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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방서예자료[723]신숙주(申叔舟)선생시詠日本躑躅
詠日本躑躅 영일본척촉
躑=머뭇거릴 척. 철쭉. 躅=머뭇거릴 촉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
我昔雲帆掛大洋。아석운범괘대양
孤舟五月繫扶桑。고주오월계부상
當時暫寄須曳興。당시잠기수예흥
今日相看思渺茫。금일상간사묘망
내가 옛날 구름돛을 큰 바다에 달았을 때
5월 외로운 배를 부상에 매었었네
그때는 〈이 곳에〉 잠깐 흥을 붙였었더니
지금에 〈이 곳에서〉 서로 보매 생각이 그저 아득하구나
척촉은 진달랫과에 속한 낙엽 관목이다.
높이 2~5m로, 잎은 어긋나지만 가지 끝에서는 많이 모여 난다
. 5월 무렵에 진달래꽃과 비슷한 깔때기 모양의 분홍, 연분홍 꽃이 피고
열매는 10월에 익는다. 산지에 흔히 자라며 관상용으로 심기도 한다.
흔히 양척촉이라고도 하는데 학명은 ‘Rhododendron schlippenbachii’이다.
진달래의 방언인 ‘참꽃’에 반하여 ‘개꽃’이라고도 한다.
철쭉으로 불리는 꽃을 읊은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昔: 옛석. 雲帆掛운범괘=구름 돛을 달고
繫매다계. 扶桑: 부상, 해가 돋는 동쪽 바다를 빗대어 이름.
暫: 잠시잠. 寄須기수= 모름지기 의지하다
曳興예흥= 흥미를 붙이다. 渺茫묘망= 그저 아득하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달진 (역) | 1968
동문선 제22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신숙주申叔舟
조선 세조 때의 문신(1417~1475). 본관은 고령으로 자는 범옹(泛翁)이며
호는 보한재(保閑齋), 희현당(希賢堂)이다.
영의정을 지냈으며,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와 보급에 공을 세웠다.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문집인 《보한재집(保閑齋集)》 과 《북정록(北征錄)》, 《사성통고(四聲通攷)》 등이 있다.
세종의 사랑을 독차지한 집현전 학사
신숙주(申叔舟, 1417~75)는 변절자로 낙인이 찍혔다.
사육신의 충절이 빛을 더하면 더할수록 그는 반비례로
변절자 · 겁쟁이 또는 시세를 추종한 자로 인식되었다.
이것은 그가 어린 임금 단종을 저버리고 씩씩한 기상으로 뻗어 가는
수양대군을 받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동료인 성삼문(成三問) 등이
절의를 지키고 죽은 것과는 달리, 그가 새 임금에게 빌붙어서 영화를 누렸다는 것이다.
유가에서는 ‘절의’를 목숨보다도 중시여긴다. 이것은 ‘충’과 같은 개념으로,
아무리 부당한 임금이나 상전이라도 끝까지 받들어야지 찬탈한 새 임금을 받들면
인간의 도리, 신하의 도리를 저버리는 것이다. 절의는 숭상할 만한 것이요,
변절은 매도되어야 할 경우가 많지만 이것이 민족 또는 민중적 차원으로 확대
적용될 때에는 새롭게 해석해 보아야 한다. 이런 뜻에서 신숙주의 경우를 다시 비추어 보려고 한다.
세종은 문화진흥의 큰 꿈을 안고 집현전을 설치해 인재들을 모았다.
집현전 학사들에게는 온갖 편의를 제공해 학문에만 열중하게 했다.
집현전의 경비를 넉넉하게 함은 물론, 때로는 학자들이 절이나 집에 돌아가서
공부하게 하면서 그 경비를 모두 국가에서 댔다1) . 신숙주는 스물네 살에 집현전에 들어왔고
, 8학사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타고난 학자요, 문사였다. 집에 있는 책을 모두 독파한
그는 궁중에 있는 장서각(藏書閣)의 책을 모조리 읽을 결심을 했다. 숙직을 번갈아 하게
되어 있는데도 그는 자청해서 숙직을 도맡아 했다. 그는 숙직할 때마다 장서각을 높이 쌓아 놓고 읽었던 것이다.
