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의 몰락과 기황후의 최후 원나라는 순제 때 문치주의 정치를 펼치면서 문화적으로는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순제 즉위 전 있었던 왕위 다툼의 여파가 여전히 남은 상태에서 기황후가 정권을 잡은 후 시작된 황위를 둔 정쟁이 원나라의 힘을 점차 약화시켰다. 원나라는 소수의 몽고족이 다수의 한족을 다스리는 체제였기 때문에 작은 혼란도 국가의 존망을 좌지우지할 위기로 비화될 가능성이 많은 나라였다.
기황후는 남편 순제에게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 장성한 자신의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 줄 것을 종용했다. 순제는 이를 거부했고 그 와중에 황태자 반대파와 지지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다. 반 황태자파의 지도자 볼루드 테무르가 1364년 수도 대도를 점령했을 때 기황후는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이 내전은 결국 황태자 지지자인 코케 테무르(擴廓 帖木爾)가 1365년 대도를 회복하면서 수습되었다. 기황후는 1365년 제1황후이던 바얀 후투그가 죽은 후 제2황후라는 딱지를 떼고 원나라의 제1황후로 올라섰다. 그러나 그녀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원나라 중앙 정부의 정치가 문란해지자 그동안 몽고족의 지배에 반감을 품었던 한족들이 홍건적이 되어 일어나면서 원나라는 수습할 수 없는 혼란으로 치닫게 되었다. 1368년 마침내 주원장이 이끄는 명나라 대군이 원나라 수도 대로를 점령하자 원나라 왕실은 피난길에 올랐다. 기황후도 이때 남편 순제와 아들 아이유시리다라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을 떠나면서 기황후는 구원병을 보내주지 않는 고려를 원망했다고 한다. 원나라 왕실은 응창부로 수도를 옮겼다가 카라코룸까지 피난했다. 피난 와중에 순제는 죽고 그 자리를 기황후의 아들 아이유시리다라가 이어 북원의 소종이 되었다. 대도를 떠나 응창부까지 가는 동안의 기황후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기황후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우리나라 연천에 기황후의 능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조선시대 기록인 [동국여지지]에 전하고 있다. 능이 있었다고 전하는 지역에 고려시대 양식의 기와가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능을 둘러싼 담장의 기와였다는 것이다. 어쩌면 기황후는 응천부에서 카라코룸으로 가지 않고 고려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때 동아시아와 유럽을 호령했던 대제국 원나라의 황후였던 고려 여인 기황후는 오랫동안 원나라 망국의 한 원인으로 평가되면서 우리나라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황후라는 존재가 14세기 말 고려와 원나라의 역사에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