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마오쩌둥)
근대중국의 역사는 모택동의 역사라고도 할 수 가 있다.
1911년에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 청나라(영화 마지막황제)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세운 손문은 각지의 군벌들에 의해서 혁명이 실패하자, 새로운 가능성을 러시아혁명에서 발견하였다.
1920년 소문은 소련의 코민테른(제3인터네셔널로 레닌의 볼셰비즘파가 만든 중앙집권적인 공산당조직)에서 파견한 마린에게 “중국의 혁명은 첫째-국민당을 개혁하여 사회 각계의 계층, 특히 노동자, 농민대중과 연합해야 하며, 둘째-군관학교를 세워 혁명군 장교를 양성해야 하며, 셋째-공산당과 국공합작(國共合作)을 해서 군벌과 제국주의를 타도해야 합니다.” 라는 이야기를 듣고 군벌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1919년 소련에서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은 중국에서 혁명조직의 건설을 시도한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중국공산당은 각지에서 노조를 건설하고 빠르게 발전하였다. 1921년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13명의 대표와 50여명의 당원으로 출발하였다. 하지만 공산당이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제국주의와 결탁한 군벌들을 타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때 군벌들을 타도할 수 있는 세력은 손문의 국민당 뿐이었다.
1924년 1차국공합작이 이루어져 국민정부가 선포되고, 상해에 세워진 황포군관학교 교장에 장개석, 주은래가 임명되었다. 모택동은 이 기간에 호남성을 거점으로 노동자 조직을 건설하고 있었다.
1926년 국민혁명군은 장작림 군벌의 세력을 제외하고 북방을 통일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국민혁명군 사령관 장개석은 공산당의 발전에 위협을 느끼고 군사쿠테타를 감행하여 국민당정부를 세운다. 이때 전국적으로 공산당조직은 와해가 되며 공산당(홍군)은 무장봉기를 일으키나 우세한 국민당군에 모두 실패하고 뿔뿔이 흩어진다.
당시 중국공산당의 지도부는 출신성분이 세종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첫째, 왕명과 강생을 대표로 하는 국제파 공산주의자이다. 이들은 모스크바로 유학을 가서 마르크스이론을 배운 정통파들로서, 국제공산주의 조직인 코민테른의 지시외 지지를 받으며 중국공산당을 지배하고 있었다.
둘째, 모택동을 중심으로 하는 국내파 공산주의자들로 이들은 마르크스 이론보다는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고, 현장에서 투쟁이 몸에 밴 사람들이었다.
셋째, 주은래와 등소평을 대표로 하는 파리유학파 출신으로, 파리 공산주의 소조(小組)로부터 출발한 인텔리들로서 국제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1927년 도시에서의 봉기는 중국의 실정에 맞지 않는 견해가 출현하며 이때 선두주자는 모택동이었다. 그는 중국혁명은 농촌중심으로 무장역량을 키워내고 산발적으로 국민당군을 끌어내어 무장역량을 약화시키는 것이 혁명의 원동력이라고 주장을 한다. 이러한 견해는 국제파 지도부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중국공산당의 내용은 실질적으로 코민테른을 지도를 받는 중국지부나 다름이 없었다. 이때부터 모택동과 국제파는 당권싸움이 시작되었다.
모택동은 혁명근거지의 유격전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가장 먼저 대중의 지지를 받는 조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당 조직을 건설하고, 강력한 유격부대를 양성한 다음에 병력의 이동이 자유로운 지점에 근거지를 세우고, 경제적으로 자급능력을 가져야 혁명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모택동의 철저하게 농민을 이해하고 그들의 신임을 얻어내는데 주려하였다. 그는 교육수준이 낮은 농민 출신의 홍군들에게 알기 쉬운 행동규칙(3‧8작풍)으로 규율을 잡아갔다. 대다수 농민들에게 절대로 피해를 주지 않는 전략은 오랫동안 수탈과 가혹한 정치에 시달린 농민대중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로부터 모택동의 혁명근거지 구축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1931년 모택동은 우선 혁명근거지 중심의 유격전이 유일한 중국혁명의 길이라고 확신하고 중화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운다. 중국의 역사상 최초의 공산당정부가 세워졌던 것이다.
장개석과 국민당 군벌들은 반공 연합전선을 결성하고 반공산당 토벌 작전을 전개한다. 1932년 모택동은 당회의에서 유격전을 주장하였다. 그는 홍군(공산당군)을 소규모로 나누어 국민당 지구에 분산시키고 습격과 후퇴를 거듭하며 국민당군을 괴롭혀야 한다고 하였다. 모택동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실권은 하락한다.
