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맛 여행
돼지국밥의 재발견
Pork & Rice Soup
한국관광공사 청사초롱 2018. 2 vol. 489
edit 박은경 write 유지상(음식 칼럼니스트) photograph 박은경
오랜 세월 우리의 허기진 몸과 마음을 채워준 국밥 한 그릇에서 특별한 맛을 찾았다.
국과 밥은 한식을 이끄는 쌍두마차다.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진 밥상도 밥이 있으면 국이 있어야 하고, 국이 제구실을 하려면 밥이 있어야 한다. 밥상 위의 많은 음식 중에서도 밥과 국은 먹는 사람의 제일 앞자리에 나란히 선다. 자리도 정해져 있다. 왼쪽이 밥, 오른쪽이 국이다. 쌍두마차이긴 하지만 밥이 앞서고, 국이 도와주는 자리 배치다. ‘밥과 국’이란 말의 순서가 편하고, ‘국과 밥’이란 말이 어색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묘하다. 접속조사 ‘과’가 빠지면 ‘밥국’이 아니다. ‘국밥’이 된다. 국이 앞서고 밥이 뒷자리로 이동한다.
사실 밥상에서 밥과 국의 자리가 바뀔 때도 있다. 죽은 자의 밥상이 그렇다. 제사상에선 국이 왼쪽이고, 밥이 오른쪽이다. 죽지도 않은 산 사람의 밥상인데 밥국이 아니라 국밥이란 단어로 정착한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글자의 순서는 국이 앞서 끄는 모양새지만 내용은 여전히 밥이 중심이다.
‘밥을 만 국’이 아니라, ‘국에 만 밥’으로 뒤에 힘이 실린다. 조상들의 지혜에 절로 웃음이 난다.
국밥은 한식의 패스트푸드다. 서양의 대표적인 패스트푸드인 햄버거보다 주방에서 내놓은 속도가 더 빠르다. 햄버거는 패티를 굽고 빵을 데웠다 치더라도 할 일이 꽤 남아 있다. 빵에 소스 바르고, 상추 깔고, 패티 올리고, 토마토 덮고… 등. 그런데 국밥은 대접에 한 주걱 밥을 담고, 끓는 국 두 국자만 퍼 담으면 끝이다. 펄펄 끓는 국 한 솥만 있으면 혼자서도 수십 명 밥상을 10분 안에 차려낼 수 있다. 국밥은 한식의 원 디시 푸드(one dish
food)이기도 하다. 따로 반찬을 차릴 필요가 없다. 달랑 국밥만 있어도 목 넘김에 전혀 지장이 없다. 국물에 만 밥이 훌훌 목젖을 건드리고 식도를 타고 내려가 뱃속에 따뜻하게 안착한다. 다행히 잘 익은 김치 쪼가리 하나라도 더해지면 맛은 배가되고 숟가락질에 가속도가 붙는다.
국밥은 토렴 과정을 거친다. 토렴은 뜨거운 국을 이용해 차가운 밥을 데우는 행위다. 보온밥솥이 없던 시절엔 식은 밥을 밥상에 올리는 건 주부든 요리사든 밥상을 차리는 사람의 입장에선 큰 불편함이었다. 정성을 담은 밥상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뱃속에 넣으라고 던져버리는 몰상식한 행위로 간주한 모양이다. 그래서 온돌방 아랫목 이불 속에 밥주발을 넣어 식지 않도록 애썼고, 토렴이란 과정을 통해 식은 밥을 데워내는 지혜를 발휘했다. 그런데 토렴은 단순히 밥을 데우는 노력에 그치지 않는다. 입안을 델 수 있는 국물의 뜨거운 온도를 그대로 먹을 수 있는 만큼 낮춰주는 마음 씀이 담겨 있다. 게다가 맛의 과학도 숨겨져 있다. 밥을 지으면 쌀의 전분이 익으면서 먹기 좋은 호화(糊化) 상태가 된다. 그런데 다시 식으면 원위치로 돌아가려는 성질로 인해 먹기 어려운 노화 전분으로 변한다. 찬밥이 노화된 전분인 셈인데 여기에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가 따라내는 일을 여러 번 반복하면 다시 호화의 형태로 바뀐다. 단순히 재(再)호화에 그치지 않고 전분 조직이 깨지면서 국물의 맛이 밥알 안에 잘 스며든다는 점이 중요하다. 라면 국물에 더운밥을 말아먹는 것보다 찬밥을 말아먹는 게 더 맛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토렴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조상들이 경험을 통해 얻는 맛의 지혜와 과학이 담긴 기술이라 할 수 있다.
국밥 가운데 ‘따로’란 단어가 앞에 붙는 따로국밥이 있다. ‘국 따로, 밥 따로’란 뜻에서 나온 말이다. 보온밥솥이 등장하면서 음식점에서 ‘더운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등장한 국밥이다. 밥과 국이 한 그릇에 담기는 동일화를 거부하는 몸부림으로도 볼 수 있는 일이지만, 더운밥과 더운 국을 통해 각각의 맛을 즐기는 자유로움이나 개성으로 발전한 것이다. 따로국밥으로 유명한 지역은 내륙 분지인 대구다. 소고기를 주재료로 고추장이나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 시뻘건 국물로 즐겨 먹는다. 뜨거움에 얼큰함을 더해 특히 주당들에겐 다음날 속 푸는 데 좋은 해장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굳이 대구식 따로국밥이 아니더라도 요즘은 ‘○○국밥정식’이란 메뉴로
국과 밥을 따로 내는 국밥집이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다. 주문할 때 “말아 드릴까요? 따로 드릴까요?”라고 묻는 음식점도 생겨났다.