어느 날 밤, 세종은 내시를 시켜 집현전에 숙직하는 학자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게 했다. 이때 입직하고 있던 신숙주는 밤이 깊었는데도 촛불을 켜 놓고 독서에 열중하고 있었다.
내시는 서너 차례 가서 엿보았는데, 닭이 울고 나서야 잠이 든 모습을 보았다. 내시가 이 일을 임금에게 알리자, 임금은 입고 있던 돈피 갖옷(모피로 안을 댄 옷)을 벗어 신숙주에게 덮어 주라고 했다. 곤히 잠들었던 신숙주는 아침에 일어나서야 이 일을 알게 되었다. 다른 학자들도 이 소문을 듣고 더욱 열심히 학문에 열중했다. 세종 또한 밤늦도록 학문에 열중했는데, 그야말로 임금과 신하가 서로 경쟁하듯 촛불을 켜 놓고 밤을 샜던 것이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책읽기를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세조는 한명회 · 신숙주와 함께 궁중에서 마음껏 술을 마셨다. 세조가 신숙주에게 자기 팔을 잡으라고 했는데, 신숙주가 몹시 취하여 임금의 소매 속에 손을 넣고 팔을 잡아당긴 탓에 임금이 비명을 질렀다. 연회가 끝나고 신숙주가 집으로 돌아가자, 한명회는 청지기에게 일렀다.
“범옹(泛翁, 신숙주의 자)은 아무리 술에 취해도 깨면 일어나 등불을 켜고 글을 읽고 나서야 자는데, 네가 가서 오늘 밤은 글 읽지 말고 자라고 내가 특별히 당부하더라고 전하라.”
청지기가 가서 보니 과연 신숙주는 글을 읽고 있었다. 청지기의 말을 듣고 나서야 신숙주는 잠자리에 들었다.
세조도 이때 신숙주의 집에 내시를 보내 글을 읽고 있는지 알아보게 했는데, 내시가 돌아와 “그가 자더라”고 전했다. 한명회는 임금이 신숙주의 동정을 살필 줄 알고 먼저 선수를 쳐서 곯리려고 한 것이다. 아무튼 이 정도로 열성이었으니 학문을 좋아하는 세종의 눈에 들 수밖에 없었다.
신숙주
변절의 대표적인 인물로 낙인 찍혔으나 유능한 학자, 정치가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민족과 민중적 시각에서 그를 본다면 꼭 변절자라고만 할 수 있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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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통한 외국어로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하다
신숙주는 3년 동안 세종의 뜻을 받들어 훈민정음 창제에 심혈을 기울였다.
최항(崔恒) · 박팽년(朴彭年) 그리고 성삼문 등과 함께 밤잠을 자지 않고 이 일에 매달렸다.
임금은 신숙주와 성삼문을 요동에 귀양 와 있는 중국의 음운학자 황찬(黃瓚)에게 보내
중국의 음운을 연구하게 했는데, 이때 이들은 시도때도 없이 요동길을 드나들었다.
마침내 1445년(세종 25)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
그러자 한문으로 글을 지으며 행세를 하던 벼슬아치와 유학자들이 들고일어나 크게 반대했다.
“몽골 · 서하(西夏) · 여진 · 일본 · 서번(西蕃)과 같이 중국 문자를 버리고
새 문자를 만드는 것은 오랑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이들의 어리석음을 타이르고 신숙주를 중심으로
한글을 활용하는 방안을 세우라고 했다. 신숙주는 《운회(韻會)》를
번역하고 이어 〈용비어천가〉 등 훈민정음을 사용한 글이나 번역을 도맡아 했다.