그러나 모택동은 서서히 군내의 자신의 기반과 지지세력을 다져 나가며 명분을 세우는 일에 착수를 한다. 홍군이 패전하여 사기에 문제에 있을때, 홍군은 퇴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북상항일(北上抗日)이라는 깃발이었다. 모택동은 이렇게 전체 홍군의 이념적 토대를 세웠다. 모택동에 맞서는 장도국이 퇴각을 할때는 패배주의자, 퇴각주의자로 공격하기 시작하여 당내에서 장국도의 지지기반을 무너뜨렸다.
1933년 장개석은 대대적인 제5차 토벌 작전을 시작한다. 중국공산당은 장개석에게 패전하고 모스크바중심의 국제파 정책은 점점 불만이 당내에 고조가 된다. 모택동은 당회의에서 잘못을 빌미 삼아 국제부를 몰아내고 실권을 장악한다. 드디어 당 중앙은 1934년 회의를 열어 모택동의 혁명근거지 재건책을 받아들여진다. 마지막으로 홍군을 장악하는 순서만 남게 되었다.
1936년 친국민당군 세력인 장학량은 홍군을 공격하라는 장개석의 명령과 거국적으로 단결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야 한다는 중국공산당의 선전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장학량은 드디어 일본군의 압박이 더욱 가열차게 전개되자 항일전선의 구축으로 마음을 굳힌다. 장학량은 장개석을 연금하고 내전의 중지와 항일연합전선을 요구하는 서안사건이 일어났다. 장개석이 이를 거부하자 장학량은 그를 친일 민족반역자로 몰아 처형하려고 하였다. 모택동은 이때 그의 생애에 있어서 또 한차례의 모험을 강행하였다. 장개석을 죽이지 않고 살린 것이다.
만일 당시의 중국정세에서 장개석이 장학량에게 살해를 당하면 전국적으로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국민당군은 분열과 와해에 이르고, 나아가 커다란 혼란에 빠진 중국의 무장역량으로는 강대한 일본에게 대항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따라서 중국이 일본에게 정복을 당할 처지였다. 이런 정세를 간파한 모택동은 협상에 능한 주은래를 서안에 파견하여 장개석과 장학량을 중재하고 제2차 국공합작을 이끌어 내었다.
이유는 두가지였다.
첫째는 일본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인 장개석을 살려내 그에게 항일전쟁을 담당케하여 힘을 소모시키는 전략이었다. 두마리의 호랑이가 싸우다 지치면 사냥군은 가볍게 두 장의 호랑이 가죽을 얻는다는 전략이었다.
둘째는 군사적인 역량이 거의 소멸된 홍군이 재기하려면 시간이 필요하였다. 유일한 방법은 오로지 국민당군의 진격을 막아내고 국민당군의 이 힘을 일본군에게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모택동이 내놓은 내전중지, 거국항일의 구호는 많은 민족적인 중국의 지식인들의 동조를 받을 수 있었고 10년에 걸친 홍군의 재건은 성공할 수 있었다. 또한 주은래가 서안으로 가고 없는 사이에 당 중앙 확대중앙군사위를 열어 정식으로 군사위 주석에 올랐다.
모택동은 오랜 기간동안 정세를 냉정하게 관찰하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그리고 기회가 왔다고 느끼는 순간에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예리한 판단은 한마디로 그의 손에서 한번도 떠나본 적이 없다는 손자병법과 삼국지에서 배웠다. 모택동이 손자병법을 모르는 사람은 전술전략을 감히 말할 자격이 없다고 한 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모택동은 당내에서 확고한 지지기반을 세우기 위해서 이들을 제거하는 마지막의 힘겨운 권력경쟁을 시도한다.1938년 국제파의 착오노선을 집중적으로 조사하며 1941년에 우경, 좌경기회주의를 당내에서 일소하고, 교조주의, 종파주의, 주관주의를 반대하는 정풍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정풍운동의 권력투쟁이었다. 우경기회주의자로 몰아 당내에서 국제파를 제거하는데 성공하여 국내파가 당권을 장악한다. 무려 10여년이 넘도록 계속된 권력경쟁에서 모택동은 홍군의 절대적인 지지기반과 국내의 변화를 적절히 이용하여 마지막의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항일전쟁이 중국의 승리로 끝나고. 이어 4년 내전을 거친후인 1949년에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 주석이 되었다. 이제는 새로운 권력투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국민당군과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내부의 지도노선을 둘러싼 권력투쟁이었다면, 이제는 국가권력의 우두머리를 놓고 벌이는 새로운 형태의 권력게임이었다.
