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74
1월18일[연중 제2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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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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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YF8_y80f1Zo (김지수 루치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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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손을 뻗어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들의 오그라든 마음, 뒤틀린 영혼을 곧게 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몸과 마음이 극도로 경직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신학을 공부하던 시절, 교수 신부님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치르는 구술시험이 있었는데, 교수실 바깥에 대기하고 있노라면, 얼마나 긴장이 되던지 온몸이 경직되곤 했습니다.
얼마 전 오랜만에 종합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다른 검사들을 그럭저럭 견딜만한데, 엄청난 양의 혈액을 채취하기 직전이나, 대장내시경 직전에는 경직되는 것을 넘어 사시나무 떨리듯 온몸이 떨리더군요.
몸이 경직되다 보면 마음도 경직됩니다. 마음이 완고해지다 보면 몸도 뻣뻣해집니다.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가 아니라 함께 가는 것 같습니다. 때로 몸이 경직되는 것보다 마음이 완고해지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가끔 마음이 꽁꽁 얼어붙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렸습니다. 어떻게든 한번 풀어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하고, 쌩쑈를 다해보지만, 끝끝내 문을 열지 않습니다.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한탄만 할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들, 아마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겠지요. 예수님을 따라다니기는 다니는데,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추종하려고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여차하면 예수님을 고발하고 그분께 올가미를 씌우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보다 백만 배 천만 배 더 가련하고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손 오그라든 거야, 그러려니 하고 참고 살아가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오그라들 대로 오그라든 그들은 스스로 구원의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천국으로 향하는 문을 자기들 쪽에서 굳게 잠궈버렸습니다.
이런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크게 슬퍼하십니다. 노기까지 띠십니다. 그리고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향해 외치십니다.
“손을 뻗어라.”(마르코 복음 3장 5절)
“손을 뻗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둘러서 있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요, 동시에 오늘 우리 각자를 향해 건네신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오그라든 마음, 뒤틀린 영혼, 비비 꼬인 정신을 곧게 펴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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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를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분>
제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세상에서의 행복을 좇고 있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 간신히 대학을 다니던 저에게 가장 부러운 대상은 개그맨 이휘재 씨였습니다. 저는 여전히 미래가 불안한 가난한 대학생이었지만, 그는 저와 같은 나이에 벌써 출세하여 돈과 인기와 명예를 온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돈과 명예와 인기를 많이 얻지 않으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고, 그런 세상 앞에 저는 너무나 작게 느껴졌었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고 그분의 뒤를 따르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제가 세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존재이지, 세상에 억눌릴 작은 존재가 아님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이제는 세상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어도 결코 부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의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불쌍하게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도 그런 사람이 나옵니다.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입니다. 커다란 불구는 아니지만 세상에 떳떳하게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불구는 죄 때문이라고 여겨지는 때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이 사람을 ‘가운데’로 불러 세우십니다. 회당에서 ‘가운데’ 설 수 있는 사람은 사제나 바리사이, 혹은 율법학자들처럼 사회의 큰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쪽 손이 오그라든 이 사람도 유대 지배자들과 동등하게 당당히 중앙에 설 수 있고 똑같은 행복을 누려야 하는 평등하고 존엄한 인간임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웅크리지 말고 가슴을 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아무리 유명한 사람들 앞에서도 오그라들지 말고 숨지 말고 당당히 머리를 들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들은 그들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고 마는 지푸라기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은 이런 것을 못마땅해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상대적인 행복감’을 느끼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나보다 더 가난하고, 인기가 덜 있고,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야 자신들의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자신들의 힘에 우리가 여전히 짓눌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자만이 우리의 참된 가치를 알아주십니다.
제가 깨끗한 5만 원권 지폐를 들고 아무 조건 없이 원하는 사람에게 주겠다고 하면 거부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지폐를 마구 구겨서 그것을 다시 들고 가지고 싶은 사람 있느냐고 묻는다면 여러분들은 어쩌시겠습니까? 물론 구겨진 것도 같은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거부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넌 구겨진 돈이야. 네가 어디서 우리와 같은 급으로 놀려고 그래. 우리는 너보다 더 잘났고 영향력도 장난 아니지. 너는 너와 같은 하층부류와 어울리도록 해.’라고 말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아무리 구겨진 우리들도 같은 존귀함을 지닌 귀한 존재임을 알아주시는 유일한 분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참다운 해방자이신 것입니다.
오늘 손이 오그라든 사람도 예수님께서 중앙에 세우시고 팔을 뻗으라고 하시지 않으셨다면 그는 여전히 사회의 한 구석에서 웅크리고 살았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존재가치를 알아주는 분만이 나를 해방시켜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예전에 어떤 미국 고등학교에서 교장선생님이 새 학년 반을 편성하여 담임을 정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반은 머리가 더 똑똑한 아이들만 모아놓은 반이었고 나머지는 보통 아이들로 이루어진 반이었습니다.
