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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산아동문학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문홍
<김문홍의 영화 속을 걷다>(20)
소통과 단절의 변주(變奏)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김 문 홍
<이란, 드라마 / 1987년 제작/ 1996년 국내 개봉/ 90분>
단아한 형식 속의 동양적 관조의 미학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이란의 영화감독으로 모흐센 마흐발마프와 함께 동양적인 관조의 주제의식과 그 독특한 영상문법으로 각광을 받아 오다가, 1997년「체리향기」가 제 50회 칸느영화제에서 일본의 이마무라 쇼헤이의「우나기」와 함께 그랑프리인 황금종려상을 공동 수상하면서 일약 세계적 감독으로 떠오르면서 아시아 영화의 위상을 널리 떨쳤다. 1997년의 칸느 영화제는 홍콩의 왕가위까지「해피 투게더」로 감독상까지 수상하여 아시아 영화의 지평을 크게 넓힌 의미있는 해로 기록되기도 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오랫 동안 어린이들을 소재로 한 다큐멘타리 영화를 만들어 오다가 1987년「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만들어 1989년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인 청동표범상을 수상하면서 유럽 대륙에 알려지게 된다. 그 뒤를 이어 이란 북부 3부작의 연작 형태로 만들어진「그리고 삶은 계속된다」(1990)가 칸느 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수상하게 되면서 다큐멘타리와 극영화 스타일을 뒤섞은 듯한 그만의 독특한 영상 문법으로 주목을 받으며 떠오르기 시작하게 된다. 그가 1992년에 만든「클로즈업」은 프랑스의 유명 영화비평지인《까이에 뒤 시네마》가 올해의 10대 좋은 영화에 선정되기도 하면서, 일약 그는 세계 영화계의 총아로 떠올랐다. 그러다가 1997년 칸느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일본의 이마무라 쇼헤이가 만든「우나기」와 함께 그랑프리인 황금종려상을 공동 수상하면서 대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가 만든 영화 중 이란 북부 3부작으로 일컫는「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올리브 나무 사이로」, 그리고 칸느영화제 수상작인「체리향기」는 국내 개봉관에서는 상영되지 않고 비디오 테이프로만 소개되고 있다. 이들 작품 중「체리향기」만이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참가한 일부 관객에게만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예술 영화의 감상을 통한 우리 영화의 발전이라는 장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안목보다는, 국내 흥행 실적이라는 현실적인 상술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는 국내 흥행업자들의 짧은 안목이 존재하는 한 그의 예술적 영화들은 개봉관에서는 구경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줍제의식도 주제의식이지만 인생의 무게가 실려 있는 한 편의 수필을 읽는 것 같은 단조로운 내러티브 구조가 헐리웃 영화에 경도되어 있는 일반 관객들에게는 먹혀들지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왜곡된 영화 배급 구조 속에서 살고 있는 진정한 예술로서의 영화에 목말라 하는 관객들로서는, 좁은 화면에서 비디오 테이프―그것도 테이프을 쉽게 구하기 어려운 현실에서―로 감상해야 한다는 대안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영화 현실인 것이다. 이란 북부 3부작은 감독의 반자전적인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으면서 그의 영화적 스타일과 주제를 이해하는 데에는 적격이다.
철학적 수필의 영상
1987년에 제작된 이 영화는 사실상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세계 영화계의 데뷔작인 셈이다. 1989년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인 청동표범상을 수상한 이 영화는 그의 이름을 유럽 영화계에 하나의 신선한 충격으로 알림과 동시에 아시아 영화의 현주소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겼다. 그 이전에 그는 이란 예술 영화와 영화작가의 산실이 된 청소년 지능 개발 연구소에서 이란 어린이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담은 다큐멘타리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어느날 갑자기 솟아오른 것이 아닌 그의 이런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성격 설정과 논리적인 사건의 연결이라는 일정한 내러티브 구조와 화려한 배역의 파노라마인 헐리웃 영화에만 길들여져 온 관습적인 관객들의 눈엔 이 영화는 아주 낯선 경험이 될지도 모른다. 영화의 내용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 영화는 인생에 대한 한 편의 짧은 경구(警句) 같기도 하고, 어쩌면 한 편의 깔끔한 철학적 수필을 읽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의 형식 역시 마찬가지이다. 출연 인물들의 연기에 있어서도 감정을 숨기거나 절제하는 듯한 무표정과 소박한 행위, 그리고 화려하고 조작된 미장센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일상적 풍경을 담고 있어 극영화 스타일보다는 오히려 다큐멘타리에 가깝기 때문에 낯선 경험과 함께 또다른 새로움이라는 하나의 충격으로 작용하기도 할 것이다.
