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大雪
진정 오랜만에 대설이었다. 끝이 언제가 될지도 짐작 못하게 눈은 내리고 있었다. 강릉지방 사람들에게 눈은 전설이다.
눈에 얽힌 허풍 섞인 전설같은 이야기는 강릉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들었을 터이고 또 자기 자신도 누군가에게 자신만의 경험담에다 약간의 허풍을 실어서 이야기 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강릉에서 눈은 곧 전설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과장된 이야기라는 것을 다 알지만 누구도 그것이 허풍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 허풍은 우리가 만들어 온 역사이고 삶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구간이 시원스레 뻥 뚫려서 왠만한 눈에는 막히는 일이 없지만, 불과 몇년전만 해도 대설 때문에 겨울이면 툭하면 길이 막혔다.
그래서 실제로 대관령 고갯길을 걸어서 내려 온 사람도 주위에 많다. 대관령이야 워낙 유명한 곳이라서 외지 사람들도 뉴스를 통해서 그런 일들이 있는 줄은 알지만, 외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작은 고개에 얽힌 눈에 대한 이야기는 진짜 전설만큼이나 다양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많다.
사람들은 이야기 한다.
“와! 그때는 눈이 처마 밑까지 내려서 아침에 굴을 파고 화장실에 갔다니까.”
그 말에 질세라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지붕을 덮어서 아침에 일어나고도 아침인 줄도 몰랐다니까. 몇일을 눈속에 갖혀 있다가 쌀이 떨어져 굶었다니까.”
사람들은 전설보다 더 큰 전설에 호기심을 보이고 그래서 허풍을 쳐야하고, 언젠가 가장 많이 내린 해의 눈의 전설이 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올림픽에서 100 미터 육상 기록이 깨어지기를 기원하는 마음과 비슷할 것이다.
눈 때문에 생활에 수 없이 고충을 겪어 온 강릉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갖는 것은 아이러니 하겠지만, 그렇게 매년마다 수없이 눈에 당하고 살아왔지만, 그 놈의 못난 정이 들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강릉 사람에게 눈은 삶이 되었고, 나아가서 허풍 섞인 전설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제 새벽 부터 내린 눈이 오후가 되자 오십 센치 가까이 쌓였다. 문득 집안에 가만히 있으면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 눈으로 전설을 확인하고 싶었다.
어쩌면 과거 전설의 기록을 깨어버릴지 모를 이번 눈을 내 눈으로 현장에서 느끼고 싶었다. 그래야 나도 그 전설을 보았노라고 사람들에게 허풍이라도 칠 것이 아니겠는가.
집안 창문에서 바라본 전설과 생생하게 현장에서 몸으로 느낀 전설은 질적으로 다를터이니까. 나중에 사람들에게 난 이렇게라도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전설같이 눈 많이 내리던 해에 나는 체인도 치지 않고 차를 끌고 나갔다.
아무도 없는 밤거리를 나는 겁도 없이 곡예운전을 했다. 설사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해도 나는 그 전설을 나중에 누군가에게 꼭 말 할 것이다. 그래야 전설이 아니겠는가.
아내에게 수영장에 가야 한다고 대충 둘러대었고, 이 눈속에 하루쯤 빠지면 안돼냐고 왜 고생을 사서할려고 하느냐고 하는 미심쩍음이 아내의 얼굴에 역력했지만, 눈의 역사를 꼭 봐야만 할 것 같은 나의 객기가 아내의 걱정 정도는 무시하게 만들었다.
삼십분에 걸쳐 차 주위의 눈을 삽으로 쳐내고, 우리 집 골목길을 몇번에 걸쳐 미끄러져서 간신히 대도로로 나올 수 있었다. 다행히 대도로는 시청에서 제설 작업을 한탓인지 천천히라도 차를 몰아 갈 수가 있었다.
겁 없이 나온 엉금 엉금 기어가는 차들 틈에 끼여 어느덧 안목까지 가게 되었다. 대도로로 따라 가자니 어쩔 수 없이 안목에 가게 된 것이다. 거기 포장마차에서 해삼을 시켜 소주 한병을 마셨다.
비록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된 상태이지만 이런 날 술이 취해 미끄러운 길을 운전해 간다면 그것 또한 나의 전설이 아니겠는가.
물론 이런 날은 절대로 음주건문을 안할 것이라는 나의 얄팍한 계산이 숨어있었지만 말이다.