1년이 지났는데 역시 머리가 좋은 아이들이 모여 있는 반의 아이들 성적이 다른 반들보다 월등히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 담임선생님을 불러 1년 동안 고생했다고 칭찬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담임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원래 머리가 좋은 아이들을 모아놓으셨기 때문에 점수가 잘 나온 것이지 제가 특별히 잘 한 것은 없어요.” 교장선생님은 그 때야 솔직히 말해 주었습니다.
“아닙니다. 그 땐 제가 거짓말로 그렇게 말했던 것이고 사실은 모든 반이 같은 수준의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반만 좋은 점수가 나올 수 있었을까요? 선생님이 그 반 아이들을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보아주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김민경 씨가 쓴 《괜찮아, 엄마는 널 믿어》라는 책을 소개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게임에 빠져 자퇴까지 결심했던 아이를 끝까지 믿어주어 고등학교 전교 1등, 연세대 4년 장학생으로 키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김민경 씨는 ‘아이는 엄마가 믿는 만큼 자란다.’는 것을 굳게 믿어왔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 각자 하나하나를 굳게 믿고 계십니다. 동물처럼 순간적인 쾌락을 쫓는 존재가 아닌,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존엄성을 지닌 존재들이란 것을 알고 인정해 주십니다.
그래서 해바라기가 해를 보듯 그분의 말씀만 따른다면 우리도 세상의 작은 태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세상의 어떤 것에도 주눅 들어서는 안 되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분을 따르면 우리도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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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8살에 억울하게 32년 동안 감옥에서 지낸 ‘흑인청년 보젤라’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보젤라가 사는 동네에 할머니가 잔혹하게 죽었습니다. 경찰은 두 사람의 증언을 토대로 보젤라를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했습니다. 보젤라는 자신은 죄가 없다고 항변했지만 재판에서 유죄가 선고되었고 그렇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나중에 할머니의 집에서 다른 사람의 지문이 나왔지만 그것도 보젤라를 감옥에서 나오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32년을 지낼 무렵 무죄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단체에서 보젤라를 위해서 변호사를 선임했고 재심 끝에 보젤라는 50세가 되는 해에 무죄를 선고받고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32년 동안 죄를 인정하면 감형해 주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한 번도 죄를 인정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자신은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보젤라에게 감옥에 있던 32년은 고통의 시간만은 아니었습니다. 보젤라는 감옥에서 열심히 공부했고 학사학위와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동료 죄수를 면회 왔던 여인을 알게 되어 감옥에서 결혼도 했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보젤라는 언젠가 나올 줄은 알았지만 너무 긴 시간이었다고 감회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남은 시간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불의와 거짓이 보젤라를 감옥에 가둘 수는 있었지만 보젤라의 정신과 영혼까지 감옥에 가둘 수는 없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도 감옥에서 27년을 보냈다고 합니다. 감옥이 만델라의 몸을 가둘 수는 있었지만 만델라의 정신과 영혼은 가둘 수 없었습니다. 만델라는 긴 감옥에서의 시간을 독서와 명상의 시간으로 보냈습니다. 대통령이 된 만델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과 백인의 인종 갈등을 치유하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사형선고를 받았고, 오랜 시간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죽을 고비도 몇 차례 넘겼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감옥에서 많은 책을 읽었고, 언어를 공부했습니다.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표어로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은 ‘IMF'의 국가부도 위기를 국민들과 함께 잘 극복하였습니다. 불의한 정권이 김대중 대통령을 감옥에 가둘 수는 있었지만 그의 정신과 영혼은 가둘 수 없었습니다. 구약성서는 우리에게 요셉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억울하게 이집트로 팔려갔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무고하게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습니다. 비록 몸은 감옥에 갇혔지만 요셉의 정신과 마음은 자유로웠습니다.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정확하게 해몽하였고, 이집트의 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팔아넘긴 형제들을 용서하였고, 가족들이 가뭄을 피해서 이집트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자리에는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손은 멀쩡했지만 그들의 마음을 오그라드는 것을 넘어 쪼그라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표징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오그라든 손으로 평생 고통을 겪어야 했던 사람의 아픔을 보듬어 주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한 예수님을 죽이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마음이 오그라들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절망하는 사람은 비록 몸은 넓은 세상에 있어도 그 정신과 영혼은 감옥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이웃의 성공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은 비록 몸은 넓은 세상에 있어도 그 정신과 영혼은 감옥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몸을 가두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영혼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을 두려워하여라.” 저 자신은 보젤라처럼, 넬슨 만델라 대통령처럼, 김대중 대통령처럼 억울한 일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큰 어려움 없이 지금까지 넓은 세상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정신과 영혼은 때로 오그라들었고, 쪼그라들었던 적이 많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있었고, 허영과 교만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저의 정신과 영혼을 쪼그라들게 했습니다.
