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맹사성의 강호사시가
제1수
江湖(강호)에 봄이 드니 미친 興(흥)이 절로 난다.
탁료 계변에 錦鱗魚(금린어) 안쥐로다.
이 몸이 閒暇(한가)해옴도 亦君恩(역군은)이샷다.
제2수
江湖(강호)에 녀름이 드니 草堂(초당)에 일이 업다.
有信(유신)한 江波(강파)난 보내나니 바람이로다.
이 몸이 서날해옴도 亦君恩(역군은)이샷다.
제3수
江湖(강호)에 가알이 드니 고기마다 살져 잇다.
小艇(소정)에 그믈 시러 흘니 띄여 더져 두고.
이 몸이 消日(소일)해옴도 亦君恩(역군은)이샷다.
제4수
江湖(강호)에 겨월이 드니 눈 기픠 자히 남다.
삿갓 빗기 쓰고 누역으로 오슬 삼아.
이 몸이 칩지 아니해옴도 亦君恩(역군은)이샷다.
해석
강호에 봄이 찾아드니 참을 수 없는 흥겨움이
절로 솟구친다.
탁주를 마시며 노는 시냇가에 싱싱한 물고기가
안주로 제격이로구나.
다 늙은 이 몸이 한가롭게 지냄도 역시 임금의 은혜이시도다.
강호에 여름이 닥치니 초당에 있는 이 몸이
할 일이 별로 없다.
신의 있는 강 물결은 보내는 것이 시원한 강
바람이다.
이 몸이 이렇듯 서늘하게 지냄도 역시 임금의 은혜이시도다.
강호에 가을이 찾아드니 물고기마다 살이
올랐다.
작은 배에 그물을 싣고서, 물결 따라 흘러가
배를 띄워 버려 두니,
이 몸이 이렇듯 고기잡이로 세월을 보내는
것도 역시 임금의 은혜이시도다.
강호에 겨울이 닥치니 쌓인 눈의 깊이가
한 자가 넘는다.
삿갓을 비스듬히 쓰고 도롱이를 둘러 입어
덧옷을 삼으니,
이 몸이 이렇듯 추위를 모르고 지내는 것도
역시 임금의 은혜이시도다.
■핵심정리
▮작자 : 맹사성(孟思誠)
▮연대 : 세종 때
▮종류 : 평시조, 연시조(連時調)
▮명칭 : 강호가(江湖歌),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
사시한정가(四時閒情歌), 강호한정가(江湖閑情歌)
▮구성
►계절에 따라 한 수씩 노래하였다.
►각 수는 ‘江湖(강호)’로 시작하여 ‘亦君恩(역군은)이샷다’로 끝을 맺었다.
▮내용 : 자연 속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선비의 생활을 읊은 것이다.
▮제재 : 사시(四時)의 강호 생활(江湖生活)
▮주제 : 강호에서 자연을 즐기며, 임금의 은혜에 감사함
▮의의 :
►우리 나라 최초의 연시조이다.
►이황의 ‘도산십이곡’과 이이의 ‘고산구곡가’에 영향을 준 작품이다.
▮기타 : ‘亦君恩(역군은)이샷다’은 상진(尙震)의
‘감군은(感君恩)’과 송순의 ‘면앙정가(俛仰亭歌)’에도 나온다.
■이해의 초점
▬춘(春) : 시냇가에서 천렵(川獵)을 하여 잡은 물고기를 안주로 하고
탁주를 마시는 흥겹고 한가로운 생활을 소개하는 한편,
이 한가로운 자연 속의 풍류 속에서도
임금에 대한 충(忠)의 정신을 잊지 않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하(夏) : 무더운 여름 초당(草堂)에서 시원한 강 바람을 쐬며
한가로이 지내는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생활을 노래하고 있다.
▬추(秋) : 고기잡이를 소재로 하여 배를 띄우며 소일하는
어부의 모습에 자신의 심정을 의탁하여 한가로움을 나타내고 있다.
▬동(冬) : 눈 내린 겨울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삼아
강촌 생활을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즐기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燕子樓(연자루)-맹사성/孟思誠
駕洛遺墟幾見春(가락유허기견춘)
首王文物亦隨塵(수왕문물역수진)
可憐燕子如懷古(가련연자여회고)
來傍高樓喚主人(내방고루환주인)
-연자루-
가락의 남긴 터는 몇 해나 되었던가.
수로왕의 문물도 티끌로 돌아갔네.
가련해라 저 제비는 마치 옛날 그리운 듯
연자루 곁에 와서 자꾸 주인 부르네.
*연자루(燕子樓)-김해에 있는 누각. *유(遺)-끼치다.
*허(墟)-터. *수(隨)-따르다. *가련(可憐)-불쌍하다.
*회(懷)-품다. 마음. *환(喚)-부르다.
