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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이중섭 李仲燮
분카 가쿠잉 재학 시절
생일 : 1916년 4월 10일
데뷔 : 미술창작 작가협회전 (1941년)
학력 :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매력 : 자유분방하면서 격렬한 화풍
출생 : 평남 평원군 송천리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 송천리에서
부농 이희주와 안악 이씨 아들로 태어났다.
형은 12년 위, 누나는 6년위의 귀한 막내였으나
1923년 5세무렵 부친이 작고 했다.
1925년 마을 서당에 다니다가 평양의 외가로 가서
종로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이중섭은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고,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사과를 먹기 전에 먼저 그림을 그리고 먹었다고 한다.
그림을 그려 물의를 일으키기도했다.
1935년 졸업 후 곧 일본 동경으로 가서 테이코쿠 미술학교에 입학.
연말에 다쳐 쉬면서 프랑스 어 공부에 몰두했다.
1936년 21세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인 분카 가쿠엔으로 옮겨 입학했는데,
김병기와 오산의 선배 문학수 그리고 유영국이 상급생이었다.
1940 환상적인 바다
1938년 본인 화가들이 창립한 단체 지유미즈츠가쿄카이(自由美術家協會)의
2번째 공모전 (이하 지유텐)에 응모하여 첫 출품에 협회상을 받았으며,
동시에 평지들의 대호평을 획득했다.
이무렵 미술학교 후배인 일본 여성 마사코를 알게
되어 사귀기 시작했다.
1940년졸업. 도쿄에 머물면서 제작에 몰두. 두해전에 이어서 토오쿄오와
경성에서 열린 4번째 지유텐에 <서있는 소>, <망월>, < 소의머리>,
<산의 풍경>을 내어 커다란 찬사를 받다. 휴가로 원산에 있으면서
연말부터 마사코에게 그림만으로 된 엽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소와 소녀 * 1941년, 제5회 지유텐 출품작
징병을 피하기 위해 고아원 등에서 일하기도 하면서, 그림은 거의
못 그리게 되었다. 1945년 4월 마사코가 천신만고 끝에 홀로 현해탄을
건너 원산으로 와서 결혼하였다.
아내의 이름을 이남덕으로 바꾸고 분가하여 따로 집을 마련해 살다가
소련의 대일 폭격을 피해 다시 이사했는데, 여기서 8. 15를 맞이하였다.
세 사람 * 18.2×28cm * 종이에 연필 * 1942∼5년
1946년, 31세때 원산사범학교의 미술교사가 되었으나 작업 에 전념하기
위해 사직했다. 첫 아들이 태어났으나 곧 죽음.
연말에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공동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를 그렸는데.
詩 내 용과 더불어 표지 그림에 대해 북조선문학가동맹의 규탄을 받아
문초 받았다. 이후 부인이 일본인 이라고 하여 친일파로 분류된 점과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수 없다고 하면서
자주 술 마시고 주정을 부리기도 했다고 한다.
1947년 32세 6월 친구인 오장환의 시집 나사는 곳 의 속표지 그림.
8월 평양에서 열린 8. 15 기념 전에
원산시외인 송도원으로 이사. 소를 하루 내내 관찰하다가
가장인 형이 행방불명되고
10월에는 집이 폭격으로 없어졌다.
12월 초 바뀐 정세에 따라 부인, 두아들, 조카 영진을 데리고
이중섭이 기거했다는 서귀포의 초가 - 이 작은 집의 맨 끝 방에 머물렀다
1951년 36세 초에 가족과 부산을 떠나 제주도로 왔다.
여러 날 걸어서 서귀포에 도착. 서귀포에서 만난 주민이 방을 내주어서
안착하게 된다.피난민에게 주는 배급과 고구마로 연명하는 한편,
게를 잡아 반찬으로 했다.
이중섭은 노래를 잘 불렀다. 테너 목소리로 쩌렁쩌렁 불렀다는 것이
친구 김병기의 기억이다. 그가 잘 부르던 노래는 둘인데, 독일민요
소나무’와 이광수 작시 ‘낙화암’이었다.
얼굴을 맞댄 가족. 1953.
