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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디고 유니콘 원문보기 글쓴이: 봄날isu
성숙한 남성의 고태형(古態型)을 재발견하기
왕, 전사, 마술사, 연인
로버트 무어, 더글러스 기예뜨
최근에 빌 모이어가 시인 로버트 블라이와 가진 인터뷰 “남자들의 모임”에서 젊은 남자가, “애초의 권위있는 남자들은 오늘날 다 어디 있습니까?”하고 질문하였다. 남녀 모두의 마음 속에 깃든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이 책을 썼다. 20세기 후반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남자의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더욱 더 많은 가정에서 유감스럽게도 아버지들이 사라지고 있으며, 이러한 아버지의 사라짐은, 그것이 정신적 방기이든, 육체적 부재이든 간에 남녀 어린아이들에게 심리적 황폐감을 주고 있다. 나약한 아버지 혹은 아버지의 부재는 그들의 아들, 딸들이 성적인 정체성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마비시키고 동성과 이성의 친구들과 친밀하고 긍정적인 방법으로 관계를 맺는 능력을 마비시킨다.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단순한 방법으로 현대 가정체제의 와해를 지적하고, 남성의 위기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와해를 밑받침하고 있는 두 가지 다른 요인들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첫째, 우리는 소년이 어른으로 입문하게 되는 관습적 의식의 사라짐을 아주 심각하게 취급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 사회에서는 소위 우리가 말하는 소년 심리와 어른 남자심리가 어떤 것인지를 정의하는 기준개념이 있다. 유명한 인류학자, 아놀드 반 제넴과 빅터 터너가 자세히 검토한 바 있는 부족사회 안에서 이것은 아주 분명히 보여진다. 그곳에는 부족의 소년들이 남자 어른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도와주기 위해 아주 세심히 짜여진 의식이 있다. 지난 수세기 동안 서구 문명권에서는 이러한 관습적 입문의식이 폐기되어 왔고, 혹은 훨씬 더 협소하고 맥빠진 경로로 다양화되어, 가짜 입문이라고 칭할 수 있는 현상으로 변하였다.
우리는 관습적 입문의식이 쇠퇴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지적할 수 있다. 신교의 종교개혁 계몽운동은 관습적 의식을 불신하는 주제와 맥락을 같이 한 강력한 운동이었다. 일단 성스럽고, 변형하는 과정으로서의 의식이 불신을 받게 되자, 남겨진 것은 빅터 터너가 말하는 “단순한 의전”으로, 의식(意識)의 전환에 이르는데 필요한 권위(힘)를 갖지 못한다. 의식(儀式)으로부터 격리되면서 우리는 남자 여자가 심오하고, 성숙되며, 삶을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성적인 정체성을 완성시키는 과정을 저버리게 되었다.
이러한 정체성이 형성되는 관습적 입문의식이 불신받게 되는 사회는 어떻게 될까? 남자들의 경우, 남성으로의 입문교육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지거나, 어른이 되는 데 필요한 변신과정을 거치지 않는 “가짜 입문”을 하게된다. 즉 소년심리가 우세하게 된다. 우리 주위에 소년심리가 만연되어 있으며, 그 징표는 쉽게 볼 수 있다. 상대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폭력적인 행동, 성을 학대하는 행위, 소극성, 나약함, 자신의 삶을 창조적 효율적으로 살지 못하는 무능성, 타인에게 생명과 창조를 불러 일으키지 못하는 무능함, 그리고 때때로 나약함과 학대, 학대와 나약함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갈팡질팡한 행위이다.