맹사성의 '강호에 봄이 드니’
석야 신웅순
하루는 최영 장군이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배나무 밭에서 용이 승천하고 있었습니다. 꿈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밖으로 나가 보니 아이들이 나무에 올라가 배를 따고 있었습니다.
“요놈들. 누가 허락도 없이 배를 따고 있느냐?”
호통을 쳤습니다. 아이들을 모두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만 배를 가지고 와 잘못을 빌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함자가 무엇이더냐?”
“할아버지는 맹, 유자이옵고 아버지는 맹, 희자 도자라 하옵니다.”
“음, 착한 아이로구나.”
최영과 맹유는 서로 잘 아는 사이었습니다. 최장군은 맹유를 찾아 갔습니다. 꿈 이야기를 하고 예의 바른 손자를 칭찬했습니다. 장군은 그 아이를 훗날 손녀 사위로 삼았습니다. 맹사성은 맹유의 손자이며 맹희도의 아들이었습니다.
맹사성은 바로 최영 장군의 손서입니다. 할아버지 맹유는 두문동 72현( 조선의 개창에 반대해 두문동에서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바치며 지조를 지킨 72명의 고려 유신을 이르는 말 )의 한 사람으로 순절했고 아버지 맹희도는 출사 없이 절의를 지켰습니다.
유형원의『동국여지지』에 최영 장군의 집은 원래 "홍주에서 동쪽으로 23리 떨어진 삼봉산 아래 적동리에 있고 후에 성삼문이 거기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영 장군은 홍북면 노은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330년 최영이 15살 때 아버지 최원직이 이사를 와 지금의 맹씨 고택을 짓고 살았습니다. 이성계에 의해 죽기 전까지만 해도 최영 장군은 이 맹씨 행단의 주인이었습니다. 버려진 최영 장군의 집에 와 산 사람이, 서천 한산에서 잠시 은거했다 이곳으로 이주해온 바로 맹사성 아버지 맹희도였습니다. 맹희도는 온양의 최영 장군 집으로 와 이 집을 개수해서 살았습니다.
맹사성은 우왕 12년에 문과에 급제했고 조선조에 들어와 대사헌, 판서를 거쳐 좌의정으로 세종 17년(1435)에 벼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는 조선조 500년사의 명재상으로 황희, 이원익 등과 함께 청백리에 올랐습니다.
맹사성은 8년 간이나 정승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집은 낡아 비만 오면 빗물이 샛고 세간들도 낡을대로 낡아 볼품이 없었습니다. 나들이 할 때는 언제나 소를 타고 다녀서 백성들은 그가 재상인 줄 몰랐습니다.
어느날 병조 판서( 조선시대 군사 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병조의 우두머리 관직)가 집을 찾았습니다. 그날 따라 소낙비가 세차게 쏟아졌습니다. 낡은 집은 소낙비에 물벼락을 맞았습니다. 빗물이 줄줄 새어나왔습니다. 판서의 의관이 다 젖었습니다. 고불은 빗물을 피해 앉으면서 군시렁거렀습니다.
“하필 손님이 계실 때 소낙비가 쏟아질게 뭐람.”
이 때 병조 판서는 사랑채를 크게 짓고 있었습니다.
“정승의 집이 그러한데 내 어찌 바깥 사랑채가 필요하겠는가.”
집에 돌아온 그는 당장 공사를 중단시켰습니다.
하루는 평소와는 밥맛이 달라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이보오, 녹미( 녹봉으로 주는 쌀. )는 아닌 듯하오. 어디서 구해온 쌀이오? ”
“오래 묵어 군둥내가 나 먹을 수 없어 이웃집에서 빌렸습니다.”
“허허, 벼슬아치가 녹을 먹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차후엔 그리하지 마시오.”
맹사성은 관에서 주는 녹미 외에는 절대로 먹지 않았습니다. 일국의 정승임에도 그는 이렇게 청렴했습니다.
이보다 그를 명재상으로 만든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겸양지덕이었습니다.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공복의 예를 갖추고 반드시 대문 밖까지 나가 맞아들였다. 들어와서는 맨 윗자리에 앉혔으며 돌아갈 때에는 공손하게 배웅했습니다. 그리고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비로소 들어왔습니다. 그는 그렇게 겸손했습니다.
맹사성은 일찍이 장원 급제하고 한 지방의 군수가 되어 발령을 받았습니다. 고불은 고견을 듣고자 고을 근처의 선사를 찾았습니다.
“이 고을 수장으로 최고로 삼아야 할 좌우명이 무엇이라고 보오?”
“악한 일 하지 말고 착한 일 많이 하세요.”
“그 말은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니오?”
맹사성은 그런 말을 들을려고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불은 버럭 화를 내며 일어서려고 했습니다.
“녹차나 한 잔 하고 가시구려.”
