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큰 가정
마태복음 12:46-50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부활절 다섯째 주일이다.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린다. 세계교회가 이어온 부활절 인사를 해보자.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오늘은 어린이주일이다. 가족예배로 드린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우리와 함께 예배드리는 것은 큰 은혜이다. 감사드린다.
힐러리 클린턴이 방글라데시를 방문하여 농촌 여성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동네 여자들이 장관에게 물었다.
“소가 몇 마리나 되냐?”
“한 마리도 없다”
“그럼 자녀는 몇이나 되냐?”
“딸 하나다”
그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안타까워하였다. 그러면서 딱하다는 표정으로 서로 말한다.
“저런, 힐러리는 소도 없고, 애도 하나뿐이란다. 참 안됐다. 무슨 재미로 사냐...”
여러분은 무슨 재미로 사는가?
오늘 바이블25에 올라 있는 오늘의 책은 <내 아이를 내 목숨보다 사랑합니다만>이다. 아이를 키우는 6명 엄마 필자의 고군분투기이다. 독후감을 쓴 김은진 님은 이렇게 덧붙였다.
이 세상은 엄마의 희생은 당연한 거라 말한다. 아기를 낳아 키워보니 나 또한 내 엄마의 젊음을, 그리고 그녀의 육체와 정신을 갈아 만들어진 존재구나 절절이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누군가의 엄마인 당신, 당신은 지금 부족함 없이 잘 해내고 있다고 이곳에서 나는 당신의 안녕과 당신의 꿈을 응원한다고 꼭 말해주고 싶다.
여러분을 응원한다.
1)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가정 이야기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였을 때,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은 이를 자랑스럽고, 대견하게 여겼을까?
아들이, 또 큰 형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고, 사람들 한가운데서 시시비비를 가렸다.
처음 반응은 전혀 다르다. 식구들은 대단히 두려워하였다. 심지어 더러운 귀신의 영에게 씌운 것 아니냐는 오해도 있었다.
그래서 찾아다녔다. 집회 현장 밖에서 기다렸다. 어떡하든 말려 보려고 하였다. 말이나마 건네려고 사람을 다리 놓기도 하였다.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47).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전혀 뜻밖이다. 예수님은 반문하신다.
“누가 내 어머니며 내 동생들이냐”(48).
그리고 나서 손을 내밀어 둘러앉은 제자들을 가리키며,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48)고 하셨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들으면 자칫 친 어머니와 동기 간을 배척하는 말씀처럼 서운하게 들릴 수 있다. 그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자신의 가족은 물론, 당신에게 모여든 사람들에게까지 자신을 활짝 열어 놓으셨다. 함께 한 그들까지 내 가족과 형제자매로 받아들이신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가족의 범위는 이미 관습과 시대를 초월하였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가족관계이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50).
2)
예수님의 가족은 자기 식구인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하였다. 당연한 일이다.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니 예수님이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아무래도 식구들끼리는 권위를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고향 나사렛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잘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가족들처럼 예수님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예수님에 대한 어설픈 지식이 예수님을 외면하게 하였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막 6:4).
누구든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에서 인정받으면 정말 훌륭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라고 물으셨다. 그 질문으로 가족은 ‘혈통의 가족’(46-47)과 ‘영적인 가족’(49-50)이 분리되었다. 두 가족의 구성원은 같을 수도 있고, 혹은 다를 수도 있다.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며 그들 역시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이라고 하신다. 참 가족으로서 혈통의 가족이 아닌, 영적인 가족을 강조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가족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하늘의 하나님을 모두의 아버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맏형으로 모시는 사람들의 가족 공동체이다.
하나님 나라는 옛 가족을 뛰어넘는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이루어 간다. 참 가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처음 가정은 에덴동산에서 시작되었다. 최초의 공동체였던 가정은 그 자체로 낙원이었고, 하나님의 즐거움이었다. 우리가 아직 에덴의 기억을 지니고 있다면, 그 대표적인 흔적은 가정일 것이다. 그런데 인간 스스로 신뢰를 깨버렸고, 동산에서 쫓겨났다.
시편은 가정을 마치 에덴동산의 모습처럼 표현한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시 128:3).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559장에도 믿음의 가정을 가리켜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집 즐거운 동산이라’고 하지 않는가?
예수님만 섬기는 우리 집의 모습, 그곳은 여전히 하나님과 관계가 깨지기 이전의 에덴동산과 다름없다.