1957년 모택동의 인민공사를 중심으로 하는 대약진운동을 전개하지만 처절하게 실패한다. 이때 실용주의 노선을 걷고 있던 유소기, 등소평등은 모택동의 노선을 반대하며 권자에서 몰아냈다. 승리는 실용주의 노선파에게 돌아간 듯 하였다. 모택동의 멋진 반격이 기다리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으리라.
모택동의 정치적 결단은 1965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에서 그의 진가를 발휘한다. 권력을 잃은 모택동의 반격은 홍위병이라고 불리우는 소년군단의 결성과 여론조작이었다. 대중을 선동하는 그의 선택과 이용방법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래 세상을 떠나는 1976년까지 13억 중국을 이끄는 절대권력을 유지하는 비법이었다. 1965년부터 10년동안 정상적인 통치행위를 접어두고, 비정상적인 홍위병 집단의 광적인 충성을 바탕으로 국가를 경영하였다.
이것이 훗날 혁명원로들이 모택동의 지도노선을 이탈하여 등소평에게로 기울어지게 만든 요인이었다. 주은래, 등소평, 원로세력을 견재하기 위하여 허수아비인 화국봉을 권력에 올려 놓았다. 그후 1976년 후계자 구축에 실패하고 세상을 떠난다.
모택동은 우회전략, 명분세우기등을 사용하여 권력을 쟁취하였다.
많은 우회전략중, 1935년 하급군관의 절대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지도부를 성토하는 여론을 형성하여 당중앙을 장악하고, 1957년 유소기, 등소평을 중심으로하는 세력과 투쟁시 유소기를 제거하였으며. 1965년 문화대혁명때는 자본주의를 걷는 사령부를 폭격하라는 지시하나로 정적을 제거 하였다.
모택동의 술수는 명분을 세우는데 능숙했다. 국제파인 장국도가 퇴각을 할대는 패배주의자로 몰아서 제거를 하고 자신이 퇴각을 할때는 북상항일(北上抗日)이라는 명분을 세웠다. 또한 장개석을 살려내 국민당군의 목표를 일본으로 돌리는 거국항일의 구호를 내세웠다.
대중정치에 능하였던 그는 결코 지지자의 규합에 신경을 쓰지 않고 대중의 지지에 기반을 두었다.그의 성공요인은 중국의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대국적인 차원에서 대응한 점에서 찾을수 있다. 또한 직접적인 공격보다는 우회적인 공격, 그리고 시기적절한 명분을 내세워 여론을 형성하고, 장기적으로 승부를 걸었던 일도 하나의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마르크스는 산업화가 진전된 나라가 아니면 혁명을 성공 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모택동은 중국의 상황에 가장 잘 맞는 농민혁명전략을 발달시킨다. 1920년대부터 혁명투쟁과정에서부터 경험된 것을 마오쩌둥 사상(모택동사상)으로 만든 것으로 내용면에서 모택동이 전개한 유격전술, 대중조직방법, 토지개혁정책, 민족통일전선의 형성, 신민주주의론, 사상개조운동, 실천론과 모순론, 영구혁명론, 사회제국주의론, 명방운동, 하방운동을 포함하고 있다. 모택동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반봉건적, 반식민지적인 중국사회에 응용, 접목하여 공산주의를 실현하려는 전술상의 혁명이론 체계로 마오쪄둥 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구별된다.
모택동의 가장 파괴적인 운동은 1966년대 극좌적 사회운동인 문화대혁명 이었고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고, 모든 전통과 가치와 부루주아적인 것이 공격을 받고 경제는 파탄이 났다. 이것은 반대파를 제거하려는 모택동의 권력 투쟁이었다. 결국 모택동 사망후 중국공산당은 문화대혁명이 극좌적인 오류로 공식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전면적인 부정은 중국공산당의 정신적인 기반을 파괴하는 일이었기에 55년 후에 그의 정책과 문화대혁명만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사상과 가치는 그대로 보존이 되었다.
그의 사상은 반외세와 반파쇼와 반봉건을 동시에 주장을 했던 제3세계의 혁명가들에게만이 아니라, 서유럽의 좌파 이론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문제에서 대한민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그 모택동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모든 혁명가들에게 해방이며 빛이었지만 한 시대를 피냄새로 비리게 만든 광기의 기호이기도 했다.
중국공산당과 전교조의 조직원칙
중국공산당
1. 조직원칙
근본적인 조직원칙은 민주집중제(民主集中制)이다. 민주의 기초위에 고도의 집중을 시행하는 민주집중제의 기본원칙은 아래와 같다.