남자 어른이 되는데 필요한 의미있는 관습적 입문의식이 붕괴되는 것과 함께, 성숙한 남성의 정체성이 분해되는데 기여하는 두 번째 요인이 있다. 이 요인은 일련의 여권신장론자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으로, 가부장제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가부장제는 우리 서구세계를 지배하는 사회적, 문화적 제도로써 2천년전부터 지금까지도 지구의 대부분 사회가 지배당하고 있다. 여권신장론자들은 가부장제의 남성지배가 여성을 어떻게 악용하고 억압해 왔는가를-즉 여성의 성격적 특성과 미덕 그리고 실체를 지닌 여성들 그대로를 다 포함하여- 관찰해 왔다. 가부장제에 대한 격렬한 비판 가운데, 일부 여권신장론자들은 남성은 그 뿌리에서부터 가학적이며, “에로스”와의 연계에 있어서 조차-사랑, 부드러움, 상호적 관계 등도- 오로지 여성쪽으로 부터만 기인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통찰력이 전형적인 가부장제로부터 남성, 여성을 해방시키는 원인을 제공하는데 유용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시각에는 중대한 문제가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우리들의 관점에서 볼 때, 가부장제는 심오하고 근원적인 남성의 표현이 아니다. 왜냐하면 진실로 심오하고, 근원적인 남성은 가학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는 미성숙한 남성의 표현이다. 그것은 소년심리의 표현이고 부분적으로는, 남성의 어둡거나, 혹은 미친 쪽의 표현이다. 그것은 미성숙한 수준에서 인격의 성장이 정지된, 위축된 남성의 표현이다.
가부장제는, 우리의 시각으로, 총체적 의미의 남성에 대한 공격일 뿐 아니라, 총체적 의미의 여성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다. 가부장제의 구조와 역학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여자뿐 아니라 남자도 지배하기를 꾀한다. 가부장제는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 여자에 대한 소년의, 미성숙한 남성의 두려움, 또한 남자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하다. 소년들은 여자를 두려워 한다. 그들은 또한 진짜 남자를 두려워 한다.
가부장적 남자는 자기 아들 혹은 자기에게 속한 남자들의 완전한 남성적 성장을 원치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딸들, 혹은 여성 고용인들의 완전한 성장을 원치 않는다. 이것은 직장에서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의 충분함을 참지 못하는 상급자들의 이야기이다. 얼마나 자주 직장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아름다움, 성숙함, 창의력, 생명력을 있는 그대로 펼쳐 보이려 할 때 간접적, 비 능동적-공격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공격하고, 시기하고, 증오하는가! 더 아름답고, 유능하고, 창의적일수록, 상급자나 동료들로부터 더 많은 적대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를 실제로 공격하는 것은, 존재로서 완성된 여성, 남성으로의 길을 앞서가는 우리에게 겁을 집어먹고 있는 인간 내부의 미성숙함이다.
가부장제는 소년 심리라 부르는 것을 표현한다. 그것은 그들 존재의 충만함에 있는, 본질 속의 성숙한 남성적 잠재능력의 표현이 아니다. 고대 신화와 현대 꿈의 연구를 통하여, 종교 공동체의 신속한 여성화의 내막을 검토함으로써, 사회전체에서 일어나는 급속한 성 역할의 변화를 숙고함으로써, 그리고 심리치료를 요하는 많은 남자들의 내적 생활에 생명력있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만든 지난 수년간의 임상치료를 통하여, 우리는 이러한 결론에 이르렀다.
결여된 것은, 대부분의 경우, 많은 심오한 심리학자들이 결여되었다고 가정하는 것, 즉 내적 여성성과의 적절한 연결이 아니었다. 많은 경우에, 도움이 필요한 이 남자들은 계속적으로 여성에 의하여 억압되고 있었다. 그들이 결여한 것은 심오하고 본능적인 남성적 에너지, 성숙한 남성의 잠재능력과의 적절한 연결이었다. 그들은 가부장제 자체에 의해 이러한 잠재능력과의 연결이 막혀 있었으며, 자신 속에 거의 남아있지 않은 남성에 대한 여권신장론자들의 비난에 의하여 막혀있었다. 어른 남자가 된 성취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의미있고, 전환적인 입문과정이 그들의 생에서 결여됨으로써 그들은 또한 막혀있었다.
명상, 기도, 융 학자들이 말하는 적극적인 상상을 통하여, 이들이 성숙한 남성에 내재한 내적 원형들과 접하면 할수록 자신들의 가부장적 자아와 여타의 상처를 주는 생각, 느낌, 행동 패턴에서 더 많이 벗어날 수 있었으며, 자기자신과 타인-남성, 여성 둘 다-에게 더욱 더 강하고 중심이 잡히고 생성력이 있게 되었다.