이런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확장된 새 가정이다. 신앙공동체, 즉 교회는 바로 부모 자녀요, 형제자매의 ‘행복한 큰 가정’인 것이다. 핏줄을 통한 형제애보다 더 깊고 따뜻한 정과 하늘의 위로와 뜻을 나누어야 할 사이임에 틀림없다.
우리 색동교회는 어떠한가? 하루가 멀다 않고 만나는 이런 가족이 또 어디 있는가? 한 부모에게서 난 형제자매인들 이렇게 자주 만나는가? 속없이 웃고, 나누고, 위하여 기도하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뜻으로 모인 교회는 영적인 가족 공동체이다. 혈통의 가족이 부럽지 않다. 신앙공동체는 내 형제자매처럼 아껴주고 싶은 마음, 말 한마디라도 좋게 해주는 마음, 허물을 감추어 주고 싶은 마음, 소소한 일일망정 편들어 주는 마음, 다른 입장일망정 존중해 주려는 마음이 든다.
어찌 가족 사이에 ‘소 닭 보듯’ 할까? 어찌 ‘원님 남 말 하듯’ 하겠는가? 그럴 수 없다.
예수님은 일찍이 더 근본적인 가족관계를 말씀하셨다.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49-50).
3)
사람은 어느 한 사람 예외없이 누구나 부모의 사랑 아래 태어나 자라났다. 또 대개 자신들의 자녀들 낳고, 사랑하면서 고생과 함께 재미를 누리며 한평생을 보낸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자식 농사는 언제나 대성공이다. 그 자체로 행복이다. 그러니 금쪽같은 내 자식을 결코 남의 자식과 비교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우리와 함께 한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보면 너무 즐겁다. 요즘 아이들은 우리 세대와 참 다르다. 이렇게 묻고 싶다. “너희는 어느 별에서 왔니?”
실은 우리를 보고도 어른들이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여기 어린 왕자, 어린 공주들은 우리와 같은 세상에 살지만, 딴 세계 아이들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는 것은 희망을 헤아려 보는 일이다. 마치 천체망원경의 렌즈를 닦는 일과 같다. 그 렌즈를 통해 별과 미래와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일은 우리 자녀와 우리 자신에게 있어 커다란 축복이다.
그런데 어떤 자녀는 쉽게 ‘부모 잘못 만난 죄’를 말한다. 또 어떤 부모는 ‘자식 복 없는 탓’을 하소연한다. 사실 그 속을 같은 심정으로 들여다보면 모두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다.
색동교회는 행복한 큰 가정을 소망한다. 7가지 비전 중 세 번 째는 ‘서로 격려하며 행복을 가꾸는 큰 가족’이다.
우리 모두는 지연적 뿌리가 다르다. 심지어 고향이 같은 사람도 드물다. 혈연적 뿌리 역시 공통성이 없다. 우리가 서 있는 입장도 제 각각이다. 살아온 이력도, 살아가는 방식도, 직업도, 성격도, 기호 식품도, 취미도, 정치적 견해도 비슷한 구석이 별로 없다.
다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뜻에 복종하려는 ‘공통의 삶’이 있다. 같은 주님을 모신 사람은 공통의 사랑의 범주 안에 머문다. 우리는 서로 다 다른 모습으로 늙어 갈 것이다. 세상적 기준으로 보면 성공한 모습도, 실패한 모습도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라는 ‘공통의 희망’을 갖고 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겠다는 공통의 목표가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가 되었다.
한국에서 활동하던 독일 ‘한델스블랏트’ 특파원이 한국인의 대인 관계를 가리켜 이렇게 평가하였다.
“한국인은 자기가 아는 사람에 대해서는 친절과 호의가 대단하지만 반대로 관계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적대시할 정도로 냉담하다.”
한국인은 일반적으로 사고와 행동이 비합리적이어서, 기분에 치우치고 신경질적이기 때문이란다. 특히 가족 관계는 더욱 그렇다.
“남에게 차가와도 제 핏줄은 뜨거운 법이다.”
우리가 이루려는 ‘행복한 큰 가정’은 결코 기분의 문제나, 분위기의 차원이 아니다.
우리 색동교회는 과연 새 가정인가? 그렇게 고백하는가?
우리는 팔 둘레를 넓힐 자신이 있는가?
우리 사이 이상으로 이웃과 세상을 향해 친절할 수 있는가?
심지어 초대교회의 코이노니아는 경제적인 문제까지 책임지려는 공동체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에게 큰 복을 주시길 바란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그 기쁨으로, 때론 아픔까지도 함께 버무려 행복한 큰 가정을 이루어가는 색동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