신숙주는 뛰어난 언어학자였다. 그는 설총이 사용했던 이두(吏讀)는 물론,
중국어 · 일본어 그리고 몽골어 · 여진어에 능통했고,
인도어와 아라비아 문자까지 터득하고 있었다. 그의 언어학 지식이
동원되지 않았다면 훈민정음의 창제는 지지부진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이런 기록이 전해진다.
공이 중국어 · 일본어 · 몽골어 · 여진어 등의 말에 능통해서 때로
통역을 빌리지 않고도 스스로 뜻을 통했다. 뒤에 공이 손수 모든
나라의 말을 번역했는데, 통역들이 이에 힘입어서 스승에게 일부러
배울 것이 없게 되었다.
- 《연려실기술》 〈세조조 고사본말〉
그는 한글 창제를 위해 언어학 지식을 동원한 것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외교를 위해서 여러 나라 말본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 등 다방면으로 능력을 펼쳤다.
훈민정음을 반포한 뒤, 세종은 신숙주를 일본으로 보냈다.
세종이 이종무를 시켜 쓰시마를 정벌한 뒤 일본과의 왕래가 끊어졌는데
, 그즈음 일본이 다시 끈끈한 외교관계를 맺기 위해 사신을 보내 달라고 간청한 것이다.
세종이 신숙주를 서장관(書狀官, 문서 또는 실무를 관장하는
사신의 한 자리)으로 뽑아 보낸 것은 특별한 배려 때문이었다.
일본은 우리의 문화를 늘 숭상했다. 그리하여 신숙주를 통해
우리의 학문과 문화를 일본에 과시하려고 한 것이다.
신숙주가 일본에 도착하자 가는 곳마다 일본의 문사와 승려들이 밀려왔다. 그들은 신숙주에게 시를 지어 달라거나 글씨를 써 달라고 하면서 학문을 물어 오기도 했다. 신숙주는 서슴없이 이에 응답하며 부탁을 들어주었다. 일본의 승려와 문사들은 이 청년 문사의 재주에 흠뻑 빠졌다. 그들은 신숙주를 스승으로 받들었다.
이때 신숙주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의 동정을 살폈다. 신숙주는 가는 곳마다 산천의 경계와 요해지(要害地)를 살펴 지도를 작성했고, 그들의 제도 · 풍속 그리고 대신들의 가족 계보와 각지 영주들이 강하고 약함을 기록했다.
그는 공식적인 사신행차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이 모든 내용을 적어 도면과 함께 나라에 바쳤다. 이것이 유명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이다. 이것은 최초로 일본의 사정을 적은 책으로, 일본의 사정을 알고 싶거나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일본안내서가 되었다.
해동제국기
1471년(성종 2)에 신숙주가 일본에 관한 사정을 정리하여 지도와 함께 묶어 편찬한 책. 조선시대에 대일본 외교상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었으며, 지금도 조선전기 한일관계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인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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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중국의 문장가 예겸(倪謙)이 우리나라에 오자, 신숙주와 성삼문을 보내 글을 겨루게 했다. 예겸은 신숙주 앞에서 오금을 펴지 못하고 돌아가 신숙주를 중국의 유명한 문인인 굴원(屈原)에 비겨 칭찬해 마지않았다.
세종은 이렇듯 신숙주를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 뒤 세종은 그를 집현전 학사의 우두머리인 직제학으로 삼았다. 그의 나이 불과 33세였다. 세종이 “신숙주는 큰일을 맡길 만한 자이다”라고 말한 것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신숙주에게 미처 큰일을 맡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 버렸다.
역사의 변혁기,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세종이 죽은 뒤에 신숙주에게는 새로운 시련이 몰려왔다. 새 왕 문종(文宗)은 어질기만 할 뿐 늘 병에 시달렸고 패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런 속에 신숙주는 또다시 중국에 가게 되었다.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중국에 갈 때에 신숙주가 서장관으로 뽑힌 것이다. 수양대군과 신숙주는 몇 달 동안 먼 이국 땅을 함께 넘나들며 그야말로 의기를 투합했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였는데 한 사람은 기개가 넘치는 왕자였고, 한 사람은 차분한 학자였다.
