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경환의 {사상의 꽃들} 15에서
과분過分
이상국
알지도 못하는데
커피콩을 외상으로 주는 동네 가게
어떻게 시 한 편 있는 줄 알고 용케 도착한 청탁서
괜히 마음이 언짢은 날 내리는 비
연립주택 화단의 애 머리통만 한 수국
점심은 먹고 왔는지
남해에서 하루 만에 달려온 택배
어디선가 사람을 낳는 사람들이 있고
마음 깊이 감춰둔 사람이 있다는 것
아무리 두꺼운 어둠을 만나더라도
어떡해서든지 오고야 마는 아침아
부모가 있다는 것
나무들이 있다는 것
통장에 찍힌 손톱만 한 원고료
해지면 기다리는 식구들
‘과분過分’이란 ‘분수에 맞지 않게 넘치는 데가 있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치와 허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지나치면 모자람만도 못하다라는 말이 있듯이, 자기 자신의 처지와 경제적 능력에 맞지 않게 행동을 하게 되면 반드시 혹독한 댓가를 치루게 되어 있다. 사치는 쓸데없는 낭비에 지나지 않으며, 허영은 대부분이 자기 자신의 양심을 짓밟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과분하다’는 대단히 만족하다라는 뜻으로 읽힐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그의 처지와 능력에 반하여, 너무나도 좋은 사회적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는 그에게 과분한 여자지’라는 말은 그가 아내를 아주 잘 얻었다는 것을 뜻하고, ‘장관직은 그에게는 과분한 자리지’라는 말은 그가 그의 능력 이상으로 출세를 했다는 것을 뜻하고, ‘그의 노벨상 수상은 참으로 그 작품에 비해 과분한 것이지’라는 말은 그가 그의 업적에 비해 하늘의 은총과도 같은 행운을 얻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과분하다’의 긍정적 의미는 ‘크게 만족한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지만, 이상국 시인의 [과분過分]은 모든 꿈과 욕망을 다 비우고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일상생활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자그만 기쁨과 행운 같은 것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잘 “알지도 못하는데/ 커피콩을 외상으로 주는 동네 가게”도 있고, “어떻게 시 한 편 있는 줄 알고 용케 도착한 청탁서”도 있다. 공연히 마음이 언짢고 우울한 날 내 마음처럼 내려주는 비도 있고, 너무나도 뜻밖의 행운처럼 “연립주택의 화단”에서 “애 머리통만 한 수국”을 볼 때도 있다. “점심은 먹고 왔는지/ 남해에서 하루 만에 달려온 택배”를 받을 때도 있고, “아무리 두꺼운 어둠을 만나더라도/ 어떡해서든지 오고야 마는 아침”을 만날 때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도 가까이 있고, 미워하는 사람도 가까이 있다. 행복도 가까이 있고, 불행도 가까이 있다. 이 사랑과 미움 사이에서, 혹은 이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어떻게 자기 자신의 행복을 연주하고 노래를 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주체자의 자유와 선택의 문제라고 할 수가 있다. 그대 인생의 주인공은 그대이듯이, 그대가 이상국 시인의 [과분]에서처럼 그대의 행복을 연주하면 되는 것이다. 어디선가 아이를 낳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즐겁고 기쁜 일이고, 마음 깊이 감춰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즐겁고 기쁜 일이다. 부모님이 살아있다는 것도 즐겁고 기쁜 일이고, 나무들이 있다는 것도 즐겁고 기쁜 일이다. 통장에 찍힌 손톱만 한 원고료가 있다는 것도 즐겁고 기쁜 일이고, 해가 지면 기다리는 식구들이 있다는 것도 즐겁고 기쁜 일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 것이고, 모든 것이 가능한 이 세계가 가장 좋은 세계인 것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잿더미 속에서도 풀과 나무들이 살아났고,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활화산 근처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 허리케인과 쓰나미와도 같은 재앙이 예고되어 있는데도 사람이 살고 있고, 오 미터, 십 미터의 눈폭탄 속의 오지마을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 모든 삶은 대부분의 불행한 자들의 삶에 비하면 과분한 것이며, 우리 인간들의 불행은 이 [과분]한 삶을 향유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행복은 살아 있다는 것이고, 진짜 불행이 찾아오면 우리 인간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지몽매와 불행은 어리석음의 젖형제이며, 어리석음을 퇴치하면 우리 인간들의 불행도 소멸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