국이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 다 중국 문화를 같이 받은 것은 유불 양교를
보면 알 수 있다.
선후의 차이는 있지만 마침내 전해 받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면, 유불 두 교가 이미 들어왔다면 하필 도교만
아니 들어 왔을까?
도교가 고구려에 들어온 것은 분명히 글에 적혀있고,羅, 濟는 없지만, 그 두 나라에도 오천문을 읽은 사람이
없지 않은즉 羅 濟에도 도교사상이 없다 할 수 없다. 백제 때 도교의 흐름이 있지 않았느냐 하는 증거는
도리어 일본의 고사에 있다.
즉 아직기와 왕인 두 사람이 그것이다.
근래에 문학박사 구로이타(黑板勝美)씨의 사림에 발표한 논문 중에 그것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8권1호)
신라는, 저자의 생각으로는, 그 정체가 무위자연의 교에 합해 있다.
그뿐 아니라 신라 일대에 무릇 산수에 방랑하며 음풍농월한 사람들을 다 선이라고 했다.
그랬기 때문에 명구승지마다 선의 자취가 많다.
신라의 화랑을 국선이라 했고, 그 교를 풍류라 했는데 그 이유는 얼굴에 분을 바르고 신발을 보석으로
꾸며 단장을 했을 뿐 아니라,노래하고 음악하며 산에 오르고 물에 가는 취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선가해동전도록(仙家海東傳道錄)이란 책 안에 의상(義湘)이니 도주(道誅)이니 하는 이들을
다 우류(羽流) 열에다 넣었는데 자세히 찾아보면 그 까닭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조선 사람들은 도술이 있는 사람을 보면 이인(異人)이라고 하는데,
그 이인이란 중을 상당히 넓게 쓴다.
의상이나 도주를 세상에서 이승(異僧)이라고 하는데 의상의 쓴 청구비결(靑丘秘訣)이나
도주의 지은 옥룡밀기(玉龍密記)가 다 풍수설이요, 세상이 그것을 다 높이 믿었다.
그래 결(訣)도 이미 비(秘)라 했고 사람도 이(異)라 일컬은 즉, 방술을 하는 사람들을 선이라고 한 것이다.
고려는 국초부터 팔관회를 행했는데 그 받드는 대상을 천제, 용왕 및 악빈(岳濱)의 신이라고 했으며,
그 제(祭)를 주장하는 사람을 선가(仙家)라고 했다.
신채호 씨는 말하기를 선가는 곧 신라국선(花郞)인데, 그 시작은 삼한의 소도(蘇塗)의 제관, 고구려의 조의선인
(皂衣先人)에 있다고 했다. 팔관회는 진(晋)에서 나온 것이고 그것이 고구려에서 신라로 태봉으로 고려로 전해
내려 온 것이다.
신채호 씨는 팔관회가 불계(佛戒)에 속한 것이지만 변해서 국선의 신사로 됐다고 하며,
고려 의종 때에 팔관회가 차차 쇠했으므로 조서를 내려서 말하기를 신라에서는 선풍(仙風)이 크게 행해졌기
때문에 백성 들이 평안히 살 수 있었는데 근래 양경(兩京)의 팔관회가 차차 옛 모습이 없어져가니 이제부터는
팔관을 미리 두 반으로 갈라서 골라 선가를 정해 놓고 고풍에 따라 행하도록 하라고 했다고 한다.
이것은 곧 오주연문(五洲衍文)에 이른바, 팔관회가 불사(佛事)이기는 하지 마는 또 도교의식을 겸한 것이라고
한 것과 같은 말이므로 근거가 있는 말이다. 고려 중엽 인종 때 서경에다가 팔성당을 짓고 상들을 그렸는데
선과 불이 반반씩 서로 섞였고 또 팔성을 팔선이라고도 했는데 개성 송악산에 있는 팔선당이 그것이다.
예종 때에 송나라 도교 옥촉정월초천존(玉燭亭月醮天尊)을 전해다가 복원관을 첨으로 두었는데 우사(羽士)의
무리가 그때부터, 태일초(太一醮)니, 본명초(本命醮)니, 북두초(北斗醮)니, 수성초(壽星醮), 삼원초(三元醮),
그 밖에 여러가지 재초(齋醮)가 있어서 명목이 차차 많아졌다. 청사의 글을 쓰고 사람도 황관도사(黃冠道士)가
있었으니 미루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음양오행의 설이 넓이 행하게 됐는데 이것이 다 술수에 가져다 부치는데서 나온 것이요,
도교의 산물 아닌 것이 없다.