이 영화는 숙제 검사를 하는 오늘 오전부터 예의 그 숙제 검사가 있는 다음날 아침까지의 하루라는 시간 속에서, 잘못 알고 가지고 와버린 친구의 공책을 돌려주기 위해 마을과 마을을 오가며 친구를 찾기 위해 시간을 죄다 써버린 8살의 초등학생 아마드푸르의 설레임과 초조, 그리고 방황을 그리고 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아마드푸르 소년의 이 길지 않는 시간 속에서의 친구 찾기 과정을 통해 과중한 숙제와 생활의 궁핍함 사이의 간극이라는 이란 사회의 구조적 모순, 전통과 현대의 마찰,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가치관의 충돌과 소통의 부재, 절제를 가르치는 교육의 존재 가치, 친구를 향한 끝없는 연대감이라는 우리 삶에 있어서의 중요한 미덕과 가치를 깨우치게 하는 한 편의 철학적 수필을 영상으로 옮겨 놓고 있다.
낡고 무겁고 권위적인 느낌을 주는 철제 교실문이 플레임 속에 클로즈업되고 화면 바깥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를 배경으로 타이틀이 소개된다. 무겁고 권위적인 철제 문과 가볍고 맑은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의 대비라는 영상과 음향의 충돌인 몽따즈 기법을 통해 감독은 이 영화의 주제와 내러티브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남자 선생님의 엄격하고 감정이 절제된 듯한 목소리를 통해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일순 사라지면 낡은 교실과 그 속의 몇 안되는 아이들의 누추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콧수염을 기른 중년의 남자 교사가 아이들이 떠드는 것에 대해 간단한 질책을 한 다음 숙제 검사를 하기 시작한다. 선생님이 간혹 짦은 충고를 하면서 앞으로 나아갈수록 아마드푸르의 짝인 네마자데는 침묵 속에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네마자데는 공책에 숙제를 하지 않고 별지의 종이에 했다는 이유로 심한 질책을 받으며 괴로워한다. 이를 안쓰럽게 지켜보는 그 옆의 아마드푸르. 이런 일이 몇번 째이며 다음 번에는 퇴학을 당할 수도 있다고 하자 네마자데는 숨죽여 울기 시작한다. 교사는 공책에다 숙제를 해야 하는 이유를 전체 아동에게 논리적으로 해명하기 시작한다. 모든 것에는 절제가 있어야 하며, 공책에다가 숙제를 해야 한 달 전의 것과 지금의 것을 비교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숙제 검사를 받는 아이들의 나름대로의 사정에 대한 변명을 통해 감독은 과중한 숙제의 부담에 시달리는 이란 어린이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다. 아이들은 궁핍한 일상에 허덕이는 부모들의 강요에 의해 공부 이외의 일에 시간을 빼앗기고 있으며, 부모들은 무지와 가난이라는 이중고에 얽매여 아이들의 교육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교실 밖으로 뛰쳐나와 하교하다가 넘어진 네마자데를 일으켜 세워 수돗물로 흙먼지를 닦아주는 아마드의 행동은 이 영화에서 네마자데에 대한 아마드의 관심이라는 유대감을 넘어서서 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네마자데가 입고 있던 갈색 바지는 영화의 중반부에 가면 줄에 걸려진 빨래로 등장하는데, 이러한 오브제로 인해 아마드와 노인의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것은 중요한 촉매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의 잔심부름을 돕는 아마드의 몇몇 에피소드는 바로 이란 하층민 아이들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다. 