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의 발전과 역사의 굴곡(1)
춤도 인류 역사와 흐름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 문헌에 보면 결국 문화사가 되지만 댄스의 역사가 혁명, 전쟁, 대 공황 등의 영향을 받아 물길이 크게 변한 것이 보입니다. 다행히 한쪽에서 시들해지거나 춤보다 급한 사정이 생기면 다른 지역에서 발전을 거듭해 온 춤의 역사를 보면 때로는 전쟁이나 큰 난리가 아이러니하게도 발전의 계기를 만들어 준 경우도 많습니다. 태풍이 엄청난 재난을 몰고 다니지만 죽은 가지들을 자연적으로 부러뜨려 새 가지가 나게 한다든지 바다 속을 뒤집어 새로운 플랑크톤이 자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준다든지 하는 자연의 순환 내지는 순리를 볼 수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프랑스를 왜 예술의 나라, 파리를 왜 예술의 도시라고 할까요? 막상 파리에 가서 개선문을 보고 에펠탑을 보고 샹제리제 거리를 돌아 봐도 그것만으로는 파리가 예술의 도시라는 것을 실감할 수 없습니다. 거리의 여인들이 패션모델들 같다고요?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여인들은 외국에서 온 관광객이 더 많고 여인들의 의상 수준은 오히려 서울이 더 화려할지 모릅니다. 노트르담 사원을 보고는 좀 오래된 멋진 건물이니까 감탄은 하지만 그 정도는 로마, 밀라노, 쾰른, 바르셀로나에 가도 필적할만한 멋진 고건축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을 보고 나면 수많은 명화가 있으니 예술이 꽃을 피웠던 것 같다고요? 세계 3대 박물관이라는 대영 박물관, 상트 페테르부르크 박물관도 소장 미술품으로는 만만치 않습니다.
음악으로 치면 독일이 배출한 바하, 헨델, 베토벤, 멘델스존, 슈만, 바그너, 브람스, 슈트라우스의 계보에 비해 프랑스는 19세기 와서야 베를리오스, 드뷔시 정도를 배출 했을 뿐입니다. 미술에서는 세잔느, 밀레, 고갱 등 유명 화가가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유럽은 국가 경계가 우리나라처럼 엄격한 것이 아니어서 프랑스만 미술이 발전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고호는 네델란드 화가이고 피카소는 스페인 화가입니다.
잉글랜드와의 100년 전쟁 이후 프랑스는 이웃나라 이탈리아를 침공할 때마다 예술가와 문인들을 잡아 갔는데 그중에 무용교사들도 빼 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우리 도공들을 잡아 간 것과 비슷한 경우입니다. 파리를 예술의 도시라 부르는 이유는 음악, 미술과 함께 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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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의 발전과 역사의 굴곡(2)
이탈리아도 예술이라면 빼 놓을 수 없을 만큼 세계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나라입니다. 경제력으로 치자면 우리나라 바로 앞에서 우리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제낄 수 있을 것 같은데 결코 만만치 않은 나라입니다. 로마를 가본 사람은 수긍할 수밖에 없겠지만 오래된 건축물이나 멋진 조각품들만으로도 문화적으로, 예술적으로 화려하고도 단단한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댄스스포츠에서도 세계 랭커들이 즐비해서 댄스의 본고장이라는 영국을 위협하는 나라가 바로 이탈리아입니다.
이탈리아에서 시집 온 메디시스가 프랑스 궁정을 춤으로 유럽의 문화 중심지를 만든 이후 정말 발레는 파리를 예술의 도시로 불리게 한 그 중추적인 수단이 된 것입니다. 춤의 역사로 바로 보면 파리가 왜 예술의 도시로 불리게 되었는가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파리의 예술은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발레의 영향을 받은 바가 큽니다.
프랑스에서는 세계최초로 왕궁에 발레 학교가 생기고 루이 14세는 직접 발레에 출연할 정도로 발레는 프랑스에서 전성기를 맞았으나 1789년 7월 프랑스 대혁명은 루이 16세를 목 자르고 공포정치가 행해질 때 무용가들도 프랑스를 떠났습니다.
발레는 엄청난 돈이 드는 예술입니다. 프랑스 왕정이 무너지고 유럽에 남은 전제군주는 러시아뿐이었습니다. 유럽의 발레 스타들, 안무가들, 발레마스터들이 러시아로 몰려 든 것입니다. 그리하여 러시아가 클래식 발레의 메카가 된 것입니다.