안식일은 규정과 율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안식일은 내가 있는 삶의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있을 수 있습니다. 그곳이 삶의 자리입니다. 편하게 자유로운 세상에서 지낼 수 있습니다. 그곳이 삶의 자리입니다. 비록 몸은 삶의 자리에서 고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과 영혼은 삶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정신과 영혼은 어떤 삶의 자리에서도 지치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내가 있는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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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1-6: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고치시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다시 회당으로 가신다. 그런데 회당 한쪽에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고(1절), 사람들은 예수께서 고쳐주시면 고발하려고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2절)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부르시어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3절) 하신다. 그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거기 있던 사람들은 정신이 오그라들었다. 그들은 그분을 바라보지도 않았고, 기적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주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신다. 그분은 물으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악을 행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4절) 만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해도 되느냐?’라고 물으셨다면 그들은 즉시 ‘당신은 율법을 거슬러 말하고 있소’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본 의미를 말씀하신다.
생명을 위해서라면 예외적으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우물에 빠졌을 경우 밖으로 끌어내어도 괜찮았고(마태 12,11), 소나 나귀도 그러하였다. 이처럼 율법은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허용했고, 유대인은 안식일에도 음식을 장만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을 던지신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4절)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선의를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도와줄 가능성이 있을 때 사람을 비참한 상태에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확실히 나쁜 것이고,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돕는 것은 확실히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탄식하시면서 노기에 가득 차 그들을 둘러보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시면서 성하게 해주셨다. (5절) 그리하여 여러 차례 예수님의 처사를 비난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모의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다(6절).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묵상할 것이 있다. “손이 오그라들었다.”라는 것은 인간의 죽은 행동의 상징이다. 바리사이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손을 잡고 예수님을 처치할 모의를 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창조하는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그라든 손끼리 서로 잡았음을 볼 수 있다. 오그라든 손끼리 잡았으니 창조의 손을 없애는 결과를, 즉 죽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떠한 손을 잡고 살아가는 신앙인인가? 내 손도 오그라들었는데 내가 잡은 다른 손은 나의 손을 펴줄 수 있고 창조하는 생명을 주는 손인가 아니면 창조하는 손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낡은 이데올로기의 권좌에 있는 손인가? 우리도 많은 경우에 우리 자신의 아집에 사로잡혀 오그라든 손이 된 줄도 모르고 그 손으로 잘못하는 경우가 많다. 즉시 창조하고 생명을 주는 주님의 손을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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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의 뜻>
구약시대 안식일은 주간의 마지막 날, 즉 토요일이고, 하느님께서 창조 사업을 마치시고 쉬신 날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하느님의 휴식에 동참하는 일로만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한 주간 동안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동참하고 나서 하느님과 함께 쉬는 일입니다.
신약시대 주일은 주간의 첫날, 즉 일요일이고,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은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면서 부활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주님의 구원 사업에 동참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구원 사업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는 ‘새로운 창조 사업’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의 의미와 주일의 의미는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에 초점을 맞추느냐만 다를 뿐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든지 주일을 지키든지 간에, 모든 날이 다 거룩한 날이고, 모든 날이 다 ‘주님의 날’입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세속의 날’이고, 일요일 하루만 ‘주님의 날’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세속 사람으로 살다가 일요일 하루만 신앙인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날을 신앙인으로서 살면서, 모든 날을 항상 주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하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마르 3,1-6)
요한복음 5장에도, 안식일 문제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박해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요한 5,16-18).”
여기서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안식일에도 쉬시지 않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사람들을 보살펴 주시는 일을 하시니 나도 안식일에 쉴 수가 없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랑과 선을 실천하는 일은 요일과는 상관없이 날마다 해야 하는 일입니다. 안식일에는, 또는 주일에는 특히 더 많이 실천해야 합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라는 계명을 실천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문제가 어렵다고 고민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은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선이냐고 고민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또 누구에게나 사랑은 사랑이고, 선은 선입니다. 복잡하고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라는 말씀은, “안식일에 선을 실행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냐? 악을 행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냐?”라는 말씀이고, 이 말씀은,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선을 실행하지 않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다.”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안식일 율법을 재해석한 말씀이 아니라, 원래의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깨우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은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날, 선을 행하는 날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탈출기와 신명기에 있는 십계명에도 안식일은 선과 사랑을 실천하는 날이라는 것이 강조되어 있습니다.(탈출 20,8-11; 신명 5,12-15)>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라는 말씀은,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냐?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냐?”라는 말씀이고, 이 말씀은,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큰 죄다.” 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대단히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 것은, 예수님 말씀에 동의했기 때문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기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안식일 율법을 안 지키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화가 났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 말씀에 반박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무능력에 대해서도 화가 났을 것입니다. 그 분노와 증오가 올바른 판단을 못하게 만드는 걸림돌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마귀가 그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며”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그들 마음속에 자리 잡은 ‘악’에 대해서 노여워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라는 말은, 율법주의자들이 고집과 집착을 버리지 않고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을 안타까워 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는 그들도 회개시켜서 구원해야 할 ‘양들’, 즉 ‘잃은 양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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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계명을 따르다 보면 정확하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하는 계명은 무엇을 해야 또 하지 말아야 거룩하게 지내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는, 열려 있는 가르침입니다.