당원 개인은 당의 조직에 복종해야 하고, 소수는 다수에게 복종해야 하고, 하급조직은 상급조직에게 복종해야 하며, 전당(全당)의 각 조직과 전체 당원은 중앙 당에 복종해야 한다. 이러한 네 가지의 내용을 핵심으로 하여, 당 강령과 당장(당章)에 의해 제정된 당조직과 당원이 다 같이 준수하고, 일정한 절차에 따라 업무수행을 요구하는 조직규칙의 중요한 점은 아래와 같다.
①당의 영도기구는 선거제와 임기제를 실시한다. 다만 비밀공작이나 전쟁 혹은 기타 특수한 상황일 때는 당의 영도기구에서 위임제를 취할 수도 있다.
②당의각급 위원회의 집단영도제와 표결제의 실시. 당의 각급 위원회에서 중대한 문제를 결정할 때에는 한 사람이 단독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전체 구성원의 토론을 거쳐 표결로서 결정한다.
③당의 각급 위원회는 동급 대표대회에 업무를 보고 해야 하며, 당의 하급 조직은 상급 조직에 지시를 청해야 하고 또 업무를 보고해야 하는 업무보고제도가 있다.
④각 당원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반드시 일개 지부나 소조(小組) 혹은 기타 특정조직에 편입되어 당의 조직생활에 참가하여 당내외의 군중의 감독을 받도록 당장(당章)에 규정하였다.
⑤당의 업무검사제도와 당의 기율검사제도의 운용
⑥당 간부의 선발과 육성 및 상벌 등의 간부 관리제도 등등이 있다.
전교조
조직원칙
근본적인 조직원칙은 민주집중제(民主集中制)이다
민주주의와 집중의 원리: 자주적 단결력을 고양하고 관료주의를 배격하는 조직 운영의 기본 원리이다.
민주주의 원리 (비판의 자유와 소수의 권리 보장, 조직 활동과 정보의 공개, 하부가 상부를 선출한다.)
집중 원리 (소수는 다수에게, 부분은 전체에게 복종한다. 하부는 상부에게 복종한다. 활동보고 및 정보의 집중)
①전교조는 선거제와 임기제를 실시한다. 비상적 시기에는 효율적이고 집중적인 조직 운영을 위해 투쟁본부, 투쟁위원회 등 비상적 조직 체계를 임시로 구성하여 사업을 집행한다.
②각급 위원회의 집단영도제와 표결제의 실시. 전교조의 각급 위원회에서 중대한 문제를 결정할 때에는 한 사람이 단독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전체 구성원의 토론을 거쳐 표결로서 결정한다.
③지부, 지회는 조합원의 요구와 의견 및 제반 문제점 등을 종합하여 수시로 또는 정기적으로 상부에 보고한다.
④누구를 막론하고 (규약 및 규정과 결의사항의 준수의 의무, 조합비 납부의 의무, 조합의 사업 및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의무)를 가진다.
⑤결의·결정의 범위 내에서 지부의 중요사항을 의결하기 위하여 지부대의원대회를 둔다.
⑥전교조는 상반기 후반기로 나누어 간부의 선발과 육성 및 상벌 등의 조합원 관리제도 등등이 있다.
동지(同志)의 유래
전교조가 가장 많이 쓰는 단어중에 동지(同志)란 말이 있다. 우리의 동지(同志)가 처음 나타난 유래와 숨은 뜻을 알고 있어야 한다. 전교조가 중국공산당에 많은 것을 가져 왔듯이 중국공산당에서 근거가 있다.
