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예수님의 발에 향수를 부은 여인)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남보다 먼저,
종교가 직업인 이들보다도 먼저 알아보았다.
극한 상황에까지 내몰렸기에 가능한 일이다.
더 추락할 데도 없는 거기서 비로소
그녀는 자신이 구제 불능임을 깨달았다.
우리 중에도 극한 상황에까지 내몰린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철창처럼 우리를 가두는 슬픔도 그렇고,
밤마다 쫓아와 양심을 괴롭히는 죄책감도 그렇다.
하나님마저 위로를 거두시는 극한의 상황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가 우리 삶에서 가장 복된 때였다.
큰 환난 중에도 그분이 능히 도우신다는 찬송가의 진리가
퍼뜩 깨달아진 것이다. 과연 무력하고 어두운 밤이
없었어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비참한 한계치까지 가 보지 못한 이들은 한편으로
불쌍하다. 영원에 대해 더 가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이 영원한 존재며 모든 것이
자신의 삶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지리멸렬한 삶인데도 말이다.
......
크신 하나님을 보려면 우리가 작아져야 한다.
그분의 기적을 경험하려면 무력해져야 한다.
거룩하고 선하신 그분의 용서의 비밀을 알려면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한다.
우리 중에도 막다른 상황에 이르러 깊은 어둠과
슬픔에 잠긴 이들이 있다면 알아야 할 게 있다.
이런 쓰라린 시간을 복 주셔서 창조의 시간으로
거룩하게 바꾸시는 게 예수님의 뜻이다!
자신의 몸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집에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분이 집으로 찾아오셨다!
고개를 들기만 하면 그분이 눈물을 성화해 주신다.
눈물 너머로 보이는 그분은 함께 슬퍼하시는 형제요,
우리를 어두운 웅덩이에서 건지시는 구주시다.
헬무트 틸리케, <하나님의 침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