이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당초에 서로 의론이 많아서 마침내 소격전(昭格殿)에서 결정을 지었다는 말이
있는데, 소격전이란 곧 고려 때의 도관(道觀)이니 이것이 이조 소격서의 시작이다.
李朝 소격서의 위치는 삼청동에 있었는데 그것은 도가의 삼청 곧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에서
나와서 이름한 것이다. 삼청동 안에 또 성제정이 있었고, 소격서 신의 설치와 초제(醮祭) 의식의 자세한 것은
성현(成俔)의 용제총화(慵齊叢話)에 나와 있다.
소격서 우사의 명칭은 상도(尙道), 지도(志道), 도류(道流)하는 것이 있었고,
도류는 재지 있는 자를 골라 금기를 송(誦)하고 영보경을 읽게 하며,
과의에는 연생경, 태일경, 옥추경, 진무경, 용옥경 등이 있었던 것이 경국대전 안에 실려 있다.
도류 중에는 또. 맹인들이 있었는데 맹인들의 경 읽기 제사에 관한 것은 태상안(太常案)에 실려 있다.
위에 말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행하던 도교제사 이야기고, 맹인들의 하던 경읽기 점치기라든지,
중들이 칠성에 재를 올리는 것이라든지, 절에 칠성각이 있으며 마을 풍속에 칠성에 제를 지내고
세시에 직성양재를 하는 것, 방간(坊間)에 돌아가는 한글 소설에 옥관도사니 철관도사니 하는 칭호가 있는 것,
중들의 힘써 한다는 노릇이 강필(降筆)이니 제서(題序)니 하는 것을 일삼다가 나중에는 삼제군을 섬기고
음척문(陰隲文)을 간행하는데 이른 것 같은 것, 이것은 다 도교가 민간에 전해져 가지고 풍속으로 돼버린
것들이다.
이러한 풍속은 다 중국의 종교 풍속과 서로 관련이 있는 것들이므로
책 끝에 중국 역사의 신화, 술수, 종교(도교)의 유래를 부쳐서 참고케 하고자 한다.
2. 조선 단군신화는 도교설에 매우 가깝다
이능화는 말하기를 중국인이 역사를 논하여 이런 말을 했다.
무릇 인류가 처음 났을 때는 들에서 살다가 부락을 이룸에 미쳐서 살림살이가 차차 갖추어졌고,
글자를 지어 쓰게 된 것은 살아가는 일이 어느 정도 발달된 후일 것이라고 했다.
그 처음에는 부족의 옛일이 입을 통해 전해오다가 그 후에 그림으로 되고 다시 그 후에 변하여 글자가
됐을 것이다.
글자는 그림이 더욱 더 정밀히 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의 무리 중에 글자가 생겼다면 첫째로 한 것은 그 족의 옛 일을 기록한 것일 것이고,
거기는 반드시 천지가 어떻게 생겼으며 옛 사람이 제도를 어떻게 만들어 냈는지를 말했을 것이다.
그 연대는 아득히 멀기 때문에 신인이 섞여있고 이치로써 밝힐 길이 없을 것이지만 이미 그 족의 옛 일이고
본즉 그 성정, 풍속, 법률, 정치가 거기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글이 그 족속의 높여 믿는 바가 됐을 것은 문명 야만을 말 할 것 없이 다 그러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세계 모든 옛 나라의 건국 신화를 보면 서로 비슷 비슷하여 대개는 그 시작이 하늘에서 나왔다고 한다.
예든다면, 중국의 삼황(天, 地, 人) 일본의 신무(神武), 우리나라의 신시, 유대 모세 구약의 창세기,
아라비아의 모하멧의 코란, 인도 브라만 같은 것이다.
그런데 도교에서는 맨첨에 一氣가 나뉘어 三氣가 되어 그것이 三天이 됐다.
一氣는 대나천(大羅天)이요, 三氣는 청미천(淸微天), 우여천(禹餘天), 태적천(太赤天)이니,
즉 옥청, 상청, 태청의 삼경이다.