1955년 40세 1월 18일부터 서울 미도파 갤러리에서 개인전 개최, 유화와
은박지그림을 비롯한 소묘 등으로 전시는 호평이었으나, 은지그림이
춘화라고하여 철거 당하고, 그림 값을 떼이기도 하고, 저녁마다
술로 지내다 빈털털이가 되어 자학과 외로움으로 기진맥진에 빠졌다.
1955년 초 서울에 이어 5월 대구에서도 개인전을 열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해 보려던 의도는 산산이 부서진다. 밀항을 해서라도 가족이 있는
일본으로 가겠다는 계획도 실패로 돌아가자 자포자기에 빠져 그토록 열심히던
그림도 그리지 않고 밥도 먹지 않겠다고 하자, 정신 이상이라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이에 전람회를 열기 위해 대구에 머물 당시 친구에게 자신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며 그린 그림이다.
사실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이 이중섭만큼 많은 화가도 드물 정도다.
가족을 그린 그림에는 꼭 자신이 등장한다.
하지만 자기만을 그린 것은 한 점도 없다고 여겨졌는데, 이 작품이
발굴되었다.
1956년 41세,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다시 음식을 거절하기 시작.
청량리뇌병원에 입원. 정신이상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 퇴원했으나
곧 다시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입원했다.
적십자병원에서 그린 마지막 그림
미국 뉴욕 모던 아트 뮤지엄에 은지화 3점이 소장되기로 결정되었으나,
9월 6일 홀로 숨을 거두었다.
3일 뒤 친지들이 이를 알고 장례를 치루고
망우리 공동묘지에 그를 묻었다.
“이중섭 화백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구상 시인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했다”,
“편지에는 화가가 가톨릭에 귀의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2004년 8월 18일 뉴스가 있었다.
화가는 편지에서
“제(第)는 여러분의 두터운 사랑에 쌓여 정성껏 맑게 바로
참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구형의 지도를 구해 가톨릭 교회에 나가 弟의 모든 잘못을 씻고
예수 그리스도님의 성경을 배워 깨끗한 새 사람이 되고 싶다”고 고백했다.
화가가 작고하기 직전인 1955년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는
200자 원고지 한장 분량으로,
뒷면에 ’具常兄前 李仲燮製’(구상형전 이중섭제)라고 적혀 있다.
구상시인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이 화백은
시인의 인품을 높이 사는 의미에서,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그를 ’형’으로 높여 불렀던 것으로 알려졌다.
-출처 : 조선일보/2004.8.18. 서울=연합뉴스)
1960년 부산 로타리다방에서 최초의 유작전이 열리다.
1986년 30주기를 기려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회고전이 열리고 화집이 발행됨.
1996년 제주도 서귀포시에 살던 집을 복원하여 기념관으로 개관하다.
1999년 1월 문화관광부가 이달의 문화인물로 이중섭을 선정하다.
이를 기념하여 이중섭 특별전이 서울 갤러리 현대에서 개최되다
1955년 전투수기 "저격능선"의 표지그림
1955, 성당 부근
1955, 노란 달과 가족
1955, 나무 위의 새를 바라보는 예수
1951, 물고기가 그려진 소
1942, 얼굴
1942, 소와 어린이
1942, 소와 남자
1942, 소를 든 사람
1942, 새해 인사
1942, 사람을 치는 소
1942-45, 세 사람
1941, 활쏘는 남자
1941, 해를 불평하는 사람
1941 파도타기
1941, 토끼풀 꽃이 있는 바닷가
1941, 토끼풀
1941, 추상
1941, 짐승을 부리는 사람들
1941, 저울질하는 사람
1941, 연못이 있는 풍경
1941, 연꽃이 핀 물가에서 노는 세 아이
1941, 연꽃밭의 새와 소년
1941, 연꽃 아래 헤엄치는 여자
1941,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
1941, 야수를 탄 여자
1941, 소와 여인
1941, 소묘
1941, 서커스
1941, 사다리를 타는 남자
1941, 발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여자