유다인들의 율법도 마찬가지다 보니 라삐들은 안식일에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규정하여 무엇이 노동이고 아닌지를 구분합니다. 물론 유다교에서 생명이 위독한 사람을 치유하는 것은 안식일에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위급하지 않은 지병인 경우는 다른 날에도 고칠 수 있기에 안식일에 할 수 없는 일에 속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고치신 이는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입니다. 복음이 정확하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분명히 이 사람은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안식일에 치유하시는 것은 규정에 어긋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이 질문에 어느 누구도, 바리사이들조차 대답하지 못합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고 목숨을 구하는 것은 할 수 있고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규정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나무라십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문자 그대로를 따르는 것보다 넓은 의미입니다. 어쩌면 그 계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숙고하고 고민하는 것부터가 계명을 따르는 과정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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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안식일은 무행(無行)이 아니라 선행(先行)의 날이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일(창세 2,2-3; 탈출 20,8-11)과 할례를 받는 일(창세 17,10-11)은 하느님께 대한 유다인들의 가장 중요한 신앙행위의 지침들이다. 동시에 이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신앙심을 저울질하는 종교적 기준이 되기도 한다.
물론 이 사람들이 이 지침들을 글자 그대로 지키는 데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늘 불쌍하고 없는 사람들에게 이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앞서간 복음에서는 예수의 제자들이 밀이삭을 자르는 행동으로 안식일법을 어겼고, 오늘은 예수님 스스로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심으로써 안식일법을 어기신다.
물론 바리사이파 사람들 편에서 보았을 때 치유의 행위가 범법(犯法)이 되나 예수님 편에서 볼 때는 는 아니다.
우리는 앞서간 복음을 통하여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두 가지 법칙을 발견하였다.
첫째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2,27)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의 아들이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2,28)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치유기적은 원래 따로 전해오던 것을 마르코가 의도적으로 이 자리에 배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예수와 그 반대자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의 논쟁을 일단락 짓기 위해서이다. 물론 논쟁의 일단락은 예수에게 불리하게 진행된다. 반대자들이 예수를 제거하려고 결의하고 그 작업에 착수하겠기 때문이다.(6절)
예수께서는 사태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진행되더라도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와 뜻을 밝히려 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선포하신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법칙을 실천할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려 하시는 것이다.
안식일법을 지킨다는 것은 이날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천지창조의 완성의 날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낸다는 것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유다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는 것을 이날에 금지된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예수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반문하신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은가?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은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은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옳은가?
이는 다소 과장된 표현이기도 하다. 혹자는 예수께서 굳이 안식일법을 어기지 말고, 안식일을 피해 다른 날을 택하여 좋은 일을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루카 13,14 참조)
그러나 꼭 알아두어야 할 점은 예수께 있어서 내일은 없고, ‘지금’과 ‘여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안식일과 좋은 일을, 안식일과 사람을 살리는 일을 서로 연결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도 밝혔지만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에 모든 일에게 손을 떼고 쉬셨다(창세 1,2)고 해서 이렛날을 무위도식하는 날로 생각하면 착각이다. 이 날은 창조의 완성을 의미하는 날이기에 거룩한 날이고 다른 날보다 복이 많은 날이다.
이날이 유다인들에게는 토요일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주일이다. 따라서 이 날은 죽은 무행(無行)의 날이 아니라 살아있는 행위의 날, 선행(善行)의 날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사명 핵심은 바로 ‘생명을 주는 일’, ‘사람을 살리는 일’에 있다. 이들 일은 안식일에 더욱더 행해져야 한다. 그런데 내 것만 챙기고 나만 살자고 하는 행위는 안식일의 정신에 절대적으로 어긋난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죽임을 당할 줄을 내다보시면서까지 안식일에 다른 사람을 살리시는 뜻을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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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종주 베드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유대 율법에 정면으로 도전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당시 그들의 율법에 따르면 생명의 위험을 제외하고는 안식일에 일한다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벽이 무너져 사람이 깔려 있을 때 그 사람이 살아있다면 집 밖으로 낼 수는 있으나 치료는 금지되어 있었고, 죽었다면 그 시체는 그다음 날에야 치울 수 있도록 당시 율법은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또 로마와의 전쟁 시에는 적에게 쫓기던 유대의 한 병사가 동굴에 숨어 있다가 안식일이 되어 도망도 못 가고, 저항도 못하고 불에 타 죽으면서도 안식일을 지키는 명예 속에 죽어간 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런 형식적 율법에 대항하는 하느님의 정신을 오늘 오그라든 사람의 손을 펴 주심으로서 보여주십니다. 예수께서 보여 주시려는 하느님의 뜻은 명백합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이 한마디로 족하십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당시 청중들의 말문이 막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 ‘하느님의 뜻’을 마치 ‘인본주의’와 동일시하는 행동은 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비교하고자 한 것은 ‘율법의 형식적인 측면’과 ‘생명의 존엄성’이었습니다. 단순히 ‘인간의 존엄성’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인 인간이 가진 ‘생명의 존엄성’을 선택하신 것이지요.