국밥의 주재료는 대부분 소고기나 돼지고기 부산물이다. 살코기 등 고기의 좋은 부위는 그 자체로 즐기는 음식, 즉 구이나 찜 메뉴로 쓰인다. 뼈 또는 내장 등 고급스럽지 못한 자투리 부위를 활용한 게 국밥이다. 소머리국밥, 장터국밥, 돼지국밥, 순대국밥 등이 그렇다. 여기에 콩나물, 시래기 같은 채소를 더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창자에 속을 넣는 순대를 만들어 끓여내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고깃국 본질의 맛보단 마늘, 생강, 된장, 고추장 등을 넉넉하게 풀어 양념의 자극적인 맛으로 입맛을 유혹하는 경우가 많다. 부산물 자체가 가지고 있는 거북하고 불편한 맛을 숨기려는 의도도 있다.
돼지국밥은 경상도 지역의 향토국밥이다. 특히 부산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된장 푼 국물에 돼지 살코기를 푹 끓여서 낸 음식이다. 파 대신 ‘정구지’라고 말하는 부추를 듬뿍 넣어 먹는다.
이런 돼지국밥이 최근 서울 곳곳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국밥을 끓이는 손도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의 손’이 아닌 외국 음식을 만들어내던 젊은 셰프의 손이다. 양념 맛보단 재료 본질의 맛을 추구한다. 요즘 새롭게 펼쳐지고 있는 돼지국밥의 세계를 얘기하려고 서두가 길었다. 돼지국밥의 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음식점 3곳을 소개한다.
1. 경성주방
맑은 국물이 아닌 붉은 색을 내는 돼지국밥. 하지만 품질은 곰탕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차분한 붉은 맛이다. 엄선한 국내산 암퇘지 살코기를 주재료로 국물을 내고 국내산 고춧가루와 고추장, 집 간장으로 맛을 더했단다. 돼지고기를 어른 엄지손가락 크기로 큼직하게 썰어 고기를 제대로 먹는 기분이 난다.
베트남 쌀국수처럼 밥 위에 숙주나물을 얹고 국물을 담은 게 특징이다. 돼지국물을 품은 아삭한 숙주나물을 씹는 맛도 재미나다. 조각가 출신의 오너셰프는 ‘애호박과 두부를 넣은 어머니표 돼지국밥의 응용 버전’이라고 설명한다.
직접 담은 배추김치와 집 된장을 찍어먹는 풋고추는 고향 어머니 밥상을 떠올리게 한다. 삼청동에 있어 주말과 휴일에 줄 설 각오를 해야 하지만 평일엔 불편함 없이 식사할 수 있다. 단 화요일에는 문을 닫는다. 8000원. 서울 종로구 삼청로 122-4 02-737-9373
2. 광화문국밥
글
쓰는 이탈리아 유학파 박찬일 셰프가 야심 차게 차린 국밥집. 이 집의 국밥은 따로국밥이다. 밥을 국에 말지 않고 더운밥이 따로 나온다. 밥은 국에 말아 먹기 아까울 정도로 맛있게 잘 지었다. 이곳의 돼지국밥은 국밥보단 곰탕이란 표현이 어울린다. 돼지고기 살코기를 사용하여 깊고 담백한 맛을 낸다.
고기는 두께 1mm 정도로 얇은데 크기는 숟가락 사이즈다. 기름이 적어 다소 퍽퍽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씹는 맛이 있다.
반찬으로는 김치 대신 깍두기가 나온다. 달달한 맛이 ‘백종원’을 떠올리게 한다. 오징어젓갈과 된장에 풋고추, 마늘이 곁 반찬으로 나온다. 혼밥 손님을 배려해 중앙에 공용 테이블을 준비했다. 8000원. 일요일 휴무. 서울 중구 세종대로21길 53 02-738-5688
3. 옥동식
소고기국밥 가운데 그레이드가 높은 국밥이 있다. 소고기곰탕이 그것이다. 기름이 알맞게 들어간 살코기만으로 국물을 낸다. 소뼈가 주재료인 설렁탕과 비교하면 소고기곰탕은 한 차원 위다. 그래서 값도 설렁탕에 비해 비싸다.
옥동식 돼지국밥은 소고기곰탕에 해당하는 고품격 돼지국밥이다. 지리산 버크셔K 흑돼지의 앞다리와 뒷다리 살만을 고아낸다고 한다.
유기그릇에 담긴 국물이 맑은 황금색이다. 돼지고기의 본향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얇게 썬 고기의 크기가 아기 손바닥만 하다. 돼지비계가 넉넉해 부드럽게 씹힌다.
반찬은 배추김치 하나. 소홀함이 없는 맛으로 돼지국밥의 격에 견주어 부족함이 없다.
매장에 자리가 10여 석에 불과한 점, 그래서 문 앞에 줄을 서야 하는 점, 게다가 준비한 물량이 떨어지면 문을 닫는다는 점. 그런 것만이 불편하다. 8000원. 일요일은 쉰다.
서울 마포구 양화로7길 44-10 02-6012-9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