아길레프가 영도한 러시아의 발레뤼스가 1909년 파리에 입성하면서 전 유럽에 발레 러시아의 명성을 떨쳤으나 결국 디아길레프가 1929년 57세의 나이로 운명함으로써 발레의 중심지는 유럽 각국으로 분산되어 버렸습니다.
러시아도 1917년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전제군주가 무너졌으나 발레는 묘하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발레란 원래 왕실의 후원으로 자란 귀족들의 예술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의 평등한 시대를 부르짖은 소비에트 연방과는 맞지 않았지만 살아남아 1927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 ‘붉은 양귀비’가 올려집니다. 주제를 공산주의에 맞춰 오히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상트 페테르부르그에서 모스크바로 옮겨오면서 볼쇼이 시대를 맞게 됩니다.
1905년 이사도라 덩컨이 러시아에 나타나 발레를 부정하고 모던댄스를 주창하고 나서면서 춤은 모던댄스라는 새로운 장르로 갈라져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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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의 발전과 역사의 굴곡(3)
볼룸댄스가 제대로 사교춤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때가 1910년대로 버논캐슬 부처의 가로보행법이 나온 때입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춤은 전문가들이나 추는 것이고 발레 수준 정도는 되어야 추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로 보행법은 자연스런 발걸음 방식으로 춤을 쉽게 만든 획기적인 전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1924년 ISTD에서 비로소 모던 5종목을 확정하고 라틴댄스는 한 참 뒤인 1974년 정립이 되었습니다.
1914년 8월초 세계1차 대전의 발발로 인하여 유럽에 전쟁이 시작될 무렵, 영국의 무도계는 여름 휴가철이었으며 암담한 전쟁 중에 과연 일반국민들이 댄스를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판단에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댄스는 전쟁 중의 여가선용과 긴장완화에 도움이 된다 하여 댄스가 허용되었다고 합니다.
1929년 10월 24일 미국의 대공황이 터지자 춤은 다시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먹고 사는 문제가 우선이었으므로 미국에서도 춤은 침체기를 맞았습니다.
1933년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가 전쟁에 광분하게 되자 다시 춤은 위축되게 되어 무대를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멀리 떨어진 미국으로 옮겨 현재 미국이 현대무용인 모던댄스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1939년 9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2차 세계 대전은 1945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미국도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자 미군병사들이 유럽에 지터벅을 퍼뜨려 오늘날 자이브가 된 것과 우리나라에도 지터벅이 들어와 사교춤으로 발전한 일은 오늘날 댄스스포츠계에서는 유명한 일입니다.
중국은 공산 혁명 후 발레가 공산주의와 안 맞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으나 묘하게 발레가 꽃을 피운 케이스입니다. 당시 냉전시대의 우방이었던 러시아에서 발레를 전수 받아 마침 모택동 주석의 4째 부인이었던 강청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오늘날 중국의 댄스 수준이 만만치 않은 것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발레가 1931년 서울 YMCA에 러시아 무용가 슈하로프가 공연을 한 것이 최초라고 하는데 일제 식민지 시대에 특히 노일 전쟁까지 일어나 일본이 승전하는 바람에 러시아 발레가 힘을 쓰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일본에서 공부한 한동인에 의해 ‘서울발레단’이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한국동란의 폐해를 딛고 다시 일어서는데 시간이 좀 걸려 1962년 한국무용과 발레를 묶어 역시 일본에서 공부한 임성남 단장의 국립무용단이 만들어졌고 1974년 발레가 독립하면서 장충동시대를 열게 되었습니다.
볼룸댄스와 라틴댄스는 1987년에 비로소 댄스스포츠로 명칭을 통일한 이래 유일하게 댄스의 대중화에 성공하여 여러 사람이 즐기고 있습니다. 댄스스포츠는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는 발레의 예술성과 민속 무용의 대중성, 그리고 현대인의 필수 교양이자 웰빙 방식인 스포츠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대중화에 성공하였고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군사독재 시절 어두운 시절을 보내는 등 댄스에 대한 굴곡은 많았으나 오늘날 댄스스포츠 방면에서 이만한 발전을 거두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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