예, 오늘날 특별히 인간의 절대적인 가치를 표방하는 대표적인 대중문화가 바로 ‘뉴 에이지 운동’입니다. 이 운동의 여러 사상 중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다’라는 것이며, 모든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한 기적들을 할 수 있는 잠재적인 능력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세상에서 오직 인간만이 최고의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단지 신앙이란 자신의 내적인 평온함과 평화 그리고 의식 확장을 위한 요법적인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사상과 대적되는 환생사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인간이 무한한 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계속 환생하여 온전히 인간의 잠재력과 신적 의식을 개발시켜 신이 되는 수단으로 간주합니다.
때로는 극단적으로 자신의 무한한 잠재력을 개발하기 위하여 생명을 버리는 일들도 간혹 일어납니다. 예, 알게 모르게 우리는 이러한 뉴 에이지의 문화 속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요즘은 인간의 환생이 아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죽음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입니다. 이를 우리는 티비나 영화, 서적 등을 통하여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존엄성보다 더 큰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때 우리는 뉴 에이지 운동의 잘못된 신심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을 살리심으로써 생명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모습. 오늘날과 같이 많은 생명이 위협당하는 세상에서 잊지 말아야 할 그분의 모습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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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홍태 베다 신부님]
<안식일 논쟁>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려 하시자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비판하고 고발하려 듭니다. 병자를 고쳐주는 일은 좋은 일인데 왜 그들은 예수님을 비판했을까요?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는 겁니다. 도대체 안식일이 무엇이기에?
1. 안식일이란?
그것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렛날에는 쉬시며,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축복하셨는데 이날이 곧 안식일입니다.(창세 2,2-3. 그리고 탈출 20,11 참조)
그리고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야 한다. 그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손녀, 사내종 여종뿐 아니라 소와 나귀와 그 밖의 모든 가축과 집 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그래야 네 남종과 여종도 너처럼 쉴 것이 아니냐?”(신명 5,14)
이처럼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쉬신 날로, 이날은 사람과 종들과 짐승들도 사회적이고 인도적인 이유에서 하루를 거룩히 지내며 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과 집짐승에게 공평한 휴식의 날은 이스라엘인들의 쓰라린 체험에 근거합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면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인들에게 하느님께서는 해방과 안식을 마련해 주십니다.
이제 그들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이 해방과 안식을 다른 모든 존재와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신명 5,15) 그래서 안식일을 지킴은 자기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자기 민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느님을 기억하는 것이고, 또 그분께서 베푸시는 기쁨과 구원에 동참하는 것입니다.(이사 56,2; 58,13-14; 예레 17,19-27)
안식일에 대한 이러한 생각과 규정은 처음부터 확정되어 내려온 것이 아니라, 역사가 흐르면서 점점 꼴을 갖추고 강화되어 온 것입니다. 특히 기원전 6세기 말에 유다 왕국이 멸망하고 많은 사람이 유배살이를 하게 되면서, 안식일은 유다인들의 삶에서 더욱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교의 중심인 제사를 거행하는 성전이 없이, 이국땅에서는 다른 나라 사람들 사이에서, 본토에서는 다른 종교들을 신봉하는 여러 종족과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야훼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실은, 이제 할례나 안식일 준수 같은 것으로만 분명히 드러낼 수 있게 됩니다. 안식일 준수가 야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행위가 되고 그 신앙을 드러내는 징표가 되는 것입니다.(탈출 31,13; 에제 20,12)
2. 이렇게 안식일이 더욱 중시되면서, 이날의 안식을 어떻게 지키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안식일은 본디 기쁜 축제의 날로(이사 1,13; 호세 2,13 참조) 장사나 농사를 멈추고(출애 34,21; 아모 8,5), 성소에 가서 하느님을 경배하고(이사 1,12-13 참조) 때로는 예언자를 찾아가 말씀을 듣는 날이었습니다.(2열왕 4,23)
처음에는 이렇게 비교적 단순한 안식일에, 점점 안식을 깰 수 있는 행동이나 일들을 금하는 금령들이 덧붙여집니다. 포도주 짜는 확을 밟거나 짐을 나르는 일(예레 17,19-27; 느헤 13,15), 여행(이사 58,13), 더 나아가서는 이천 걸음 이상 걷는 것도 금지됩니다.(사도 1,12 참조)
마카베오 시대에는 적군의 공격을 받고도 안식일 규정을 어기지 않으려고 그냥 몰살당하기까지 합니다.(1마카 2,32-38; 2마카 6,11)
이러한 극단적인 자세는 수정되지만(1마카 2,39-41), 전체적으로 안식일 규정은 점점 더 엄해집니다. 나중에 랍비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39가지 일의 목록을 작성해 내기까지 합니다.