그는 못 이기는 척 도로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찻잔이 넘치도록 찻물을 자꾸만 따랐습니다.
“스님, 찻물이 넘쳐 방바닥이 다 젖었습니다.”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아시면서,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모르시오.”
“…….”
맹사성은 무명 선사의 그 한마디에 그만 낯빛을 붉히고 말았습니다.
그는 부끄러워 황급히 방문을 나섰습니다. 그만 문설주에 ‘쿵’ 하고 머리를 부딪혔습니다.
스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히는 법이 없지요.”
맹사성은 이 선사의 겸양지덕 좌우명을 평생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맹사성은 명재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맹사성은 음율에도 밝았습니다. 풍해도(조선 조선 시대의 초반인 태조 4년(1395년)에 서해도의 이름이 풍해도가 되었다가, 태종 18년(1417년)에 황해도가 되어, 조선 팔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관찰사 조선시대 각 도에 파견된 지방 행정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되었을 때 영의정 하륜이 그를 서울에 머물게 하여 악공을 가르치도록 왕께 건의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피리소리가 들리면 고불이 집에 있다는 표시였습니다. 언제나 피리를 가지고 다니면서 내키면 한 곡조씩 불렀습니다. 스스로 악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토록 음률을 즐기고 사랑했습니다.
그가 우의정 재임시『태종실록』편찬 감관사( 조선 시대 춘추관의 정1품 벼슬. 정원은 2인인데, 좌•우의정이 겸임하여 영사(領事)인 영의정을 보좌하였음.)로서 감수한 일이 있었습니다.『태종실록』이 편찬되자 세종이 한 번 보자고 했습니다.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이 두려워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가하옵니다.’
세종은 그의 말을 따랐습니다. 품성은 부드러웠으나 조정의 정사에는 이렇게 과단성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맹사성은 고향에 계신 아버지를 뵈러 온양에 갔었습니다. 맹사성이 온양으로 온다는 소문을 듣고 고을 수령은 장호원에서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습니다 이 때 한 노인이 소를 타고 지나갔습니다.
“이보시오. 노인 양반 어찌 재상 행차에 소를 타고 지나가서야 되겠소?”
수령 관졸들은 그 노인에게 버릇이 없다고 꾸짖었습니다.
맹사성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온양에 사는 고불이라고 수령들에게 이르시게.”
이 말을 들은 수령들은 당장 물고를 낼 것 같아 기겁하여 달아났습니다. 정신없이 달아나다 그만 연못에 수령의 관인을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뒤에 사람들은 관인이 빠진 곳이라하여 그 연못을 인침연이라고 불렀습니다. 소를 타고 갔기에 사람들은 그가 재상인 줄 몰랐던 것입니다. 그는 출입시 이렇게 자주 소를 즐겨 타고 다녔습니다. 맹사성은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였으며 사람들에게는 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맹사성은 한양에서 정승 벼슬을 하면서도 틈틈이 본가인 충남 온양으로 내려오곤했습니다.
어느 나른한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그 날도 책을 읽다가 무료하여 바람 쐬러 집 뒤 설화산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어디선가 왁자지껄, 웅성웅성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보았습니다. 아이들이 어린 검은 송아지 한 마리를 두고 회초리로 후려치기도 하고 돌을 던지기도 하고 두들려 패기도 하며 장난질을 치고 있었습니다.
맹사성은 이 모습을 눈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네 이놈들,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말 못하는 짐승에게 웬 행패를 부리느냐?”
호통을 쳤습니다.
아이들은 도망쳤습니다. 괴롭힘을 당한 검은 송아지가 탈진한 채 그 자리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고불은 송아지가 일어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얼마 후 어린 송아지가 몸을 털며 일어났습니다. 선생은 그것을 보고서야 산을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송아지는 선생의 뒤를 졸졸 따라왔습니다. 선생은 어린 송아지를 정성껏 보살폈습니다.
검은 송아지는 건강한 어른 암소로 자랐습니다. 이 때부터 맹사성은 출퇴근은 물론 고향을 오고 갈 때마다 피리를 불며 소를 타고 다녔습니다. 검은 암소는 선생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둘도 없는 동반자였습니다.
맹사성은 평소에 “내가 죽거든 타고 다니던 소를 내 곁에 묻어다오”라고까지 유언하곤했습니다. 선생이 죽자 그 검은 암소도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을 흘리며 죽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감동하여 맹사성 선생의 묘 근방에 묻어주고 격을 높여 ‘흑기총’이라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비석도 세워주었습니다. 해마다 맹사성 후손들이 성묘를 할 때면 흑기총의 풀도 깎아주고 있다고 합니다.
맹사성이 고향 온양에서 서울로 상경하던 도중이었습니다. 맹사성은 용인에서 비를 만나 허름한 어느 주막에 비를 긋게 되었습니다.