현대 남성의 위기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일단의 여권신장론자들이 말하는 더 적은 남성파워가 아니다. 오히려 남성파워가 더 많이 필요하다. 그러나 성숙한 남성이 더 많이 필요하다. 더 많은 남성 심리학이 필요하다. 남성권위에 대한 침착성을 개발하여서, 다른 사람들을 약화시키고, 지배적인 행위를 할 필요가 없어지게 해야한다.
가부장제 내에서는 여성과 남성의 모략과 중상이 너무 많으며, 가부장제에 대한 여권신장론자의 반응도 마찬가지이다. 여권신장론자들의 비난은, 현명하지 않을 경우, 이미 갇혀있는 권위적 남성에게 더욱 더 상처를 줄 수 있다. 사실상, 인간의 역사상, 성숙한 남성(혹은 성숙한 여성)이 실질적으로 기세를 잡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확신할 수는 없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 성숙한 남성이 기세를 잡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숙한 남성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권위있는 남성적 파워와 잠재능력을 축하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까닭은 우리가 남자로서의 개인적 삶을 잘 살고 남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성숙한 남성의 위기가 인간종족의 생존위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종족이 미래를 향해 계속 나아가려 한다면, 우리의 위험하고 불안정한 세계는 성숙한 남성들과 여성들을 긴급하게 필요로 한다.
우리의 소년심리를 어른남자 심리로 추겨 줄 수 있는 관습적 입문의식이 우리 사회에 전혀 없기 때문에 우리들 각자가 우리 모두의 내부에 내재하는 남성적 에너지, 잠재력의 깊은 원천에 이르는 길을(서로의 도움과 지원을 받아) 찾아내야 한다. 우리는 힘을 길러내는 이 자원들과 연결되는 길을 찾아내야만 한다. 이 중차대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는데 이 책이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제1부 소년심리에서 어른남성의 심리로
1장. 남성이 되는 관습적 입문의식의 위기
우리는 어떤 남자보고 “철이 덜 들었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심오한 수준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누군가가 자신의 깊은 정신적 연결구조를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는 분열되어 있다; 그의 인격의 다양한 부분들이 서로서로 떨어져 나가 꽤나 독립적이지만 자주 횬란스러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뜻이다. “철이 들지 않은” 남자는 아마도 남성으로의 심오한 구조로 들어가는 의식적 입문예식을 치뤄낼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소년으로 남아있다. 자신이 원해서라기 보다는 아무도 그에게 소년 에너지를 남성 에너지로 전환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를 남성적 잠재능력의 내적 세계를 직접 경험하거나 치유의 경험을 하도록 인도하지 않았다.
불란서에 있는 우리의 먼 조상 크로마뇽인의 동굴을 방문하여, 저 다른 세계의 내적 세계의 어두운 성소로 내려가 램프를 비춰보면, 그곳에 묘사되어 있는 남성적 힘의 신비스럽고 숨겨진 샘에 경악하고 또 경외감에 뒤로 물러서게 된다. 