또 원시천존(元始天尊)이 있어서 태원보다 앞서 나서 상주불멸하며 천지가 첨으로 열릴 때면
혹 옥경 위에 있기도 하고, 혹 궁상(窮桑)의 들에 있기도 하여 신비의 도를 주니, 이르기를 개각(開却)도인이라
한다.
태상로군(太上老君), 태상장인(太上丈人), 천진황인(天眞皇人) 하는 이들이 있어 서로 전하여 받아가지고
세상에 나와 사람에게 주었다고 말한다.
조선의 건국은 신시에서 시작되는데,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고기(古記)의 말을 보면 환인은 곧 천제인데
원시천존(元始天尊)이 옥경위에 있다는 것과 같고, 그 아들 환웅은 천신인데 천부인 세 개를 가지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 내려와 화민성속(化民成俗)하여서 신시를 이루었다 하니, 그것은 고선이 세상에 나와 인간을
건졌다는 것과 같고 [울화자(鬱華子)4) 및 대성자가 伏義 때에 나서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주었다는 것
같은 것], 환웅의 아들 왕검이 신웅이 사람이 된 몸에서 났으니 곧 조선의 유웅씨라 할 것이다.
(黃帝를 有熊氏라고도 한다).
왕검을 혹 신인이라기도 하고 선인이라기도 하는데 그 수(壽)가 아주 길어 산에 들어가 신이 됐다는 말이
고사에 있다.
상고에는 신과 선의 구별이 없어서, 예든다면, 적송자(赤松子)를 세상에서 선인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데,
또 신농 때의 우사라는 것은 그것은 선이면서 또 신이기도 한 것이다.
조선의 우류(羽流)들이 지은 청학집(靑鶴集)에는 환인진인(桓仁眞人)이 광성자(廣成子)의 도맥(道脈)올 받았다고
하니 이것은 황제가 도를 광성자에게 물었다는 말과 같은 것이고, 또 백악총설(白岳叢說)에는 환인이
시서(始書) 종서(終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 이것은 또 황제의 음부경 이야기와 비슷하다.
다 알 수 없는 신화지만 역시 예로부터 전해 오는 고사(古事)기 때문에 참고로 하는 말이다.
조여적(趙汝籍) (호를 용잠거사, 이조 명종 선조 때의 우류 청학산인 위한조(魏漢祚)의 제자)의 편찬한
청학집에 말하기를 금선자(金蟬子)가 말하기를 변지기수사문록(卞沚記壽四聞錄)이란 것은
우리나라 도류 일들을 기록한 것인데 거기 말하기를 환인진인이 있어 업을 명유에게서 받았고,
명유는 업을 광성자에게서 받으니, 옛 선인이다.
환인은 동방 선파의 조종(祖宗)인데 환웅천왕은 환인의 아들이다.
뜻을 잇고 일올 펴서 풍우 오곡 360여사를 주장하여 동쪽의 씨알들을 가르쳤으며,
단군이 업을 이어 교화를 행하기를 천년을 해서를 구이(九夷)가 다 같이 높여 세워 천왕을 삼으니,
봉정류궐(蓬亭柳闕)로써 거하고 도발과우(陶髮跨牛)로써 다스려 세상을 주관하기 1048천년이요,
아사달 산에 들어가 선이 되어 갔다.
그 후에 문박(文朴)씨가 있어서 아사달에 살았는데 소안방동(韶顔方瞳)이라 능히 천군의 도를 전하였다.
영랑은 향미산 사람인데 나이 90에 살갖이 어린애 같았고 노우관(鷺羽冠)에 철죽장을 집고 호산에 소요하며
문박의 업을 이어 받았다.
백악총설에 이르기를 향미산인이 말하되 선도가 천하에 있어서 중국에서는 황제가 광성자에게서 얻었고
우리 동방인즉 문박이 환인의 근원을 얻어서 전하여서 결청(潔淸)의 학(學)이 되었다.