이리하여 본디 휴식과 기쁨의 날인 안식일이, 곧 하느님을 위하여 거룩히 지내는 날이 이렇게 일종의 금령의 날로 많은 사람에게 짐스러운 날로 전락하고 맙니다.
3.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과 바리사이들 사이에 안식일 갈등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을 폐지하지 않으시고, 갖가지 금령으로 본말이 전도된 안식일의 원의미를 되살리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으신 대로 예수님은 당신을 비난하시는 바리사이들을 향하여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고 지적하셨습니다.
또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은 하느님을 위한 날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위함은 이웃을 위함으로 구체화됩니다. 그래서 안식일 역시 단순히 무엇을 하지 않는 날이 아니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날, 이웃의 선과 생명에 도움을 주는 날이라는 것입니다.(마르 3,4 참조) 이는 오늘날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정신이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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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안식일에 무슨 일을 하는가>
마르코 3,1-6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안식일에 무슨 일을 하는가>
안식일은
일하지 않는 날이 아니라
좋은 일이라면 하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일하면 안 되는 날이 아니라
살리는 일이라면 해야 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살리십니다
안식일에는 여느 날보다 더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있으니
남을 해치는 일이요 죽이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안식일에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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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활짝 펴진 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 법을 위반하는 사람은 추방당하거나 사형에 처하게 되어 있었습니다(출애31,14). 유다인들은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가 아니면,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할 수 없다는 법적인 규정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치유해 준 병자는 손이 오그라든 상태였기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행위가 법에 저촉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애 버릴까 모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아랑곳하고 안식일 법의 맹목적인 준수보다는 안식일에도 선행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고발할 마음만 커갔습니다.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하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칭찬은커녕 흉보고 비난하며 불평합니다. 이렇게 보면 신체적인 장애를 지닌 사람보다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이 더 문제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은 누구보다도 경건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킨다고 자만하면서, 실제로는 생명을 죽이는 악행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다양한 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손은 반역의 손이고, 질투로 혈육인 동생을 죽인 카인의 손은 살인의 손이며 유다의 손은 배신의 손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손은 폭력의 손이고 강도를 만난 사람을 스쳐 지나간 사제, 레위의 손은 오그라든 손이며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간호해준 사마리아 사람의 손은 선한 손이요, 활짝 펴진 손입니다. 성령께서 죄로 오그라든 저희의 손을 펴 주시기를 갈망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릇된 일인지를 알면서도 마음 한번 비뚤어지면 대책이 없습니다. 그는 중환자입니다. 그는 치유 받아야 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보다도 더 먼저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중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안타까움이 큽니다. 혹 나도 잘못된 고정관념, 어떤 것에 대한 집착, 쓸데없는 고집, 자존심의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손을 뻗어라” 하시며 오그라든 손을 성하게 하신 능력의 말씀이 오그라든 우리 마음을 펴주시길 기도합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36,26) 안식일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날인 동시에 사랑하는 날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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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나라 엄마들의 뇌를 분석하는 흥미로운 실험이 방송에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엄마들에게 특정 자극을 준 뒤에 뇌를 분석하는 연구였습니다. 우선 “우리 아이가 90점을 맞았어요.”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엄마들의 뇌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잠시 뒤, “우리 아이는 70점을 맞고, 옆집 아이는 50점을 맞았어요.”라고 했을 때의 뇌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90점보다 낮은 점수가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즐거움과 보상을 담당하는 쾌락 중추가 활성화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실험 결과를 두고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바라보는 자기 개념을 가진 것이 아니라, 제삼자의 시선에 따라 기쁨과 즐거움이 결정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제삼자의 시선에 따라 기쁨과 즐거움이 결정된다는 사실은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바라보지 못하고, 남과 비교하면서 남보다 더 나은 나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행복을 찾는 사람은 계속해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면서 감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보다는 비교하고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거부의 삶을 삽니다. 마음은 더더욱 완고하게 변하면서 어떤 말과 행동도 좋게 바라볼 수가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다가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보게 됩니다. 이 사람의 아픔을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보시지요. 손에 주어지는 고통은 둘째치고, 사람들의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통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벌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사회였기에 더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죄인이라고 단정 지어버렸기 때문에, 그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안식일 법을 어긴 예수님을 고발하면서 예수님을 제거하고자 하는 마음만 강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것보다 남을 해치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 목숨을 구하는 것보다 죽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어쩌면 우리의 모습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자신의 속 좁은 판단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지 못하면서 주님의 자리를 없애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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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배움의 여정>
-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과제이다 -
교회는 오늘 1월18일부터 1월25일 성 바로오 사도의 회심 축일까지 일치주간으로 지냅니다. 주제는 “선을 행하고, 공정을 추구하라(Do good; seek justice)”, 이사야서 1장17절 앞부분 말씀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일찍 정해 놨습니다. ‘배움의 여정-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과제이다-’라는, 제가 자주 사용했던 좋아하는 제목입니다. 더불어 떠오르는 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좌우명 고백 기도시 6섯째 연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戰士로
주님의 학인學人으로
주님의 형제兄弟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여전히 공감하고 마음 중심에 담고 살아가는 수도공동체에 속한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로서의 신원이자 정체성입니다. 참으로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요,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학인으로서의 신원임을 참 많이도 나눴습니다.