우리는 내면의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여기 이 침묵의 노래 속에서 마력적인 동물들이-들소, 영양, 코끼리- 태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뛰어오르고 으르렁거리며 높고 둥근 천장과 울퉁불퉁한 벽을 건너 지르며 일부러 바위틈 사이의 그늘로 숨어들게 하다가, 우리의 램프불빛에 달려들 듯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리고 예술가이자 사냥꾼이며, 고대의 전사들이고, 가족 부양자인 남자들의 손바닥 무늬도 그려져 있으니, 그들은 이곳에서 만나 그들의 원시적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러한 동굴성소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남자들을 위하여 남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졌으며, 소년들이 신비로운 남성적 정신과 남자로서의 책임세계로 입문하는 의식을 위하여 각별히 만들어졌다고 세계의 인류학자들이 거의 보편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소년들로부터 남자를 만들어 내기 위한 관습적 입문의식은 이 고대의 동굴에 대한 우리의 추축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많은 학자들이 오늘날까지도 아프리카, 남미, 남태평양 군도, 여타 많은 지역의 부족문화에서 이러한 관습적 입문의식이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최근까지도 북미의 플레인즈 인디안들 사이에 의식이 남아있었다. 전문가들의 관습적 입문의식에 대한 연구는 읽기에 좀 지리한 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시대의 영화에서 다채롭게 채색된 이러한 의식을 볼 수 있다. 고대 민담이나 신화에 관한 영화들이다. 그들은 우리들 자신에 대해 우리가 들려주는 얘기 - 우리의 삶과 그 의미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영화 ‘에메랄드 술’은 이러한 영화의 아주 분명하고 좋은 예이다. 영화에서 백인 소년이 브라질 인디안에게 붙잡혀 양육된다. 어느날 강에서 소년은 아름다운 소녀와 놀이를 한다. 추장은 소년이 이 소녀에게 관심을 두는 것을 한동안 주시해왔다. 소년에게 일고있는 성적 흥미의 자각이 이 현명한 추장에게는 하나의 표시였다. 추장은 아내와 부족의 연장자들과 함께 강둑에 나타나 소녀와 놀고 있는 소년을 놀라게 한다. 추장은 말한다. “토미(소년), 죽을 때가 되었다”. 모두들 심한 충격을 받는다. 모든 어머니와 여성의 역할을 연기하는 추장의 아내가 묻는다. “죽어야만 하나요?” 추장은 위협조로 대답한다. “그렇다”. 그 다음 장면은 토미가 부족의 연장자에게 모닥불 앞에서 고문을 당하는 밤이다 ; 숲의 덩쿨에 강제로 떠밀려져서 산채로 정글의 개미에게 먹힌다. 소년은 고통 속에 신음하고, 그의 몸은 배고픈 개미들의 턱에 유린당한다. 최악이 다가온다.
마침내 해가 뜨자, 아직 숨이 붙어있는 소년을 남자들이 강으로 데려가 달라붙어 있는 개미들을 떼어내고 목욕시킨다. 그 다음 추장은 소리 높여 말한다. “소년은 죽고 남자가 태어났다”. 동시에 소년의 코에 긴 파이프로 환각제를 흡입시키고, 소년은 첫 번째 영적체험을 하게 된다. 그의 환각 속에서 소년은 자신의 동물적 영혼(독수리)을 보게되며, 새롭고 넓혀진 의식 속에서 이 세상 위로 날아올라 마치 신이 세상을 내려다 보듯이 자신의 정글세계의 총체성을 본다. 그 다음에 결혼 허락이 내려진다. 소년은 남자가 되었다. 소년이 남자의 책임과 정체성을 받아들이자, 그는 처음으로 부족 안의 용자의 지위로 옮겨지고 다음엔 추장의 지위로 이동한다.
인생의 가장 기본적인 원동력은 낮은 수준의 체험과 의식수준을 더 높은(혹은 깊은) 수준의 의식으로 끌어 올리려는 시도, 산만한 정체성을 좀더 확고하고 체계화된 정체성으로 확보하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겠다. 모든 인간의 삶은 이러한 노선을 따라 앞으로 향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우리는 어른으로의 입문, 자신과 타인을 향한 어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어른의 즐거움, 권리, 영성으로 들어가고자 시도한다. 부족사회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성인이 무엇이며, 어떻게 성인이 되는가에 대한 각별한 개념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에메랄드 숲’에서 보는 바와 같은 관습적 의식을 갖고 있어서 아이들로 하여금 우리가 “참착하고 안정된 성숙함”이라고 부르는 것을 성취하도록 하였다.