어떤 과객 하나가 누상에 앉아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선비는 비에 젖은 맹사성의 허술한 차림새를 보았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로 둘은 서로 친해졌습니다. 선비는 노친을 놀릴 양으로 ‘공(公) 당(堂)’ 놀이나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맹사성이 묻고 청년이 대답하기로 했습니다.
"무엇하러 한양에는 올라가는 공公?"
"과거시험 보려고 갑니당堂"
"내가 시켜줄 공公?"
"그러지 못할 거당堂"
선비는 노친네가 과거시험이 뭔 줄이나 알겠냐는 듯 비아냥거렸습니다. 비가 그쳐 각자 제 갈 길로 떠났습니다.
과거 시험이 끝났습니다. 면접관 맹사성과 선비가 마주 앉았습니다. 맹사성은 선비가 합격한 줄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맹사성은 선비에게 시치미를 뚝 떼며 물었습니다.
"어떻게 되었는 공公?"
깜짝 놀라 선비는 고개를 들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떨 결에 말을 받았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당堂"
맹사성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길가 거렁뱅이 견공에게서라도 항상 배울 것이 없을까 생각하는 것이 공인의 길이니 명심하시게나"
겸손도 겸손이지만 정승의 말과 행실은 이렇게 소탈하고 소박했습니다.
1432년 좌의정에 오르고 1435년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습니다.
맹사성은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여기에서 자연의 아름다운「강호사시가」를 지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연 단시조이며 훗날 강호가의 원지류가 되었습니다.
맹씨 행단 앞을 흐르는 금곡천을 배경으로 해서 지은 시조였습니다.
강호에 봄이 드니 미친 흥이 절로 난다
탁료계변에 금린어 안주로다
이 몸이 한가로옴도 역군은이샷다
강호에 여름이 드는 초당에 일이 없다
유신한 강파는 보내느니 바람이라
이 몸이 서늘하옴도 역군은이샷다
강호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져있다
소정에 그물 실어 흘리띄워 던져두고
이 몸이 소일하옴도 역군은이샷다.
강호에 겨울이 드니 눈 깊이 자히 남다
삿갓 빗기 쓰고 누역으로 옷을 삼아
이 몸이 춥지 아니하옴도 역군은이샷다
‘대 자연 속에 봄이 돌아오니 미친 흥이 절로 난다. 시냇가에 탁주에 안주는 쏘가리로다. 이 몸이 한가한 것도 역시 임금님의 은혜이도다. 강호에 여름이 드니 초당에 일이 없다. 신의 있는 물결을 보내는 것은 바람이라. 이 몸이 서늘한 것도 임금님의 은혜로다. 강호에 가을이 오니 고기마다 살쪄있다. 작은 배에 그믈을 실어 물 위에 흘리게 띄워 던져두고 이 몸이 소일한 것도 임금님의 은혜로다. 강호에 겨울이 오니 눈 깊이가 한자가 넘는다. 삿갓을 비스듬히 쓰고 도롱이로 옷을 삼아 이 몸이 춥지 아니한 것도 임금님의 은혜로다.’ 이런 노래였습니다.
자연 만큼 정직한 것은 없습니다. 자연에 몸을 맡기며 유유자적하게 사는 선생의 노년 모습이 아름답고도 경건합니다. 충과 효, 청렴과 겸양지덕으로 평생 살아온 선생이 아니고서는 이런 시조를 지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선생은 충효 사상의 철저한 실천가이기도 했습니다. 선생의 효행은 아버지와 함께『삼강행실도』에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만인의 존경을 받고 있는 진정한 세심정혼의 재상다운 재상이었습니다.
찾아가는 길
맹씨행단,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행단길 25
맹씨 행단은 맹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이 있는 집으로 맹고불의 고택, 구괴정, 쌍행수 등을 망라하여 ‘맹씨행단’ 이라고 한다.
고불 맹사성, 방촌 황희, 독수와 권진 정승과 함께 느티나무 세그루씩 아홉 그루를 심어 구괴정이라 명명했다. 세정승은 이곳에서 시문을 지어 읊으며 망중한을 즐겼고 국정을 논의하기도 했으며 일하는 농민들의 민정도 살폈다. 60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그 느티나무들은 늙어 그 수명을 다하였고 두 그루만이 받침대에 의지하며 흥망성쇠의 500년사를 증언하고 있다. 삼정승이 국사를 논의하였다고 하여 삼상당이라고도 한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09호로 지정되었다.
맹사성(1360,공민왕9-1438,세종 20)
고려말·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신창,자는 자명·성자이며 호는 고불·동포이다.최영의 손서로 온양출신이다.
권근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우헌납이 되었다.이조에 와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이다.
-석야 신웅순의 서재
[출처] 맹사성의 '강호에 봄이 드니’|작성자 석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