어린 동생의 기저귀감을 가져 오는 일, 이층에서 더운 물을 얻어와 우유를 타는 일, 빨래를 너는 일, 보채는 아기의 요람을 흔들어 주는 일로 인해 아마드는 제대로 숙제에 몰입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숙제를 빨리 하지 않는다고 힐책하고 재촉한다. 공책을 꺼내든 아마드는 그것이 자신의 짝인 네마자데의 공책인 것을 확인하고 황당해 한다. 공책에다 숙제를 하지 않았다고 추궁을 받고 잘못하면 퇴학을 당할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해 있는 네마자데의 공책을 잘못 알고 가져온 것이다. 그는 코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포쉬테 마을에 살고 있다. 아마드가 친구에게 공책을 가져다 주어야 한다고 말하자 어머니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른 채 엉뚱한 이야기만 늘어 놓는다. 심지어는 숙제를 이미 다한 이층의 알리가 아마드를 유혹하려 하고 있다고 심한 꾸중을 한다. 하는 수 없이 공책을 몰래 들고 어머니의 눈을 피해 집을 나와 버리는 아마드. 아마드와 어머니의 목적과 목표가 다른 동문서답 식의 대화는 부모 세대와 젊은 세대와의 의사 소통의 부재와 가치관의 차이라는 심리적 단절을 암시하고 있다. 숙제하기를 강요하면서도 집안 일을 수시로 시키는 이율배반적인 어머니의 행동은 아이들의 눈높이가 아닌 자신의 눈높이에서만 모든 가치를 규정하고 재단하려는 이란 사회 부모들의 잘못된 가정교육을 비판하는 상징적인 축도의 구실을 하고 있다.
불안한 미래에 대한 희망
집을 몰래 빠져나온 아마드는 네마자데가 살고 있다는 포쉬테 마을을 향해 달려간다. 눈에 익은 가파른 지그재그 언덕을 오르내리고 숲을 지나는 여정 끝에 포쉬테에 도착한다. 어느 여인은 네마자데의 집을 묻는 아마드에게 여기 전체가 포쉬테인데 어느 구역이냐며 황당하게 대답한다. 다행히 우연하게 만난 같은 또래의 소년이 네마자데의 사촌인 헤마티의 집 위치를 알려준다. 미로와 같은 마을의 골목길을 헤매다가 아마드느 예의 그 갈색 바지를 발견하고 끈질기게 물어 보지만 그것은 네마자데의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허탈해 한다. 소년이 알려준 대로 파란 대문을 두드리자 병든 노파는 어느 헤마티냐고 묻는다. 알리 헤마티라고 대답하자 노파는 손을 들어 멀리 가리키며 아버지와 함께 코케 마을로 가고 있다고 일러준다. 다시 아마드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지그재그 언덕길을 오르내리고 숲을 지나 코케 마을로 돌아온다. 마을 어귀에서 아마드는 할아버지를 만난다. 할아버지는 집에 가서 담배를 가져 오라고 그에게 강력하게 이른다. 아마드가 집으로 뛰어가자 할아버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옆의 노인과 자신의 어린 시절의 부모로부터의 엄격한 교육을 회상한다.
옆의 친구가 담배를 가지고 있으면서 왜 손자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켰느냐고 의아해 하자, 그는 자신의 목적은 손자의 버릇을 들이는 것이라며 어릴 때 매질을 당하며 컸기 때문에 자신은 제대로 자랄 수 있었다고 얘기한다. 만약에 손자가 착하게 굴면 어쩌겠느냐고 다시 묻자 그는 트집을 잡아서라도 매질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마드가 돌아와서 담배가 없다고 얘기하자 할아버지는 다시 찾아보라고 트집 아닌 트집을 잡기 시작한다. 그럴 때 옆에서 다투고 있던 장년의 사내가 종이가 필요하다며 아마드가 가지고 있던 공책을 함부로 찢는다. 사내가 계약서를 쓰고 말미에 네마자데라고 중얼거리며 서명하자 아마드가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아저씨가 네마자데냐고 묻는다. 사내는 대답도 없이 당나귀를 타고 포쉬테 마을을 향해 휑하니 가 버린다. 아마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에 익은 지그재그 언덕길을 오르내리고 숲을 지나 포쉬테 마을의 미로 같은 골목길로 당나귀 방울 소리를 놓치지 않으며 뒤따른다.