우리들의 문화는 대신에 가짜의식을 갖고 있다. 우리의 문화에는 남자가 되는 가짜 입문이 여러 가지 있다. 군대징집이 그 하나이다. 신병훈련소의 모멸과 강제된 몰정체성이 “남자를 만든다”는 환상이다. 대도시의 갱단들이 또 다른 형태의 가짜입문이며, 크게 보면 갱단들에 의해 운영되는 감옥체제 또한 가짜입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두 가지 이유에서 가짜 행사라고 부른다. 첫째로, 군대입문이 예외가 될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과정들은 비록 상당히 의식화(儀式化)되어 있을 수 있다고 해도(특히 도시 갱단 내에서) 소년들을 빗나가게 하고, 성장이 위축되고, 허구의 남성으로 교육시키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것은 가부장적 “남성다움”으로, 타인을 학대할 뿐 아니라, 자신도 학대한다. 어떤 때는 입문지망자에게 살인을 의식으로 치르게 하기도 한다. 보통 갱문화에서는 마약의 남용이 포함된다. 이러한 체제 속에서 소년은 행동파 청년이 되고, 사회가 소년적 가치관 아래 표현하는 수준까지 비슷하게 성장하지만, 문화에 역행하는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짜 입문은 남자를 생산하지 못한다. 진짜 남자는 까닭없이 폭력적이거나 적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소년심리는 앞으로 3장에서 좀 더 자세히 취급하겠지만, 어떤 형태로든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투쟁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상처를 주게 되어 있다. 그것은 가학, 피학성 변태 성욕자이다. 어른 남자심리는 항상 그 반대이다. 그것은 상처를 주거나 파괴적이 아니라, 양육적이고 생성적이다.
어른 남자심리가 어떤 남자에게든 존재하기 위해서는 죽음이 필요하다. 죽음은-상징적이든, 심리적이든 혹은 정신적이든- 간에 어떤 종류의 입문의식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심리학적 용어로 소년 자아는 “죽어야만”한다. 옛날방식으로 살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의식적으로(儀式的) 죽어야만 새로운 남자가 태어날 수 있다. 가짜 입문은 비록 어떤 애송이들은 소년자아로서 위치를 잡게할 지라도, 왕왕이 권력과 지배를 목적으로 애쓰는 자아를 새로운 형태로 증폭시키며, 다른 청년들에 의해 조종되는 청년기의 형태일 뿐이다. 효과적이고 전환적인 입문은 옛날 형태의 욕망과 자아를 완벽하게 제거하고,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힘 혹은 중심에게 복종하는 새로운 관계로 부활한다. 성숙한 남성 에너지의 힘에 복종하면 언제나 침착함, 연민, 선명한 비젼, 생성력으로 표시되는 새로운 남성 인격을 얻게된다.
두 번째 요인은 우리 문화의 대부분의 입문을 가짜 입문으로 만든다. 대부분의 경우 내용이 들어있는 입문의식이 없다. 관습적 입문의식에는 두 요소가 들어있다. 첫째는 성스러운 공간이며 둘째는 의식을 거행하는 연장자로, “현명한 노인” 혹은 “현명한 나이든 여인”으로 입문자가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입문자를 의식과정으로 이끌고 지도하여 건전하고 강화된 인격의 다른쪽 세계로 데려갈 수 있다.
어떤 학자는 성스러운 공간의 역할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어떤 종류의 입문식에도 의식적으로 신성화된 공간이 필수적이라고 결론지었다. 부족사회에서 이러한 공간은 소년들이 자기의 입문식을 기다리는 집이거나 오두막으로서 특별히 세워졌다. 동굴도 될 수 있다. 혹은 입문 지원자가 죽기 위하여 혹은 남성다움을 발견하기 위해 내몰려진 넓은 황야일 수도 있다. 그 성스러운 공간은 마술사들이 만든 “둥근 원”이 될 수도 있다. 혹은 선진문명사회에서 볼 수 있듯이 거대한 사원의 내실이 될 수도 있다. 이 공간은 반드시 바깥세계와 차단되어야 하며, 특히나 소년의 경우, 여성의 영향으로부터 차단되어야 한다. 왕왕이 입문자들은 끔찍스러운 정서적 시험 혹은 잔인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육체적 시험을 치루어야 한다. 그들은 삶의 고통에, 의식을 거행하는 연장자들에게, 자기 사회의 신비와 남성적 전통에 복종하는 법을 배운다. 그들은 남자의 모든 비밀스런 지혜를 배운다. 그리고 그들이 성공적으로 그 고통을 감내하고 다시 남자로서 태어났을 때에만 그 성스러운 공간에서 풀려난다.