(참조 <9評 공산당>/가족의 윤리는 혈육의 정과 인애(仁愛)이다. 중국공산당은 혈육의 정과 우정 계급감정으로 대체하였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세상에서 오직 혈육의 정과 의리가 중요하다 하지만 내가 볼 때는 계급의 정과 의리가 태산보다 무겁다.”라고 선전한다. 이른바 “친하냐 친하지 않으냐는 계급으로 나누어야 한다.”는 것인데 아울러 경계선이 분명한 단어인 ‘동지’를 발명해 냈다. 서로 ‘동지’가 된 자는 곧 혁명 대가정의 일원이며 반대하면 모두 단호한 탄압대상이 되었다.그러므로 ‘동지’냐 아니면 ‘적’이냐 하는 간단한 이원대립관계로 일체 사회관계를 구분했으며 육친 혹은 친구 관계를 능가하는 곳에 올려놓았다. )
동지란 단어는 과거 일제강점기부터 사용되어온 것으로 일본에 대응을 하던 독립운동가들도 많이 사용을 되었고 그시절에는 마르크스-레닌의 이념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며 중국공산당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전적으로 많이 듣게 되었을때는는 북한군이 남한에 쳐들어 왔을때에 북한군이 주로 동지와 동무란 말을 많이 하였다. 동무란 말은 순수한 한글로 친구와 같은 말이다. 그러나 북한군들이 들어와 동무란 말을 하도 많이 사용하고 주둔을 하면서 국민을 괴롭혀 서울의 경우는 동무란 말이 지겨워서 사용을 하지 않게 되었다. 6.25동란전에는 순수한 우리나라말인 동무를 사용하였고 지금은 한자인 친구란 말을 사용하게 된 원인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지금은 동지란 말은 주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사용을 하고 있으며 별다른 뜻없이 뜻이 같은 사람으로 사용을 한다. 그러나 동지가 다른 개념과 섞이면 다른 심각한 문제를 만들기도 한다. 중국공산당이 ‘동지’가 아니면 ‘적’으로 된 것은 사상과 합쳐져 사용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적대적원칙과 계급적원칙을 가진다. 노동 계급의 입장에서 모든 문제를 노동계급의 이익을 철저히 지키며 반대세력과 대화와 타협없이 끝까지 싸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러한 원칙과 동지가 합쳐지면 중국공산당처럼 ‘동지’가 아니면 ‘적’으로 되는 것이다. 마치 물에다 색깔이 있는 물감을 떨어뜨리는 것과 같은 것이 동지이며 물감에 따라 색깔이 변하게 되는 것이 동지란 단어의 숨은 속성이다.
현재 전교조는 마르크스-레닌의 이념에 충실한 공산혁명의 집단이다. 조합원들은 서로간에 ‘동지’라고 부르며 활동가의 교육시에도 ‘동지’란 말로 통일하여 부른다. 많은 조합원이 집행부에 다른 주장을 하거나 탈퇴를 하면 「배신자」, 「반동분자」,「변절자」라고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른 조직에서 또 일반적으로 탈퇴를 하거나 다른 말을 한다고 하여 배신자라고 하지를 않는다. 전교조는 공산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가족애, 동지애로 뭉쳐진 특수공동체가 있기에 이들에 동지의 뜻은 ‘동지’가 아니면 ‘적’으로 되는 것이다.
대중성도 계급성이 포함되면 근본적으로 뜻이 변하는 것과 같이 계급성이란 적대적원칙만 들어가면 최악의 사태로 몰고간다. 전교조의 동지와 일반적인 동지가 달라지는 원인이 공산주의 사상과 특수공동체에 근거를 한다.
박헌영이 북한에서 김일성에게 숙청을 당할 당시 박헌영 판결문을 보면 공산주의 사고를 가지고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 수가 있다.
(참조 박헌영 판결문중 일부 발취 / 피소자 박헌영은 리승엽 등 공모자들로 하여금 충직한 당 일꾼들을 「변절자」「간첩 혐의자」「당 비밀 누설자」라는 무근한 누명을 씌워 살해케 하였는 바 .......
피소자 박헌영은 당과 국가의 직무에 충직한 열성자에 대하여는 「변절자」「배신자」라고 위협하여 그들로 하여금 전도를 비관하고 직무에서 이탈하게끔 꾀하였으며 이전부터 심복자 장시우를 교묘히 사주 선동하여 반국가적 범행을 적극적으로 하게 하였으며....)
동지란 단어는 특별한 단어이며 숨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 숨은 속성이란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동지란 말을 하게 되면 배신자, 변절자, 반동분자라고 말을 내 뱉는 것이다. 전교조의 동지란 개념을 명확히 인식을 하고 유래와 역사속에서 동지란 뜻의 숨은 그림자를 명심 하여야 할 것이다.
참조/전교조 조합원이야기
모택동의 사상개조운동[思想改造運動]과 전교조
사상개조운동은 의식변혁을 위한 전국민적 교육운동이다. 모택동은 정권수립후 제1차 5개년계획 기간에 걸쳐, 주로 지식인에게 그동안의 자기계급을 버리고 노동자계급이 되도록 요구를 하여 '사상개조'의 개념을 적용하여 왔다. 학습과 노동단련·노동개조를 통하여 혁명주체로서의 자기변혁을 강조하였다. (전교조는 조합원을 항상 주최라는 인식을 갖도록 교육함) 특징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사상(毛澤東思想)을 중국인민을 무장시키는데 있다.