이 셋중 오늘은 두 번째 영원한 주님의 학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싶습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동시에 평생과제입니다. 평생 배움의 여정에 항구히 충실함으로 은총의 선물을 완성해가야 하는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배움의 여정에 있어 초발심의 겸손한 순종과 섬김의 자세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이런 수도승의 신원을 요약하는 두 필수적 말마디가 바로 ‘하느님께 대한 갈망, 배움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러니 결코 지치지 말아야 할 것이 평생 배움에 대한 사랑입니다. 날마다 일기쓰듯 하는 강론입니다. 어제 잊지 못할 세 경우를 통해 저는 참 많이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배움의 여정은 그대로 깨달음의 여정이요, 이런 여정에 충실함으로 날로 자유로워지는 삶입니다.
1.끊임없이 불도佛道를 찾아 나섰던 구도자求道者 선재(善財)라는 이름을 가진 꽤 커다란 착하고 순한 개에 관한 일화입니다. 얼마전부터 수도원 개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크고 흰 개의 정체가 궁금했는데 바로 이웃 불암사의 개라는 것입니다. 불암사 절에서는 잠만 자고 낮에는 요셉 수도원의 개들과 하루종일 사이좋게 놀다가 밤에는 절로 간다는 사실을 개를 돌보는 자매들이 밝혀 낸 것입니다.
아마 외로워서 동료 개들을 찾아왔는가 봅니다. 이런 평범한 사실에서도 새삼 배워 깨닫게 되는 수행생활중 더불어의 도반들에 대한 고마움입니다. 이에 저는 기발한 의견을 첨부했습니다.
“아마 선재라는 불암사의 개는 전생에 베네딕도회 수도자였던 듯, 옛집 수도원이 그리워 날마다 찾지 않았나 싶습니다.”
2.제 손자뻘 되는 아이가 그동안 궁금했었는데 한동안 방황하다가 해군에 자원입대하여 해군 조리병으로 근무하던중 제대를 앞둔 얼마전 해군에서 있었던 조리 경연대회에서 최우수 상을 받았다며 상장 사진을 보내 왔습니다.
이제 방황은 접고 제대하면 제 좋아하는 대학 ‘외식조리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할 것이라는 소식에 얼마나 기뻤는지, 이런 평범한 사실에서도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누가 뭐래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훌륭한 삶이라며 제 손주뻘 되는 아이를 아낌없이 격려했습니다.
3.오랫동안 수도사제로 생활하던 한 형제의 퇴회소식과 더불어 사제직으로부터도 떠나게 되었다는 충격적 소식을 접하고 잠시 망연자실했습니다. 한시도 방심하면 안되는 수도성소의 길임을 새롭게 배웁니다. 새삼 주님께 대한 한결같은 사랑의 분투의 노력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어제 미사중 본기도 마지막 부분과 얼마전 선종하신 베네딕도 16세 교황의 임종어를 배우는 마음으로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믿는 이들에게 평생 배움의 여정에서 주님께 대한 사랑이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 깨닫습니다.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했던 아드님 예수님이요 그 자비와 지혜가 바로 여기서 기인함을 깨닫습니다.
어제에 이어 예수님의 자유로운 처신이 인상적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했기에 하느님 마음에 정통했던 것이며 두려움없이 소신대로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안식일법이 아닌 사랑의 법이란 잣대로 보면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치유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본질을 직시하라는 물음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질책성 물음 안에 자명한 답이 있으니 적대자들은 묵묵부답할 뿐입니다. 새삼 분별의 잣대는 사랑이며 예수님 자신임을 배우게 됩니다. 분별의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자비하시고 지혜로우신 예수님은 어떻게 처신하셨을까 깊이 생각하면 저절로 올바른 분별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는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을 축복했던 신비의 사제, 멜키체덱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다음 히브리서 내용을 통해 우리는 영원한 대사제 예수님에 관해 더 깊이 배우며 이해하게 됩니다.
“먼저 그의 이름은 ‘정의의 임금’입니다. 그는 또한 살렘의 임금 곧 ‘평화의 임금’입니다.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끝도 없는 이로서 하느님의 아들을 닮아, 언제까지나 사제로 남아 있습니다.”