성공적인 입문의식을 위한 두 번째 필수요소는 의식을 거행하는 연장자의 참석이다. “에메랄드 숲”에서 추장과 부족의 연장자들이 이 역할이다. 의식을 거행하는 연장자는 그 비밀스런 지혜를 알고 있으며, 그 부족의 생활방식을 알고 남자의 신비를 면밀히 지켜 온 사람이다. 그는 성숙한 남성의 비젼을 살아내는 사람이다.
성숙한 남성이 희소한 우리문화에서, 의식을 거행하는 연장자들의 공급이 절박하도록 부족하다는 말이 따로 필요없다. 그리하여 가짜입문식이 소년심리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왜곡된 채 남아있으며, 비록 일종의 입문식이 존재하고, 도시의 거리와 동네 단위로 일종의 성소가 존재할 지라도, 남자 어른심리로의 움직임이 허락되지 않고 있다.
성숙한 남성의 위기가 우리에게 책임지워져 있다. 성숙한 남자의 적절한 모델이 없고, 입문의식을 실제로 거행할 기구체제나 사회적 응집력이 없는 상황에서 그것은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의 노력에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우리의 性에 대한 추구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아무런 생각없이 밀려나고 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단지 가끔 남자라는 것을 수치스럽게 느끼고, 사랑받지 못하고, 대접받지 못하고, 초라하게 되고, 좌절감을 느끼고, 무기력하고 무능력감을 느끼는 지경에서 다만 불안할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창조력이 공격받고, 우리의 진취성은 적대감을 부러일으키며, 우리는 무시되고, 왜소해 졌으며, 잃어버린 자신감의 빈 가방을 들고 서 있을 뿐이라는 것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권추구의 세상 속에서 일자리를 지키려 애를 쓰며 인간관계는 그저 겉돌고 에너지를 잃어가고, 남성의 표시를 그리워하며 함몰되어 가고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생성력이 있고, 긍정적이며, 힘을 주는 아버지를(비록 대부분은 그것을 모르지만) 찾고 있다. 그 아버지는 우리들 대부분의 실제 삶에서 존재한 적이 없었고, 우리가 아무리 나타나게 하려고 노력해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어찌됐든, 인류 신화를 연구하는 학생으로서, 또한 융학파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우리에게는 기쁜소식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우리가 남자들과(여자들도 마찬가지로) 함께 나누고 싶은 기쁜소식이다. 그리고 이제 이 기쁜소식으로 넘어가 보자.
2장. 남성적 잠재능력
위대한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융의 생각에 영향을 받은 우리들은 남자지망자로서 이 세상에서 접한 외적결함(아버지의 부재, 미성숙한 아버지, 의미있는 입문의식의 결여, 의식을 거행할 연장자의 부족)이 교정될 수 있다고 희망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희망 뿐만 아니라 융 이전에는 심리학에서 상상하지 못했던 내적 자원을 가진 개인으로서의 체험과 임상의학자로서의 체험도 있다. 모든 남자의 깊숙한 내부에는 침착하고 긍정적인 성숙한 남성의 청사진이 들어있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으로 알고 있디. 융학파들은 이 남성적 잠재능력을 원형 혹은 “애초에 타고난 이미지”라고 부른다.
융과 그의 후계자들은 모든 사람의 심리는 깊은 무의식의 단계에서 “집합적인 무의식”이라고 융이 명명한 것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집합적인 무의식”은 인류종족이 수 세대에 걸쳐 유전적으로 이어받은 본능적 패턴과 에너지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고태형(古態型, Archetype)은 우리 행동, 사고, 느낌과 인간적 반응의 특성들의 근간을 제공한다. 그들은 예술가, 시인, 종교적 예언가들과 아주 가까운 이미지 메이커들이다. 융은 이들을 다른 동물에 있는 본능과 직접적으로 연계시켰다.
