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진 교수의 전쟁과 미술]
아시리아 장인의 ‘사냥하는 아슈르바니팔’(BC 7세기경)
깊게 깎아낸 조각… 제왕의 위엄과 생동감 표현
역사상 첫 번째 제국의 유적… 독자적 예술세계 사실적 묘사
아슈르나시르팔 2세, 자신 과시하려 궁전 벽면 조각으로 채워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kookbang.dema.mil.kr%2Fnewspaper%2Ftmplat%2Fupload%2F20150310%2Fthumb1%2FBBS_201503100520402950.jpg)
대 리석 돋을새김. 2.13× 2.7m. 영국 대영박물관소장
|
작은 크기의 군인
엄격한 계급사회에서 신분이 낮은 인물을 작게 표현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여기서는 원근감을 이용해서 표현했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축소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고전주의적 인상의 황제
활을 쏘기 직전 아슈르바니팔의 표정과 몸가짐은 고전주의적 견고함과 절제로 완성돼 있다. 정면을 응시하는 결연한 표정과 끝까지 활을 당긴 두 팔의 부풀어오른 근육에서 인물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 대리석 돋을새김. 2.13 × 2.7m. 영국 대영박물관 소장.
수준 높은 돋을새김 솜씨
아시리아의 장인은 황제의 모습을 위엄 넘치면서도 생동감있게 표현하기 위해 깊은 부조를 이용했다. 대리석 벽을 한 치 이상 파들어간 상태에서 3-4층으로 인물의 복식이나 말을 돋을새김함으로써 입체감 넘치는 작품을 탄생시킨 것이다.
최근 급진 수니파 무장세력인 이슬람국가가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의 고대 아시리아(Assyria) 유적을 파괴하는 장면이 공개되면서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지난 2월 말 이라크 북부 모슬(Mosul) 박물관의 석상과 조각품을 파괴한 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고대 유적지 님누드(Nimnud)까지 파괴의 손길이 뻗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은 잊혀진 나라지만 아시리아는 서기 전 3000년경부터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중동지역의 강국으로 군림한 나라다. 그 절정기는 서기 전 10세기부터 606년까지 400년간 지속된 신아시리아제국(Neo-Assyrian Empire) 시절이었다. 제국의 왕궁이 있었던 니네베(Nineveh)나 두르샤루킨(dur-Sharrukin), 그리고 님누드의 유적에서 당시 세계 최고수준의 문명을 확인할 수 있다. 인류역사상 실질적인 첫 번째 ‘제국’이었다는 전문가들의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 님누드 유적의 라마수
최근 파괴된 것으로 알려진 님누드 유적은 9세기 초 지중해에서 이란까지 광대한 지역을 정복했던 아슈르나시르팔 2세(Ashurnasirpal II)가 자신의 권능과 부를 과시하기 위해 새롭게 건설한 수도다. 사방이 트여있는 초원지대의 특성상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높고 견고한 성곽이 필요했다. 사각형의 성곽 남서쪽 높은 곳을 택해 궁전과 신전을 조성했다. 뒤편으로 물길을 내고 바깥쪽으로 다시 성벽을 쌓아 운송과 방어목적을 동시에 만족시켰다. 궁전 출입구에는 어김없이 거대한 황소 몸통에 솟아오른 날개를 달고 긴 턱수염에 높은 관모를 쓴 사람 얼굴의 라마수(lamassu)가 설치돼 있어 제국의 위용과 권능을 과시했다. 궁전의 벽면은 제왕의 승리와 위대함을 자랑하는 돋을새김 조각으로 가득 메웠다.
