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무공전서 에 실린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만약 호남이 없었으면 곧바로 나라는 없어졌을 것 이라는 뜻이다
이는 ‘발해고(渤海考)’의 저자로도 유명한 유득공(柳得恭)이
1795년(정조 19년) 왕명에 따라 편찬한 이순신 장군의 문집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의 끝부분
서간문 모음집에 실려 있는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 포함돼 있는 글이다
보낸 날짜는 임진왜란 발발 1년2개월여가 지난 1593년(선조 26년) 7월 16일이다
호남은 한국 역사상 대표적인 구국항쟁의 산실이요 본거지였다
외세의 침략으로 국가와 민족의 운명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을때
호남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떨쳐 일어나 오로지 구국일념 하나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초개같이 목숨을 바쳐 싸웠다
16세 이상 청년부터 60세에 이르는 초로의 장년까지
창과칼을 들 수 있는 청장년들은 싸움터로 달려나갔고
부녀자와 노인들은 농사를 짓고 길쌈을 하여 군량미와 군포조달등
군수지원에 나서는등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총력전을 펼쳤다
이러한 호남인들의 투철한 민족의식과 필사즉생의 항쟁정신은
몽골침략으로 한반도가 유린당할때 삼별초와 함께 벌인
대몽항쟁시부터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호남인들의 구국항쟁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민족의 성웅 이순신 장군이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는
약무호남 시무국가 라고 호남의 우국충절을 높이산데서 알 수 있듯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맞아 존망의 기로에서 섰던 국가와 민족을
기사회생시켰던 것은 호남인들의 투쟁이 결정적이었다
이순신,이억기 휘하의 전라수군이 거둔 한산대첩과 명량대첩
권율이 이끈 1만5천의 호남병력과 김천일의 의병이 거둔 행주대첩
최경회등 호남의병의 연합작전에 의한 1차 진주대첩과
김천일,고종후,논개등 호남의병이 목숨을 바친 2차 진주성 혈전등
격전의 현장에 호남인들의 선혈과 투혼이 서려있다
구한말 일제가 조선정벌에 나섰을때도 호남인들은 가장 활발하게 구국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비록 일본의 침략을 분쇄하진 못했지만 103명의 의병장과 3000여명의
의병들이 목숨을 던진 구국항쟁은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으며
3.1운동의 적극적인 참여,광주학생의거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처럼 호남인들은 지배권력으로 부터 소외와 차별,수탈을 당해왔으면서도 국가가 위기에 처할때는 분연히 떨쳐 일어나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