모택동이 주장한 하방노동(下放勞動)은 지식분자를 개조하기 위하여 농촌, 공장으로 보내 노동에 종사하게 만들었다. 한국사회에 과거 운동권학생의 농활(농촌개몽활동/소련의 브나드로운동)과 공활(위장취업)으로 나타났다. 운동권 학생의 농활과 위장취업은 이것은 모택동이 생각한 하방노동(下放勞動)이었고 그것을 통하여서만 개조의 성공을 보장 받을 있다고 한 것처럼 효과는 잘나타 났고 농활과 위장 취업을 한 운동권 학생들이 유난히 활동을 하였으며 지금까지도 상당한 세력을 뒷받침하고 있다. 민노당의 노회찬(민노당 17대 국회의원) 역시 위장취업의 전력을 가지고 있으며 모택동의 동지인 주은래를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하며 노무현은 모택동을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전교조는 사악하다
대기원시보 사설 『9評 공산당』에 중국공산당의 9대 사악이 있다. 이런 사악을 보면서 놀란 것은 전교조의 만행과 거의 똑 같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전교조의 사악과 비교하여 글을 올린다. 전교조가 도입한 사악한 영체에는 9대 유전자로 고스란히 조합원에게 적용을 시켰다.
1. 사악 - 마크스레닌주의의 사악한 허울
전교조의 목적은 공산혁명이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근본적인 사악이다. 사악을 감추려고 거짓된참교육으로 창립이 되었다. 일생에 무엇인가 해볼려는 사람들이 위와 같은 슬로건에 가장 쉽게 넘어갔다. 조합원은 참교육, 교육민주화란 거짓말에 속아 학교를 투쟁의 현장으로, 타인의 인성을 가볍게 보고 노동자가 되어 자신의 본질 마져도 기존 가치관과 다르게 변질시켜 버렸다. 투쟁을 정당화 하기 위하여 명분 즉 “학교의 민주화”을 외치어 지금도 학교를 투쟁의 장으로 만들고 있으며 국가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일반조합원을 선동, 투쟁하게 만들고 세뇌하며 전교조를 따르게 만들었다.
2. 기만 - 사악이 바른 신[正神]으로 가장하려면 기만할 수밖에 없다.
사악한 것은 반드시 기만하기 마련이다. 전교조는 공산혁명단체인 것을 속이려고 거짓된 참교육으로 포장을 하였고 이런 것은 공산당의 가장 전형적인 기만술책이다. 공산주의란 첫 시작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독재적인 선천적 유전자를 갖고 있다. 공산당은 독재적이고 배타적이다. 어느시기를 막론하고 성심성의로 지낸적이 없으며 어떠한 약속도 이행하지 않고 어떠한 약속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과거 교훈이라면 만약 누가 어떤 문제에서 공산당을 믿었다면 그는 바로 그 문제로 목숨을 잃을 것이다. 지금 역시 전교조는 사상이 다르거나 문제점을 지적하면 적대적인 공격에 들어가고 참교육을 위해 조합원이 된 교사들에게 참교육을 하지 않고 선동, 투쟁시키며 세뇌를 하여 집행부의 정책에 따르게 만들고 있다.
3. 선동 - 원한을 조작하고 일부분 사람을 선동하여 다른 사람을 공격
기만은 선동하기 위한 것이다. 투쟁을 하려면 반드시 원한이 있어야 하므로 원한이 없으면 원한을 조작해 낸다. 전교조는 활동가에게 선동 연극연습과 선동 구호작성연습까지 하고 있으며 투쟁을 미화하고 투쟁의 방법까지 교육을 하고 있다. 분노를 일으키게 하여 대립의 관계로 만들고 선동을 하여 다른 사람을 공격하게 함이며 상호의존 관계를 계급 대립, 계급 착취의 관계로 변화시켰고, 조화로움을 적대적이고 원한 적이며 투쟁적인 것으로 변화시켰으며, 합리적인 것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변화시켰고, 질서 있는 것을 혼란하게 변화시켰으며, 활동가는 조합원을 선동하며 일반교원, 학생, 학부모를 선동의 대상으로 여겨 투쟁의 일선에 내보낸다.
4. 불량-깡패 불량배들이 기본대오를 조성
불량은 사악의 기초이고 사악하려면 불량해야 한다. 공산혁명에서는 항상 깡패불량배가 봉기를 일으킨다. 인천외고사태를 보면 도덕과 법은 없고 천막을 치고 시위를 한다. 이는 이미 교사의 자질과 자격을 망각한 상태이다. 2006년 전교조 전당대회에서 “빌어먹을 놈의 세상, X XXX 세상”이라며 낯 뜨거운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조합원을 깡패불량배로 만들었다. 불량하게 만들려면 선동을 힘으로, 투쟁을 미화하고, 법을 무시하고, 이것을 독립투사라도 된듯이 세뇌 시킨다.