또 이르기를 남석행이 말하되 환인진인이 대왕 씨로 하여금 시서를 쓰게 하고 스스로 종서한 권을 지었는데
시서는 풍우, 오곡, 음식, 연양의 도를 주한 것으로서, 성신하고 싸우지 않으며 음하지 않은 것으로써
인간의 선사(善事)라 했고, 종서는 일월 성진 천지 산천의 이치와 생명의 근원, 신도묘덕(神道妙德)의 가르침을
주한 것으로서 대왕 씨를 시켜 종서를 중외(中外)에 반포케 하니, 선관 대왕이 그 무리로 더불어 환인을
일컬어 문조(文祖) 씨라 하였다.
그 글이 문박 을밀,영랑, 안류, 보덕성녀의 류에서 전하여 왔다.
내가 태백산인이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본지 오래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1년조에 이르기를 평양은 신인 왕검지댁(王儉之宅)이라고 했다.
안정복의 동사강목에는 삼국사에 이르기를 평양은 본래 선인왕검지댁(仙人王儉之宅)이라고 했다.
류득공의 사군지에는 삼국사에 이르기를 평양은 본래 선인왕검지댁(仙人王儉之宅)이라 했는데
선인 왕검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고기에 이른바 단군, 이름은 왕검이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됐다 하니
그런즉 선인은 혹 단군을 가르치는 것일까.
룡비어천가에는 이르기를 신지는 단군 때 사람인데 세상에서 신지선인이라 한다 했다.
3. 신시씨가 처음 내려왔다는 태백산이 곧 삼신산이라는 설
세상에서 말하기를 삼신산이 우리 해동에 있다고 하는데, 삼신산은 아마도 태백산일 것이다.
삼국유사에 보면 고기에 이르되 환인(천제)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태백, 곧 지금 묘향산) 신단수 아래 내려오니
일러서 신시라 했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했다.
(신시는 고대 신권 군주, 즉 무(巫)다. 옛적에는 무(巫)로 신에 제(祭) 했는데 인민이 많이 모임으로 신시라
했다. 지금 도당제 같은 것이다.)
환인 환웅 왕검을 일반으로 삼신이라 하고, 또 묘향산을 태백산이라 하는데 그것은 까닭이 있다.
신인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 내려왔기 때문에 삼국유사가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본래 단군신시라 했는데,
후세에 신단수하(神壇樹下) 넉 자가 변해서 신단수하(神檀樹下)로 돼버렸기 때문에 壇君도 檀君으로 변했다.
그런데 檀은 향목이기 때문에 태백산도 변해 묘향산이 됐다. 이제 여러가지 기록을 인용하여 증명한다.
고려 이덕의 묘향산기에 말하기를 향산(香山)은 장백의 갈래다. 향목이 많아서 선 불의 구적(舊迹)이 많다.
이조 차운로(車雲輅) 서유록(西遊錄)에 말하기를 묘향산에 신선의 고적이 많다. 석굴이 있는데 중의 말이
단군의 난 곳이라 했다.
혹은 선인이라 하니 인도로 난 것이 아니다. 태백은 백두지 묘향이 아니다. 이 굴은 단군 때 사람이 도 닦은
곳이기 때문에 이 이름이 있다. 이조 신경준 강계지(疆界誌) 전조선 조에 이르기를 단군의 이름은 왕검인데
처음에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 내려옴에 나라 사람들이 세워 임금을 삼고 국호를 조선이라 했다.
내가 생각컨대 삼국유사에 신단수(神檀樹)를 신단수(神壇樹)라 하고 檀君을 壇君이라 했는데
삼국유사는 동방에서 처음 나온 역사인즉 신자로써 볼 때 단유(壇壝)라는 壇자 편이 옳을 듯하다.
신단의 壇을 檀으로 만들었지만, 단목에는 두 종류가있어, 하나는 자단(紫檀)이라 해서 향기가 있고,
하나는 속명 박달이라고 해서 나무질이 단단해서 재목으로 쓰이는데 태백산에는 자단이 많기 때문에
묘향이라고 한다. 산의 태백산 아래 있으므로 사람들이 자단으로 단군이 檀이라 한다.
강동현의 진산을 대박산이라 하고 그 아래 무덤이 하나 큰 것이 있어서 전해오는 말이 단군의 무덤이라 한다.
대박은 곧 박달이다.
이능화는 말하기를 조선 안에 태백으로 부르는 산이 많다. 대박산 咸朴山(한박산) 박달산하는 것을 속명으로
부르면 다 태백이다.
