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솔직히 아직도 이 말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알지 못한다. 내가 철학과도 아니고 따로 공부한 것도 아니기에 그런 것도 있지만, 제일 큰 이유는 그 정도로 관심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내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그 이해는 양자역학과 관련이 있었다. 내 관심은 철학보다 물리였는데, 그중 양자역학은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지만 그런 현상이 재미있었던 것 같다. 관측할 때와 하지 않았을 때 결과가 다른 신기한 현상은 나를 더 궁금하게 만들었다. 관측이 되면 입자 상태였다가 관측하지 않으면 파동 상태인 것인데, 이를 보니 데카르트의 말이 떠올랐다. 양자역학에서의 실험은 미시적인 곳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만약 저 경우를 우리의 사회에 대입해 본다면 그 누구도 한 사람의 존재를 모른다면 그 사람은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상상이 많은 편이어서 극단적인 상황을 자주 상상하는 편인데, 우주에 나 혼자 떠다니게 되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당연히 죽겠지만 그전까지의 상황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몸에서는 힘이 빠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내가 지금 이 우주 어딘가 에서 존재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자신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뿐일 것이다. 내가 세상과 단절되었을 때 나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이 내가 이해한 데카르트의 격언이었다. 하지만 난 결국 사람의 존재에 있어 중요한 것은 타인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존재가 내가 생각했다는 것으로 증명된다면 내가 자는 순간은 무엇일까. 내가 무언가와 상호작용하기에 타인이 나를 인지해 주고 있기에 나는 존재해 간다고 생각한다. 만화 *원피스*에는 정말 유명한 명언이 있다. 작중 인물이 적들의 함정에 빠져서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한 얘기이다. 사람이 죽을 때는 사람들에게 잊혔을 때라는 대사는 아직도 회자되는 명대사이다. 존재는 타인이 정해주는 것이다. 타인은 사람을 이름으로 기억할 것이다. 많이 돌아왔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존재의 여부는 타인이 정해 줄 수 있으며 타인은 이름을 통해 존재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위는 지금부터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하기 위한 밑바탕이었다. 나에게는 누구보다 나를 사랑해 주고 아껴 주었던 엄마가 계셨었다. 내가 중2 정도 될 때 암에 걸리시고, 내가 18살이 되고 며칠 뒤 돌아가셨다. 참 슬펐다. 엄마를 잊을 수 없었고, 잊기 싫었다. 하지만 사람이란 게 잊지 않는다고 생각해도 점점 잊게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엄마를 기억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다가 내가 주로 사용하는 닉네임으로 엄마를 기억하기로 했다. 지금 나의 게임 닉네임들은 대부분 이 닉네임으로 되어 있다. 엄마는 내 엄마가 된 이후로 본인의 이름보다는 준오맘으로 불렸다. 엄마의 이름인 ‘나나’는 아들인 나와 연관된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못한 이름이다. 그렇게 엄마는 나로 인해 본인의 삶보다 나의 엄마로 살아간 시간이 많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는 아빠의 아내, 할아버지, 할머니의 딸, 외삼촌의 누나로 살아갔을 것이다. 난 ‘나나’라는 사람을 세상에 남겨 주고 싶었다. 그래서 내 닉네임은 엄마 이름인 ‘나나’에 아들이라는 뜻의 영어 ‘son’을 합쳐서 ‘나나선’이라고 지었다. 게임을 할 때마다 엄마를 기억할 수 있고, 많은 사람이 엄마의 이름을 볼 수 있다. 그렇게 엄마가 존재하게 만들었다. 이런 식이라도 엄마 본인의 이름을 되찾아 주고 싶었다. 닉네임에 엄마의 이름이 드러나니 더 바르게 살려고 하는 것은 덤이다. 적어도 ‘나나선’이라는 닉네임을 달고 뭘 할 때는 엄마의 아들로서 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기쁘다.
첫댓글 서양철학 명제 가운데 하나에는 "인식이 대상을 제한한다"가 있습니다. 불교철학의 일체유심조와 유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의 관계에 대한 명제로, 최근에는 이것이 형이상학적 명제가 아니라 자연과학의 영역에서도 증명 가능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실례로 든 양자역학이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근대 분과학문이 발달하면서 과학적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 각자의 인식과는 무관하게 가치 중립적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관측, 곧 관계의 시작과 함께 존재 양상의 변화가 포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기초로 과학적 사실이 형이상학적 원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철학 분야에서는 앞서 살펴본 데까르트와 불교, 그리고 주자의 '성즉리'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이미 주장되고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현재의 삶에 계속 관계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