신숙주는 이때 분명히 보았다. 수양대군의 커다란 포부와 꺼질 줄 모르는 정열, 그리고 인재를 아낄 줄 아는 왕의 재목을 확인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뜻이 척척 맞았다. 이 만남은 한편으로는 두 청년의 꿈이 실현되는 계기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찬탈 · 변절의 역사와 비난을 받게 되는 갈림길이 되었다.
이 길에서 돌아와 신숙주는 죽음을 앞둔 문종으로부터 어린 왕자를 잘 돌봐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문종은 수양대군의 기개를 알고 신숙주 ·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 출신들에게 어린 왕을 부탁한 것이다.
수양대군은 평소 할아버지 태종의 행동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태종은 동생을 죽이고 왕이 되었고, 이어 맏아들이 아닌 셋째 왕자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만약 세종이 태종처럼 둘째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면 일은 아주 순조롭게 되었을 것이요, 문종이 큰할아버지 정종처럼 아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어도 왕위를 찬탈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병약했던 문종은 재위 2년 만에 죽음을 맞이했고, 어린 단종은 열세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삼촌이 어린 왕을 받들고 종묘사직을 지킨 경우는 역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왕자들 가운데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명망이 있었다. 특히 안평대군은 글씨와 그림에 능한 문사였기에 재상 김종서(金宗瑞) · 황보인(皇甫仁) 등이 그를 따랐다. 이에 맞서 수양대군은 권남 · 한명회 등을 끌어들였으나 이들은 별 영향력이 없는 인사였다.
한명회는 문사들보다 무사를 사귀라고 수양대군에게 권했고, 수양대군은 한명회의 꾀를 받아들여 ‘활쏘기’란 명목으로 매일 모화관 황학정 등에서 무사들과 어울려 활쏘기와 술잔치를 벌이며 사귀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거사일을 정했다.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을 받들고 역모를 꾀한다는 핑계로 김종서 · 황보인을 죽였고, 이어 대신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반대파를 제거했다. 이때 살릴 사람과 죽일 사람을 적은 ‘생살부’를 쥔 자는 한명회였다.
이 사건을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고 하는데, 이때 수양대군은 실권을 쥐고 영의정이 되었다. 온 조정은 금방 수양대군의 세력으로 채워졌다. 이때 신숙주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지만 수양대군과의 친분 탓인지 동부승지에 별다른 절차없이 임명되었다. 신숙주는 이를 받아들였고, 공신의 호칭이 내려질 때에도 얌전히 따랐다. 이와 달리 성삼문은 집현전을 잘 지켰다 하여 공신의 칭호를 주었지만 부끄러워하며 불만을 가졌고, 공신들이 돌아가며 잔치를 베풀 때에도 성삼문만은 잔치를 베풀지 않았다.
현실에 대처하는 두 사람의 태도는 이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절친한 동지의 관계가 점차 서로 죽이고 살리는 적의 관계로 치닫게 된 것이다. 수양대군의 세력이 온 조정을 덮어 누르자, 15세의 어린 단종은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겁을 먹고 끝내 수양대군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신숙주는 도승지로 있으면서 수양대군의 즉위를 순순히 받아들였고, 새 왕은 그를 곧 예문관 대제학으로 임명했다. 문사 · 학자로서 가장 영광된 자리를 얻은 것이다. 그러니 집현전 학사 출신들은 신숙주를, 복위를 꾀하고 의논하는 자리에 끼워 주지 않았다. 신숙주는 새 왕의 즉위를 중국에 알리는 주문사(奏聞使)의 소임을 띠고 북경에 가서 맡은 일을 완수했다. 이 공으로 그는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았다.
1456년(세조 2)에 들어 단종의 복위 운동이 비밀스럽게 익어 갔다. 새 왕 세조의 백부인 양녕대군마저도 여러 종친을 거느리고 임금 앞에 와서 조정의 평화를 위해 단종을 멀리 쫓아 버리라고 청했다. 세조는 짐짓 이를 허락하지 않고 단종이 거처하는 곳을 엄히 단속하라고만 했다.