아마드는 대장간 아래에 양의 축사, 그 옆에 죽은 나무가 있는 곳에서 한 노인을 만나게 된다. 이 영화의 압권은 네마자데의 집을 알고 있다는 노인과 동행하여 미로 같은 골목길을 오르내리는 바로 이 대목이다. 노인은 골목길을 느릿느릿 걸으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문양이 아기자기한 옛 고향과 같은 나무로 된 창문과 대문을 버리고 금속 대문으로 바꾸는 요즈음의 세태, 떼어내진 옛 창문들을 도시로 가져가는 것에 대한 핏줄을 잃은 것 같은 마음의 상함, 이 마을의 집집마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신의 솜씨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 등을 얘기한다. 이 노인과 아마드의 동행 씬은 네마자데의 집을 찾는 아마드의 설레임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암시하는 빛과, 새로운 가치관에 의한 생활 패턴의 변화로 서라져 가는 전통에 대한 아쉬움과 이란의 모순된 사회 구조를 암시하는 어둠의 미묘한 교차로 시적인 상징과 아름다움을 전해주고 있다.
또한 이 장면은 아름다운 전통으로서의 노인의 느릿한 걸음과 친구찾기의 초조함을 상징하는 아마드의 빠른 걸음의 미묘한 대비와 변주(變奏)를 통해 전통과 현대의 마찰,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소통의 부재를 극복하려는 감독의 주제의식을 엿보게 해주기도 한다. 혼자 앞서 가는 아마드와 이를 따르지 못하는 노인의 숨가쁜 걸음, 이러한 어긋남을 문득 문득 발견하고 걸음을 늦추며 노인을 기다리는 아마드의 세심한 마음의 배려는 이러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결국 노인은 아마드 혼자 가라고 하면서 하느님이 돌봐 주실 것이라고 희망을 예고한다. 노인은 샘물 가에서 세수를 하고 나서 풀꽃 하나를 아마드에게 건네주며 공책 갈피에 끼워 넣으라고 하는데, 이 풀꽃 한 송이는 마지막 교실 씬에서 궁핍한 현실로서의 오늘과 불안한 미래에 대한 희망의 의미라는 상징적인 화두로 이 영화를 아름답게 장식한다.
결국은 공책을 찾아주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 아마드의 침통한 얼굴. 그 얼굴 위로 저녁밥 먹기를 연신 권유하는 어머니의 목소리, 그리고 주파수를 맞추려 낡은 라디오의 채널을 돌리는 아버지의 피곤한 모습이 무척 안쓰럽게 느껴진다. 홀로 옆 방으로 돌아와 엎드려 숙제를 하는 아마드. 문득 세찬 밤바람에 방문이 덜컥 열린다. 어둠 속에서 마구 흩날리는 빨래와 땅에 떨어진 빨래, 그 어둠 속에서 안간힘을 쓰는 어머니의 피곤한 모습, 이를 응시하는 아마드의 불안한 눈이 교차되어 보여지는 이 씬은 정치적인 불안과 사회 경제적인 구조적 모순을 겪고 있는 오늘의 이란을 상징하기도 하고, 아니면 생활의 궁핍과 과중한 숙제와의 간극을 극복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는 이란의 가정 교육의 현실을 상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마지막 씬은 첫 장면과 같이 교실이다. 이따금 아이들을 질책하거나 주의를 주며 숙제 검사를 하는 중년의 교사와 자기 차례를 불안한 표정으로 기다리는 네마자데의 안쓰러운 모습이 대비되어 교차한다. 곧이어 늦게 도착한 아마드가 구세주처럼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두 사람의 숙제를 하느라 밤 늦게까지 안간힘을 쓴 아마드가 연필심의 까만 흔적이 선연한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자리에 앉아도 되느냐고 묻는다. 자리에 앉아 네마자데의 책상 위에 공책을 펼치는 아마드의 느긋함과 네마자데의 안도감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선생님이 네마자데의 숙제를 검사하다가 마지막 장을 펼치자 어제 노인이 샘물 가에서 꺾어주던 풀꽃 한 송이가 부끄럽게 갈피 사이에 드러누워 있다. 그 위로 아주 잘했다는 선생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사뿐 내려앉으며 엔딩 마아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