위의 작품은 님누드에서 30㎞ 북쪽에 위치한 니네베 궁전 벽면에 새겨진 돋을새김 조각(부조)이다. 이 궁전을 건설했던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BC 669~627) 황제는 서기 전 7세기 아시리아의 마지막 절정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남쪽 바빌로니아를 통치했던 친형의 반란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저항했던 주변 국가들을 굴복시키고 문화와 예술을 꽃피웠던 통치자였다. 서기 전 640년경 니네베 궁전 벽면에 남겨놓은 돋을새김은 아시리아제국의 전사적 특성과 위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말을 타고 화살을 재고 있는 조각의 주인공 역시 아슈르바니팔이다. 발을 걸 수 있는 등자가 사용되기 전이라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통치자인 황제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들이 기본적으로 전사의 후예라는 걸 말해준다. 그의 증조부 사르곤 2세(Sargon II)는 총사령관 출신으로 왕위를 찬탈했다. 그 이전의 통치자 역시 장군 출신이 많아 전사의 마인드를 갖고 있었다.
● 전차와 기병의 합동운용
충격적 돌파력을 자랑했던 아시리아 전차부대와 기마병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광활한 평원에서 전차와 기병이 효과적으로 결합할 경우 이겨내기 어렵다. 4필의 말로 운용되는 중형전차부대가 적의 진영에 돌진하여 대형을 깨고 나면 기마부대가 달려들어 분산된 보병들을 도륙했다. 처음으로 전차바퀴를 철제로 만들어 내구성과 파워를 극대화한 것도 그들이었다. 아시리아인들이 마상궁술에 있어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들이었을 것이라는 점은 돋을새김에 잘 드러나 있다. 뛰어오른 말의 움직임이나 황제의 부풀어 오른 두 팔 근육이 발사 직전의 긴장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이 같은 사실적인 묘사가 가능했던 것은 이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이 마상궁술에 대한 전문적 식견과 경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술적으로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돋을새김에서 알 수 있듯이, 견고하면서도 역동적인 인물묘사는 경직된 이집트예술에서 사실주의적 그리스예술로 넘어오는 전환기적 상황을 보여준다. 활을 쏘기 직전의 견고함과 상대를 향한 응시는 고전주의 조각의 기원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움직임을 사실적으로 묘사, 마치 눈앞에서 전개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이상적 인물 표현에 주력했던 그리스 조각과 구별된다.
● 제국의 영광과 전제국가의 한계
광대한 영토를 점령했던 만큼 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제국의 관리를 위해 수송과 통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먼저 깨우친 이들도 아시리아인이었다. 그들은 제국을 연결하는 거대한 도로망을 건설하고 역마제도(Pony Express)를 통해 신속한 통신체제를 갖췄다. 험난한 산들을 절단해 이동거리를 단축했고 수도에 이르는 길은 자갈로 포장해 외국인들을 놀라게 했다. 하천이나 강에는 돌다리를 놓아 건널 수 있게 했다. 수송에 있어 낙타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도 이들이다. 나귀보다 5배나 더 많이 실을 수 있고 물도 많이 먹지 않는 낙타의 사육이야말로 수송능력의 일대 혁신을 가져온 사건이었다. 아시리아제국은 군사적으로나 행정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보여줬지만 그리 오래 지속되진 못했다. 통치자 한 사람에게 국가권력이 집중된 ‘전제(專制)국가’의 한계였다. 로마제국이 보여주었던 시민권의 확대나 법에 의한 통치와 같은 지혜를 갖지 못했다. 전성기를 이루었던 아슈르바니팔이 서기 전 627년에 죽자 제국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채 10년도 못돼 바빌로니아-메디아연합군에게 패함으로써 아시리아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정치적 탄압 속에서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아시리아인들은 3000년이라는 광폭한 시간에도 아직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1세기경 초기 기독교(동방교회)로 개종해 종교적 정체성을 갖게 됐고 공동체생활을 통해 자신들의 언어와 이름, 생활관습과 달력 등 전통의 일부를 유지하는 강인함을 보여주고 있다.
아시리아 고대 유적을 파괴하는 것도 어쩌면 기독교세력과 연관된 것들에 대한 적대감을 통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한 의도적 도발인지도 모를 일이다. 인류역사에서 이슬람문명을 꽃피울 수 있었던 종교적 관대함과 문화적 개방성이 더없이 절실한 시기이다.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즐겁고 행복한 나날 되세요....
UP↑
| | | |
첫댓글 귀한작품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