마르크스는 농민의 천성적인 분산(分散)성과 우매(愚昧)성은 심지어 계급으로 불릴 자격도 없다고 여겼다. 모택동은“ 깡패 불량배들은 항상 사회적으로 기피하는 무리들이지만 사실 농촌 혁명에서 가장 용감하고 가장 철저하며 가장 단호한 자들이다” 라고 하였다. 공산당에서 혁명이란 선량한 사람들에게 재난과 생명을 빼앗기 위함이다.
5. 이간질[間]-침투하여 이간하고 와해시켜 대체
전교조는 교장 선생님 반대편에 학생, 학부모를 두고 이간질을 한다. 교장 선생님의 모든 잘못을 수첩에 기록을 할 정도로 준비를 하였다가 학생과 학부모를 투쟁하게 만든다. 서로 도움이 되고 또 보살피고 존경을 해야 할 사이를 이간질 하여 대립의 관계로 만든다. 학생에게 없는 자의 입장에 서게 함으로서 사회구성상 서로 도움이 되는 구조를 착취와 약탈의 대립구조로 이간질을 한다.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기 위하여 국기에 대한경례거부, 태극기없애기 등 국가존립을 위태롭게 하고 반미를 주입하여 국가 안보체제를 위협한다. 학생과 교장을, 국민과 국가를, 국민과 미국을, 국민과 국민을 이간하여 국가를 붕괴하고 사회주의로 대체하려는 것이다.
6. 보호비-교묘하게 유지하는 새로운 질서
중국공산당이 부유한 집 사람을 납치하여 인질의 대가로 계속하여 은화를 받치게 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강탈을 취하였으나 전교조는 다른 방식을 취하게 된다. 기회주의 적인 교사에게는 보호비요 정부에게는 활동을 한 댓가로한 활동비이다. 조합원을 늘리기 위해 마치 보험 외판원과 같이 또는 친분을 이용하여 모집하고 또한 탈퇴를 하려하면 배반자란 소리를 하고 탈퇴를 하면 집단이지메를 하여 두려움에 떨게 한다. 선을 쌓고 덕을 중히 여기는 미덕은 무너지고 오로지 투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며 선동과 투쟁은 사실상 폭력으로 마구 빼앗는 것과 같다. 무소불휘의 힘으로 투쟁을 하며 정치에 참여하고 정부로 부터 합법화라는 선물과 사무실에 운영하는 비용을 연간 약72억씩 받고 있다.
7. 투쟁-전통 종법질서와 국가제도를 파괴
공산당의 철학은 투쟁이다. 기만하고, 선동하고, 불량배를 동원하고, 이간질하는 것은 모두 약탈하고 투쟁하기 위한 것이다. 공산혁명은 절대 무조직적으로 때리고 부수고 빼앗는 것이 아니다. 공산당은 농민의 목표는 지주, 각종 법과 제도 및 탐관오리와 관습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농촌의 전통제도와 습관을 때려 부숴야 한다고 명백히 지적했다. 전교조는 투쟁을 떠나서 존속을 할 수가 없으며 투쟁을 미화하고 당연한 것으로 규정을 짓는다. 학교민주화란 거짓된 공산민주화로 학교, 교육부의 관료적인 권위를 타도해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조합원을 선동하고 투쟁하게 만든다. 교육부등 관공서에서 몸으로 저지하는등 등 폭력적인 행동을 취하고 머리를 빡빡 깎는 등 교사로서 하면 안 될 행동을 하고 있다. 크고 작은 많은 투쟁을 보면서 전교조는 투쟁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를 못할 것이다.
8. 공포-전교조를 무서워하는 학교의 현장
조합원의 인간성, 양심성의 말살은 많은 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학생을 선동하여 투쟁하게 만들며 혈서까지 쓰게 한다. 학교에서 전교조를 무서워하는 경향은 곳곳에서 벌어진다. 교장선생님이 잘못을 했을 경우 떼지어 몰려가도록 하여 전교조가 무서움으로 전해진다. 예로 기간제 여교사로 하여금 커피 한잔을 부탁 하였다가 조합원의 집단행동으로 고 서상목 교장선생님은 자살로 이어졌다. 조합원은 자신들을 무서워 하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며 일선 학교에서 많은 관리자가 전교조를 두려워 하고 있다.