술이 어리해서 해송이 둘러싸인 해안도로를 달렸다. 눈이 쌓인 해송은 마치 눈터널 처럼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역시 전설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술기운이 거기다가 한 몫 거들었다.
시내로 나오자 상점은 거의 문이 닫혀 있었다. 이런 날 돌아다니는 미친 인간이 없을 터이니 당연했다.
소주 한 병으로 더욱 간절해진 술 욕심이 거리의 술집을 찾아 헤매게 만들었다. 역시 문들 열어 놓고 있는 술집을 찾기가 힘들었다.
아! 청수원, 갑자기 청수원이 떠올려졌다. 청수원이라면 이런 날도 틀림없이 문을 열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이십여년을 술 장사를 하면서 큰 오빠 장삿날 3일을 빼고는 한 번도 문들 닫아 본 적이 없다는 그녀였다.
눈이 처마 밑까지 내려도 그녀는 절대로 가게 문을 닫지 않을것이라는 나의 믿음이었다. 이런 날 술 퍼마시고 거리를 배회하는 나는 객기였지만, 이런 날 쉬지도 않고 가게 문을 열어야 하는 그녀는 삶이었다.
역시! 청수원은 그 자리에 있었다.
뽀얗게 내리는 눈속에 분홍색 간판 불을 밝히며 홀로 있었다. 마치 옛시절 고개마루에 지나가던 과객들의 목을 축혀주던 어두컴컴한 산 밑에 홀로 있던 주막처럼 그 자리에 버티고 있었다.
가게 안에는 60대 초반의 사내들이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청수원의 허름한 분위기와 안주가 나이 먹은 사람들이나 허름한 인간들만 오게 만드는 것은 당연했다.
"혼자 오셨어요?“
그녀가 주방에서 일하면서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주는 어떤 걸로....."
뻔한 안주였지만, 그녀는 항상 난감해 했다. 그것은 그녀의 소박한 마음씨의 표시인 것이다. 자신의 요리 실력과 손님 상에 내놓은 자신이 만든 안주에 항상 미안해하고 겸손한 것이다. 그것도 청수원의 미덕이었다.
일 하는 그녀를 불러 앉혀 이야기 할 수 없어서 혼자서 마셨다. 그것 또한 나쁜 것은 아니였다. 멀쩡한 날에 혼자서 마신다면 청승을 떠는 것이겠지만, 오늘은 눈이 내리고 있지않은가. 이런 날 청승을 떤다고 해서 누가 뭐랄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설사 뭐라고 한다고 해도 어떤가. 눈이 내리고 있다고, 나는 지금 전설을 만들고 있다고 이야기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어이....영철이 오랜만이다.“
소주 한 병이 비워갈 때쯤, 머리에 눈을 뒤집어 쓰고 왠 사내가 한명 들어섰다.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이리 와서 같이 한잔 하자."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은 인간이었지만, 손짓을 해서 그를 불렀다. 머쓱해하면서 그는 다가와서 내 앞에 앉았다.
내가 따라 준 술을 마시면서도 그는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의 이력을 말해주는 미간의 흉터가 그의 인상을 더욱 험악하게 만드는 것을 술기운에 느꼈다.
그는 20 대에 불 같은 성질을 참지 못해서 살인을 해서 감옥에서 몇년을 보낸 인간이었다.
나와는 초등학교 시절 같은 반이었으나 한 번도 술자리를 가져 본 적도 없었고, 몇 년 전 전화 통화 이외에는 이야기 한 적도 없었다.
서로 같은 고향에서 멀찍히 소문으로만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는 더러운 성질 때문에 시내 깡패들 조차도 기피하는 인물이었다.
술이 취해 말싸움이 붙으면 선배고 뭐고 없었다.
술기운에도, 전설을 만들려고 위험한 외출을 한 내가 어쩌면 나만의 새로운 전설을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와 시비가 붙어 그가 내지른 칼에 맞아 나의 선명한 피가 하얀 눈위에 뚝뚝 떨어질지도 몰랐다.
아무리 겁대가리 없는 나이지만, 앞뒤 안가리고 미련하게 덤비는 놈을 어쩌겠는가.
"너...그때 나에게 욕을 했지?“
어떤 대설의 전설도 피를 이야기 한 적은 없었다. 혹시 피에 물든 새로운 전설을 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가 그 일에 끼여들 일이 아니였잖아."
소주 두 병의 취기가 어느새 달아나고 나는 긴장을 하면서 대답을 했다.
"나 그날 너를 잡으려고 너가 잘 가는 바닷가 스쿠바샵과 너의 집부근에서 삼일을 기다렸다."