이해 6월 중국의 사신이 와 창덕궁에서 단종과 함께 잔치를 베풀기로 했다. 복위 세력은 이 틈을 타 성승 · 유응부로 하여금 의식에 쓰는 검을 들고 칼춤을 추게 하면서 세조의 근신들을 모두 제거하기로 했다. 이때 각기 처치할 사람을 맡았는데, 성삼문은 “신숙주는 나의 평생 친구이지만 죄가 무거우니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여 신숙주도 처치의 대상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한명회가 이 잔치에 운검을 들이지 못하게 하여 그들 계획에 차질이 왔다. 그래서 거사를 뒷날로 미루자, 진짜 변절자인 김질이 모든 계획을 임금에게 고해바쳤다. 곧바로 성삼문 등이 임금 앞으로 끌려왔다.
성삼문은 신숙주가 임금 곁에 있는 것을 보고 꾸짖었다.
“그대는 옛날 원손(元孫)을 잘 돌봐 달라는 세종의 부탁을 잊었는가?”
이에 세조는 신숙주에게 뒤편으로 피하라고 일렀다. 거사에 가담한 사람은 모두 옥에 갇혔다. 이렇게 신숙주와 성삼문은 생사를 달리했고, 그 이름에 대한 평가 또한 상반되었던 것이다.
이날 신숙주가 집으로 돌아오니 그의 부인이 두어 자 되는 베를 가지고 대들보 밑에 앉아 있었다.
“왜 그러고 앉아 있소?”
“영감께서 성 학사와 형제같이 지냈는데 오늘 성 학사의 옥사가 있어서 영감께서도 그들과 함께 죽었을 줄 알고 자결하려 했습니다.”
이 말에 신숙주는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몰랐다고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그의 변절을 미워하는 자들이 날조한 것이다. 그의 부인은 이 사건이 있은 뒤 여러 해를 더 살다가 죽었다.
사육신이 죽은 뒤 신죽주도 단종과 관련된 일에 간여하게 되었다. “단종을 서울에 두지 말고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정승들이 연명(두 사람 이상의 이름을 한 곳에 이어서 씀)으로 건의할 때에 그도 동참한 것이다. 또 정승들과 함께 노산군(단종을 강등시킨 칭호)을 백성과 같은 서인(庶人)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 뒤 끝내 노산군이 죽음을 당하게 되자, 그 비난이 정인지와 신숙주에게 쏟아졌다. 그의 처신은 분명히 그 전과는 다른 것이었고, 또 정승의 반열에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세조의 신임을 받았지만 늘 외로워
노산군이 죽고 난 뒤 세조는 정치적 안정을 누렸다. 그 밑에서 신숙주는 좌의정 ·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그는 세조의 특별한 신임을 받았다. 세조를 왕으로 추대한 그 공으로 따지면 한명회 · 정인지 등이 으뜸이다. 그런데도 세조는 이들을 제쳐 두고 늘 신숙주를 ‘나의 위징(魏徵)’이라고 했다. 이 말은 당나라 태종의 문화통치에 헌신적으로 노력한 ‘위징’을 뜻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당 태종처럼 문화통치를 이루려면 신숙주가 꼭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이 말처럼 신숙주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세조의 문화사업에 바쳤다. 후세 왕의 귀감이 될 선대 왕의 말을 모은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했고, 세종이 국가의 기본질서를 적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교정 · 간행했으며, 사서 · 오경의 구결(口訣)을 새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을 발전 · 보급시키는 사업은 그의 손을 거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의 손으로 불경 등 많은 고전이 번역되었고, 그 간행을 대부분 그가 맡아 해냈다. 성삼문이 죽고 그도 죽었다면 이 일을 누가 해냈겠는가?