1941, 바닷가
1941, 물놀이하는 아이들
서귀포의 환상
소머리
아내에게 보낸 편지
얼굴을 맞댄 가족을 그리는 이중섭
연필스케치 1
연필스케치2
연필스케치3
1940, 작품
1940, 서있는 소
1940, 소와 여인
1940, 반우반어
옛 이야기
월간 "문학예술"에 그린 삽화
월간 "문학예술"에 그린 삽화
은박지 그림
은박지 그림(1952)
1954, 푸른 언덕
1954, 투계
1954, 통영 풍경
1954, 통영 수원지
1954, 충열사 풍경
1954, 신문보는 사람들
1954, 복사꽃이 핀 마을
1954,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
1954, 낙원 2
1954, 낙원
1954, 가족과 어머니
1956, 나무위의 노란 새
1953, 판잣집 화실
1953, 봉황(부부)
1953, 봄의 어린이
1953, 범일동 풍경
1953, 물고기와 노는 세 아이
1953, 문현동 풍경
1953, 떠받으려는 소
1953, 다섯 아이와 끈
1953, 노을 앞에서 울부짖는 소
1955, 사랑 1
1953-55, 사랑 2
월간 "문학예술"에 그린 삽화
1952, 월간 "문학예술"에 그린 삽화
1942, 여인
1942-45, 소년
세사람(1942-1945)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
길 떠나는 가족
달과 까마귀
못가에서 노는 세 어린이
물고기와 노는 두 아이
소와 새와 개
아버지와 두 아들
광복동(光復洞)에서 만난 이중섭(李仲燮)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東京)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욱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는 또
남포동(南浦洞) 어느 찻집에서
이중섭(李仲燮)을 보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
동경(東京)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다고,
이중섭(李仲燮) 2
김춘수
아내는 두 번이나
마굿간에서 아이를 낳고
지금 아내의 모발(毛髮)은 구름 위에 있다.
봄은 가고
바람은 평양(平壤)에서도 동경(東京)에서도
불어 오지 않는다.
바람은 울면서 지금
서귀포(西歸浦)의 남쪽을 불고 있다.
서귀포(西歸浦)의 남쪽
아내가 두고 간 바다,
게 한 마리 눈물 흘리며, 마굿간에서 난
두 아이를 달래고 있다.
이중섭(李仲燮) 3
김춘수
바람아 불어라,
서귀포(西歸浦)에는 바다가 없다.
남쪽으로 쓸리는
끝없는 갈대밭과 강아지풀과
바람아 네가 있을 뿐
서귀포(西歸浦)에는 바다가 없다.
아내가 두고 간
부러진 두 팔과 멍든 발톱과
바람아 네가 있을 뿐
가도 가도 서귀포(西歸浦)에는
바다가 없다.
바람아 불어라,
김춘수가 이중섭을 대상으로 지은 시는 총 9개 이다
김춘수가 이중섭에 대한 시로 그토록 말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이는 이중섭이라는 신화적 인물의 삶을 통해서만 설명이 가능하다.
가난과 절대고독의 상황 속에서,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궁핍한 세계에 대한 절망감 속에서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화가 이중섭의 삶은
사실 시인 김춘수가 갈망했던 삶의 이상이라 말할 수 있다.
이중섭의 절망과 궁핍, 비극적 삶이 김춘수에게는
신화와 예술처럼 보여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김춘수가 갈망했던 것은
그러한 비극적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이중섭의 모습이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이중섭이 살다간 세계(혹은 그가 바라본 이중섭의 세계)는
궁핍한 시대가 아니라, 궁핍한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미적인 세계였던 것이다.
이러한 이중섭의 존재는 <이중섭> 연작시에서
김춘수 시의 문학적 주체로 거듭나고 있다.
첫댓글 이중섭은 한국의 피카소! 그의 작품을 한 곳에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는 행운이다. 명작은 고난 속에서 피어나는가? 그의 삶이 애잔하다.
짧은 나이에 작고한 화가의 일대기가 그려 지네요.
일본인 아내는 아직도 살아있는데. . 안됐어요.
이중섭 100주년에 이남덕 여사님 다녀 가셨다지요.~?^^
10년의 짧은 부부생활의 애정을 안고 60년간 버텨오셨겠지요.
참 애닯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