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07 나해 부활2주일
사도 4:32-35 / 1요한 1:1-2:2 / 요한 20:19-31
‘알 수 없다’에서 ‘알다’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을 ‘무신론자’라고 합니다. 반대로 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사람을 ‘유신론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무신론자도 아니고 유신론자도 아닌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인간의 지식이나 인식의 한계로 인해 신의 존재나 절대적인 지식을 갖기가 불가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불가지론자’라고 합니다. 이들은 무신론자처럼 신의 존재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신론자처럼 강한 믿음을 갖지 못하고 의심하거나 모르겠다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오늘날 점점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하느님에 관해 불가지론자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신이 없다’고 확신하기엔 인간의 존재가 완벽하지 않고, 그래서 그런 인간만을 믿기엔 심리적으로 뭔가 불안하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신이 존재한다는 뭔가 강력한 개인적 경험을 했거나, 혹은 이성적(理性的)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지적 확신도 없어서 선뜻 믿을 엄두도 못 냅니다. 그래서 이들은 양쪽 중간 어딘 가에 갇혀 있는 채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불가지론자들은 진정으로 신앙의 삶을 살길 원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한때 교회를 다니며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하느님을 의지하고, 하느님을 위해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에 실망하거나 혹은 신앙이 약해서 더 이상 하느님을 위해 삶을 살기가 버거워 도망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 저는 미국의 종교심리학 연구 논문을 읽었습니다. 그것은 정신건강과 종교성과 간의 상관관계에 대한 글입니다. 그 연구에 따르면 정신건강과 종교성 사이에는 일종의 U자형 곡선이 있다고 합니다. U자의 제일 높은 양쪽은 각각 자신감 있고 헌신적인 무신론자들과 유신론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각각 높은 정신적 웰빙 상태를 누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중간에 있는 불가지론자들은 U자형의 가장 낮은 가운데 바닥에 놓여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양쪽에 비해서 가장 불행한 정신상태라는 뜻입니다. 이 조사결과를 통해 연구논문은 정신적으로 불안한 불가지론자들은 역설적이게도 하느님을 간절히 찾을 수밖에 없는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상태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놓인 대표적인 인물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는 바로 토마(Thomas)입니다. 이 이야기는 네 복음서 중 요한복음서에만 나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 앞부분에는 부활한 예수께서 발현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토마 이야기에 앞서 예수께서 발현하신 내용을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발현을 두 가지로 증언합니다. 하나는 여인들에게 나타나심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입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의 발현 기사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심과 토마가 없는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그리고 토마를 포함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인들에게 나타나심도 그렇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심도 그렇고, 모두 처음에는 부활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긴가민가하는 반신반의의 단계를 거쳐서, 마지막에는 확신의 과정에 도달합니다. 그리하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이제 그들에게 사명(mission)을 부여하시는 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순서에 따라 살펴보자면, 먼저 불신의 단계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요한20:19)” 요한복음에 따르면, 제자들은 부활아침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유다인들이 스승 예수께 했듯이 자신들에게도 해를 끼치고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더 압도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부활 소식을 들었어도 여전히 무기력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타나시어 “너희에게 평화를 있기를!”하고 인사하시며 자신의 손과 옆구리에 난 상처를 보여 주시자, 그제서야 그들은 반신반의하면서 기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이 더 완전해지기 위하여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용서하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여기서 용서의 가장 초보적인 형태는 타인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용서는 우리가 불의하고 죄에 빠진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개인차원 뿐만 아니라 집단차원으로까지 확장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제1독서 사도행전은 성령으로 온전한 신앙을 가진 교회공동체란 어떤 것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음 한 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고, 그래서 교회에는 가난한 사람이 없었으며,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그리하여 하느님의 크신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4:32-35 참조)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여인들도, 제자들도 기쁨과 확신을 경험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토마입니다.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라고 말하자, 토마는 부활의 가능성에 대하여 전적으로 부인하지 않지만, 분명한 조건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직접 자신의 눈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던 것처럼 토마 역시 예수님의 몸에 집착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는 붙잡지 말라고 하신 것과는 달리, 토마에게는 직접 만져보라고 그의 요청에 응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도전 역시 말씀하십니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요한20:27)”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부활한 예수를 믿으십니까? 믿으신다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믿게 되었습니까? 유아세례로 시작해서, 부모님 따라 교회 다니고,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오랫동안 전례에 참여하면서 그냥 자연스럽게 믿게 되었습니까? 아니면, 인생을 살면서 어떤 종교적 체험을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신하게 되었습니까? 사실 부활한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녹록치 않은, 그래서 평생 씨름해야 할 신앙의 화두(話頭)와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이유로 적지 않는 신앙인들이 “압니다”라고 고백하는 유신론자 범주에 속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알 수 없습니다”라고 실토하는 불가지론자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하느님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말하기 보다는 눈에 당장 보이는 사람들의 행동, 교회의 외형 등에 대하여 품평하는 것을 더 선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교회의 본질은 영(靈)에서 흘러나옵니다. 창조주 하느님이 계셔서 만물이 창조되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셔서 우리가 죽음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고, 협조자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신앙이 온존해져서 의심을 극복하고, 형제를 용서하고, 마침내 하느님 나라를 닮는 교회를 이루듯이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릴 때, 어떤 분들은 “그것이 가능할까?”라고 반신반의하실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런 분들은 오늘 복음에서 토마가 했던 모습을 다시 한번 찬찬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토마는 비록 뭔가 조건을 달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길 바랬습니다. 그러므로 토마처럼 자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진정 만나고 싶다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의 눈높이에 맞게 깨달을 수 있는 방식으로 만나주실 것입니다. 그럴 때, 토마처럼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요한20:28)”이라고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한 차원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 주실 거고, 거기서 여러분의 신앙은 새로운 차원이 열릴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 교회도 부활한 예수를 체험한 초대교회가 크나큰 축복을 받은 것처럼 그러한 믿음의 선물로 충만해지길 소망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