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회화(203) - 당대 서예(2)
남북조 시대에는 북비남첩이라 하여 서법 유파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북비가 갑골문 - 금문으로 이어지는 비뚤비뜰한 글씨를 전서로 통해서 정연하게 다듬었다. 이 전통이 북비에 이어져서 남아있다. 남첩은 기교상으로 아주 정밀하고, 치밀하다. 문인 사대부가 좋아 하였으므로 서법이 아주 유창하여 행, 초로 대표하였다.
당의 해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남첩이 모태이기는 하나 북비의 서체와 격식을 본받지 않을 수 없었다. 수의 서체에는 두 서체가 합쳐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용장사비와 동부인묘지명(603)은 해서풍의 자체와 북비의 풍격이 섞여 있다. 남첩과 북비가 혼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비는 구양순에게 영향을 주었다.
용장사 비는 586년에 하북성 보정현의 용장사에 세웠다. 대체로 왕희지 필법을 계승하고 있다. 사람들은 지영선사(왕희지의 후손이다.)가 쓴 글이 아닌가 한다. 당의 해서와 용필에서 일치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曹植廟碑는 篆-隸의 서체가 많아 거칠면서도 강하면서도 힘찬 느낌을 주는 북비의 풍격이다.
중국 서예사에서 당태종의 위치는 대단히 의미가 있다. (당태종 이세민은 서예도 잘 했다>) 왕희지를 병적으로 좋아하였따 한다. 직접 ‘왕희지전’을 지었고, 왕희지 진적을 수집하였으며, 모본도 만들었다. 왕희지의 작품을 감정하기 위해서 전문가를 임명하였다. 우세남, 저수량이 그들이다.
남아 있는 왕희지의 글은 硬黃勾本(당태종이 왕희지의 모본을 만들 때 사용한 종이는 궁중에서 사용하는 종이이다. 종이는 먹이 퍼지므로 硬黃을 발라서 피지 않게 하여 만든 종이에 쓴 모본이다. 경황지에 雙勾法(필획의 윤곽선을 먼저 선으로 표시하고 나서 먹칠을 한다.)으로 만들었다.
첫댓글 서예사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