그는 정치가가 아니라 학자였다. 높은 벼슬을 누렸지만 정치적 수완을 별로 부리려 하지 않았고 다만 문화정책에 매달렸다. 이런 일을 할 때야말로 집현전 시절과 함께 그의 뜻이 펼쳐지는 시기였다. 세조는 신숙주를 늘 가까이 두고 다정한 친구처럼 지냈다. 활도 쏘고 시도 주고받으며 술잔과 함께 장난도 치는 사이였다.
함경도에 야인이 날뛸 때에 세조는 신숙주를 보내 정벌하게 했다. 그 까닭은 신숙주가 젊은 시절에 김종서의 종사관으로 그곳에 6진을 개척하고, 조정의 잘못된 정책을 바로잡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조가 왕이 된 뒤 신숙주가 그 곁을 떠난 딱 한 번의 사례였다.
신숙주가 하직할 때에 궁궐 담장에 덩굴박이 초라하게 매달려 있었다. 세조가 박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물 것 같소?”
“뻗어 가지도 못하는데 철이 늦었으니 결실이 안 되겠습니다.”
얼마 지나자 하나가 여물자, 세조가 박을 쪼개 놓고 시를 썼다.
경은 내 말을 비웃었지만
내 박은 여물었다오
쪼개 잔을 만들어
그지없는 정 보이겠소
세조는 신숙주에게 술을 내려 떠나는 길을 위로했고, 박잔의 모양대로 사기잔을 만들어 이 시를 새기고는 자신의 술잔으로 삼았다. 그는 이 술잔을 항상 곁에 두고 먼 길을 떠난 신숙주를 생각했다. 신숙주가 세조의 기대대로 야인들을 토벌하고 돌아오자, 세조는 그를 영의정으로 삼았다. 늙어 가는 나이에 이들의 정은 더욱 두터웠다. 세조는 틈만 나면 신숙주를 불러 농담을 일삼았다.
하루는 세조가 영의정 신숙주와 이제 막 우의정에 임명된 구치관을 불러들였다. 새로 임명했을 때에 세조는 두 정승을 들라고 했다.
세조 : 내가 오늘 경들에게 물을 것이 있는데 대답을 잘못하면 벌주를 내리겠소. 신정승!
신숙주 : 예.
세조 : 내가 새로 된 정승인 신정승(新政丞)을 불렀는데 왜 신정승(申政丞)이 대답하오?
곧 벌주가 내렸다.
세조 : 구정승!
구치관 : 예.
세조 : 내가 묵은 정승인 구정승(舊政丞)을 불렀는데 왜 구정승(具政丞)이 대답하오?
세조는 각기 대답에 따라 신(新) · 구(舊)라 우기기도 하고, 또 신(申) · 구(具)라 우기기도 하며 연이어 벌주를 먹였다. 뒤에 가서는 불러도 둘 다 대답이 없자 “임금이 부르는데 신하가 대답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네” 하고 또 벌주를 주어 끝내 세 사람은 크게 취했다.
이토록 임금과 신하가 허물없이 어우러지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신숙주는 세조가 죽고 난 뒤 예종 · 성종 때에도 새 임금들을 도와 많은 일을 했다. 《성종실록》을 쓴 사관은 그가 죽은 후 그의 업적을 칭송하고 나서, 그의 단점을 “세조를 섬기면서 받들어 따르기에 힘썼다”고 지적했다. 이 말은 사육신과 단종의 문제를 두고 암시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임금에게 맞서 강하게 잘못을 따지는 성품이 아니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는 도통 사람을 죽이거나 권모술수를 부리는 인물이 못 되었다. 그가 사육신에 끼지 않은 것도 어쩌면 이런 성품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기성찰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신숙주는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그의 인품을 나타내는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그가 첫 벼슬길에 나왔을 때, 서리가 그를 꺼려서 벼슬아치의 임명 사령서인 직첩을 전해 주지 않아 맡은 일을 돌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사헌부에서 이를 알고 서리를 탄핵했다. 이에 서리가 쫓겨날 것을 염려하여 신숙주가 거짓 자백을 했다.