태백의 갈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묘향의 본명은 태백인데, 산에 향목이 많기 때문에 묘향이라고도
한다.
이미 장백의 갈래고 보면(위와 이색(李穡)의 기록) 묘향도 태백이라 볼 수 있다.
근래에 북애자(北崖子)(어떤 사람인지 모른다)의 규원사화 일권 (사본)을 보니 전혀 단군 때 일을 기록한
것인데 그 서문에 이런 말이 있었다. “내가 일찍부터 역사를 쓰자는 생각이 있었으나 그 자료가 없었다.
명산 석실을 찾아도 아무것도 간직해 둔 것이 없다.
그러니 가난한 사내로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되어 다행히 골짜기 속에서 청평와 쓴
진역유기(震域遺記)를 얻게 됐다.
그 안에 삼국 이전 고사가 있어 간략하여 자세치는 못하나 항간에 전해 오는 이 소리 저 소리에 비하면
과연 만장기염을 토한다할 만하다. 그래서 한사(漢史)의 여러 기록을 더 뽑아 넣어서 사화를 만들고
상지이년을묘(上之二年乙卯)(이조 숙종때) 삼월에 판을 찍고 규원초당에서 북애노인은 서(序)하노라”
또 그리고 그 단군기소서(檀君紀小序)에는 “신시씨는 사실 동방 인류의 시조다.
아득한 옛날에 나라를 세우는 일이 그를 힘입어서 됐는데 전에 청평산인 이명(李茗)이란 이가 있어
고려 때 사람인데 진역유기 세 권을 쓴 것이 있어서 우리나라 고사를 자세히 썼는데 일연의 글에 비하면
(삼국유사를 말함) 크게 다른 것이 있었다.
그런데 그 안에 선가 이야기가 많았다” 했다.
그 책의 진위는 후에 평을 기다리기로 하고 우선 그 인증이 볼만한 것이 있다.
옛날의 삼신산이란 것은 곧 태백산이다. 삼신은 또 삼성이라기도 한다.
지금 문화 구월산에 삼성사가 있는데 환인, 환웅, 환검을 제사하는 곳이다. 단군의 가르침은
신화 영훈(靈訓)이라,
후세에 전해서 온 나라 남녀가 지금까지 믿고 있는데, 사람의 생사를 삼신의 주장하는 바라하고,
아이들의 열 살 이내 의 목숨과 안전을 삼신에게 부탁한다. 삼신이란 곧 천지를 짓고 백성 만물을 다스리는
삼신이다.
옛날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한무제를 보고 말하기를 “폐하는 겸양하여 삼신의 즐거움을 끊지 마십소서” 했는데
그 주에 삼신은 상제라 했으니 삼신의 이야기가 당시 중국에까지 갔던 것이다.
동방의 산들이 태백으로 부르는 것이 많은데 속된 선비들이 그저 묘향산으로만 여기니,
그것은 일연의 삼국유사 때문이다.
그들이 눈이 콩알밖에 못되니 어찌 족히 더불어 말할 나위가 될까.
지금 백두산 위에 가면 큰 못이 있어 주위가 80리요, 압록, 혼동(混同), 여러 강들이 거기서 발원하는데
그것을 천지라 한다.
이것이 곧 신시씨가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 뵙던 곳이다.
묘향에는 조그만 웅덩이 하나 없으니 그것이 환웅의 내리셨던 태백이 될 수 없는 것은 말 할 필요도 없다……
내가 일찍기 책을 보니 백두산의 이명이 많다. 산해경에는 “大荒之中有山, 名不咸, 有肅愼氏之國”이라 했고,
후한서에는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 동에 있으니 동은 대해에 빈하고 북은 읍루와 접했다” 했는데
주에 평양성 서북이라 했으니 중국에 미친 허튼 수작이다.
읍루는 숙신의 후신이요 동옥저는 지금 함경도 땅이고 보면 개마가 곧 태백임을 알 수 있고,
또 고려사열전에 “여진은 본래 고구려의 부락인데 개마산동에 모여 산다” 했으니
당시 여진이 분명 백두산 동북에 있었은즉 개마가 백두인 것이 분명하다.
위서 물길전(魏書 勿吉傳)에는 “나라에 도태산(徒太山)이 있으니 魏 말로 태백이라. 범, 표, 곰, 이리가 있으나
사람을 해치 않으며, 사람이 산에 올라가 오줌을 누지 못한다. 운운”했다.