역시 그는 그 답게 나를 위협해 왔다.
나의 말은 아예 무시된 상태였다. 이런 날 피 맛을 보게 되다니. 어쩌겠는가. 새로운 전설을 만들겠다는 나의 객기 때문인 것을.
그때 그와 시비가 붙은 것은, 순전히 그 때문이었다. 우리 건물을 지으면서 옆 건물과 소송이 붙어 있었는데, 소송에 질 것이 뻔한 옆집 건물 주인이 그에게 해결사 역활을 부탁했던 것이다.
그는 전화로 나를 위협했고, 나는 너가 뭔데 참견하냐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욕을 했던 것이다.
자기의 명성을 한방의 욕으로 무시하는 나를 그냥 두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마 그는 자기의 협박이 나에게 순순히 먹혀들어 자신의 해결사 역활을 무사히 마칠 것으로 예상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그런 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고 소문으로 듣던 터였다.
"삼촌! 왜그래요? 삼촌은 술만 먹으면 왜그래요? 술 먹고 자기 맘에 안들면 시비가 붙잔아요. 벌써 몇번째예요? 삼촌이 자꾸 그러면 나 장사 망해요.“
갑자기 뒤에서 폭포수 같은 그녀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곧이어 술상이 뒤집히고 가게가 난장판이 될 것이 뻔했다. 그가 누구인가. 시내서 알아주는 성질 더러운 깡패놈이 아닌가.
그러나,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녀의 빛발치는 성화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얌전해 질수 없었다. 머리를 숙이고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기만 했다.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고, 그런 인간을 마치 어린 아이 다루듯이 우습게 이야기 했다는 것이다.
강릉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앞에서 벌벌 떨어야 했는데, 그녀는 그렇게 당당할 수 없었다.
몇 일 전에도 그가 청수원에서 술자리의 선배와 의견이 맞지 않는다고 선배의 뺨을 때리고 술잔을 집어던지는 것을 반대편 탁자에서 목격한 바가 있었다.
그때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다만 조용히 나에게 다가와 ‘미안해요’ 라고 한마디만 했었다.
헤어진 남편에게 전화가 오면, 욕을 해주고 싶은데, 재수 없다는 말 정도 밖에 못하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물론 구 터미날 부근에서 술집을 해 오면서, 강릉 시내 깡패들의 집결지였던 그곳에서 딿고 딿았겠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의외였다.
강릉 시내 온갖 깡패들이 자신의 술집에서 행패를 부려도 묵묵히 참아왔던 그녀였던 것이다.
"그래.......우리 다 잊어먹고 초등학교 동창 친구로 지내자."
"그래......우리 옛날 일 다 잊어버리자. 술이나 마시자. 한잔 받아라."
그녀 덕분에 우리는 어느새 다정한 친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부끄러움 잘 타고 얌전하고 소심하고 소박한 그녀가, 비록 그런 막 술집을 깡패소굴에서 이십여년을 했다고 하더라도, 시내에서 알아주는 성질 더러운 인간을 한방에 보내버리다니.
문득 그녀가 혹시 나 때문에 그에게 대든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만한 소란은 상대도 않고 얌전히 있던 그녀였는데, 실제로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몇번 보기도 했다.
내가 혹시 그 때문에 청수원에 나타나지 않을까봐서 그렇게 그녀 답지 않게 무서운 인간에게 폭포수 같은 말을 퍼부어댄 것은 아니였을까?
그렇다면 초등학교 동창 놈은 왜 그렇게 얌전해 졌을까?
강릉 시내 어떤 사내 놈들도 우습게 아는 인간인데, 그 연약한 술집 여자의 말에 한순간에 얌전해지다니.
그도 혹시 그녀의 진실한 삶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녀의 진정성이 교묘하게 그의 난폭한 난행을 다스린 것은 아닌지.
하여간 어제 나는, 눈 내리는 날 새로운 전설의 기록은 깨지 못했지만, 특별한 전설은 만들 수 있었다. 그것은 순전히 그녀 덕분이었다.
내가 먼저 취해 술값을 내려하자 그는, 자기가 내겠다고 내 손을 막았었고, 내가 밖으로 나오자 그는 따라 나오면서 다음에 꼭 같이 한잔하자며, 진정으로 초등학교 동창 친구로 돌아와 있었다.
여전히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해 겨울의 대설은 안타깝게도 전설을 깨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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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마차는 시간이 걸릴 거 같아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