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낯선 땅에 집을 짓고 파시조 익안대군 할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어 ‘충효전가(忠孝傳家)’에 입주한 지 오 년이 지났건만 나는 아직 우리 동네를 잘 알지 못한다.
동네 일주를 그리며 집 앞뜰에 놓아둔 벤치에 앉아본다. 길을 가다가 이 벤치에서 피곤한 다리를 쉬어가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 내가 편안한 듯 흐뭇해진다. 혹은 기억의 저편에 자리 잡고 있는 그리움의 벤치가 불현듯 떠올라 가만히 앉아본 사람도 있었을 거라는 소박한 상상이 시인을 초대하여 ‘세월이 가면’을 흥얼거린다.
나는 우리의 숱한 지명이 예언을 품고 있다고 믿어왔다. 나는 ‘자산’의 옛 이름 ‘척산(尺山)’의 자형(字形)에서 케이블카 설치를 확신했었다. ‘죽림(竹林)’이라는 우리 동네 이름에도 필시 예언이 감추어져있을 터인데 건너편 ‘원죽’마을에도 대숲은 보이지 않았다. 우후죽순의 아파트 군락이 대나무처럼 숲을 이루어 마을을 에워가고 있는 이즈음에야 나는 비로소 ‘죽림’의 예언이 이루어져가고 있다는 깨달음에 들뜬 마음을 진정하지 못했다.
얼마 전에 순대에서 오리로 간판을 바꾼 옆집 가게에는 오늘 밤 유난히 손님이 넘친다. 오리집 사장의 환한 얼굴에 마음이 놓이니 순행의 첫걸음이 너그럽고 태평하다. 태평양, 향촌, 옛골, 달콤, 더함, 토계림 등의 가게이름이 이웃처럼 정겹고 ‘그곳에 가면’ 제육볶음과 갈치조림이 기다리고 있는데 건너편 ‘줄리의 부엌’에선 낭만이 샘물처럼 흘러나올 것 같다. 아이들이 어린이 공원의 흐릿한 불빛 아래서 배드민턴을 하고 있다. 내 눈엔 셔틀콕이 잘 보이지도 않는데 주거니 받거니 하는 시력이 경이롭기만 하다.
아담한 우리 동네는 소공원이 여섯인데다 여기저기 공용주차장도 마련되어있어 아늑한 전원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우리 동네에서는 초등학교를 비롯하여 횟집, 당구장, 노래방 등 ‘죽림’으로 시작하는 이름을 흔히 만날 수 있다. 처음 와본 사람일지라도 주위를 한 번 돌아보면 이 동네가 ‘죽림’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을듯하다. 비록 고향의 흙냄새 물씬 풍기는 ‘폰남젱이’와 ‘꾸정물’도 없고 ‘솔태몬당’ 소식도 들려오지 않지만 고향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아가니 고향이나 진배없다. 나는 한껏 고무되어 젊음이 샘솟는 ‘죽림’의 밤거리를 사뿐히 걸어가고 있다.
중앙로의 한 카페를 들여다보니 빈자리가 보이지 않고 곳곳의 주점에선 종업원들의 그림자가 어지럽다. ‘족보통’이라는 상호가 눈길을 잡는다. 어리둥절하여 다시 보았더니 ‘족발, 보쌈, 통닭’이다.
거리는 활기가 넘치고 밤공기는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주마간산의 동네 한 바퀴에 사십 분이 걸렸다.
다시 집 앞의 벤치에 앉아 주변 아파트의 불빛과 거리의 네온사인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나는 이곳 아동센터 아이들의 해맑은 얼굴과 상냥한 인사말을 떠올리며 행복에 잠긴다. 거리의 가로등은 다소곳이 미소를 지으며 일기를 쓰고 있다. 남쪽 안심산 중턱에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호텔의 휘황한 불빛도 우리 동네 죽림의 밤과 더불어 조금씩 조금씩 깊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