북사(北史) 물길전에도 나라에 도태산이 있는데 중국말로 태백산인데,
그 나라 풍속이 매우 두렵게 공경한다 했다.
당서(唐書)에는 말하기를 율말부(栗末部)는 맨 남쪽에 있어 태백산 혹은 도태백에서 고려와 서로 접한다 했다.
괄지지(括地志)에는 말하기를 말갈은 옛 숙신인데 그 남방에 백산의 있어. 새짐승, 초목이 다 흰빛이다” 했고,
금사고려전(金史高麗傳)에 고구려 이래 말갈의 일을 말하면서 “흑수말갈은 숙신 옛 땅에 사는데 산이 있는데
백산이라 하는데 곧 장백산, 즉 금국이 일어난 곳이다” 했고, 엽륭례(葉隆禮)의 요지(遼志)에는
“장백산은 냉산 동남 십여리에 있는데 백의관음이 있는 곳이다.
그 산 안의 새, 짐승이 다 회고 사람이 감이 들어가지 못하니 더럽힐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라” 했다.
또 “흑수가 여기서 발원한다” 했다.
명일통지(明一統志)에는 “장백산은 삼만위 동북천여리, 옛 회령부 남쪽 육십리에 있는데,
천리에 뻗었고 높이가 이백리 그 꼭대기에 못이 있어 둘레 팔십리 깊이를 알 수 없고 남으로 흘러 압록강,
북으로 흘러 혼동강(混同江), 동으로 흘러 아야고하(阿也古河)가 된다”고 했다.
그런 즉 불함(不咸), 개마, 태백, 도태(徒太), 장백하는 이름이다.
동산이명(同山異名)이요, 역대 방언의 차이인 것을 알 수 있다.
또 고려사에 광종 10년에 압록강 밖의 여진을 백두산 밖으로 내쫓아 거기 있게 했다는 말이 있으니
이것이 백두라는 이름이 나타난 처음인데, 개(蓋)자의 음이 백(白)자의 뜻과 비슷하고 우리나라 말에 馬와 頭가
뜻이 같고 본즉 개마와 백두가 같은 말의 글자를 달리해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백두라는 이름은 그 유래가 오래다.
우리나라 산에 마이(馬耳)니 마니(摩尼)니 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을 사람들이 부르기를 다 같이
摩尼(머리)라고 불러서 별로 구별하지 않는데, 그 馬耳 摩尼는다 頭자의 뜻(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고 보면 馬耳 摩尼는 두악(頭嶽) 혹은 두산(頭山)이 잘못 전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태백의 또 다른 이름이 백두(白頭)인데, 갑비고차(甲比古次) (강화군의 옛 이름)의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을
두악(頭岳)이라 하는데 이것은 단군이 반드시 두(頭)로 이름하는 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기 보다는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냈던 곳을 반드시 頭로 이름하여 부르는 산이 되게 됐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頭(머리)는 최상 혹은 원수라는 뜻인데 백두는 동방 모든 산의 종(宗)(마루, 머리)이요,
또 동방에 사람이 처음으로 내려온 곳이요, 또 겸하여 원수인 단군이 늘 제천(祭天)하는 예식을 그 위에서
지내던 곳이므로 그때 사람들이 반드시 거기를 頭山(머리메, 마루메)으로 부르게 됐음이 틀림이 없을 것이요.
갑비고차(甲比古次)의 두악도 역시 이밖에 다른 것 아닐 것이다.
그러면 신시의 강림은 백두에서 된 것이고, 그 다음 차차 서남으로 따라 내려갔고,
그 다음 다시 남으로 패수(浿水)를 따라 내려가서 남으로 온 삼씨[부루(夫屢), 부여(夫餘), 부우(夫虞)]의 무리가
또 각각 네 번씩을 옮겨갔다.
태백이 이미 영지가 됐으면 제천이라는 놀라운 의식이 거기서 시작 됐을 것은 물론이요,
예로부터 동방 민족들이 그 산을 높이고 공경하는 것도 보통이 아닐 것은 당연하다.