서리가 직첩을 전해 주었지만 내가 스스로 나가지 않았다
- 《성종실록》 6년
결국 서리는 벌을 모면했고 신숙주는 파직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덕망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가 일본에 갔을 때에 일본이 여자를 바쳐 잠시 데리고 살았다. 그런데 그 왜녀가 임신을 해서 차마 버리고 올 수 없었기에 데리고 배에 올랐다. 쓰시마로 오는 길에 풍랑이 심하자, 배에 탄 사람들이 계집이 배에 타서 용왕이 노해 풍랑이 인다며 왜녀를 바다에 빠뜨리려 했다. 그러자 신숙주가 풍랑이 곧 그칠 것이라며 한사코 말려서 구해냈다. 총애하는 여자가 아니지만 인명을 아끼는 마음이 컸던 것이다.
단종이 죽을 때에 단종 복위를 꾀했던 연루자들의 가족을 모두 종으로 삼아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단종의 비인 송씨도 종이 되었는데 신숙주는 송씨를 자기 집에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허락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의 뜻은 딴 데 있었다. 송씨를 잘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늘 종들을 따뜻이 대해 주었는데 종들이 신공(身貢, 종이 상전집에서 나와 살 때 몸값으로 바치는 물품 또는 돈)을 밀리거나 내지 않아도 내버려 두었다. 어려운 친척에게는 늘 먹을 것을 보내 주고 잠잘 곳을 마련해 주었다.
김시습과의 일화도 전해 온다. 김시습은 그가 어릴 적부터 친분을 나눈 후배인데 18세의 나이가 차이 났다. 김시습은 서울에 와도 그를 찾지 않았다. 어느 날 김시습이 서울에 와 머물자, 그 집 주인에게 “김시습에게 술을 많이 먹이라”고 당부했다. 김시습이 술에 곯아떨어지자 가마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김시습이 술이 깨어 신숙주 집인 것을 알고 나가려 하자, 손을 잡고 “어째서 말 한마디 않는가?” 하고 안타까워했다. 김시습이 소매를 뿌리치고 말없이 가자, 그는 조용하게 김시습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명예를 잃었지만 문화업적은 남기다
이 대목에서 그의 문학을 통해 쌓은 업적도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의 후배인 임원준은 그를 이렇게 평가하는 글을 남겼다.
문장에 능숙한 자가 반드시 정치를 잘하는 것도 아니요, 정치를 잘하는 자는 본시 문장에 능숙하지 못하나니 두 가지 재능을 겸하기는 더욱 어려운데 신 문충공(申文忠公, 신숙주의 시호)께서는 타고난 바탕이 뛰어나게 우수하고 덕스러운 인품이 일찍이 이루어져 옛 전적을 열심히 공부하고 문필의 세계에 한가히 노닐어서······
- 《보한재집》 서문
이 평가는 신숙주가 문장에 능숙한 재사로 정치적 업적을 남겼다는 뜻이다. 또 그보다 훨씬 후대의 문사인 김종직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가 문장을 지으면 모두 인의와 충신에 근본을 두었고 여유 있고 화창하며 뛰어나고 넓어서 번거롭게 먹줄을 대서 깎고 다듬지 않아도 저절로 법도가 있었다. 비록 붓을 놀려 희롱 삼아 갑작스레 지어도 실로 덕 있는 사람의 말씀이 되었다.
- 《보한재집》
그는 중국과 일본에 가서 시와 노래를 주고받는 수창외교(酬唱外交)를 맡았으며 문장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글을 지을 적에 현학을 자랑하지 않았으며 상투적인 공자왈 맹자왈을 읊조리지 않았다. 또 시에서는 용사(用事, 한시를 지을 때, 옛날의 뛰어난 글에서 표현을 이끌어 쓰는 일)를 거의 쓰지 않고 표현에만 충실했다. 그러므로 난해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김시습처럼 농민의 고통을 담는 사회시를 쓰지도 않았다. 순수시에 열중했다는 뜻이다. 그는 남원 광한루에 올라 다음과 같은 시구를 남겼다.