우리들 대부분은 아기 오리가 알에서 부화되자 마자 제일 처음 보는 움직이는 물체를 따라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 현상은 갓 태어난 후의 각인적 학습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갓 부화된 아기 오리가 “엄마” 혹은 “보호자”에게 따를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보호자가 무엇인가를 학습할 필요가 없다. 보호자의 고태형은 아기 오리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곧 대기하고 있게 되어있다. 불행하게도, 아기오리가 부화된 순간에 만나는 “엄마”가 보호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적절치 못할 수도 있다. 비록 바깥 세상에서 만난 것이 본능적 기대에 부응치 못할지라도 (오리가 아닐 수도 있다!), 아기 오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보호자의 고태형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인간들은 “엄마”와 “아빠” 및 다른 인간과의 관계, 이 세상의 모든 인간적 체험의 형태에도 준비가 되어있다. 그리고 비록 바깥 세상이 고태형적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그 고태형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것은 우리 모두 안에 지속적이고 보편적으로 들어있다. 아기오리가 고양이를 제 어미로 오해하듯이, 우리들도 부모를 우리 내부에 있는 이상적인 행동패턴과 잠재능력으로 오해한다.
고태형적 행동양식은 잘못된 길로 빠지고, 바같 세상에서 살고있는 사람들과의 재앙스러운 만남으로 인해 부정적으로 삐뚤어졌으며-즉 대부분의 경우 부적절하고, 적대적인 부모로 인해 우리들 인생에서 정서장애를 일으키는 심리학적 문제들로 명백히 나타나고 있다. 만약 우리의 부모들이 충분히 양질이었다면 우리는 긍정적인 방식으로 인간관계를 체험하고, 내적 인간관계의 청사진에 다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슬프게도, 우리들 대부분은 충분히 양질인 부모를 갖지 못했다.
고태형의 실재는 인간행동의 숨겨진 양태를 면밀히 관찰하고, 환자들의 백일몽과 꿈으로부터 얻은 수많은 증거를 통하여 충분히 입증되었다. 그것은 또한 전 세계의 신화를 깊이있게 철저히 연구함으로써 입증되었다. 민담이나 신화에서 똑같은 본질적인 인물들이 계속해서 반복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분야에 전혀 지식이 없는 사람들의 꿈 속에도 이러한 인물들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죽고-부활하는 젊은 신은 기독교인, 페르시아의 모슬렘교도, 고대 사마리아인, 현대의 미국 인디안 등 다양한 민족들의 신화에서 발견될 뿐만 아니라, 심리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들의 꿈에서도 나타난다. 인간의 지적, 정서적 생활을 결정하는 내재적 양식이 있다는 증거가 너무나 지대하다.
이러한 청사진은 숫적으로 아주 많은 듯 하며, 그들은 여성과 남성으로 자신들을 나타낸다. 여성의 인간관계와 느낌과 생각을 형성하는 고태형이 있으며, 남자의 인간관계, 느낌, 생각을 형성하는 고태형이 있다. 부가하여, 융학파들은 모든 남자의 내면에도, 여성적 고태형으로 이루어진 아니마라고 불리우는 여성적 부차적 인격이 들어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모든 여성의 내면에는 남성적 고태형으로 이룰어진 아니무스라고 불리는 남성적 부차적 인격이 들어있음을 발견하였다. 모든 인간은 정도의 차이는 다르지만 이 고태형들에 다달을 수 있다. 우리는 사실 타인과의 관계를 맺으면서 이를 행하고 있다.
우리 내면의 본능적 인간세계에 대한 지식이 진보함에 따라 이 분야 전체가 활발히 토론되고 계속적으로 수정되고 있다. 언제나 신화, 의식, 꿈, 비젼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드러내 온 인간의 내면세계를 이제 우리는 체계적인 방식으로 풀어나가기 시작하였다. 고태형적 심리학 분야는 그 영아기에 있다. 우리는 어떻게하여 남자들이 이 긍정적인 고태형적 잠재능력에 다달을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다. 남자들과, 그들 주위 사람들과, 어쩌면 이 지구를 위하여.
* 위의 책은 1990년 미국 하퍼콜린스출판사 지부 하퍼샌프란시스꼬에서 발간한 것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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