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레 스님 중광의 비상하는 학
우리 집에는 걸레 스님 중광이 그린 남성의 성기 그림이 치부를 가릴 양으로 면벽 가부좌하고 서가 구석에 앉아 있다. 그림이 잘 있는지 궁금하여 돌려 보면 아직 수행이 모자라는지 풀기가 사그라지지 않고 뻣뻣하여 견성 성불할 가망은 도저히 없을 것 같다. 대구의 ‘멕시코’란 룸살롱의 큰 안주 쟁반에 매직잉크로 쓱쓱 그린 이 그림은 “너, 엿이나 먹어”라는 표정으로 온종일 염불 대신 욕이나 하면서 그렇게 앉아 있다.
어느 봄날, 시인 구상 할아버님이 전화를 주셨다. “응 그래, 잘 있지, 이따 다섯 시쯤 동대구역에 내려 전에 갔던 한정식집으로 갈 거야. 퇴근해서 걸루 와” 할아버님은 무슨 행사에 참석하시기 위해 김수환 추기경, 조각가 문신 선생 내외, 그리고 중광 스님과 함께 열차 편으로 대구에 오셨다. 추기경님은 바로 교구청으로 들어가시고 남은 분들끼리 음식점으로 오셨다.
대구에선 필자 등 3명이 참석, 오랜만에 반가운 안부를 주고받으며 반주를 겸한 화기애애한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중광 스님만 뒤가 급한 사람이 화장실 문 앞에서 동동거리듯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스님 약속이 있어요. 왜 그리 조급증을 내세요” “그래, 임마. 빨리 끝내고 나가자”
걸레 스님을 깃발처럼 앞세우고 맥시코로 진군했다. 술집 입구에는 묘령의 아가씨 보살이 스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하, 그랬었구나. 스님의 불알에 요령 소리가 난 게 바로 이 보살 때문이었구나” 아가씨 보살은 대구 마산 간 고속버스의 승무원이었다. 요즘은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안내양을 두지 않지만 그때는 비행기 스튜어디스 보다 더 이쁜 아가씨들이 안내를 맡고 있었다. 일전에 스님이 마산에서 대구로 올라오면서 이 보살을 만났고 당시의 눈 맞춤이 오늘 결실을 이룬 듯했다.
‘염불보다는 잿밥’이라더니 중광 스님은 술과 안주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오로지 옆에 앉아 있는 아가씨 보살에게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술 값을내야 할 대구 사람들은 본전 생각이 간절했다. “스님으로부터 그림이라도 한 점 받아야 할텐데...”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럴 땐 눈짓만이 최고의 언어였다. 내가 두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두께까지 정해 줬더니 주인은 사기 쟁반을 한 아름 들고 와 스님 앞에 쌓아 놓았다. 그러나 스님은 우리의 바램을 속으로 짐작은 하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그러면서 숨바꼭질의 술래가 된 듯한 왼손은 아가씨의 젖무덤을 더듬거리느라 보이지 않았고 매직잉크를 쥔 오른손이 쟁반에 황칠만 해대고 있었다.
슬며시 부아가 치민 나는 그 황칠 접시를 뺏어 대리석 바닥에 패대기 쳐버렸다. 그때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스님은 “저 놈이 사람 잡겠네”라고 한마디 하고선 “그래, 무슨 그림을 그리면 좋을까”고 자세를 곧추세우며 그림 그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스님은 석가모니 얼굴에 예수의 가시 면류관을 씌운 그림을 H씨에게 그려주었고, K씨에겐 달마 선사를, 멕시코 주인에겐 해바라기를, 그리고 접시를 박살 내버린 내겐 털이 숭숭 난 남성에 빳빳하게 풀을 먹여 ‘엤따’하고 나에게 던져 주었다. 내가 받은 그림이 가장 중광 적이란 걸 받는 순간에 알아차렸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스님과 나는 석가모니와 가섭존자의 미소처럼 이심전심으로 통했는지 대구에 내려올 때마다 “아무도 부르지 말고 우리 둘이서만 마시자”고 하여 술집 여기저기의 재미있는 구석만 찾아다녔다. 한 번은 중앙파출소 옆 누드모델 출신이 운영하는 ‘코코’라는 카페에서 서라벌의 처용처럼 ‘카페 등불 밝기 다래 밤드리 노닐다’보니 밤이 너무 깊어졌다.
술기가 거나하게 오르자 스님은 그 카페의 주인처럼 행세했다. 내가 “이제 그만 마시고 숙소로 들어갑시다.”고 아무리 졸라도 막무가내로 버티었다. 스님은 내게 ‘먼저 가라’는 눈짓을 몇 번이나 하길래 무슨 일을 벌일 예감(?)을 모른 척하고 나와버렸다. 일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카페주인이 스님에게 “영업시간이 끝났다”고 일러도 들은 척 만 척 하더라는 것. 그래서 주인은 밖에서 문을 잠그고 퇴근을 해버리자 스님은 긴긴 겨울밤을 혼자 갇혀 지내다 새벽녘에 겨우 풀려난 적도 있다.