9. 통제─의식화로 조합원을 통제
전교조의 이익은 개인의 이익이 아니고 개인의 이익은 전교조 전체의 이익이 아니다. 전교조의 이익은 개인의 이익을 합친것보다 높이있다. 즉 전교조의 사회주의 정책이 개인의 이익보다 높은 것이다. 당성이라는 공산당은 인간성을 집어삼키며 무한히 확장을 하며 비인간적으로 변화시키는 강제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 교사를 노동자로 변질시키고 특수공동체로인 조합원을 탈퇴방지, 조직강화, 세뇌 하여 기존의 가치관을 변화시켰다. 사상적인 면에서의 소멸은 때론 단순한 물질적인 소멸보다 더 효과적이고 더 오래가는 것이다.
전교조와 중국공산당과 비교를 하여 9대 사악의 예를 들었다. 무서운 일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는 현실이자 사실인 것이다. 억지로 끼워 맞춘 것이 아니라 전교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다시한번 이야기를 하면 전교조의 조직과 규약이 중국공산당에 벤치마킹을 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사상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것이다. 이런 현상에서 전교조가 거의 똑같이 중국공산당의 9대 사악을 가져와서 표현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결과인 것이다.
중국공산당과 전교조
전교조를 분석하면서 중국공산당과 많은 유사점을 알 수가 있었고 또 중국공산당에서 벤치마킹을 했음을 명확히 알 수가 있다. 모택동의 우회전술, 거짓명분과 특히 문화대혁명의 모습은 전교조에게 잘나타난다. 중국의 근대사와 모택동만 알고 있다면 특히 가장 먼저 노동조직을 건설하여 침투를 한다. 소련(마린) 말대로 노동자, 농민계층과 연대하고, 전교조와 민노총처럼 활동가를 길러내는 일을 하며, 북한의 주장에 똑같이 주장을 하여, 미군을 철수시키려고 하고, 모택동의 말처럼 대중의 지지를 기반을 두고, 경제적인 자금능력을 가지도록 한다.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도 다르지 않다. 전교조, 민노총, 민노당, 범민련, 한총련 등 수 많은 좌익단체를 보면 알 수가 있다.
거짓명분 (북상항일, 내전중지, 거국항일 / 다음과 같은 거짓된 구호로 활동 참교육, 참세상, 민중, 민주, 민족, 통일, 학교 민주화, 인간화 교육 등)
우회전술 (민노총, 민노당을 지원함으로서 자신들의 정책을 해결을 하려고 하며, 국가정체성을 부정을 하기 위하여 태극기 부정, 애국가부정과 일제앞잡이가 나라를 지배하다고 함, 미군을 철수시키려 반미. 친북, 북한찬양, 효순미선을 이용함, 국가보안법을 철폐를 하려고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을 말하며, 학생에게 세뇌를 하여 학생들이 주장을 하게 한다)
대중성 (모택동이론 이론 나온 것으로 지금 민노총, 민노당, 전교조는 계급성과 대중성을 철저히 중히 여긴다. 또한 조합원의 이득을 철저히 챙기며 잘못한 조합원을까지 비호를 하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또한 비정규직을 이용하고 FTA반대를 주장하여 혁명을 위해 농민을 이용하는 것이다.)
조직운영원칙 (민주집중제는 중국공산당, 북한, 전교조가 공히 복종의 원칙으로 사용을 한다)
사상개조작업 (전교조는 지금 가장 중요히 여기는 것 중에 하나가 교사를 노동자로 만드는 것이다)
(참조 /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오정윤>,모택동과 모택동사상, 중국의 근대사, 대기원시보 사설 『9評 공산당』, 중국의 정치제도, 중국과 북한의 권력구조와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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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모택동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봅니다
노무현을 보면 정말로 기가막히게 대통령이 되었고 모택동의 전술을 잘이용합니다.
이미 좌익들은 모택동전술을 그대로 다르고 있으며 핵심이론가들과 한가닥 한다는 종류들은
모택동의 모순론을 전술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술을 알지 못하면 좌익들의 행동을 알 수가 없습니다.
모택동만 연구를 하면 대한민국내에 좌익들의 행동을 추측을 할 수가 잇습니다
물론 북한에서 내려온 대남적화문건도 모택동의 모순론이 기존이 되어 벌어지는 것입니다...
약간의 중국공산당과 모택동에 관하여 줄거리만 올려봅니다
부디 좌익들의 전술과 전략을 간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모택동의 모순론을 이해하지 못하면 영영 좌익들의 손아귀에 놀아납니다...
정말로 대단한 전술입니다..
언젠가는 이러한 전략을 파괴 할 대체 전략이 정말로 필요합니다...
한나라당에서 그러한 것을 깨닫을 수가 있고 영석한 분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
영영 힘들어 집니다
결과가 김대중에 이어진 노무현이고 좌익정권치하에
망가진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