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신우(辛禑) 때에 왜구(倭寇)가 함양(咸陽)을 도륙(屠戮)하고 팔량령(八良嶺)을 넘어 남원산성(南原山城)을 치고는 물러나 운봉현(雲峯縣)을 불질렀다. 인월역(引月驛)에 주둔하고서 장차 북상(北上)하겠다고 소리치매 온 나라가 소란스러워졌다. 태조(太祖.이성계)가 변안렬(邊安烈)과 더불어 남원(南原)에 이르니, 배극렴(裵克廉) 등이 길에 나와 배알하고 기쁘고 좋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태조가 이른 아침을 기하여 적과 싸우려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적은 험한 곳에 의지하고 있으니,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려 싸우는 것만 못할 것이라.” 하였다. 태조가 이르기를, “나라를 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니, 적을 만나지 못할까 두려워 하는 것인데 이제 적을 보고서도 치지 아니한다면 되겠느냐.” 하고, 밝은 아침에 군사들에게 맹세하고 동으로 운봉(雲峯)을 넘어 적과 수십 리를 두고 대치하게 되었다. 황산(荒山.인월과 운봉사이에 있는 해발고도 699m 산) 서북쪽에 이르러 정산(鼎山.황산의 동쪽 1km지점)의 봉우리에 오르는데, 길 오른편에 험한 길이 있었다. 태조가 이미 험지에 들었는데, 적이 날카로운 창을 가지고 튀어 나왔다. 태조가 50여 발을 쏘아 적의 면상(面上)에 적중시키니, 활을 당기기만 하면 죽지 않는 놈이 없었다. 적이 험한 산에 의지하고 스스로 굳게 지키매, 태조는 사졸(士卒)을 지휘하여 요해지(要害地)에 나누어 의거하니, 적은 죽을 힘을 다하여 대항하였다. 태조는 다시 소라를 불어 군대를 정돈하고 개미처럼 붙어 올라가니, 적은 태조를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태조가 그 자리에서 여덟 놈의 적을 죽여 없애니 적이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태조가 하늘의 해를 가리켜 맹세하고 좌우에게 이르기를, “겁이 나는 자는 물러가라. 나는 적에게 죽을 터이다.” 하니, 장사들이 감동되어 용기백배(勇氣百倍)하였다. 적장 중에 나이 겨우 십오륙 세 되고 이름을 아지발도(阿只拔都)라 하는 자가 있었는데, 태조는 그가 용맹스럽고 날랜 것을 아껴서 사로잡으려고 하니, 이두란(李豆蘭)은 말하기를, “죽이지 아니하면 반드시 사람을 상해할 것이라.” 하였다. 태조가 아지발도의 투구를 쏘아 맞히니 투구가 떨어졌고, 이에 두란이 재빨리 사살하니, 이에 적은 기세가 꺾였다. 태조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여 크게 격파하니, 시냇물이 붉은 핏물이 되었다. 처음에 적의 수는 아군의 10배나 되었는데 겨우 70여 명이 지리산으로 도망하였다. 태조가 개선하여 돌아오매 판삼사(判三司) 최영(崔瑩)은 백관을 인솔하고 산대(山臺) 잡희(雜戱)를 배설(排設)하여 천수사(天壽寺) 앞에서 맞이하였다. 최영은 태조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공이여, 공이여, 삼한(三韓)을 다시 살림이 이번 이 승전에 있으니, 공이 아니었으면 나라가 어찌 되었으리오.” 하였다. 이색(李穡)이 시를 지어 축하하기를, “적을 소멸함이 참으로 썩은 나무 꺾기와 같이 하였으니, 삼한의 즐거운 기운이 여러 공(公)에게 속했도다. 충성은 백일(白日)에 빛나니, 하늘이 안개를 거두었고 위엄이 동방에 떨쳤으니, 바다에 파도가 잠잠하누나. 나가 맞이하는 빛나는 잔치에는 무열(武烈)을 노래하고 능연(凌煙) 고각(高閣)에는 영웅의 얼굴을 그리리라. 병든 나머지 교외에 나가 맞이하지는 못하니, 앉아서 새로운 시를 읊어 높은 공(功)을 칭송하네.” 하였다. 윤소종(尹紹宗)의 시에, “왜구가 발동한 지 30년, 인월(引月)의 일전(一戰)에서 한단(邯鄲.꿈속의 일)의 싸움처럼 전멸을 시켰네. 장군은 급히 창 들고 철마(鐵馬)에 뛰어 오르니, 황금 갑옷이 석양 빛에 반짝이네. 기운은 산을 뽑을 만하고 담력은 말[斗]만큼이나 크도다. 나라에 바친 일신은 기러기 털처럼 가볍게 여기니, 구구한 관악(管樂)을 어찌 족히 비기리오. 복건으로 집에 돌아와 주자(朱子)와 정자(程子)를 스승하리, 주자 정자의 학문으로 이윤(伊尹)과 주공(周公) 되어 만세에 태평을 열어주소.” 하였다.
▼ 붉은 원은 전투가 벌어졌던 황산이고, 노란 원은 황산대첩비지(址)를 나타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