또 예로부터 새, 짐승도 다 그 거룩한 교화를 입어 그 산에 안거하고 사람들도 또한 감이 그 산에 올라
오줌 똥을 누어 더럽히는 일이 없이 언제나 만대에 공경하고 보호하는 목표가 되었다.
우리 선조가 다 신시에서 나왔고, 삼천단부의 자손이 인(因), 웅(雄), 검(儉), 삼신의 나라를 열고
역사의 터를 닦은 그 공덕을 대로 전하여 찬송하며 잊는 일이 없었으므로 옛 사람이 그 영산을 가르쳐
삼신산이라 했을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 신풍(神風) 성속(聖俗)이 멀리 한토(漢土)에까지
전해져서 중국 사람들까지도. 그 신화를 사모하고 삼신을 숭신하는 자까지 있게 되어,
나중에는 동북 신명지사(神明之舍)라는 말까지 있게 됐는데, 그 말류의 잘못된 것이 점점 황탄(荒誕)한
데로 빠져 갈수록 더 기괴한 설화를 낳아 소위 연제해상(燕齊海上)의 방사라는 데까지 가게 되었다.
본래 燕, 齊는 그 땅이 우리 진방(震邦)과 서로 접하여 있어 민물의 교통이 매우 성했기 때문에
이상한 소리를 들으면 그것을 또 이리저리 맞추어서 나중에는 삼신산이란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다
하고 그것이 발해(渤海) 가운데 있다고 했고, 또 그것을 어디라고 증거 할 수 없기 때문에
바라보면 구름 같아 갈 수는 없다 하게 되었는데, 신선이니 뭐니 하여 세상을 혹하게 하는 사람들은
또 그 해중이라는 글자를 보고 해상에 삼신산이 있어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라 한다 하게 됐고,
그것을 세 섬이라고 하게도 됐다. 그래서 해상의 육오(六鰲)니 뭐니 하는 허망한 소리가 나왔다.
그것이 다 한가한 사람들의 소리인데 또 우리나라 선비란 것이 그것을 도리어 본받아 금강이 봉래요,
지리가 방장이요, 한라가 영주라고 하게 됐으니, 이것은 한(漢)나라 사람의 뱉은 침을 다시 받아먹는 셈이다.
사기 봉선서(封禪書)에 “삼신산은 전하는 말에 발해해중에 있는데, 거기는 선인들이 있고 또 불사약(不死藥)이
있으며, 모든 물건과 금수가 다 희고, 황금과 은으로 궁궐을 지었다고 했다.
또 선가서(仙家書)에는 삼신산에는 환혼불로초(還魂不老草)가 있는데 또 한 가지 이름은 진단(震檀)이라 한다
하기도 했다.
지금 백두산에는 예로부터 백록(白鹿), 백치(白雉), 백응(白鹰)이 있다 했고,
괄지지(括地志)에 기남에 백산이 있는데 조수(鳥獸) 초목이 다 회다 한 것도 이것이다.
방사(方士)들의 말도 자못 근거 있는 것이 있다. 또 백두산 일대에서는 때때로 산삼(山葠)이 나는데 세상에서는
그것을 불로초라고 한다. 산골사람들이 캐려할 때는 반드시 목욕제계를 하고 산에 제사를 지낸 후
감이 떠나니 그 환혼불로초(還魂不老草)라는 이름이 필시 여기서 나왔을 것이다.
또 백두산에서는 자단(紫檀)이 나는데 예로부 터 오는 단목(檀木)이란 것이 이것이다.
고기(古記)에 (즉 神誌秘詞) 전하는 바 구변진단(九變震檀)이라는 이야기도 반드시 여기서 나왔을 것이다.
이 불로진단(不老震檀)이란 아마도 듣는 사람이 잘못 들어서 된 것인데, 연제(燕齊) 방사(方士)가 뽐내면서
해중에 삼산이 있다한 것은 꿈속에 놀며 그 주인을 속이고 또 자기도 속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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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씨알의 소리 1976. 6 54호
2) 간적(簡狄)은 유융(有娀)씨의 딸 제곡(帝嚳)의 차비(次妃) 목욕하다가 현조(玄鳥)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주어 삼키고 잉태하여 계(契)를 낳았다.
3) 노자의 도덕경(글자가 오천여자이므로 하는말)
4) 鬱華子는 日神의 이름
[출처] 347. 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작성자 집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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