은연중 하느님 아버지께 뿌리를 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암시처럼 읽힙니다. 예수님 역시 오늘 “멜키체덱과 같이 너는 영원한 사제로다.”(시편 110,4ㄴㄷ)라는 시편의 화답송 시편을 통해 자신의 신원을 자주 확인하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이런 이해와 더불어 초대 교회 신자들의 ‘정의의 임금’, ‘평화의 임금’으로 상징되는 영원한 대사제 파스카 예수님에 대한 이해 지평도 더욱 확장되었을 것이며 주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도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열린 자세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바리사이 적대자들인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배움의 자세가, 회개가 절실한 이들입니다. 배움의 여정에 소홀하여 무지의 감옥에 갇힐 때 누구나의 가능성이 이런 완고한 마음입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의 답답한 심정이 잘 드러납니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말씀 하시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오늘 복음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성하게 해 주신 똑같은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두려움과 불안으로 오그라든 마음을 활짝 펴 성하게 해 주십니다. 마음이 오그라들어 있으면 몸도 오그라들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활짝 열린 마음의 자세가, 배움의 자세가 절실한 사람들입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했으니 말그대로 점입가경의 야합이자 악의 카르텔입니다. 이렇게 무지의 눈이 멀면 악과의 연대도 자연스럽고 거침없이 이루어 집니다. 말그대로 악의 카르텔입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얼마전 원로 정치인에게 들은 ‘선무당과 색맹色盲의 카르텔’이란 말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참으로 겸손히 배움의 여정에 충실하지 못할 때 악의 카르텔 유혹에 빠지기 십중팔구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처럼, 무지무식하여 용감한 선무당들과 신호들을 보지 못하는 색맹들이 결합하여 악의 카르텔을 이룰 때, 이보다 위험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이렇게 불의하게 이뤄졌지만 하느님은 파스카의 신비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심으로 모든 것을 제자리에 놓으셨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평생 학인으로서 매사 깨어 겸손히 지혜로이 배움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배움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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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지혜롭고 단순해지려면>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오늘 이 말씀은 안식일 법을 어긴 주님께 시비 거는 사람들에게 안식일에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쾌하게 대답하신 말씀입니다만 이것은 비단 안식일에 무엇을 해야 하고 말아야 할지 말씀하시는 것뿐 아니라 언제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또한 주님을 사람들의 안식일 함정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한 현명한 답일 뿐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가 고민할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지혜롭게 판단하도록 주시는 답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언제나 해야 할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우리가 언제나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 곧 미워하지 않은 것이요 더 나아가 무관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면 인생이 복잡하지 않고, 그렇게 고민고민할 것도 없으며 잘못할 일도 없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지혜로워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나이를 먹을수록 단순해져야 한다는 말과 같고,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행복인지 그것을 늘 기준 삼으면 지혜로운 사람이고, 단순한 사람이 될 것임을 오늘 복음에서 배우는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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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마르3,1-6)도 '안식일'이 주제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시고,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시는데도, 율법이라는 규정 그 자체 안에만 갇혀 있었던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3,6)
이러한 모습들은 지금 여기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예수님처럼 모두의 구원이라는 공동선을 위해서 땀 흘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모습을 보고 못 마땅해 하는 바리사이들과 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제대로 믿지 않는 이들입니다. 머리로만 믿고 삶으로는 믿지 않는 이들입니다.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지닌 이들입니다.
오늘(1.18)은 '일치 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교회는 오늘부터 1월25일인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까지를 일치 주간으로 정해놓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위해 기도합니다.
본래 하나였고, 하나로 이어져 오던 교회가 동방교회(1054년)와 개신교(1517년)과 영국성공회(1549년)로 갈라졌습니다. 하나의 교리를 받아들이고, 정의와 평화의 임금인 멜키체덱과 같은 대사제요 영원한 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교회가 본질적이지 않은 정치적인 일들로 인해 갈라져 있습니다.
'일치'는 우리를 위해 땀 흘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이었고, 기도였습니다.(요한 17장 참조)
그러니 우리가 먼저 하나 되고, 나아가 갈라져 있는 교회가 하나가 되도록 예수님처럼 간절히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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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손을 뻗어라."(마르 3, 5)
손을 뻗어야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완고한
마음에 몹시
슬퍼하시고
우리의
오그라듦에
너무 아파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십니다.
누구도
손대지
않은 일을
주님께서
하십니다.
움츠러들고
오그라든 손을
다시 성하게
하십니다.
손만 다시
성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그라들고
쪼그라든
우리의
마음까지
펴주십니다.
세상의
한가운데에서
살게하십니다.
더 이상
두려움 때문에
움츠려들지
않습니다.
더 이상
나의 십자가로
오그라들지
않습니다.
손을 뻗어
말씀이 사람이
되신 주님을
만납니다.
오그라든
손 하나를
뻗었을 뿐이데
삶이 달라집니다.
놓아버릴 것을
이제 놓으니
이제 잡아야 할
주님의 손이
보입니다.
새로운 삶이
뜨겁습니다.
구원은
오그라든 삶이
다시 기도하며
감사하는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손을 뻗어
더 힘껏
주님의 손을
잡는 오늘입니다.
손을 뻗으니
손마디가
보입니다.
솟구쳐 오르는
뜨거움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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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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