뜬 구름 같은 부귀 공명 따질 것이 못되니
임천(林泉)의 흥취 아직 버리지 못하겠노라
인생에 천명 있음 이제야 믿겠노니
공명은 물리치기도 어렵고 구하기도 어려워
그는 부귀 영화의 부질없음을 담담하게 읊조리고 있다. 또 이렇게 읊기도 했다.
세상 속인 공명 만족한 줄 안 지 오래인데
가을바람에 또 고향 생각 나누나.
문사의 기질과 인생관이 잘 나타나고 있다. 그의 이런 시 경향은 많은 후배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한편 그는 만년에 명예와 이익을 멀리하는 결백한 선비의 길을 가고자 했다. 그렇게 한가한 삶을 누리며 문학에 정진하겠다는 뜻을 자주 표방했다. 그래서 그의 아호를 보한재(保閑齋, 한가롭게 글 읽는 곳)라고 지었다. 그는 고향 나주로 가서 살고 싶어했다.
역사의 흐름에 떠밀린 인생
아무튼 그는 여느 벼슬아치와는 달리 검소한 생활을 했고, 결코 재물을 탐하지 않았다. 권력을 잡으면 부가 따르는 법이요, 더욱 부당하게 권력을 잡으려는 동기는 재산을 탐한 데에서 나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는 부를 탐하지 않았고 공평하게 사람을 썼다는 칭송을 들었다.
그는 죽을 때 자손들에게 장례를 검소하게 하라고 당부했고 자신의 무덤에 책만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이렇게 인간적인 사람이었고 벼슬아치로서 결함을 지닌 인물이 아니었다. 나약할지언정 포악하지 않았으며, 현실적이었을망정 술수를 부리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 결함으로 지적되는 것은 물론 절개를 지키지 못한 것이었고, 이것 또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면서 곰곰이 따져 볼 여지도 없이 윤색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잘 쉬는 나물을 숙주나물이라 했다. 여기의 숙주는 신숙주의 이름을 뜻한다고 한다.
하지만 한 인간의 평가는 전체를 보아야지 한 국면만 보아서는 제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절의란 누구를 위한 것이냐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진다. 민족과 국가 그리고 한 사회를 위한 것일 때 애국자도 되고 위인도 된다. 그러나 한 개인을 위한 것일 때에는 그 이해의 각도가 달라질 필요도 있겠다.
신숙주는 목숨을 부지하여 편안하게 산 대신에 명예를 잃었다. 성삼문은 한 목숨을 바친 대신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여기서 그냥 넘길 수 없는 것은 성삼문은 그 이상 이룬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사육신의 문제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가치관의 혼란만을 가져온다고 할 수 있겠다.
신숙주의 묘
조선 초기의 대학자이며 문신이었던 보한재 신숙주의 묘이다.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뛰어난 학식과 글재주로 모두 6명의 임금을 섬기면서 수많은 편찬사업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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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는 분명히 우리 역사에 큰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신숙주는 역사의 흐름에 떠밀려 갔을 뿐, 그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는 않았다. 또 그는 비난받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이었고 깨끗한 벼슬아치였다. 그의 행적은 보통 사람이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을 정도의 것이었지만, 그가 뛰어난 학자요, 세종 · 문종의 총애를 받았던 신하였기에 따르는 유명세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생육신처럼 초야에 묻혀 지냈더라면 역사에 업적을 남길 수 있었겠는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사람을 많이 죽인 세조 밑에서 신하 노릇을 했다는 것만으로 신숙주를 비난하기만 한다면 온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살아남았기에 우리 역사 속에 두 거인이 그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이들은 바로 독립투사인 예관(觀) 신규식(申圭植)과 민족사가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이다. 신채호는 근대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온 힘을 쏟다가 일제 경찰에 잡혀 옥사했다. 혹시 할아버지의 절의를 대신 지키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