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 제철은 가을이라던데 어찌 된 일인지 내 종아리에 달린 무는 사시사철 오동통해 늘 제철이다. 다행히 요즘, 통이 넓은 바지가 유행이어서 튼실한 다리를 감출 수 있지만 교복 치마를 입어야 했던 학창 시절에는 맥주병으로 열심히 종아리를 문지르며 조금이라도 다리를 가늘게 만들려고 애썼다. 그때 내가 가장 갖고 싶었던 것은 좋은 대학의 합격 통지서도 멋진 남자친구도 아닌, 바로 평지에 있는 집이었다. 당시 나는 관악산 끄트머리에 있는 벽산아파트에 살았다. 산과 인접한 아파트에 사느라 등교할 때도, 학원 갈 때도, 친구3들과 떡볶이를 사 먹으러 갈 때도 항상 언덕을 오르내려야 했다. 용돈 받은 날이면 하교할 때 꼭 마을버스를 탔다. 맛있는 간식을 사 먹거나 예쁜 옷을 사 입는 것보다도 종아리가 두꺼워지지 않도록 하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그렇다고 내게 종아리만 중요했던 것은 아니다. 그에 못지않게 소중했던 것이 바로 동네 친구들이다. 한 동네에서 나고 자란 두 친구와 난 같은 아파트에 사는 데다 초·중·고등학교까지 같아서 삼총사처럼 항상 붙어 다녔다. 부모님이 모두 맞벌이였던 터라 우린 학교가 끝나면 한 명의 집으로 가서 엄마가 차려 놓은 음식을 먹으며 밤늦게까지 오락 게임을 즐겼다. 물론 게임 말고 학교 숙제를 한답시고 서로 베낀 적도 많았다. 고등학교 때까지 그렇게 추억을 쌓으며 우린 다함께 스무 살을 맞이했다. 어른이 되면 사이가 멀어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우린 여전히 돈독했다. 바뀐 게 있다면 집에서 테트리스를 하는 대신 동네 호프집에서 맥주잔을 부딪히는 것 정도였다. 우린 익숙한 동네를 벗어나 다른 동네에서도 종종 모였다. 화려한 화장과 고불거리는 머리, 굽 높은 구두를 신고 가로수길, 홍대 같은 유명 번화가에서 만났다. 그때마다 한껏 치장한 모습이 어색하고 낯간지러워 서로 놀려대곤 했다. 네온사인 불빛이 수놓은 거리를 거닐며 인파를 구경하기도 하고, 목소리를 높여야 말소리가 들리는 시끄러운 술집에 가보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마냥 재밌진 않았다. 번화가 투어를 몇 번 만에 끝낸 우린 늘 그랬듯 펑퍼짐한 옷을 입고 아파트 상가에 있는 술집으로 모였다. 그곳에서 남자친구와 이별한 친구의 슬픔을 달래줬고, 첫 직장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친구와 함께 한바탕 욕을 쏟아내기도 했다. 익숙한 동네에서 우리만의 이야기를 쌓아가는 시간이 나는 참 좋았다. 그러나 역시 영원한 것은 없는 걸까. 삼총사 중에 처음으로 동네를 떠나는 친구가 생겼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우리의 아지트에 애인을 데려와 결혼 발표와 함께 경기도 포천에 신혼집을 마련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문자 한 번이면 언제든 당장 만날 수 있던 우리가 이젠 미리 약속하지 않으면 만나기 어려울 정도로 멀어진다고 생각하니 서글펐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진짜 어른이 된 우리가 대견했다. 결혼한 친구가 벽산아파트를 떠난 뒤, 둘만 남은 친구와 나는 단골 술집에서 만났다. 셋이 앉던 테이블에 둘이 앉자 허전함이 밀려왔다. 친구의 빈자리를 절실히 느낀 그날 이후로 우리 둘은 그 술집에서 만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이사를 가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그토록 바라던 평지에 있는 아파트였다. 지하철역도 가깝고 조금만 걸어가면 한강이 나오는 좋은 동네였다. 그러나 생각만큼 기쁘지 않았다. 완벽한 동네에 딱 하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며 종아리를 튼실하게 키우면서도 매일 만나던 나의 친구들. 삼총사가 나란히 걸으며 아파트 일대를 누비고 다니던 시절이 그립다. 김현수 서울 영등포구에 살고 있는 32세 직장인입니다. 최근 다섯 평 크기의 집 근처 텃밭을 계약해 상추와 오이, 호박, 가지 등을 키우고 있습니다. 주말마다 직접 기른 채소로 다양한 제철 음식을 요리하는 즐거움에 푹 빠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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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과 음악 즐감하고 갑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반갑습니다
동길짱 님 !
고운 걸음 주셔서
감사합니다다 ~
가을이 무륵익어갑니다
환절기 감기 유의하시어
늘 건강하게 지내세요
~^^
좋은글 감사 합니다
반갑습니다
동트는아침 님 !
다녀가신 고운 멘트
감사합니다 ~
일교차 큰 환절기,,
건강과 보람으로 미소짓는
행복한 나날들 보내시길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