스님은 대구에 올 때마다 “이건 너 줄려고 정신 들여 그린거야”하며 춘화에 가까운 선화를 여러 장 주셨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아 친구들에게 나눠 줘 버렸다. 하루는 동아 쇼핑 5층에서 <걸레 스님, 중광>이란 연극의 공연 전에 무대 인사를 해야 한다며 대구에 내려오셨다. “오늘은 진짜 마음먹고 한번 그려 보자. 어떤 그림을 그려야 까다로운 네놈 맘에 들겠노”하시며 전화로 내게 “미리 준비해 두라”고 얘기한 ‘히끼시’(배접을 미리 해 둔 화선지)를 빨리 꺼내라고 야단이었다.
스님은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시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마음먹은 대로 그림은 풀려나오지 않았다. 자정이 지나고 새벽 두 시가 넘어섰다. 무엇에 화들짝 놀란 듯 일어난 스님은 붓끝을 세워 한일자를 그리더니 다시 붓을 눕혀 바로 내려그었다. 그런 다음 아무렇게나 네 개의 점을 찍고 나니 한 마리 학이 비상할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스님이 포스트 칼라 붉은색을 학의 머리와 꽁지에 찍으니 영락없는 홍학이었다. “이제 됐어. 그림이 나오기 시작하는구먼” 어깨너머로 봐도 정말 걸작 명화였다. 스님은 연거푸 서너 장을 그리더니 “야 임마. 인제 맘에 드나”라고 말했다.
어제는 하도 심심하여 서가에서 가부좌하고 있는 ‘쟁반 속의 남성’을 끄집어내 스님의 학 그림 밑에 앉혀 보았다. 그랬더니 학은 끼들끼들 웃으면서 바짝 물오른 남성을 다리 사이에 차고 중광 스님이 좋아했던 여인들이 살고 있는 사바세계 저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이 세상에는 나만 혼자 남아 있다.
첫댓글 저는 아직 모르겠네요
쟁반 속의 남성과 비상하는 학 셋트의 진의를!
화중지병!^^
욕망의 세계(=쟁반 속의 남성)에서 욕망에서 벗어 난 해탈의 세계(=비상하는 학)를 꿈꾸지만 그런 꿈은 이루지 못할 꿈일 뿐이고 죽어야 욕망이 없는 세계로 날아가는 것이니 그저 살아 있을 때 열심히 사는 게 중요하다는 뜻.
작가가 왜? "이 세상에는 나 혼자 남아 있다"고 독백처럼 내 밭았을까? 걸레 스님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었듯이 작가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 (=카페주인이 스님에게 “영업시간이 끝났다”고 일러도 들은 척 만 척 하더라는 것. 그래서 주인은 밖에서 문을 잠그고 퇴근을 해버리자 스님은 긴긴 겨울밤을 혼자 갇혀 지내다 새벽녘에 겨우 풀려난 적도 있다.= 이해 해 주지 못한다는 뜻)
"왼손은 아가씨의 젖무덤을 더듬거리느라 보이지 않았고 매직잉크를 쥔 오른손이 쟁반에 황칠만 해대고 있었다."
=욕망의 세계에 빠져 살면서도 해탈의 세계를 꿈꾸는 이루지 못할 꿈 속을 헤매는 중생들의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상징 = 그렇다고 걸레를 본 받으려 하지는 말 것. 걸레는 빨아도 걸레 일 뿐인 것이니 걸레 흉내 내지 말것^^
구활이 아니면 감히 이런 수필을 써낼 인물이 당금의 우리 대한민국에는 없음.^^
중광 스님도 남자, 구활 선생도 남자, 범몽 선생도 남자, 심지어 저도 남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심전심으로 '좋다!' 하는 게 정말 타당할까?
하루에 열두 번도 마음이 더 바뀌는 게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갑자기 의기투합을 하고 만장일치로 뭘 결정하면,
이게 과연 견실할까?
그래서 저는 이렇게 의심합니다.
남자인 나도 아무 여자나 다 좋지가 않는데,
어느 여자가 함부로 젖을 만지는 걸레가 좋으랴.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아주 외딴 환경에서 사는 족속들의 경우
외부에서 온 손님한테 자기 부인과 동침하게 하는 건
근친교배의 폐해 때문에 생긴 풍습이 아닌가 짐작이 가는데,
정작 그 부인의 감정은 아무도 말하지 않아요.
부인이 싫다고 하면 '재수 없는 여편네'라며 맞아야 하나?
젖을 만진다는 것도 그래요.
사람의 신체가 신경으로 긴밀히 연결이 되어서 호르몬이 분비되는 등으로
여자들이 일종의 마비증(또는 도취증)에 걸린다고 하자.
동일한 작동 원리로 아기들이 밤낮으로 빽빽 울어대며 괴롭혀도
어머니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며 깜빡 잠을 잔다고 하자.
.....
어휴, 말을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